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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 주간 동안 사탄과 그 졸개들이 광명의 천사와 의의 일꾼으로 자기를 가장하여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문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기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자리로 돌아가서 그의 음성을 청종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그의 두 번째 편지(고린도후서)에서 이제까지 거의 쭉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주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말해 왔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어떻게 우리의 생명이 되고 어떻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리스도 본인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사람인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소개를 했습니까? 어떻게 자기를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포로'로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편지'로, 또한 '새 언약의 일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뒤에서는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담은 '그릇', 즉 질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표현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자이므로 정결할 수밖에 없고 세상과 결코 짝할 수 없다는 것을 쭉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를 그리스도라는 신랑에게로 인도되는 처녀 곧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소개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신부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중매하기 위한 일꾼으로 자기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소개한 이유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바울과 그리스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바로잡고 참 교회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자기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그리스도의 사역과 복음만 말하면 되지 굳이 자기를 이야기했을까, 왜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사람을 말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진리가 지식과 교리가 된 것은 있는데 '진리가 적용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 곧 복음을 전하고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와서 감동시키는 모든 역사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형성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적입니다. 복음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성령님이 정상적으로 사람 속에서 역사했을 때 나타나는 최종 결과는 하나님을 아는 한 사람 곧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 그 생명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 그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인데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안 보이는 것 같아서 바울이 부득이 그런 사람을 보여주고자 하는 차원에서 자기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증거와 성령의 역사, 교회 생활 이 모두가 사람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저런 기독교적 지식과 선한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열심 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좋은 행위와 사업을 이루어놓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인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하는 이런 사람이 그들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고린도교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보다 육신의 축복을, 생명보다 일을, 사람보다 조직을 더 추구한 결과 그리스도의 몸(교회)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는 그리스도와 거의 상관없는 (사데교회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들에게 단지 복음을 전하고 성령을 좇으라고 말을 해주는 것만으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거기에 더하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은 자기들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다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건지를 한번 점검해보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잘못된 곳에 제대로 된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를 이야기하게 된 것이지요.


자 이제 우리는 바울이 자기를 어떻게 소개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고해봅시다. 이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안에서 체험된 빛나고 영광스러운 인격, 곧 십자가를 철저히 거치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케 된 한 인격은 우리가 계속 되씹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포로라는 말이 직접 나와있지 않지만 3장에서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바로 그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2:14) 그리스도 안에 이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영광과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포함된 포로의 위치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 행렬을 보면 가는 데마다 꽃과 종이가루를 뿌리고 나팔을 불며 영광과 승리를 선포하는데 그것이 행진하며 영광과 승리를 선포하는 포로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를 사로잡은 장군의 영광과 승리를 선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벤허'나 옛날 로마시대 개선 행렬이 나오는 영화를 보셨으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포로들이 행진해 가는데 그들은 전리품에 불과하고 자기들은 조금도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승리를 선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승리가 아니고 뒤에 있는 그 장군의 승리라는 것이지만 어쨌든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위치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영광이 되든지 안되든지 언제나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을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포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라고도 소개합니다. 바울의 말과 행동, 인격, 심지어 그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의 선전 도구, 표현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 구원의 도구로 역사했고 어떤 사람들(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로, 부딪히는 돌로 작용하여 그들의 멸망을 확정하는 사자로 작용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분명해서 누구든지 바울을 볼 때 다른 것은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확실한 인격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말로 소개합니다. 모세나 구약의 선지자가 옛 언약의 일꾼인 것에 비해 자신은 새 언약(신약)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사람들에게 진리의 지식을 가르쳐 일깨우는 율법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살리는 영)으로 사람(의 영)을 살리고 사람의 근본을 회복시키는 그런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몰래 침투해서 사람들에게 진리와 상관없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참으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참 일군인 것은 그가 영의 직분을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유대교 선생들이나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생들은 사람의 속은 못 고치면서 껍데기와 모양만 이리 저리 바꾸고 꾸미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바울은 사람의 생명과 영을 새롭게 함으로서 근본적으로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과거의 율법처럼 사람에게 단지 무거운 짐과 부담으로만 작용하도록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말이 사람 속에서 잠시는 근심하게 하고 잠시는 갈등과 몸부림을 치게 만들지만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성령)께 항복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을 받아들여서 사람이 바뀌게끔 하기 때문에 그는 참 하나님의 일꾼이요 생명의 일꾼이라고 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처음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하고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라고 소개한 것보다 여기 새 언약의 사도로 소개한 이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위치를 훨씬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그릇'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관련된 자신의 위치를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4:7) 이렇게 말함으로서 그는 외형으로 볼 때는 약하고 눈에 눈물이 흐르고 갈대와 같이 갈팡질팡하는 약한 인생에 불과하지만 속의 생명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고 그 누구도 멸시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강한 자라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담았으니 눈물과 슬픔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있고 사탄에게 조롱당할 약하고 거짓된 성품이 있지만 그런 약하고 타락한 본성을 뚫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이 솟아 나옴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보며 "저것이 도대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놀라움과 혼란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 속에서, 이처럼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담았으니 이것을 무엇으로 규정해야할지, 보배로 보아야 할지 질그릇으로 보아야 할지 선뜻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한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이처럼 자기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엎고 극히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분이므로 자기 안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그리스도 곁에 놓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바울이 만능 천재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잘하는 사람이고 많은 면에서 사람들에게 내보일만한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을텐데도 그는 자기를 그런 여러 가지를 소유한 사람으로 나타내고 싶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자, 그리스도밖에 없는 자로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그로 자기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증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6:14-7:1)

자기 속에 하나님만 담고 다른 것은 다 없어진 사람에게 가면 하나님밖에 만날 수 없고 진리밖에 없고 생명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이지요. 그래서 그는 자기를 성전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과만 교통할 뿐 세상과는 결코 일치할 수도, 교통할 수도, 일을 함께 할 수도, 친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그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며 사랑하여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의 실제 삶은 그것이 불가능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불의와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과 벗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해될 수 없는 의아한 존재로 남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외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오직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만 드리며 그의 목적에 맞도록 거룩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위치를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소개합니다. 사실은 그리스도의 중매자로 소개합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에게 바쳐진 신부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신랑에게로 가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사람들을 그 신랑에게로 같이 데리고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중매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자! 바울이 이런 모든 소개와 증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왜 자신의 마음과 인격과 삶을 형제들에게 이렇게 알리려고 했습니까? 그것은 지금 소개한 인격과 마음과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 안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즉 고린도교회 형제들 안에서 이런 모습이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일깨우고 자극하기 위해 이 모든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어떠함에 대해 말한 부분에서 꼭 '내가 이렇다'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다' 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요 다 이래야 하는데 너희는 왜 그러고 있느냐" 라는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3:2,3에 보면 바울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할 때 그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만 편지가 아니라 너희도 그리스도의 편지다" 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성전이라는 사실을 말할 때도 그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이루고 온갖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6:14-7:1)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탄의 시험은 언제나 그리스도보다 사람, 생명보다 일, 인격보다 행위, 사람보다 조직을 먼저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보다 육신의 영달과 안락을 더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보다 일, 인격보다 행위를 더 추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보다 기독교적 선한 사업을 더 추구하고 신자들의 인격과 생명이 성령과 십자가의 체험 안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추구하기보다 그들의 외적 모습이 그럴듯하게 되도록 꾸미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또 생명보다 조직을 더 추구한다는 것은 신자들의 영혼보다 하나의 기관과 조직인 교회를 더 생각하고 그것의 유지 확장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과 신자들이 인격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을 중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러한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서로 자랑하고 다투고 갈라졌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형제를 미워하고,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형제끼리 싸우다가 갈라지는 식이지요. 이것이 얼마나 사탄에게 속은 것이겠습니까?

성도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아 시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 속으면 자기를 부르신 분이 어떤 분이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내 신분과 위치가 무엇인지, 내가 해야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사탄에게 속아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가야할 길은 그리스도의 길인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실제적이고 생생하게 증거해서 오해가 없도록 만들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바울은 그다지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기를 말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좀 어리석고 산뜻하지 않은 방법 같지만 그것 외에 달리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11:1,17,18)
바울은 왜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까? 무릇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놔두고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답고 정제되고 깨끗한, 마치 전시장의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하거나 그래도 안되면 어리석은 자로 알고 들어달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가 '기탄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고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자기대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바울이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 멋대로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와 그리스도의 진리 자체를 말하지 않고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심정은 이것입니다. 객관적인 그리스도, 객관적인 진리를 아무리 말해도, 들을 때 "좋습니다 맞습니다"만 해 놓고는 사람은 바뀌지 않으니 우리 탁 터놓고 이야기 좀 하자는 것입니다. 진리 자체를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선명하고 산뜻하며 거기에 무슨 너저분한 것이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십자가에 어떻고 구원이 어떻고 하며 객관적 진리를 말하기를 5년 하고 10년 해도 사람이 안 바뀌고, 오히려 "우리는 그 모든 말씀에 아멘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라고 하며 문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좀 너절하고 어리석은 것 같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짜 교회인 나를 말할테니 좀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지식 對 지식이 아니라 사람 對 사람으로 한번 붙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변화된 실체(인격)를 접해보지 않고는 아무리 진리에 대해서 많이 듣고 생각해도 그것을 그다지 깊이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느낍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교회를 위한 그의 고난과 여러 가지 헌신과 수고에 대해서 주저 없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거의 자랑에 가까울 정도로 생생하고 주저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가 자기를 통해 거침없고 생생하게 말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제대로 체험한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서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개인적 간증은 대체로 두 번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체험을 생생하게 간증함으로써 모든 형제들에게 다 자기처럼 참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들어올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그의 모습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구체적이므로 그것이 형제들의 삶의 지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바울의 개인적 고생과 수고에 대한 증거들은 다 첫째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다. 우리가 환란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이 말은 결국 자기가 교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들이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뭘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내 잘 났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고생 많이 했으니 대접 좀 잘 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교회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철저히 헌신하시는지'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원에 의해서, 자기 마음에 의해서 그런 고생과 수고를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강권을 받아 그 길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집에서 밥 잘 먹고 내 마을에서 존경받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알지도 못하는 너희를 위해 이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며 이 수고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교회의 가치와 소중함]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며 염려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국 주님이 얼마나 교회를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시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이 자기의 몸을 다 주기까지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좀 알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환란을 당하는 것도 다 너희(교회) 때문이고 내가 위로를 받는 것도 다 너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교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땅에서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죄와 원수와 싸워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고하게 해야 할 주체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귀한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내가 정신이 멀쩡해도 너희 때문이고 내가 돌아도 너희 때문이니 다른 사람들은 나를 원망하고 나무랄 수 있을지라도 너희들은 나를 뭐라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친 사람처럼 된 것은 다 너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결국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가치와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그러한 교회를 위한 그의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으려고 많은 고생과 환란과 궁핍과 혼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당했고 많은 욕을 얻어먹었고 악한 이름을 얻었습니다.(고후6:3-10)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주저없이 "나를 영접해라, 나를 받아들여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7:2,3)

사람이 자기를 세상 모든 진리의 표준이요 모든 가치의 척도요 가장 귀하고 영광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자랑이고 너무 엄청난 말입니다. 특히 종교나 윤리, 도덕 세계에서 이런 행동은 겸손과 반대되는 행위이므로 사람들에게 어필하기가 어렵습니다. 종교나 윤리 세계에서 겸손이 얼마나 큰 덕목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속으로야 어떻든지 겉으로는 자기를 이런 식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전통과 습관에 매이지 않고 주저없이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에 대해 말합니다.

제가 바울말고 이런 종류의 사람을 본 것은 워치만니가 처음입니다. 그의 저서 '영에 속한 사람' 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작가가 자기가 쓴 작품에 대하여 너무 많은 열심을 보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인줄 알고 있지만 나는 이 인간적인 습성을 도외시할 생각이다. 이는 내가 이 책을 썼기 때문이 아니고 이 책에 내포된 진리의 본질 때문이다.... 고로 나는 제 정신을 잃은 나를 용서해 달라고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자기를 통해 나타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사람들 가운데 제공하기를 원합니다. 작든지 크든지 많든지 적든지 좀 세련되고 사람들 가운데 내놓을만하든지 아니면 좀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이든지 우리 자신의 영광이 문제가 아니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람들에게 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단을 이미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육신 안에서 우리는 죄인이고 죽어야 할 자요 냄새나는 쓰레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있으며 장차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말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낮아질 것도 없고 높아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체면을 따질 필요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말해내어야 합니다. 그 말을 할 때 우리가 얼마나 폼이 나고 완전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 그 사람 참 멋지다" 이런 말을 듣든지 못 듣든지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토해내어야 합니다. 내 말이 얼마나 정제되어 있고 내 방법이 얼마나 완전한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늘 이런 면에서 무디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가난으로 인해 배우지 못하였고 장사를 하면서 배운 습관이 몸에 붙어서 어디를 가든지 다소 거칠고 장사꾼 같은 기질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품격 있는 전도자로서, 품위 있는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저 없이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장사꾼처럼 그리스도를 전하더라도 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것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지요. 그가 살고 있던 보스톤이라는 지역이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하바드 대학이 있는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학한 자가 복음을 전하기에 적당치 않은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못나면 못난 대로 나를 불렀고 보스톤에 살게 하셨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전도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다소 무식하게 말해내더라도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바울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기로는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담지 않고 고려청자 같은 데 담으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급한 것은 우리가 고려청자로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표현되고 증거되어서 사람들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11:26-28)

바울의 마음에는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위험을 당하고 많이 수고하고 애쓰며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춥고 헐벗었지만은 진짜 그의 마음에 염려가 되고 그를 누르는 것은 오직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염려가 배고픈 것보다 훨씬 더, 병에 걸린 것보다 훨씬 더,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눌리는 것보다 훨씬 더 그를 압박하고 있었으므로 부득이 그는 교회를 위하여 그 수고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 마음을 사모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돈타령, 병 타령, 내 명예와 자존심을 살리려는 염려와 노력에서 벗어나서 교회가 참으로 진리 위에 굳건히 서고 사탄의 모든 훼방과 속임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하게 누리기를 사모하고 그것으로 인해 염려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런 분이었고 그 종인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가난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분들이었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 나라, 그 교회가 어떻게 견고하게 설 것인가만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를 적대하고 오해하며 핍박하는 교회를 위해 이렇듯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로부터 배척받고 쫓겨났지만 도로 가서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인격 안으로 깊이 이끌려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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