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제76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요한복음 19장
 

137.선한 사람의 한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여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정죄한 것은 주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곧 거룩한 자라고 일컬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거룩한 자’ 또는 ‘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사람의 정상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런 이유로 주님을 정죄하고 죽인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때문일 것이다.  


첫째, 주님이 실제로는 거룩하지 않은데 거짓으로 자기를 높여서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 즉 예수는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죄를 짓고 악을 행했다.


둘째, 예수는 진실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를 허용하고 수납하면 우리(유대교 지도자들)가 그 동안 구축해 놓은 모든 것들(거짓된 종교 왕국)이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 또한 억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첫째 이유는 근거가 없으며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8:46)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요10:32) 라고 유대인들에게 물었을 때 유대인들이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작 이렇게 대답했다.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3) 이 말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행위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당신이 ‘나는 아무 문제가 없소’라고 말했기 때문에 악하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결국 이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요10:38) 


유대인들도 (이 골치 아픈 사람, 진리의 사람,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부딪힐 돌’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거짓된 것들이 드러나고 무너지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결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허례허식(虛禮虛飾)과 교만을 버리고 진리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죽이고 하나님과 진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유대인들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따라서 그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리새인(주로 율법학자, 서기관들)이나 사두개인(주로 제사장과 종교 권력을 잡은 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시중 잡배나 악인 그룹은 아니었다. 그들은 최소한 자칭(自稱)으로라도 ‘선한 사람들’이었다. 즉 평소에 그들은 ‘내가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 ‘선한 선생님’(눅18:18)이라고 불렸던 사람을 죽여야만 했던가? 육신의 길 곧 육체의 욕망대로 (세상 영광과 부와 권세를 좇으며) 사는 인생에는 결코 그 ‘선하다’는 것이 끝까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결국)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결국)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여기서 ‘결국’이라는 단어를 첨가한 것에 유의하기 바란다.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온통 죄를 짓고 거짓되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양립(兩立)할 수만 있었다면, 타협할 수만 있었다면 결코 그리스도와 정면 대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그들의 위선과 기득권을 인정해주기만 했다면 그들은 결코 진리를 거슬러 선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빛이 만일 어두움을 수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다. 진리가 만일 불의와 거짓을 조금이라도 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결국 (본의 아니게) 악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는 육신의 길을 선택하느냐 영의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초기(初期) 선택의 문제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이 말은 육신대로 가기로 길을 정한 사람은 결국 죽는 쪽으로 망하는 쪽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진리를 거스르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려고) 생각하고 싶어서 생각하고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결국(結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 또 한 선한 사람이 있다. 그는 빌라도이다. 빌라도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종교인도 아니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종교세계에서의 영광을 추구한 것과 달리 빌라도는 세상 영광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선한 사람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빌라도를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가 주님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주님을 심문한 후 그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넘겨준 유대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계속 주님을 죽이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썼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유대인들과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나 그의 활동에 아무 관심도 없었고 따라서 그를 죽일 일도 살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전에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일에 부딪혀 고민을 하고 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진리와 정면으로 부딪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심문하는 가운데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큰 갈등에 빠졌다. 그는 예수를 죽일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정죄할 마음도 없고 사실은 심문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일에서 빠지고 싶었다.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의 시기(猜忌)로 인해 자기 손에 넘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마27:18)  


그래서 빌라도는 어떻게든 주님을 놓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문제가 자기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생각했으므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죽이기 위해 빌라도를 곤란한 시험에 빠뜨렸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를 교묘하게 로마 황제(가이사)에 대한 충성 문제와 결부지었다. 이로써 이제 빌라도는 진리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선택할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조금 전에 유대인들이 선택해야 했던 문제가 이제 빌라도의 문제가 되었다. 그도 부득이 진리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여기 한 진리가 있으니, 의와 진리를 추구하면 세상에서 편히 살 것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에서 편히 살 생각을 하면 의와 진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아마도 빌라도는 이런 상황에서 정말 빠지고 싶었을 것이다. 빌라도만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도 그랬고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이다. 육신대로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곤란한 자리가 바로 이 자리이다. 그러나 누구나 어느 순간에는 진리냐 육신의 안녕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그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가 아니면 다 결국 진리를 버리고 세상에서 잠시 편히 사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말씀의 빛이 중요한 것은 이것을 분명히 접한 사람은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진리를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5-8) 


빌라도는 (자칭, 혹은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길로 가는 한 그의 최종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는 무죄한 예수를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결국 진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마27:19)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을 나타낸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총독 자리에서 떨어지고 난 후에 어떤 더 나은 것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바 없었으므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27:24-26)  

 

이것이 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다. 빌라도는 손을 물로 씻음으로써 양심과 진리를 어기고 원치 않는 판결을 내린 데서 오는 찝찝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 버리려고 했다. 물로 어떻게 죄와 불의가 씻기겠는가! 이것이 결국 선한 사람의 한계이다. 진리의 빛이 아니면 아무 것도 사람을 자유케 하지 못한다. 


138.가이사를 왕이라 함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쓰자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놓아주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에 빌라도가 주님을 가리켜 “이는 너희의 왕이 아니냐 내가 너희의 왕을 십자가에 달란 말이냐?”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가이사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한 것은 사실 본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를 미워했고 속으로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왕되심을 반대하기 위해 가이사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그들은 명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를 따라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바라바는 민란을 주도한 자나 강도였다고 증거되고 있다. 유대인들 중 어느 누구도 바라바가 예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거나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강도 바라바가 거룩한 삶을 자기들에게 요구하는 예수보다는 편하고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이사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 그리스도인 예수를 죽이고 강도인 바라바는 놓아주라고 한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본 의도가 어떻든) 결국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되었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세상 나라와 세상 임금에게 속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자기 왕이 아니라 세상 임금(마귀)이 자기 왕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함으로서 자신들이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라 거짓의 아비(마귀)로부터 거짓말하는 영을 받은 자들임을 또한 드러내었다.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사람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더 나은 곳으로 간다고 간 곳이 바로 가이사의 종이 되는 자리였고 거짓말하는 자의 아들이 되는 자리였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지위를 작게 여기고 하나님을 떠나서 더 높고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간 곳이 어디인가? 하나님과 같이 되거나 하나님보다 높아졌는가? 그것이 아니고 도리어 사탄과 같이 되는 자리로 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린 자가 가는 자리는 사탄의 종노릇하는 자리이며 타락하여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되는 자리인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 등장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인간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주님을 거절하는 그 어떤 이유를 내세울 때 그것은 결코 자기를 합리화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기의 실상만 적나라하게 드러낼 따름이라는 사실도 볼 수 있다.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유대인들은 최후에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은 당장의 육신의 이익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말을 막한 것이다. 육신의 길로 가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입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영으로 행하지 않고 감정(육신의 느낌)대로 행하는 것, 긴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짧은 이익만 생각하는 것,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장차 닥칠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어리석은 범죄자의 전형적인 사고(思考)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