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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婢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表明)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꽃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18:10,11)


주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려는 순간 베드로는 주님을 막아서며 칼을 빼서 주님을 잡으려는 자들을 베려고 했다. 그러다가 실제로 대제사장의 종의 한 사람인 말고의 귀를 베었다. 칼을 휘둘러 사람의 귀만 베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베드로는 그의 귀를 베려한 것이 아니라 죽이려 한 것이다.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거의 군대 수준의 무리들이었지만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맞서려고 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두 말할 것 없이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을 옹위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권력자들로서 함부로 대항할 수 없는 큰 세력들이었지만 베드로는 주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하며 맞서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주님이 무리들에게 순순히 잡히게 되자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또한 대제사장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주님이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던 중 자신을 알아보는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자기는 예수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을 위하던 그가 거기서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앞의 것과 뒤의 것 중 어느 것이 진짜 베드로의 모습일까? 어느 하나만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라 둘 다 베드로의 모습이다. 굳이 따지자면 앞의 행동보다는 뒤의 행동이 인간 자신의 솔직한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베드로가 왜 다른 행동을 했는가? 그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앞의 행동은 주 예수님이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곁에 있는 상황에서 즉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힘입고 있는 상황에서 한 행동이고 뒤의 행동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즉 홀로 있는 가운데서 한 행동이다. 베드로는 특히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특히 못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두 행동은 자연인(육에 속한 자, 죄인)으로서 인간의 한계와 역량을 드러낸 것이지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못한 것도 아니다. 주님을 칼로 막아서며 옹위한 행동이나 주님을 부인하며 꽁지를 뺀 행동이나 다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지 특별히 베드로니까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주님을 부인한 것은 물론 잘한 일이 아니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홀로 서 있는 고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힘도 없고 아무 용맹도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그토록 초라하고 가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홀로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지닌 자가 아니요 타락한 죄인에 불과하다. 홀로 있을 때 사람은 마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위협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분리된 베드로는 앞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의 실패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시험에 들 수밖에 없고 범죄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주님은 인간의 이러한 형편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0,41)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시험을 앞두고 기도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결코 가벼운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덜렁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무엇인지 몰랐는가? 물론 그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입고 온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여기서 주님이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 되셨음을 표현한 말이다. 왜 사람을 종이라고 하는가?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즉 창조자 하나님과 비교할 때 사람은 그의 종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종이라고 할 때 성경이 일반적으로 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이 영의 요구(원함)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자가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의 거짓말(위협)에게 붙들려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현실적으로 사람이 영의 요구가 아니라 육신의 욕망에 휘둘리고 죄를 짓고 사망으로 치닫기 때문에 사람을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자기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이것을 알았다. 육신을 입은 사람이 된 이상 주님도 육신의 요구와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살고자 하는 욕망 곧 그 생명을 보존코자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평안하고 즐겁고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주님은 자기 육신의 이러한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로마서 8장 12절 말씀과 같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그래서 주님은 살았다. 살았다는 것은 십자가를 면했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죽고 영원히 사는 길을 잘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이기는 자가 되었고 사는 자가 되었다. 그가 그렇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육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육신을 입은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깊이 이해하고 자기를 하나님께 내놓고 도움을 구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길을 보지 못했다. 주님의 길은 주님 자신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위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주님의 겸손과 자기 부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그러한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자기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겪으신 모든 인생의 과정은 그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가 인생이 되신 것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단지 죽고 부활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모든 자들 곧 사망의 몸을 입고 있는 모든 연약한 자들에게 인생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사람의) 길이요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길과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의 말씀만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고 그의 삶과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다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삶, 그의 기도, 그의 눈물, 그의 겸손 하나 하나가 다 바로 우리의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주님이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 및 육신의 욕망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인생(육신을 입은 사람, 종의 형체를 입은 자)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가 진리 안에 있었고 하나님(성령) 안에서 행했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사람은 오직 진리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 안에서만 권세자가 될 수 있다. 진리가 없으면 영이 살아날 수 없고 영이 살아나지 못하면 사람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육신의 동물적 본성 및 거기에 편승한 마귀의 유혹과 거짓말이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종의 자리이다. 여기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영이 되어 우리를 살게 하고 자유케 한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1,32,36) 주님의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본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가 가는 길로 가는 것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리 안에 있게 된다. 주님은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는가? 진리 중의 기본은 '사람은 혼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주 가운데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계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으며 그 안에서 살도록 정해져 있다는 이 사실이 진리 중의 진리이다.

그리고 사람은 지금 타락하여 하나님 보시기에(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도 굉장한 진리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즉 그대로 있으면 흙덩어리,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며 자기 생각에는 대단한 존재 같지만 실제로는 죄나 생산해내는 쓰레기에 불과하며 그 결과는 멸망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으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구해야 한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내일(소망)이 있으며 그 안에서만 믿을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믿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내게 이런 생각이 있고 이런 의지가 있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알아서는 안된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칼을 휘둘렀으며 죽는데까지 따라가고자 했다. 그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는 말을 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거나 입에 발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그러했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많은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지만 그것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진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결코 변치 않는다. 주님은 장차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이것은 진리를 밝힌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계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이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힘들지만 결국 그 길로 갔다. 그러나 제자들은 진리에 대해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주님이 곁에 계신 동안에는 용감했지만 주님이 무력하게 잡히게 되자 모든 것을 상실하고 겁쟁이와 배신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님이 베드로 곁에 서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고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했다는 사실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잡혀 죽게 하신 것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 제물이 되게 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뜻(진리)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진리)은 이미 밝혀진 것이다. 주님이 잡힌 것은 이 진리는 바뀐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진리가 성취된 것이다. 주님은 예상 밖의 어려움에 처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자기 갈 길을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과 달리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변한 상황으로 인해 두려워하였으며 실패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도 반복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만일 진리 안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환경이 변하고 생각지 않던 문제가 생길 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환경에 따라 이리 저리 춤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드로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견고히 서 있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떻게 되든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요동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우신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과정을 거치심으로써 우리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4-16)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믿어서는 안된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을 만나기 전의 상태인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는 장차 일이 닥쳐왔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떻고 내 생각이 어떻다는 것은 지금 그렇다는 것이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실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4,1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8-24)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이것을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알면 무엇에든지 큰 소리 쳐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이다. 그리고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해야 한다. 주님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유와 해방과 승리는 이 자리에서만 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로 이 자리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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