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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독 (마26:59-68) / 2006. 12. 10

2010.04.30 16:30

이상봉 조회 수:7478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26:59-68)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정죄되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무슨 죄로 주님을 사형에 처했는가? 바로 신성모독죄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선하고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느냐 악하고 더러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죄로 여겨졌다. 물론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한다면 더 큰 모독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주님이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리에서 처음 표명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표명된 바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0-33)

그렇다면 주님은 이런 관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을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4-38)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며 어째서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이 주님의 입장이었다.

유대인들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 것은 그러한 행동을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하나님을 사람의 자리로 끌어내려 낮추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적 관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님은 외형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는 사람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마귀의 생명이 있으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자인 것이다.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냐 어떠냐 하는 것은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주님의 시각은 이렇게 달랐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 판단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때도 오직 껍데기를 가지고 판단했다. 그들의 눈에는 한 손으로 피를 묻히며 죄를 짓으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38년간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사람이 안식일에 나아서 걸어가는 것이 죄로 보였으며 그를 고쳐준 예수님도 죄인으로 보였다. 이 얼마나 표면적인가! 이러한 거짓된 관념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어이없는 죄로 정죄를 받고 죽음을 당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가 없는가?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생각하지 않던 몇 가지 용어들에 오늘날의 신자들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빼고는 사실상 달라진 것이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참람하다고 생각하여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이러한 용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 관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로 생각하며 가까이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결국 그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씨)으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감히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의 관념 곧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이고 종교적 관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실제로 자기를 스스로 높여서 하나님처럼 행세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겠다고 스스로를 높이며 교만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분명히 교만하고 망령된 생각이며 그 기원은 타락한 천사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높여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멸망할 교만한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아들의 자리로 이끄실 때 거기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님은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억지로 자기를 높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낮추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할 아들로서 행했고 실제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다. 이것은 자기를 스스로 높인 것이 아니요 도리어 스스로 낮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희생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이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교만과 일탈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보시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시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며 그의 아들로 보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항상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지으셨다. 그래서 아담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그 속에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또한 그로 생명과를 먹게 하셨으며 그로 천하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며 그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정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뜻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차질을 빚게 되자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택하신 한 무리를 불러 다시 자기 아들(백성)을 삼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처음 뜻을 이루게끔 역사하셨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고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4:22,23)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호11:1)

이스라엘은 그 생명의 실상으로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서 아들로 조성(회복)되어가는 중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로 간주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그리고 약속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합당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서로를 그렇게 격려하며 거기에 맞게 살았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영원한 뜻에 대해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 주님이 성경(시82:6)을 인용하셔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지적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하여 아버지의 길과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연합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사소하거나 희미한 계획도 아니고 감추어진 비밀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핵심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세상 끝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은 그것을 보여준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1-7)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전혀 몰랐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들을 전혀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3-47)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안 맞는 것이다.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주님 때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후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감히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말하지 못했으며 그렇게 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항상 갇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지만 인간은 죄나 짓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겸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진리에 대한 무지, 육신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참 아들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못한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마귀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생명)을 받은 사람들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표현하기를 주저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적 관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보다 인간의 종교적 철학적 관념이 득세한 경우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관념에 따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롬8:14)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좇는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아버지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다. 그가 거룩하면 우리도 거룩할 수 있으며 그가 의인과 악인에게 꼭 같이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시는 분이면 우리도 원수를 용납하며 축복할 수 있다.  

신성 모독이 무엇인가? 진짜 신성모독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좇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이다. 진짜 신성 모독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 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육신의 욕망을 위해 그것을 어기며 그것을 교묘하게 위장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진짜 신성모독인 것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하나님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종교적 의식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인격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1-9)

금식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건과 섬김이 아니요 하나님의 심정으로 행하는 것이 경건과 섬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겉과 속이 다른 자는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꾸지람을 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겉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속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조롱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1-3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5-19)

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를 섬기는 것을 자기 양식으로 삼는 그 사람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 사람이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할 때 벌써 때가 찼으며 시간이 촉급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때 이스라엘의 죽어가는 죄인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39-44)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 뜻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권속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반가워서 그를 보고 자연히 '형제여'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법적 문제도 아니고 다른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생명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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