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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3년간 마태복음 상고해 왔는데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이다. 주님은 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맨 먼저 나타나셨고 그 후에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주님은 그녀에게 '내가 갈릴리로 갈 것이니 가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올라가라'고 이르도록 지시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갈릴리의 지정한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 이제 세상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그의 권세와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6-20)

마태복음을 보면 이처럼 주님이 부활하신 후 바로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세 복음서들 곧 요한복음이나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주님이 갈릴리로 가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세상에 40일을 계시면서 적어도 열 번 이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1.막달라 마리아에게 (막16:9, 요20:11-18)  
2.여인들에게 (마28:9,10)
3.글로바와 그의 동행자에게 (눅24:13-15)  
4.시몬에게 (눅24:34, 고전15:5)
5.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요20:19-23)
6.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에게 (요20:24-29)
7.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사람에게 (요21:1-14)
여기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기록이다.
8.갈릴리의 주님이 지정하신 산에서 (마28:16-20)
9.오백여 형제들에게 (고전15:6) -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갈릴리 산에서 주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것과 같은 때라고 생각한다.  
10.주님의 형제 야고보에게 (고전15:17)
11.예루살렘 근처 감람산에서 열한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행1:4-11, 눅24:50,51)

왜 각 복음서 간에 이런 기록의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왜 마태는 주님의 많은 나타나심에 대해 다 생략하고 이렇게 간략하게 오직 갈릴리 산에서 나타나신 것만 기록했는가? 그것은 각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주님의 부활 후 나타나심에 대해 가장 자세하고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요한의 관심이 제자들의 내적 변화 곧 생명의 변화에 있었고 또한 그의 관심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마태의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며 그 나라가 어떻게 건설되는가 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주님과 제자들 간의 접촉과 대화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왕 되심과 천국의 건설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주님이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왕 된 위치 곧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얻은 그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언급하시고 제자들에게 세상을 회복하며 다스리도록 명하신 것은 그의 왕권을 선언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신 것과 같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이 명령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특별히 명하신 말씀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지상과제'(至上課題, 가장 중요한 일)라는 이름을 붙여 신자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둔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많은 교회들이 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로 삼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교회의 온 힘을 여기에 쏟는다.

물론 그러하다. 실제로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 가서 주님의 왕 되심과 마귀가 패한 것과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마귀의 손에서 되찾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특히 없어질 세상 나라와 거기에 속한 일들에 여전히 소망을 두고 몰두하는 신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고 그들의 관심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로 돌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함께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한 부활 후의 기사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네 권의 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 전에 마태복음의 강조점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은 오직 전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나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10:5)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분명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의 상황이 주님께서 육신으로 땅에 계신 상황이 아니라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마귀를 이기고 온 세상을 통치할 권세를 가진 왕으로 세워진 상황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왕으로 오신 분의 계보를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오늘 여기 마지막 부분에서 공중(세상)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의 권세를 잡게 된 그리스도와 교회의 주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체 주제와 잘 일치하는 구성이다.

마태의 관심은 처음부터 나라와 권세에 있었다. 하나님이 마태의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마태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사역에 있었다. 그리하여 마태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산에서 (혹시 이 산은 전에 주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신 그 산일지도 모른다) 제자들을 만나 그의 권세를 위임하시고 세상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명하신 일을 그의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 마태복음 상고를 마치려고 한다. 전에 우리는 먼저 요한복음을 상고한 바 있다. 요한복음을 마태복음보다 먼저 상고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요한복음이 마태복음보다 먼저 또는 최소한 동시에 상고되어야 할 이유는 '사역(일)은 결코 생명을 앞서지 못하며 사역은 결코 생명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이 주로 사역에 대해 말한다면 요한복음은 주로 생명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생명을 알고 누리는 만큼 주님을 전할 수 있으며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 일은 오직 인격(사람)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나온다. 사실 하나님의 일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나온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만 천국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 주님의 일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일을 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부족하기 때문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며 주님의 생명을 깊이 알고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교회들은 오늘 여기 마태복음 28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역에 깊은 관심과 부담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열매로 볼 때 교회들의 사역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하는 자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많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므로 열매가 적다면 그것은 교회가 주님께 견고히 붙어있지 않고 다른 열심과 능력으로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오직 자기에게 붙어 있을 것을 강조하셨는데 사람들은 왜 주님께 관심을 가지기보다 거기서 맺히는 열매(일)에 대해서 더 관심을 많이 가지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아가 어디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주님과의 연합은 사람이 자기를 부인해야만 이루어지지만 사역(일)은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제사와 봉사와 활동을 더 좋아한다.

유대교의 실패도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었다. 언제나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원한다. 사람은 단지 세상을 좇고 쾌락을 좇고 죄를 짓는 데만 열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 사람은 선한 일을 함에 있어서도 열심을 낸다. 그것을 통해 자기 의가 드러나고 자기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람이 주님과의 연합 그리고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보다 일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면 주님과 연합이 안 될 뿐 아니라 일도 제대로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일을 추구하면 일이 되고 주님을 추구하면 주님을 누리게 된다면 이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잔느 귀용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주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며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만 하고 어떤 사람은 나가서 (그들의 기도의 뒷받침을 받든지 해서) 일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둘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일만 추구해서는 아무 일도 안 된다. 일을 이루려면 일을 함과 동시에 반드시 먼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과 교통하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주님을 전파하여 사람을 건지고 천국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주님을 의지하고 그의 생명을 힘입는 사람만이 제대로 주님을 전파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만이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지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일이야 많이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주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세계를 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외의 다른 복음서들의 내용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자들은 마태복음 28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갈릴리에서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들으시며 그의 권세와 사역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거기서 오실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3-8)

또 이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일차적으로 만났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요20:21-23) 주님의 이때의 행위는 제자들이 장차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며 그 생명의 권세로서 주님이 땅에서 하셨던 일 또는 그 이상의 일들을 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주님이 위임하신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다음 여러 기록들에서 주님의 부활 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불신앙적이고 약한 모습을 나타내었는지를 볼 수 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16:10-14)(눅24:13-35)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4,2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

마태의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것을 성취하는 사역에 있었다면 요한의 관심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생명에 있었다. 이것은 마태복음보다 요한복음이 뒤에 쓰여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사람들 안에서 주님보다 일이 더 추구됨으로써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때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무엇이 근본이며 무엇이 우선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관계)을 회복시키신 후 그의 어린 양들을 돌볼 것을 지시하셨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생명을 받지 않고서 주님의 권세를 행사하며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든 생명을 보전하고 충만케 하는 일이든 모든 것은 다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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