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과 인생의 성공과 완성
요한복음 19장
143.다 이루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적어도 7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을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눅23:34)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19:26,27)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이 일곱 개의 말씀 중 요한복음에는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내용과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 세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할 때 주님은 어머니를 여자라고 불렀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그랬다.(“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2:4) 주님이 번번이 어머니를 여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이 사실을 (특별히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이라는 예언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또 요한은 주님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을 ‘일이 다 이루어진 것’에 대한 주님의 반응으로 인식했다.(“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왜 내가 목마르다 한 것을 그냥 목이 마른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일이 이루어진 것’과 연관시켰는가? 주님이 (목마르다고 말한 결과 얻게 된) 신 포도주를 마신 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33년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요절한 것인데 주님은 자신의 일생이 불완전하거나 무언가 아쉬운 미완성의 인생이 아니라 온전하고 충분한 일생이었다고 천명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무엇을 완성했을까?
첫째, 그의 고난이다. 땅에서 주님은 참으로 많은 고난을 받았다. 사람으로 오신 첫 순간부터 주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헤롯은 그를 죽이려고 주변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주님의 고난에는 그 자신이 받은 고난과 자신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겪은 고난으로 인한 고통까지 포함되어 있다.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사52:13-15)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53:3)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 자체가 고난이다. 창조주가 피조물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주인이 종의 위치로 떨어진 것이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또한 주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단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는 태초에 창조된 그 사람이 아니라 인류가 타락하여 망하게 된 후 그 인류(죄인)의 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람이 된 것은 단지 창조주가 피조물(종)의 자리로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사망의 몸을 입게 된 죄인의 자리로까지 떨어지신 것이다.
물론 주님은 아담(첫 사람)의 고리를 끊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됨으로써) 여자의 후손이라는 특별한 형식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 속에는 실제로 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워졌으며 죄인들의 대표자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의인이 죄인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전혀 체질에 맞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 생활에서 주님은 어릴 때부터 줄곧 고난을 겪었다.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갔고 가난하고 거친 환경에서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 힘든 삶을 꾸려갔다. 30세가 되어 사역에 나섰을 때는 사람들의 반대와 박해를 받으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자신은 종종 목마르고 굶주렸으며 머리 둘 곳도 없었고 여러 가지 오해와 멸시를 받고 마침내는 죽어야 할 죄인으로 매도되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음을 당했다.
그가 겪은 모든 고난은 죄인인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7-10) 그는 고난과 멸시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사람들의 손에 잡혀 죽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자기를 좇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쓴잔을 받았다.
이 모든 고난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탈진한 그 자리 곧 목마르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그 자리에서 완성된 것이다.
둘째, 그의 구원 사역이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죄인들을 건지는 일을 완성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은 한편으로는 천국 복음을 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죄제물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를 ‘세상 죄를 지고 희생당할 어린 양’으로 세상에 보내셨다. 주님은 한 시도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이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대속할 어린 양으로 드려지기 위해 왔으며 그 일을 위해 살았고 그 일을 위해 죽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5-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요12:27,28)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이 모든 말씀들은 주님의 목적과 관심사가 어디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주님의 일생의 목적과 관심사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속죄(대속) 제물로 드리는데 있었다. 그는 어린 양은 제단 위에서 그의 목적이 달성되며 작업이 마감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으며 마지막 순간에 이제 내 일을 마감한다 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한 속죄이다. 이 속죄가 완전하다는 것은 사람이 다시 거기에다 더 무엇을 보태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오직 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만 있으면 된다. 아무 공로도 필요 없으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 예컨대 기도를 많이 한 후에 나아간다든지,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든지, 마음을 집중시켜 잡념 없는 무아의 상태를 만든다든지,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조용히 엎드린다든지 하는 행동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런 외형을 갖추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님의 속죄 사역은 완전하기 때문에 사람이 거기에 대해 보여야 할 반응은 주님의 십자가상의 사역(속죄)이 완전하여 충분하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셋째,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은 그의 개인적 인생이다. 즉 그는 인생을 성공으로 마감했다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사역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주님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완전하게 마감되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님은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하게 마감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이고 승리이다. 순종하는 삶, 바로 이것이 성공한 삶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러워해야 하며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아무도 자기 원대로 인생을 다 살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나는 내 인생을 완전하게 마감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 희망과 포부가 있지만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한다. 다 양심이 있고 지혜와 지식이 있어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대로 사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인생을 온전히 마쳤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비해 주님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삶의 내용이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생을 만족스럽게 마칠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와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무지개를 좇는 사람처럼, 파랑새를 좇는 사람처럼 도무지 정함이 없는 헛된 목표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사탄에게 속아서 진리와는 거리가 먼 정함 없는 뜻을 세우고는 그것을 달성해야 만족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그들의 인생은 성공과 만족이 있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야망이나 계획을 전혀 따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만 생각했다. 그것은 위의 성경 말씀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또한 주님은 그것을 성취함에 있어서 결코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서두르거나 인간적인 지혜로 인위적이고 억지로 무엇을 하시려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영(성령)이 그를 주장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따라감으로써 모든 것을 하나님의 때와 방법대로 하셨다. 그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7-19)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인생 목표였다. 이처럼 주님의 인생은 그 목표가 단순하고 방법이 확실하니 성공으로 마감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한 인생이며 성공적인 인생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하고 정하신 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바로 사람이 걸어가야 할 참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인생,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진리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없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 외에 다른 기쁨이 없었다. 주님이 일생을 통해 추구하신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생명을 따라 사는 것뿐이었다. 육신의 요구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이 역사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그의 삶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고 쉬라면 쉬고 일하라면 일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따라 안식일에도 건져야 할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주저 없이 일했다.
구원 사역이 급하고 할 일이 많았지만 성령께서 기다리게 하실 때는 아무리 주위에서 동생들이 명절에 예루살렘과 같은 대도시로 올라가서 자기 뜻을 펴라고 권해도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다리셨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현재 자신이 사람으로 와 있고 또한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절대적으로 아버지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길이며 하나님께 속한 정상적인 사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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