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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사실 비유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 대한 실제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만물을 다스리고 심판하는 주로 오실 것이다. 그때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아니라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한편으로 주님은 우리의 구주로서 여전히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신부를 찾으러 오는 신랑으로서 위엄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며 더 나아가서 만민을 심판하는 주로서 불꽃같은 눈과 주석 같은 빛난 발로 우리 앞에 두렵게 나타나실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주님 오실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까지 다 다시 살려서 주님 앞에 세워놓고 시행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온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와 권세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그에 속한 자들은 그 의와 명예를 공개적으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를 죽인 마귀와 그에게 속한 악한 무리들은 공개적으로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먼저 양과 염소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양과 돼지 또는 양과 소가 아니라 양과 염소이다. 양과 염소는 외형상 비슷하게 보인다. 양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목자이고 그 백성은 양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무엇인가? 염소는 양을 닮은 것이지만 양은 아니다. 그것은 양도 아니고 양과 아주 다른 모습의 무엇(소나 돼지)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이비 양이다. 이것은 사이비 신자들을 나타낸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들,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따라가지 않는 자들,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정신으로 행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염소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말씀하실 당시의 상황에서 염소에 해당하는 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다수의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다.(롬3:1,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롬3:3) 그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요10:26)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4-27)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 그것은 주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찾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태초부터 계신 그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양이 아니었다. 그들은 양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거칠고 사나운 염소였다. 누가 그들을 염소라고 말해서 염소가 된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염소 됨을 드러내었다.

종말에 주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생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일생 주님을 따랐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주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 곧 염소에 해당하는 자들을 향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놀라서 주님께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섬겼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주님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고 주님을 섬기지 않은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의외의 말씀 같고 어떻게 보면 억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정확한 것이다. 이 기준이야말로 사람의 인격과 생명, 그 실상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최후 심판의 기준과 근거는 인격과 삶이다. 곧 그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면 받아들여지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면 거절 받는 것이다. 천국(왕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 하나님과 한 생명인 사람, 하나님의 성질(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천국(왕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어린 양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천국에 적합한 사람도 역시 어린 양이어야 한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인격과 삶을 나타내는 사람이어야 주님께 받아들여진다.  

이론(교리)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천국에 갈 수 있다. 구원은 선한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며,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되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 그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지배를 받는다. 주님을 참으로 믿은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생명은 자기의 육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생명이다. 이 생명이 하나의 운동력이 되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인격과 삶은 주님의 그것을 본받게 되고 전체적으로 그의 생애는 주님을 나타내는 생애가 된다. 이런 원리에 의하면 믿음은 좋은데 사람은 나쁘다거나 예수는 잘 믿는데 행실은 엉망이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누구든지 예수를 잘 믿는다 하나 그의 삶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사람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옳은 말이지만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산 믿음에는 증거(열매)가 따른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생명으로 행한다. 그 생명으로 행할 때 그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나온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함 또는 열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니요 죽은 믿음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십자가를 질 줄 모르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어린 양과 같이 자기를 바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힘쓰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믿음의 결과는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여기서 행함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그 마음으로 인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섬겼던 불쌍한 사람들을 섬긴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결과요 표시이다.

기독교의 믿음은 결코 관념적이고 막연한 이론이 아니다. 믿음은 바로 삶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직접 볼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좇아 행하면 된다. 주님은 그를 믿는 사람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땅에 계실 때 행하셨던 것처럼 사람을 구원하시고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신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원한다면 소위 '주님을 경배한다는 각종의 종교적 의식을 하기보다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순종하여 주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공궤할 수 없다. 오직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공궤할 수 있다. 아무 이해타산적(利害打算的) 계산 없이 자기 생명으로 말미암아(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표시이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사탄에게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다시 되새기는 것도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찾고 있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얻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면 된다.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또는 마지막 날에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성령을 잘 따라가는 것이며 우리 길을 끝까지 제대로 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을 사탄이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로 성령께 복종치 못하게 한다. 여기에 걸려드는 사람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는 동안 항상 자기 생명을 관리해야 한다. 그 생각과 삶의 실제를 항상 주님께 비춰보아 온전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실패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다. 이 실패란 이스라엘이 앞에서 말한 마귀의 궤계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열매 없는 쭉정이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지식을 가졌으나 거룩한 삶은 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자기 의를 삼고 자기를 방어함으로써 도리어 교만한 태도를 취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이 사실을 먼저 말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2:6-11)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적용될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헬라인만 행위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도 행위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사람의 구원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냐 라는 식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이 그 말과 지식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그의 삶과 인격, 행함에 있는 것이냐 라는 식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즉 바울은 이 말을 통해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 곧 그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도 이러한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이 그 생명대로 행함에 있어서 사탄의 훼방(거짓말)으로 인해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경계의 말을 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2:9-11)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3:17-19)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훼방이란 어떤 것인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하는 야고보의 말 속에 그 답이 있다. 즉 믿는 자들이 빠지는 사탄의 올무는 지식으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지식은 실제가 아니고 그것을 위한 밑거름일 뿐이다. 오직 행함(실행)만이 실제이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를 온전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과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신약 교회의 많은 신자들도 그랬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종교적 의식을 통해' 섬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 섬김에도 어느 정도 희생과 수고가 따르기는 한다. 그 역시 돈과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을 받기 위해서 혹은 재앙을 면키 위해서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투자이지 손해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한다고 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그런 일을 할 때는 자기보다 월등히 높은 존재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전능자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므로 마음을 높이고 자아를 높인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그것을 할 수 있다. 왕보다 작은 내가 나보다 큰 자인 왕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내 인격이 어떤 인격이든 내 마음과 생명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크신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자아가 죽은 자든 살아 있는 자든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나 부유한 자가 지극히 가난한 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그 생명 자체가 부드럽고 겸손한 생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히 섬기는 것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 된다. 이 일은 아들의 생명을 받은 자가 그 생명으로 온전히 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을 사랑하는 생명이요 긍휼히 여기는 생명이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공의로운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용납할 수 있으며 사람을 그 외모와 상관없이 사랑하며 섬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유무와 사람이 자기로 살지 않고 아들의 생명으로 행하는지의 여부는 다른 것으로는 드러날 수 없고 오직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만 드러난다.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며 가난하고 곤고한 자를 돌아보는 것, 죄인을 용서하며 흠 있는 자를 용납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합당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를 인정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일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인정하시는 것이다. 즉 아들의 생명을 받은 자의 증거가 바로 그러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마지막 날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거의 언제나 사람의 모습 그것도 가난하고 작은 인생의 모습으로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섬길 줄 알아야 하며 특히 작은 자 곧 사람이 보기에 지극히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 속에 자신을 감추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병든 자, 약하고 외로운 자, 갇힌 자나 헐벗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다. 이런 자들을 대접하고 돌아보는 것을 곧 주님 자신을 대접하고 돌아보는 것과 같이 여기신다. 그것은 이들이 주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도 아니며 이들이 특별히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다. 주님을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이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성심 성의껏 돌아보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우리는 주 예수님이 지금 땅에 계신다면 틀림없이 돌아볼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명하셨고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마땅히 이런 일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한 주님은 세상의 버림 받은 불쌍한 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거셨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대신하여 임무를 수행한다는 차원에서 이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또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차원에서 이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배고프시고 추위에 떨었고 갇혔고 사람들의 버림을 받았다. 또 역사상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같은 고난을 당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이 역시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고난당하는 이들, 모든 불쌍한 자들을 대할 때마다 고난 받으신 주님과 믿음의 선배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그들을 기꺼이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양의 나라이므로 어린 양과 같이 겸손하며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기를 힘쓰는 자, 그리스도의 삶이 넉넉한 자에게 주어짐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아들의 생명을 받은 자라면 이러한 모습이 우리 안에 마땅히 드러나야 함을 항상 인식하자. 만일 우리 안에 이러한 생명의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예수를 바라보며 그를 알아야 하고 은혜를 구해야 한다.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투르의 마틴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님의 오늘 교훈을 요약하여 상기시킨다.

마틴은 로마의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성읍에 막 들어가고 있는데, 거지 한 삶이 그를 세우고는 팔을 내밀어 무엇인가를 좀 달라고 했다. 그때 마틴은 돈이 없었다. 그 거지는 추위로 인해 얼굴이 시퍼렇게 된 채 떨고 서 있었다. 마틴은 좀 생각하다가, 오래 입어서 낡은 군용 외투를 벗어 둘로 나누어 반쪽을 그 거지에게 주었다. 그 날 저녁 마틴이 꿈을 꾸는데 꿈 속에 천사들이 모여 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웬 낡아빠진 로마 군인 외투의 반쪽을 입고 계셨다. 천사 중 하나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왜 그런 낡아빠진 외투를 그것도 반쪽을 입고 계십니까?" 주님은 즐겁게 대답하셨다. "내 종 마틴이 내게 준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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