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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상봉 2010.05.05 14:59 조회 수 : 4706

제81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20장
 

144.그리스도의 부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1-10)  


주님은 죽으신 후 동산 근처에 있는 무덤에 장사되셨다. 유대인의 장사(葬事)법은 흔히 시행되고 있는 매장(땅을 파고 거기에 사람을 묻는 것)이 아니고 바위나 절벽에 굴을 파서 구멍을 뚫고 무덤을 만든 후 시신을 거기 놓아두는 방식이다. 유대인의 일반적인 장사법은 이러하다. 먼저 시신을 세마포 띠로 싼다.  

 

이때 형편이 좋은 사람은 향을 세마포로 싸는 겹 속에 넣는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백 근의 향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얼굴과 목, 어깨 부분은 그대로 드러내 놓는다. 그리고 머리 윗부분은 세마포로 터번처럼 싼다. 이렇게 수습된 시신은 관 없이 얼굴을 위로 한 채 그대로 무덤 안에 놓여진다. 주님은 (아리매대 사람 요셉 덕분에) 부자의 좋은 묘실에 정성껏 수습된 후 안치되었다. 


주님이 장사된 후 이틀이 지나 제 삼일 째(주일) 날 새벽이 되었을 때 몇몇 여인들이 주님의 몸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이때 간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살로메 등이었다. 그들은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제자들에게 알리고 의논하기 위해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로 달려갔다. 잠시 후 날이 더 밝아졌고 여인들은 조금 더 담대해져서 무덤을 들여다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주님은 없고 천사들이 있었다. 여인들이 무서워할 때 한 천사가 말했다.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마28:5-7)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그들도 무덤으로 달려왔다. 둘 중에 요한이 더 젊었기 때문에 먼저 도착하여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는 그 안에 주님이 없고 수의만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덤 밖으로 나왔다. 이어서 베드로가 도착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거기에는 주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그대로 놓여있고 그 옆에 머리를 쌌던 수건이 돌돌 말린 모양으로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형세는 사람들이 주님의 몸을 감싸고 있던 수의를 풀고 어디로 옮겼거나 주님 자신이 그것들을 풀고 나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 마치 수의에 감겨 있는 상태 그대로 어디로 사라져 버리거나 증발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형세였다. 실제로 주님은 부활을 통해 변화된 몸을 입게 되었다. 그의 몸은 이제 마치 공기나 물이 천 밖으로 빠져나가듯이 그대로 수의를 빠져나와 무덤을 나간 것이다. 그의 몸의 성질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오셨을 때 문을 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오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45.부활의 의미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분명히 들었지만 그것을 기억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들은 누가 (정치적 목적으로) 시신을 치웠거나 훔쳐갔는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했다. 


제자들조차도 부활을 믿지(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너무나 큰 이적(miracle)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는 차원의 이적이 아니라 모든 인간 삶의 근본을 흔들고 파괴하는 격변(激變)적, 혁명(革命)적 차원의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이것은 죽으면 삶은 끝난다는 인간의 상식을 뒤집는 사건이고 죽음을 무기로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의 사망 권세를 일시에 무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사건이다.   


부활이 갑자기 나타난 하나님의 새 계획은 아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사람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미 이런 길을 정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부활이 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려면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런 인생 길을 알았다면 부활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이것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그리스도는 부활했고 그 안에서 우리가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그리스도의 부활 또는 죽은 자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들 곧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만물 가운데서 죽은 후 다시 살아나거나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이는 곧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람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종자(種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을 그 속에 담고 있는 ‘하나님(神)의 종류’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복된 영생을 누리든 저주스런 영생을 누리든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간다. (이 점은 천사-마귀-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삶의 형태(자리)를 바꿀 뿐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아들(사람)이나 종(천사)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가는 것이다.  


둘째,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며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심을 말해준다. 죽은 자의 부활은 단지 사람이 영생하는 하나님의 종류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가 하나님의 참 아들이 맞느냐 하는 것을 판정 받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종류라고 하지만 왜곡되고 변질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종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어느 날에 하나님의 심판(판정)을 받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자기가 자기 생명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며 자기가 마치 우주의 중심이고 주권자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산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어느 순간 (진짜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에 대해 계산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 죽은 자의 부활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고 우주 가운데 그의 주권을 다시 확립하시는 일을 하실 때 필수적인 과정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영생하는 성질 또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에 대해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 있을 일반적인 인류의 부활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의 부활은 단순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아들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의 대표로서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으로 인정받는 작업이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것이나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온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신 것과 그 후에 하늘로 올리우신 것은 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말해준다. 사실 에녹이나 엘리야도 실제로 죽음을 보지(겪지) 않고 삶을 마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육신에 속한 삶(이생)을 마감하는 과정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죽음을 (마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것처럼) 그렇게 신비적으로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결코 영원한 죽음(멸망)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하늘로 가는 과정이요 더 낫고 더 완전한 차원의 삶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소개할 때 언급한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은 ‘능력으로(실제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다. 주님이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이 마지막 순간에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세상은 틀렸고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걸은) 그는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 받게 될 것이다. 


146.부활로 인해 우리와 완전한 형제 되신 주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20:15-17)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만나 대화할 때 제자들을 일컬어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이라고 일컬음과 동시에 ‘너희 아버지, 너희 하나님’이라고도 일컬었다. 부활하기 전에도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형제로 생각하셨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형제라고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단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라는 일반적인 말씀을 하신 정도였다. 

 

그때는 다만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4,15) 라는 말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주님은 제자들이 그의 말씀을 알아듣고 같은 생명(정신)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주님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를 거침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제자들을 능히 형제라고 일컬을 수 있도록 상황을 변화시켰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2:10-17) 이 말씀은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하실 수 있었는지 그 과정과 내용을 설명해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와 형제라고 불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첫째,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고난과 시험의 자리를 거쳤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사망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두려워하여 피하지 않고 (기꺼이 사망을 받아들임으로써) 정면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사망을 돌파한 결과가 무엇인가? 마치 죽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당당히 사망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바로 부활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기꺼이 묻혔을 때 세월이 흐른 후 많은 밀이 생산되는 것과 같이 주님이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때 그에게서 많은 ‘형제들’ 곧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 많은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나온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의 담을 허묾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되게 하며 (육신의 차이를 넘어서는 새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사람과 사람을 하나되게 한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역사가 완전히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결과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완전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함께 부름 받은 사람들끼리 모든 (육신적) 차이를 넘어서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아들의 지위를 얻었으며 주님으로부터 형제라고 불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지위를 바탕으로 하여 함께 부름 받은 각 사람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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