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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과 불행한 쓰임

이상봉 2010.05.05 14:38 조회 수 : 4255

제73과 불행한 쓰임 

 

요한복음 18장
 

130.불행한 하나님의 종 가야바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가야바는 주님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을 죽이려던 유대교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한 사람(예수)이 많은 백성(이스라엘인들)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며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예수를 제거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11: 47-53)  


가야바가 예수를 잡아 죽이자고 한 것은 민란이 일어나서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 민족을 망하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화근의 씨를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당시 유대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에 혹시 그가 민중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독립 전쟁이나 민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결국 유대는 망하게 될 것이고 그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그들로서는 좋을 일이 없으므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야바라는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많은 이들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가야바의 말은 그의 본의(本意)와는 달리 인류가 죄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는 부득이 희생제물인 그리스도가 반드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것을 예언한 말이 되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큰 뜻을 예언한 선지자가 된 셈이다.  


가야바는 그리스도도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고 심지어 주님을 죽이려던 사람이었던 만큼 감히 주님의 대속적 희생에 대해 예언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가 그때의 대제사장(이스라엘의 명목상 종교적 대표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타락하여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지위를 잃고 있었지만 그래도 법(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구속 사역에 대해 가야바를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삼아 그것을 공식적으로 말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바의 용도는 참으로 이상하고 불행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쓰이기는 했지만 자기 뜻, 자기 감정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처럼 쓰였다. 그는 가룟 유다나 구약의 발람처럼(민22,23장) 하나님께 불행하게 쓰였다. 발람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이방 나라들에게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 외치는 하나님의 대변자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력과 처신이 자기가 타는 당나귀보다 못했기 때문에 그 당나귀에게 책망을 받기까지 한 부끄러운 하나님의 종이었다. 가야바도 꼭 그런 사람이었다. 


가룟 유다 역시 하나님께 받은 많은 선물(은사)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탐욕과 헛된 야망으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를 대적들에게 파는 바보같은 짓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마이너스 기여(寄與)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틀림이다. 문제는 거기에 쓰인 사람이 매우 불행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못 나가게 붙잡다가 혼이 난 이집트 왕(바로)도 마찬가지이다. 초기에 이스라엘 사람(요셉)을 맞이한 이집트 왕은 그 하나님의 사람의 지혜에 탄복하여 그를 이집트의 실질적 책임자로 삼고 환대했다. 바로는 요셉과 그의 가족을 이집트에서 얼마든지 넉넉하게 살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그 때문에 이집트도 복을 받아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의 이집트 왕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거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자기 자식과 백성과 나라의 많은 재산과 (홍해에서) 군대마저 잃고 거의 쫄딱 망하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그가 그런 상황을 맞게 된 것은 평소 그 자신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은 아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악함과 무지와 교만과 고집이 때를 만나 하나님께 적절히 활용된 것뿐이다. 그는 그의 악함과 고집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밖으로 몰아내어 약속의 땅으로 가게 만드는 사람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다니엘을 환대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 뒤에 일어난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및 고레스 왕은 세상의 보통 왕들처럼 악하고 무자비한 권력자들이었지만 때를 잘 만나 하나님의 목적(나라)을 위해 쓰이게 되는 큰 복을 얻었다. 그러나 같은 악하고 교만한 권력자인 벨사살 왕(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그의 악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의 종 다니엘을 대적하는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급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도구로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주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잠16:4) 


바로나 발람이나 벨사살이나 가야바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따지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드러낼’ 자로 지음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드러낸 것처럼 우리도 다 그렇다. 다만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처럼 자기 생명 안에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대제사장 가야바가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처럼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에 악역을 담당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람이 악역을 맡아 하나님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살인 도구가 아니다.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진리를 버리고 의와 진리에 속한 사람을 죽이는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를 체험한 우리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기는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죽은 생활, 세상을 좇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가룟 유다나 발람, 가야바처럼 결국 어느 시점에 가면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즉각 돌이켜야 한다. 가야바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표자이다.   


132.베드로의 실패 안에 나타난 주님의 뜻
 

주님께서 당신이 원수들에게 잡히시고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확고하게 장담했다.(요13:37-38,막14:27-31) 그러나 그는 주님이 잡히신 후로 실패를 거듭했다. 주님이 원수들에게 잡히시던 밤에 그는 칼을 뽑아 무리들에게 대항했으나 주님이 순순히 잡혀가시자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 그 후 그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예수의 일행인 줄 알아보자 그렇지 않다고 거듭 부인했다. 또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아예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주님은 왜 베드로로 하여금 그렇게 참담하게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그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는 실제로 남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흙으로 지음 받은 연약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인도 없이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에 전에 주님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에 대해 그렇게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에 대해 전에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밀 까부르듯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따르며 승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고 또 그로 인해 실패를 경험하게끔 하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그의 일생을 통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로 오직 주님께만 모든 것을 의뢰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요21:15-17) 


주님은 우리에게도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경험을 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다만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실패 가운데 내버려두기도 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왜 베드로의 실패를 허락하셨는가를 살핌과 동시에 우리는 베드로가 왜 주님을 배신했는가 하는 것도 살펴야 한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한 것은 그가 용감하게 주님을 옹호하던 때와 여건(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님을 옹호하던 앞의 행동은 주 예수님이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곁에 있는 상황에서 즉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힘입고 있는 상황에서 한 행동이고 뒤의 행동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즉 홀로 있는 가운데서 한 행동이다.  

 

베드로는 특히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특히 못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두 행동은 자연인(육에 속한 자, 죄인)으로서 인간의 한계와 역량을 드러낸 것이지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못한 것도 아니다. 주님을 칼로 막아서며 옹위한 행동이나 주님을 부인하며 꽁지를 뺀 행동이나 다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지 특별히 베드로니까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주님을 부인한 것은 물론 잘한 일이 아니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홀로 서 있는 고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힘도 없고 아무 용맹도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그토록 초라하고 가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홀로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지닌 자가 아니요 타락한 죄인에 불과하다. 홀로 있을 때 사람은 마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위협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분리된 베드로는 앞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의 실패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시험에 들 수밖에 없고 범죄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주님은 인간의 이러한 형편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0,41)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시험을 앞두고 기도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결코 가벼운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덜렁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무엇인지 몰랐는가? 물론 그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입고 온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여기서 주님이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 되셨음을 표현한 말이다. 왜 사람을 종이라고 하는가?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즉 창조자 하나님과 비교할 때 사람은 그의 종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종이라고 할 때 성경이 일반적으로 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이 영의 요구(원함)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자가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의 거짓말(위협)에게 붙들려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현실적으로 사람이 영의 요구가 아니라 육신의 욕망에 휘둘리고 죄를 짓고 사망으로 치닫기 때문에 사람을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자기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이것을 알았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된 이상 주님도 육신의 요구와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살고자 하는 욕망 곧 그 생명을 보존코자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평안하고 즐겁고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주님은 자기 육신의 이러한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로마서 8장 12절 말씀과 같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그래서 주님은 살았다. 살았다는 것은 십자가를 면했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죽고 영원히 사는 길을 잘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이기는 자가 되었고 사는 자가 되었다. 그가 그렇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육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육신을 입은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깊이 이해하고 자기를 하나님께 내놓고 도움을 구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길을 보지 못했다. 주님의 길은 주님 자신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위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의 겸손과 자기 부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그러한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자기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겪으신 모든 인생의 과정은 그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가 인생이 되신 것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단지 죽고 부활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모든 자들 곧 사망의 몸을 입고 있는 모든 연약한 자들에게 인생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사람의) 길이요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길과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의 말씀만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고 그의 삶과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다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삶, 그의 기도, 그의 눈물, 그의 겸손 하나 하나가 다 바로 우리의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주님이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 및 육신의 욕망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인생(육신을 입은 사람, 종의 형체를 입은 자)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가 진리 안에 있었고 하나님(성령) 안에서 행했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사람은 오직 진리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 안에서만 권세자가 될 수 있다. 진리가 없으면 영이 살아날 수 없고 영이 살아나지 못하면 사람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육신의 동물적 본성 및 거기에 편승한 마귀의 유혹과 거짓말이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종의 자리이다. 여기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영이 되어 우리를 살게 하고 자유케 한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1,32,36) 주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본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가 가는 길로 가는 것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리 안에 있게 된다. 주님은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는가? 진리 중의 기본은 ‘사람은 혼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주 가운데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계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으며 그 안에서 살도록 정해져 있다는 이 사실이 진리 중의 진리이다.  


그리고 사람은 지금 타락하여 하나님 보시기에(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도 굉장한 진리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즉 그대로 있으면 흙덩어리,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며 자기 생각에는 대단한 존재 같지만 실제로는 죄나 생산해내는 쓰레기에 불과하며 그 결과는 멸망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으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구해야 한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내일(소망)이 있으며 그 안에서만 믿을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믿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내게 이런 생각이 있고 이런 의지가 있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알아서는 안된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칼을 휘둘렀으며 죽는데까지 따라가고자 했다. 그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는 말을 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거나 입에 발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그러했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많은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지만 그것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진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결코 변치 않는다. 주님은 장차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이것은 진리를 밝힌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계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이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힘들지만 결국 그 길로 갔다. 그러나 제자들은 진리에 대해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주님이 곁에 계신 동안에는 용감했지만 주님이 무력하게 잡히게 되자 모든 것을 상실하고 겁쟁이와 배신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님이 베드로 곁에 서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고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했다는 사실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잡혀 죽게 하신 것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 제물이 되게 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뜻(진리)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진리)은 이미 밝혀진 것이다. 주님이 잡힌 것은 이 진리는 바뀐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진리가 성취된 것이다. 주님은 예상 밖의 어려움에 처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자기 갈 길을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과 달리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변한 상황으로 인해 두려워하였으며 실패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도 반복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만일 진리 안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환경이 변하고 생각지 않던 문제가 생길 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환경에 따라 이리 저리 춤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드로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견고히 서 있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떻게 되든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요동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우신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과정을 거치심으로써 우리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4-16)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자신을 믿어서는 안된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을 만나기 전의 상태인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는 장차 일이 닥쳐왔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떻고 내 생각이 어떻다는 것은 지금 그렇다는 것이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실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4,1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8-24)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이것을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알면 무엇에든지 큰 소리 쳐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이다. 그리고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해야 한다. 주님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유와 해방과 승리는 이 자리에서만 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로 이 자리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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