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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한 해를 살면서 우리는 여러 날을 보내고 그 끝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 있으면 끝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인생의 시작과 끝에다 적용한다면 오늘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 것이다. 오늘이 12월 31일이라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 온 것이 아니라 정신없이 지나다보니 어느덧 우리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시편 90편은 모세가 쓴 시이다. 여기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시90:3-6)

우리는 불과 몇십 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설사 우리가 천 년을 산다 할지라도 그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월을 합쳐 놓으니까 50년이고 100년이고 천 년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사람이 사는 것은 하루 하루 매 순간 순간이기 때문이다. 밥을 한 번 먹으나 열 번 먹으나 차이가 없는 것은 그것이 똑 같은 일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답고 사람의 생활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을 얼마나 길게 반복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 일생을 육신대로 살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고 기대하는 바가 있었으므로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징계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7-9)

이렇게 살면 뭐하겠는가? 아무리 길게 살아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상고하고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상고하는 것은 이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시90:13-17)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분발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은혜가 필요하다. 구원의 첫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셨듯이 그 과정 과정도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하다. 시인이 말하는 주의 행사, 주의 영광,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이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고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때 우리 인생은 몇 년을 살든 기쁘고 평안한 인생이 될 것이다.

요즘 우리는 마태복음 27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관한 기록들이다. 이제 우리가 남기고 있는 부분은 그의 죽으심에 관한 부분이다. 주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언젠가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이란 그동안 우리가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정지하고 끝낸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추억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감사와 찬양이 될지 회한(悔恨)이 될지는 그동안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결정할 것이다. 물론 본인의 느낌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심판이 또한 기다리고 있다.

주님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소감을 가지셨을까?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5)

그는 그의 일생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바쳤다.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룸으로써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무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다.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뿐이었다.

주님의 영을 받은 바울도 같은 인생을 살았고 마지막 순간에 같은 말을 했다.

"관제(灌祭)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인생은 한 번 사는 것이다. 한 번 산다는 것은 한 번 죽는다는 말과 같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한 번의 기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없다. 어떻게 해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는가? 주님처럼 살면 된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인생을 보냈다. 그가 무엇을 원하시든지 그대로 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타인의 목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다. 십자가에 죽을 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일생 자체가 이러한 희생의 일생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잘 사는 인생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서 만물의 주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삶과 죽으심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의 삶이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산 것이 아니요 그의 죽음이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살고 죽는 모든 과정을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했다. 그는 오직 영을 좇아 살았다.

누구나 한 번 살며 한 번 죽는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주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죽인 자들도 죽었고 그 곁에서 왜 저렇게 인생을 끝낼까 하고 혀를 차며 구경하던 자들도 다 죽었다. 아무도 영원히 살 수 없으며 아무도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인생을 마칠 자도 없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스스로 내놓고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며 인생을 마쳤지만 예수를 팔고 죽인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위해 의인을 팔고 희생시키는 인생을 살다가 인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들이 일생을 자기 생각 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것은 아니다. 주님을 판 유다는 비참한 자살로 인생을 끝맺었으며 주님을 시기하고 거짓으로 모함하여 죽인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의 칼날에 처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던 주님은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사실은 그가 땅에 계실 때 항상 평안했으며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땅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게 되었을 때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평안하였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자기를 핍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말로 인생을 마감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인생이 그 목적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갈 길을 제대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 자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생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실패를 예정해 놓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표와 목적를 가지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룸으로써 후회없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첫째, 그 목표와 목적이 성취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둘째, 그것이 참으로 인생의 안식과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목표와 목적이어야 한다. 사람의 안식과 만족은 어디서 오는가? 영의 안식과 만족에서 온다. 육신의 만족은 결코 사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을 계속 더 깊은 육신적 욕망으로 끌어당기며 사람을 허전하게 할 뿐이다.

인생이 후회없는 만족한 인생이 되려면 그 목표와 목적이 성취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목적과 목표는 다 성취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신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쓸어없앨 것이며 그들의 육신을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은 어느 날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그 날이 이를 때 육신에 속한 소망들을 가졌던 사람들은 허무하게 될 것이다. 흙에 속한 모든 것들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다. 그러므로 흙에 속한 소망을 가진 자들은 허무한 인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평안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어지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스로 인생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고 그 결과 쓴잔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기댈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그들의 말에 흔들릴 것도 없는 것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요19:10,11)

주님은 아무 변명도 할 필요가 없었고 자기에게 다가온 일들을 피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없다면 자기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쥐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오늘 이 순간 진실한가 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고 우리의 지혜이다. 우리가 이 길로 간다면 우리 인생은 견고할 것이며 마지막 순간에 감사와 찬송을 내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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