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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31-46)


1.사람을 신뢰할 수 없음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시험하여 넘어뜨린 후 그로 우리를 넘어뜨리도록 역사한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 다윗의 시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때로 이런 일을 일으키신다. 그리하여 가장 가깝고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허락하신다.

사실 주님은 가룟 유다뿐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모든 제자들로부터도 배신을 당했다. 주님이 잡혀서 고난을 당하실 때 그들은 다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다. 그들 중 누구도 주님을 옹호하고 그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실을 아셨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0,41)
주님은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여 결국 주님을 위할 수 없는 제자들의 상태를 알고 계셨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셨으므로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를 때도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시고 일정한 거리를 두셨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2:23-25)


2.주님을 파는 사람들

가룟 유다는 주님의 길이 자기의 뜻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결국 주님을 배신하고 원수들에게 그를 팔아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단지 유다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주님을 팔고 버린다는 것은 신자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가운데 자기가 어느 때에 주님을 팔고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런 일을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잡히기 직전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당신의 제자들이 때가 이르면 주님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1-23)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혹시 그 사람이 접니까?" 하고 주님께 물었다. 실제로 주님을 팔게 되는 유다조차 그렇게 물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운명과 실상을 모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팔면 팔고 안 팔면 안 파는 것을 자기가 마땅히 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안 판다 생각하는 사람도 팔 수 있고 팔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인가? 하나님과 마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를 주장하면 그는 팔고 싶어도 팔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마귀의 거짓말이 그 속에 들어가면 그는 안 팔고 싶어도 안 팔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빌라도는 주님을 결코 죽음에 내어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목숨을 위협하며 주님을 내놓으라고 할 때 그는 부득불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베드로는 주님을 떠나 편하고 자유롭게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주님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인자를 팔고 버리는 사람이 가룟 유다만이 아니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구속되기 전 곧 완전한 몸으로 변화되기 전의 모든 인간의 상태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실패 후 모든 인류는 그 속에 마귀의 거짓말이 들어가 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드로든 누구든 다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지극히 유감스럽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이다. 타락한 인생의 속성과 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를 수 있는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알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를 주님께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배신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배신하거나 버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주님을 믿었으며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님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자기 목숨)을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를 위해 주님을 팔고 버릴 수 있는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왜 주님을 따르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가 계획하고 부르셨기 때문이지만 베드로는 그런 하나님의 사정 때문에 따른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주님 안에서 뭔가 할 일이 있고 뭔가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목적이 상실된다면 그는 더 이상 주님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될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베드로나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더라도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절대적인 부르심 곧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을 다시 주님께로 돌이켜 결국은 도로 주님을 위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31-34)

주님은 여기서 사탄이 베드로를 청구했지만 주님이 그를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결국 그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사탄이 청구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시험에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시험을 이기고 도로 온전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말하는 자리에서 다음 이야기 곧 형제들을 온전케 하는 자로서의 그의 다음 사역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5-18)

베드로는 나중에 결국 자신이 한편으로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을 배신하는 자요 팔고 버리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그것을 고백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지만 그 대답에는 자신감과 확신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겸손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 견고한지 스스로 알지 못하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저는 솔직히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확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지금 제 마음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라는 말과 같다.

그러한 심정으로 그는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아가페라는 단어로 물었을 때 그는 필레오라는 단어로 응대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사랑은 주님이 원하신 사랑과는 차이가 있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섬길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양떼와 목자

주님은 제자들이 다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질 것이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실제로 그렇다.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거나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어서 따르게 하고 섬기게 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 속에 본래 그런 속성이 있거나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양떼는 왜 목자를 따르는가?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자기를 돌봐주고 지켜줄 목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하나님을 믿는가? 왜 하나님을 사랑하며 따르는가? 처음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외 없이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다 보면 그 이상의 이유를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육신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하나님을 따르며 믿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은 양떼가 목자를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목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진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원래 하던 대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갈릴리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가? 사람이 잘 결심하고 힘써 노력함으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택한 자들을 그의 열심으로 잘 이끄셔서 끝까지 따르고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사람)이 양 무리와 같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절대 혼자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그는 양떼를 위해 반드시 목자를 붙이신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는 교회를 홀로 버려 두는 분이 아니고 그 안에 살아 계시며 그 안에서 날마다 역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양의 관심은 길을 잘 찾는 것이 아니라 목자를 알고 따르는 데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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