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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는 한편으로는 영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육신의 생각 곧 살고자 하는 육신의 갈망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12:24-28)

이 말씀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주님은 십자가가 결코 멸망의 길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이요 영광의 길임을 아셨다. 십자가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수고와 희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 생명을 잃는 것이요 극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달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말을 동시에 내놓게 된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5:6-10)

심한 통곡과 눈물로 무슨 간구와 소원을 올렸겠는가? "빨리 죽여주십시오" 라고 했겠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형제들과 한 모양이 되었다고 말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자에게 생명을 주고 만민을 다스릴 구원자로서의 주님 곧 만유의 주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인 그 분의 자리에서 나올 모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때 하늘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사람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임과 동시에 그 손에 의해 지음 받은 하나의 피조물 즉 동물이었다. 그가 서 있었던 자리는 오늘 우리 인생이 서 있는 자리이다.

우리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동물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안에 육신적 생명 곧 동물적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판단하고 느끼는(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사람 되심과 십자가를 지신 체험은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 잡은 자를 이기도록 길을 여신 것이다. 십자가를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육신의 생명 곧 사람의 전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마귀는 이것을 알고 사람을 위협하며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육신의 정함 없는 욕망에 충실하도록 부추긴다.

주님이 사람이 되시고 또 사람이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사망(십자가)의 문을 통과하신(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서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주님은 어떻게 사망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써 사람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는가? 그는 사람이 아니고 육신을 가지지 않아서 그랬던가? 그는 우리와 완전히 성정이 같은 분이었다. 그의 눈물과 통곡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기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 곧 이기는 생명, 부활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그에게 하나의 권세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은 목숨을 버리는 권세였다. 즉 타의에 의해 혹은 자연적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권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최고의 권세 최고의 자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버리는 권세는 목숨이 여러 개 있든지 아니면 절대 죽지 않는 목숨을 가지고 있든지 할 때 구사할 수 있는 권세이다. 나는 안 내놓으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이 권세 앞에 마귀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권세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만 구사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 곧 진리를 알고 우주의 이치를 아는 지식을 가진 자만 구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자기를 내놓으면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고 존귀케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기를 바친 자는 그것으로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많은 생명을 얻는다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의 법칙이요 이치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주님은 이 생명, 이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육신이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십자가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이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투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5-12)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로 영광과 권세, 생명과 존귀를 얻는 지름길이며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우주의 진리요 길이요 질서요 이치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 지혜요 지식이다. 주님은 수동적으로 목숨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목숨을 내놓았다.

우리가 땅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꼭 죽을 때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알면 안 된다. 바울의 앞의 말씀을 빌자면 형제들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로를 향해 복종하고 섬기는 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꼭 예수를 믿는 형제들 안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5:20-6:7)

이 권세가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많은 불안과 염려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하는 것이다. 건강, 주권, 명성,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 소유물, 이런 것들을 필요에 따라 버리는(빼앗기는) 것이 도리어 얻는 길이며 풍성케 되는 길이라는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11)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은 주님의 담대함과 당당함을 보고 놀라서 땅에 엎드러졌다. 얼마나 당당하고 권세가 있었으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무리들은 주님의 담대함과 당당함을 보고 혹시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우리는 예수를 잡으러 왔는데 당신이 예수 맞소 하는 식으로 재차 물었다.

주님은 혼자였지만 그들은 군대를 끌고 주님을 잡으러 왔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그를 위한다면 그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 권세자는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사람들의 손에 잡히지 않으며 해를 당하지 않을 자였다. 그는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아버지의 때를 따라 잡히기도 하고 놓이기도 하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4:28-30)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7-10)

이 말씀들은 주님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기 전에는 결코 사람들로부터 죽음이나 손상이나 훼방을 받지 않으실 것을 알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그의 생명, 그의 활동,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필요에 따라 주어지고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우리 일이 죽음이나 늙음이나 세상의 어떤 방해를 통해 중단되거나 제재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가서야 비로소 그렇게 될 것이다. 즉 우리의 인생, 우리의 목숨과 우리의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다 마친 후에 청산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최종적 수단으로써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는 주님을 위해 능동적으로 일을 하고 최후에는 죽음(을 당함)으로써 피동적으로 주님을 위해 간증할 기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정하신 때에 의해 (어쨌든 하나님의 손에서) 일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귀의 사망 권세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에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초월해 있는 자에게 그것은 아무 권세도 되지 못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1-9)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1:20-26)

바울은 죽는 것을 안식의 때로 여겼으며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인생이 완전하고 영구한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상황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속히 죽기를 원했다. 그가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사역) 때문이었을 뿐 그 자신의 육신적 갈망은 아니었다. 그가 진심으로 갈망한 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곧 죽음 후에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죽을(없어질, 썩어질)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것이었으며 진짜로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누가 목숨을 빼앗아 갈까봐 떨기는커녕 스스로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판이었다.

주 예수님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사역과 관련하여 자기의 죽음을 큰 승리와 영광의 기회로 생각하였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0-24)

주님은 자기의  죽음의 순간을 영광을 얻는 순간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의 죽을 자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죽을 때도 알고 있었다. 어떤 이방인(헬라인)이 자기를 찾았을 때 주님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로 쓰시고자 하는 때가 왔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한 알의 밀'로서 드려져야 할 자신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의 죽음이 많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이지 결코 허무한 손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통해 주님은 자기 목숨을 누구에게 억지로 뺏앗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자신과 세상에 있는 자기의 택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이 권세가 얼마나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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