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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마태복음 26:26-3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눅22:19)


누가복음 22장에서 주님은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다음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념하는 것인가?

주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첫째,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과 희생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과 그렇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신자들이 하고 있는 주님에 대한 기념은 이러한 기념이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이러한 기념은 중요하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에 대한 기념의 전부는 아니다.

둘째, 주님을 진실로 기념하는 방법은 삶 속에서 그를 믿으며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즉 그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떡을 뗄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한 사람을 기념하는 것이며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 자신을 기념하는 것이다. 즉 성찬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실로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를 매사에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기념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주님은 죽어 없어진 분이 아니고 하늘에 계시며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를 기념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기념하거나 그의 옛 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반드시 현재적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가 이루신 역사를 믿음으로 누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셋째, 주님을 궁극적으로 기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의 죽으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주님은 어쩌다보니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어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을 참으로 기념하려면 그가 죽기까지 하면서 이루시고자 한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주님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목적에 쓰일)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주님이 목표로 한 구원이란 우리로 이 낮은 몸 곧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높고 영광스런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고 하나님을 담는 그릇(집)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마귀의 종노릇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성전이 되게 하게 위해 죽으신 것이다.

주님의 희생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을진대 만일 사람이 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주님의 희생은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십자가의 목적은 사람으로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며 성령(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자 곧 그리스도의 몸(신부, 영광스러운 교회)이 되게 하는 것이며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무릇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부서진 것은 그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단체적 몸(교회)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위해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명(살과 피)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써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축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죽음은 실질적으로 기념되지 못하는 것이며 그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단지 옛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나 육신을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신 것은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이 아들을 본받게(닮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이 아들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고 그들을 이 영원하신 아들에게 붙여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건짐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가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본받으며 그의 나라와 신부가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주님의 죽음은 전혀 실제적으로 기념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얻고자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담 안에서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회복된 사람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마귀의 종으로 살며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 곧 말씀대로 사는 사람, 그리스도의 계명(법)을 지키는 사람(요14:21), 거룩한 사람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동하며 그의 인격, 그의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얻으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런 사람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교회가 사랑이 없고 하나로 연합되지 못하고 범죄하는 자리에 있다면 주님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 20:7을 보면 안식일 다음 날에 신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주일이든 다른 날이든 모일 때마다 주님을 기억하며 떡을 떼었던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11:24-2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10:16,17)

우리가 떡을 뗄 때 한 떡을 여럿이 떼는 것은 우리가 다 한 몸에 속한 하나라는 사실을 느끼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람들을 하나로 엮으시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떡을 뗄 때 포도주도 마셨는데 이 잔은 새 언약 곧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의 생명이 되시며 사람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 언약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으며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떡을 뗄 때마다 그리고 잔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로 사는 세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이것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단지 예수를 믿음으로써 즉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을 좇아 삶으로써 이것을 누릴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믿음의 기초이자 근본이고 또한 핵심이다. 이것은 주님을 기념하고자 하는 자의 기본 자세이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다면 즉 교회 안에 속한 각 사람들이 다 자아가 살아서 육신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들이 모일 때 각기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서로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모임이 아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같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다. 사랑 안에서 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먼저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음으로 사람들끼리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주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생명을 받은 자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연합된 교회 곧 영광스러운 교회가 나타나지 못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믿게 할 길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하나가 되도록 도우신다. 제도나 교리나 조직과 같은 인간적 수단을 통해 억지로 연합하는 것은 가짜 연합이고 오직 생명이 같음으로써 자연히 하나로 연합하는 것만 참된 연합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임과 연합은 신자들이 서로 사랑해서 그리고 서로 (생명적으로) 필요해서 함께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 같은 말을 하며 같은 생각을 품는 것이다.

이런 모임만이 주님을 기념하는 모임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각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머리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을 받은 각 지체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우리의 모임과 사역들은 다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교회 안에서 연합을 이루어지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육신의 생명)를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자랑, 육신의 정욕, 육신의 생각, 육신의 감정을 보존하려고 하다 보니 거기에 손상을 주거나 괴로움을 주는 것들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거부하며 갈라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육신적 이유로 인해 교회가 서지 못하게 되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몸이 굳게 서는 것 즉 신자들이 각기 자기를 부인하고 아들의 생명으로 행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이 양보하실 수 없는 일이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를 보존하려고 하다가 다 같은 뜻을 품고 다 같은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격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허용하실 수 없는 일이다.

간과하지 않고 허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몸의 생명을 보지 못하고 육신의 생명만 보는 사람들을 징계로 일깨우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 몸을 보존하고 자기 자존심과 자기 영광, 자기 뜻을 나타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영광이 나타나지 않고 더 어려움이 많게 되고 더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를 도모하는 자들이 몸이 아프고 약해지며 일이 안 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어렵게 되도록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기념하고 그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억지로 자기를 낮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낮아지게 될 것이며 저절로 형제들을 존중하며 사랑하며 하나로 연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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