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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과 나를 따르라

이상봉 2010.05.05 15:08 조회 수 : 4750

제85과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150.그리스도인의 운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18,19)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다는 것은 ‘옷을 잘 챙겨 입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잘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본래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던 자유분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 따르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현재 중년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살던) 청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마지막 때가 가까운 늙은이는 아닌 상태이다. 주님은 그가 이제 점차 자기를 위해 사는 인생을 접고 타인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될 것이며 노년(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초대교회 역사가(歷史家)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敎會史)에서 베드로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 비두니아, 갑바도기아 및 소아시아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 마지막으로 로마로 돌아가서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 같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고난을 받기를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리스도인의 길이 다 이러하다. 사람에게는 운명(길)이라는 것이 있는데 마귀의 꼬임에 빠진 아담의 길은 그가 아무리 진실한 삶을 원해도 결국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본 사람의 길은 그와 반대인데, 그는 아무리 자기가 스스로 띠 띠고 자기의 원하는 곳으로 다니고 싶어도 결국은 영의 인도를 따라 세상과 육신을 거스르는 길 곧 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생을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되어 있다.  


베드로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나 영을 좇아 사는 사람 둘 다 ‘젊을 때는 자기 뜻대로 살지만 마지막에는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간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 젊을 때 자기 뜻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 곧 성령을 위하여 심는 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또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 늙었을 때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인생이 ‘자기’(육신)의 입장에서 볼 때 전체적으로 ‘자기가 원치 않는 방향’ 즉 수고가 많고 희생을 많이 한 힘든 인생-이타적(利他的) 인생-을 살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히 ‘자기’ 편에서 볼 때는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한 것이다. 


이에 비해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젊을 때 자기 뜻대로 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육신의 원하는 것(情과 慾心)을 좇아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늙었을 때 자기가 원치 않던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정신 없이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그(양심과 지성)가 전혀 원치 않던 허무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는 것(썩어진 것을 거두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결국 인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것이다. 요는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베드로는 젊을 때는 육신의 기쁨을 얻었고 늙어서는 영의 기쁨을 얻었다. 그러는 사이, 하나는 잃는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 즉 육신에 충실하려고 했을 때는 그가 사랑하는 주님 곧 목숨까지도 바치고 싶었던 주님을 (제 목숨을 부지하려고) 어이없이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늙었을 때 즉 영에 충실하려고 했을 때는 그가 정말로 보존하고 싶었던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목숨)까지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둘 다 얻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둘 다 잃는 것도 아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는 것이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느냐 하는 것은 그의 길과 운명이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베드로가 노년에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사형을 당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절대로 원치 않는 일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원해서 된 일이다. 그가 원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죽음(사형)의 방법을 스스로 십자가로 택했다는 것과 그마저 거꾸로 못 박히는 것을 원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왜 이러한 (그의 육신이 정말로 원치 않는) 상실을 원했을까?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잃는 것보다 그 가운데서 얻는 것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알든지 모르든지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잃는 것(또는 얻는 고통)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서 얻는 유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취한 것이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육신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베드로가 실패(주님을 부인)한 것은 그가 잠시나마 육신의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가 실패하기 바로 직전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1,32) 라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일깨우셨다. 

 

주님은 그에게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돌이키라는 것인가? 그가 잠시 잘못 서 있었던 자리 곧 ‘육신의 자리’에서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리도 아니다. 괴롭거나 즐겁거나 육신의 자리는 우리 자리가 아니며 오직 영의 자리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리, 타인을 위해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는 자리,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가 우리 자리이다.  


151.주여 이 사람은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21:20-24)


주님으로부터 자기의 앞날에 대해 들은 베드로는 주님께 “당신이 특히 사랑하시던 이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너는 십자가에서 죽지만) 요한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네가 상관할 것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결국 “네 인생은 네가 살고 요한의 인생은 요한이 사는 것이니 너는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내게만 신경 쓰라”는 말씀이다. 베드로의 인생이 하나님이 그에 대해 계획하신 대로 전개되듯이 요한의 인생 역시 하나님이 그에 대해 계획하신 대로 전개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든지 그것은 그의 인생이고 나는 내대로 주님이 이끄시고 빚으시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바 주님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3인은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다.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다가 주님을 만났다. 주님은 그에게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4:19) 또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낚아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세움으로써 천국을 건설하였다. 주님은 그에게 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권세를 위임하셨다. 그는 천국 열쇠를 가지고 실제로 천국문을 열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양무리들을 칠 목자로 세움을 받았으며(요21:15) 그 권세를 가지고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로서 교회를 다스리며 형제들을 섬겼다.  


요한은 그물을 깁다가 주님을 만났다.(마4:21) 그는 주님의 제자 중 가장 젊은 자로서 사도들 중 가장 오래 살면서 늦게까지 사역을 했다. 그는 특히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형제들을 깊이 사랑했으며 교회가 사랑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였다. 그는 교회가 기본에서 떠나 흔들릴 때 그물을 깁는 자처럼 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을 메우는 사역을 하였다. 그가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다 다른 사도들의 사역이 끝난 후 가장 늦게 기록된 것들로서 다른 이들이 세운 것들을 든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바리새인이고 율법사였지만 그의 세속적 직업은 장막(집, 천막)을 짓는 것이었는데 그의 사역은 바로 이러한 직업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베드로가 그물을 치는 자로서 교회를 시작하는 자로 봉사하고 요한이 그물을 깁는 자로서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자로 봉사했다면 바울은 교회를 실제로 견고하게 세우는 건축자로서 봉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으로 세우는 자였다. 그는 진리로 엮어진 ‘공동체’(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 ‘진리’(교리) 자체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것의 기초를 놓았고 그 위에 견고한 건물을 세웠다. 베드로가 시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완성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보수(補修)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주님은 그의 광대한 계획에 따라 각 사람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당신이 원하시는 자리에 두시고 일을 하게 하신다. 우리 또한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처럼 주님의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목적 안에서 일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디서(어떤 자리, 어떤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든지 그대로 쓰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상관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서 우리가 받은 그 은사와 은혜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일은 꼭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없어도 되겠지 하고) 빠지면 안 된다.  


주님은 (대부분의 경우) 혼자 일하셨지만 우리는 혼자 일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혼자 일할 수 없고 반드시 요한과 바울과 함께 일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혼자 일할 수 없고 반드시 아무개 형제 아무개 형제와 함께 일해야 한다. 우리는 몸 안의 지체로 있는 자이지 홀로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우리의 사역에서 꼭 필요한 동역자로 인식하고 함께 사역하고 서로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각자의 일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각자의 방향대로 가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형제였지만 그 사역의 내용은 달랐으며 서로 맞출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확하게 순종하다 보면 결국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가듯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생명)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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