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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주님에게 쓸개 탄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27:34)
쓸개 탄 포도주는 몰약을 탄 포도주(막15:23)로도 묘사되었다. 이것은 마취제 역할을   하도록 제공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쓴잔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의 의지를 나타낸 행동이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꽃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18:11)

때가 이르렀느냐 아직 이르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 때가 이르렀다면 하나님이 주신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 다시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으셨다. 그의 안식과 구원은 육신의 안락에 있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때 주님 안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었고 그의 몸은 그러한 그의 영에 복종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은 어린양이 속죄제사에서 희생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끌려나가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에 끌려 죽으러 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지금 죄인의 대표로서 죄의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몸의 느낌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그 죽음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주님의 육신은 아담의 육신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육신은 죄의 몸, 사망의 몸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반드시 죽고 사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저주를 최종적으로 담당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범죄한 인생에게 내리신 창세기 3장의 저주는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몸(인생)에서 영원히 위력을 발휘한다. 아이를 낳거나 기를 때 또는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할 때 사람은 고통을 당하며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은 이 저주를 그의 몸으로 담당하셨으며 완전히 끝내셨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는 영으로는 자유를 누리지만 육신적으로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즉 주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도 역사하여 새 몸을 입게 될 때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 죽을 몸에 굴레씌워진 저주 곧 육신의 수고와 고통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피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고통과 고난은 다 목적이 있어서 또는 까닭이 있어서 있는 것이다. 주님의 고통은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죄인의 대표로 섰기 때문에 온 것이다. 우리가 오늘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가 의를 위하고 진리를 위하다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해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겪는 대부분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가 '세상에 살기 때문에' 부득이 겪을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세상은 죄가 있는 곳이며 인간의 탐욕이 있는 곳이고 그것들이 뒤엉켜서 문제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들은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다. 즉 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탕자에게 실패와 고통이 없었다면 그는 자기가 한 일이 어리석고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과 고난을 무조건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일과 상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것은 소극적으로 어떤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주님이 그의 쓴 잔을 받으신 것과 달리 오늘날의 인류는 그 신장된 힘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지우신 운명을 거부하며 벗어나려는 애를 쓰고 있다. 여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 그의 약자된 위치 곧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 위치를 거절하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남자와 투쟁하고 있으며, 남자는 하나님이 지우신 육신의 고통 곧 삶의 수고를 피하기 위해 계속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노력과 투쟁이 곧 인간 역사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기술 문명이 발달했고 많은 생활의 편리함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권의 신장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인간의 고통과 수고는 사라지지 않았고 단지 그 모양만 바꾸어 여전히 인간을 동일한 강도(强度)로 누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벗어나려고 하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은 아무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길은 육신이 고통을 면하고 안락한 상태를 누리도록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주신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 올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되면 주님처럼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겸손히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앞에서 여성이 그의 낮은 지위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문제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1-15)

이것은 결국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낮은 지위와 거기에 따르는 손해를 감수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늘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이어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성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여기서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길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안에 생명의 길이 있다고 믿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세계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선이 그어진다. 하나님은 여자들이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행하면 그의 저주와 고통에서 벗어나 큰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이 말한 해산(解産)은 여성의 저주와 고통의 대명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순종할 때 그는 그 해산의 자리 곧 만인을 섬겨야 하며 희생과 수고를 해야 하는 그 자리로 말미암아 도리어 큰 구원이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이 주신 섬김의 지위를 달게 받아들여 순종한 많은 여성들은 교회에서 가장 큰 존귀와 영광을 얻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생명 안에서 키움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권세자가 되었다.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27:35)

주님은 죄인들에게 철저히 배척되고 최후의 순간까지 조롱과 약탈을 당했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세상과 하나님의 대결이며 죄인들이 의인을 거절하고 배척하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시편 22:18에서 하나님이 오래 전에 예언해 놓은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9-44)

이것은 마귀가 광야에서 주님께 던졌던 시험을 유대인들의 입을 통해 반복한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3,6)

예수님이 만일 이때 사람들의 말대로 거기서 내려오심으로써 자기를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못했을 것이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8-10)

무엇이 승리이며 무엇이 온전인가?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승리로 온전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육신이 괴롭게 되고 손해를 입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승리고 온전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벗고 내려오는 것이 온전이고 승리고 구원인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희생하여 그들의 생명을 건지는 것이 온전이고 승리고 구원이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7:45-50)

영혼이 떠났다는 말은 원문에 영을 포기했다(놓았다, release, yield up) 라는 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죽음을 묘사하는 유대식의 표현이다. 여기에 영혼이 떠났다는 표현이 쓰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죽음을 흔히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즉 육체는 죽고 영혼은 하늘 나라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온 것이다.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묘사하는 것은 관용적으로 써 온 것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진리적으로는 그렇게 정확한 말은 아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는다는 것이지 영혼은 살아 있고 육체만 죽는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전혀 다른 두 성질의 존재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흙에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져서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가 공존하는 피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흙에다 하나님의 생기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존재라고 해서 사람 안에 흙과 하나님의 생기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은 수소와 산소라는 두 성분으로 구성된 것이지만 그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은 하나로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 물이라는 전혀 별개의 존재로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 상태로 설명은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따로 두 존재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타락했을 때 '너는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사람 전체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혼과 육체는 사실상 하나이다. 사람을 편의상 육체와 영혼의 두 개념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사람이 영혼과 육체라는 별개의 두 존재로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혼과 육체라는 것이 따로 있다면 육체가 늙어지고 쇠약해질 때 왜 정신이 흐려지고 약해지며 어릴 때 육체가 미약할 때는 왜 정신이 그렇게 미약하겠는가? 육체와 정신은 같이 가는 것이다. 정신박약아는 본래 정신이 박약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뇌(육체)가 문제가 생겨서 (그 뇌가) 박약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두고 정신박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과 육체는 같이 가는 것이며 육체의 한 현상이 정신 활동인 것이다. 육체는 정신을 산출하고 그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뒷받침하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연결되어 있고 하나이다.

인간의 중추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육체를 지배하고 조절하는 영(영적 통제력)이다. 이것이 인간의 정신이며 영혼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와 분리되거나 무관한 별개의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좁게 말할 때 이 영적 통제력(정신)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죽을 때 영이 떠났다고 표현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떠났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표현을 접할 때 그것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로 갔다는 식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영혼불멸의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 것이 아니고 철학에서 온 것이다. 헬라철학을 비롯하여 모든 세상의 종교와 철학들이 인간의 영생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주님은 사람이 죽으면 때가 이르기까지 흙으로 돌아갔다가(없어졌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을 것이며 그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15장, 살전5장 참조)

크게 보면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성질을 가졌고 그 하나님의 성질의 기본은 '영원함(불멸함)'이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한 번 죽는 것(히9:27)조차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은 후에 다시 살리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주님이 죽으신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주님이 죽으신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27:51-56)

적어도 세 가지의 일이 일어났다.

첫째,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성소(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휘장(curtain)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는 곳으로서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죽음을 당했다. 이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이 단절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던 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로 연결되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또한 휘장이 밑에서부터 위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이 일이 사람이 행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임을 나타낸다. 종교란 인류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거나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 몸부림의 표현이지만 여기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이 휘장의 역사는 하나님이 사람과 교제하시기 위해 길을 여시고 스스로 내려오신 것을 나타낸다.

둘째,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는 것은 세상 나라가 이제 무너졌음을 나타낸다. 즉 마귀가 기반으로 삼고 있던 땅이라는 세계가 궁극적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28-31)

아직 세상에서 마귀의 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세상 임금이 그 주권을 잃고 쫓겨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이전처럼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없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위협뿐이다. 그는 기반을 잃었다.
또한 땅이 진동한 것은 이제 세상에 천국이 임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나라는 진동치 못할 나라이다. 이 진동치 못할 나라를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은 그 날(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 땅을 진동하실 것이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6-29)

진동치 못할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세상을 진동하실 것이며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영구한 안식과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자주 드러내실 것이다. 주님의 부활 후에 땅이 진동한 이 일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시작이다. 주님은 전에 이런 사실을 예고하셨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난리와 난리의 소식들이 들리며 지진과 각종 자연 재해와 인재(人災)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 세상이 영원하지 못하며 반드시 무너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대해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어떤 큰 지진이나 재앙이나 핵폭탄이 터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우리의 세계, 우리의 자리를 견고케 하기 위해 허락된 조치들이기 때문이다.

셋째,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이제 주님의 승리로 말미암아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정복되고 굴복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의 권세에 마귀의 사망 권세는 꼼짝할 수 없다. 땅이 진동한 것이 세상 나라의 멸망의 시작을 시사한 것이듯 성도의 부활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원한 부활의 시작을 시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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