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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람의 모의와 하나님의 계획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마26:1-5)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유월절에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잡혀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속죄)하기 위해 바쳐진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일은 유월절에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무리들(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그 일을 유월절 기간 동안에는 하지 않으려고 의논했다. 명절에 예수님을 체포하고 심문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은 시기가 적절치 않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인 때에 그런 일을 하면 폭동이나 민란이 일어날 우려도 높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모의 간에 충돌이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유월절을 위한 희생 제물로 예비하셨고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일이 유월절을 피해서 진행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필요는 결코 하나님의 필요를 넘어설 수 없으며 사람의 모든 모의는 하나님의 계획을 뒤엎지 못한다.

주님의 잡힘과 죽으심은 사람들의 필요와 모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과 그에 대한 주님 자신의 순종과 자발적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출애굽 직전 무렵에 애굽의 바로는 늘어나는 히브리인들이 큰 세력을 이루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온갖 방법을 써서 고통과 제한을 가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세력은 더 강성해졌다.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혹사시키기도 하고 남자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민족의 번식과 번성을 제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모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노래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12)

역사는 짧게 보면 사람의 뜻대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사 우주의 왕으로 세우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누가 그것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주님의 오심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이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이 주님의 몸인 교회(우리)의 건축(부르심)과 불 가운데서의 연단과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막지 못하며 심지어 그 일정을 변하게도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표대로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진행될 따름이다.


2.주님께 향유를 부음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

이 일은 마가복음 14장에도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12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12:1-8)

또 이 일과는 별개의 일이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되어 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7:36-50)

유월절 엿새 전에 주님은 베다니에 있는 한 집에서 식사 초대를 받고 그 집을 방문하셨다. 그 집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문둥이 시몬의 집이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나사로의 집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사로가 문둥이 시몬으로 불리는 그 사람일 것으로 본다. 즉 시몬은 나사로의 다른 이름이고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기 전에 본래 문둥이였는데 주님에 의해 고침을 받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둥이 시몬이 마르다의 남편일 것으로 생각한다. 어쨌든 이 자리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식사 자리는 그의 부활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를 지닌 동네 잔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주님을 맞이한 사람들 중 나사로는 주님과 함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가 주님께 나아와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값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주님의 몸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놀라운 헌신으로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주님이 계셨던 베다니는 예루살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가 묵었던 시몬의 집은 매우 가난하고 초라한 곳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몬은 문둥이였던 사람으로서 결코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이라면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제공하는 좋은 집에 머물면서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되는 곳에서 보잘것없는 죄인들과 함께 계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하지도 못하고 영광스럽지도 못한 한 멸시받는 자의 가난한 집에서 주님은 지극히 풍성한 잔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의 하나인 마리아의 헌신으로 말미암았다.

마리아는 그 값이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를 주님께 서슴없이 부어드렸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 치 품삯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랐으며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은 그녀를 나무라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터무니없는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 마리아의 행동은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였으며 분수를 넘어선 과잉 충성이요 무절제한 행동으로 보였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책망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그들은 마리아가 향유를 '허비'하였다고 단정하였다. 과연 마리아는 향유를 허비한 것인가?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오히려 그녀가 자기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시면서 그 일을 옹호하시고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며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율법 이전에 人情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 양심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그런 다 아는 문제를 말하는 것 이상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성과 양심, 율법이 말하는 세계와 아들의 세계는 다르다. 엄밀하게 말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세계이다. 이것은 법의 차원과 사랑의 차원이 다른 것과 같다. 제자들은 식사 대접과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 대해 말했지만 주님과 마리아는 생명을 바쳐서 사랑하고 연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왜 이 여자는 주님께 그 비싼 향유를 부었으며 주님은 왜 그것을 좋게 여기셨는가? 주님이나 마리아가 제자들 만한 상식도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형편 및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마리아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다른 가족도 없이 오빠와 함께 살던 터에 (그 오빠가 문둥이 시몬이었다면 더 그럴 것이다) 나중에는 그 오빠마저 병들어 죽게 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참으로 가난하고 곤고한 처지에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형편이 그랬으므로 그녀의 마음도 가난하였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는 많았지만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가장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깊이 따른 사람들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사함 받은 자들 곧 그 죄가 가장 크고 또한 주님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영접되거나 인정받지 못했을 자들이었다. 곧 가장 비천한데서 건지심을 입은 자들이 가장 큰 은혜를 입었고 그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따랐던 것이다. 누가복음 7장의 죄인이었던 여인의 경우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여자는 세상에서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의 행동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 여자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알지 않으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은 이렇다. 즉 이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 마음을 바쳐서 받아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가난한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사람들일 것이다. 밥 먹는 사람이 죽 먹는 사람을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또 그를 위해 밥을 나눠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죽도 못 먹고 맹물만 먹고 있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왜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하느냐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나은 사람인 것이다.

이 여자는 남들이 어찌 보든 자기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의 책망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아니면 세상에서 설 수 없는 자였다. 가난한 자를 도와야 된다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야기는 그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이 여자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밥 먹는 사람에게 죽 먹는 사람을 돕지 않느냐고 하면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맹물 먹는 사람에게 왜 너의 맹물로 죽 먹는 자를 돕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이 여자는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만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주님께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부을 수 있고 자기 인생과 몸을 전적으로 투자하여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자는 바로 이 여자와 같은 사람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딴 데 눈 돌릴 수 있는 사람, 여유가 있는 사람, 다른 곳에서 무언가 할 일이 있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설 자리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무모하게 향유를 주님께 부을 수 없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주님이 자기에게 이렇듯 소중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을 수 없으며 설사 주님께 어떤 헌신을 했더라도 후에 남들이나 그 행동의 합리성을 들어 비난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할 때  회의가 생기며 차라리 그것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여자의 행동이 주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조금만 여유가 생겨도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며 또 주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주님은 벌써 여러 번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이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며 장사를 위해 준비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게 되었나?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발붙일 곳이 없는 자였기 때문에 주님의 처지와 그 길(운명)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의 길(세상에서의 배척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깊이 공감하고 새겨들을 수가 있었다.

이에 비해 주님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다 제각기 자기 일과 계획이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성전 문제 등이 그런 것들이었으리라.(막13:1-4)  그러나 이 여자에게는 오직 주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행동과 가는 길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였고 또 그것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주님의 죽음을 정확하게 미리 알고 그 장사를 위해 향유를 예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죽음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고 그 때문에 자기가 주님을 좀 더 오랫동안 가까이 하고 싶다는 保存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이를 아시고 그녀의 행동은 주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복이요 지혜이다. 이 여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얻게 되었는가?  그녀는 남보다 나은 무슨 여건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녀는 머리가 좋은 여자이거나 성경에 능한 사람이어서 그런 지혜롭고 복된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

이 여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와 영원히 함께 있기를 원하여 향유를 붓기까지 하게 된 것은 그녀가 단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리스도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는 그녀의 처지가 그녀를 복된 길로 이끈 것이다. 이러한 처지와 상황을 우리는 가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마5:3, 눅6:20)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도록 되어 있다.(마11:5) 이론적으로는 어떻든 우리의 경험은 복음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와 미련한 자의 것임을 말해준다. 상식적으로는 복음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과 부자들에게 더 잘 전파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꼭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가난하기만 하면 누구나 복음을 당연히 받아들이는가?  부자는 누구이며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부자란 어떤 면에서든지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가진 자이다. 부자는 자기가 강하고 강화된 자이다. 가장 보편적인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아쉬운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밖에 자기 일이 많은 사람도 부자이다. 어딜 가도 대접받고 설 자리가 있는 사람도 부자이다. 지혜가 많아 자기 인생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사람도 부자이다. 이러한 부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무척 어렵다. 또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다 心靈이(정확히는 [靈 안에서]) 가난한 자는 아니며 따라서 가난한 자들이 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오직 주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절대적 가난 가운데 처하지 않으면 결코 주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택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을 만큼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의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원래 지음 받을 때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없도록 지음 받았다.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시고 그 안에서 모든 만족과 풍요를 누리게 해 놓으신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가난한 자의 자리에 두시는 것이나 그리로 계속 이끄시는 손길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며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여러모로 가난하다면 그것은 이미 복된 자리에 놓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한 자이므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쉽기 때문이다. 바울은 전에는 매우 부요한 자였지만 복음이 가난한 자의 것임을 알고 스스로 가난한 자리로 내려가는 지혜를 보였다. 빌립보서 3:4-9에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주님을 찬송할지니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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