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고린도후서 12:11-13:2


에베소서 4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주의 부르심에 합당한 인격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인격,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의 영적 상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울이 이야기하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부르심에 합당한 인격이라는 것은 교회에 맞는 인격입니다. 다시 말해서 함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이 사랑으로 서로 연합해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인격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오직 서로 참고 용납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맞춤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맞춰야 됩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오직 깎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철(凹凸)을 보면 하나가 튀어 나와 있으면 하나는 구멍이 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둘을 합치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둘이 하나 되려면 이 수밖에 없습니다. 둘 다 튀어나와 있으면 최소한 반드시 한 쪽은 깎여야 합니다. 깎일 뿐 아니라 구멍을 파야 합니다. 이것은 맞추려면 별 수 없는 겁니다. 조화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는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기적이고 타락한 죄인인 우리가 무슨 수로 또 그렇게 자기를 낮추고 깎일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무슨 수로 그렇게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고 형제들과 연합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엡4:4에 나옵니다. 즉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무슨 능력으로 서로 개성이 다른 사람들과 맞추어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을 부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그로 인해 우리 안에 새로운 인격이 형성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그런 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며 모든 사람과 다투지 않고 함께 살기에 가장 적합했던 인격이 바로 예수님의 인격 아닙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 안에 살면서 남편이 아내와 맞추고 부모가 자식과 맞추고 형제가 형제와 맞추도록 만든다는 것이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사랑과 자비와 또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연합과 평안의 주로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 예수를 깊이 바라보며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란 예수님이 믿음을 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主)란 말은 어떤 것이 내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주라는 것은 내가 믿음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라는 말이지요. 주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모든 것의 주(主)이십니다. 평안은 평안의 주를 쳐다보고 거기에 붙을 때 됩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찌그덕거리고 싸우는 사람이 애를 적게 써서 화목이 안되고 평안이 됩니까? 자기가 용쓰고 애써서 될 것 같으면 벌써 됐을 텐데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안에서 계속 답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평안과 화목을 생산해 내는 분을 쳐다보는 쪽으로 가야지요.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바울의 편지를 공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이러한 행동은 바울을 공부하고 바울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든지 다른 바울의 편지를 공부하든지 결국 그것은 바울을 붙드는 것이며 바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바울의 주인이신 주 예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형제들과 교제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주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왜 그분들을 쳐다봅니까? 우리는 왜 주님을 주목하고 바울을 읽으며 씹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주목하고 바라보는 동안 그들이 모든 겸손과 온유와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만드는 능력을 우리 안에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이 우리에게 생명과 영이 되어 우리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쳐다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고린도후서 12:12에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가 한 말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말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가 자신은 감옥에 있으면서 다른 교회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이렇게 저렇게 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여기 고후12:12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참 부르심을 입은 사도라는 것을 그가 엡4:1에서 설명한 원리를 가지고 입증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된 증거, 곧 부르심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어떤 사람이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이 부르신 사도 맞느냐?'고 물을 때 그는 제일 먼저 '나는 누구보다 오래 참았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그가 사도의 표(증거)에 대해 말할 때 제일 먼저 [모든 참음]을 든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참음이라는 것은 엡4장에서 말하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한 데서 언급한 그 참음입니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은 그 뒤에 즉 참음 뒤에 따라 나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깊이 받은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인격적 특성이 기적을 행하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거나 말을 굉장히 잘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잘 참고 오래 참는데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확실하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참는데 도사'라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자기가 참는 데 선수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환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환난에는 뭐가 따릅니까?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은 죄 짓고 실수해서 겪는 어려움이나 세상이 각박하고 황폐하다보니 겪는 고생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까 어려움을 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 환난 뒤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반드시 함께 따라옵니다. 환난과 위로를 계속 반복하여 경험하다 보니 그에게는 인내가(오래 참음이) 형성되었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가히 고난의 인생이고 환난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왜 날마다 죽습니까? 자꾸 자살을 기도합니까? 스스로 괜히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꾸 누가 자기를 죽여준다 이겁니다. 누가 자기를 자꾸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매일 이런 풍파 저런 환난을 당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참 하나님의 사람, 참 사도의 일상(日常)은 날마다 죽는 맛을 보는 고난의 연속이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기 목적에 맞는 사람으로 단련하시려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참음(인내)은 순서가 있는데 첫째는 자기 부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편지를 죽 읽어보면 우리는 그가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부터 참는 훈련을 받기 시작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이전 같으면 금방 될 일도 주님을 따르고 난 다음부터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뭐든지 해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전 같으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될 일인데 예수를 따라가고 난 다음부터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그가 점점 느끼는 것은 "아! 이제 모든 일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이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는 것을 배울 수밖에 없지요. 참지 않을 재간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내 원대로 되지 않고 내 원하는 때에 되지 않으니 참는 걸 배우는 수밖에 다른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바울은 수많은 실패와 고난과 좌절의 체험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을 시작하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일을 시작한 후에도 하나님이 온전히 일을 주장하며 이루어가시도록 맡기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요? 시작뿐 아니라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도 내가 하면 도무지 일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일이 되는 것 같다가도 안되고 자꾸 엉뚱한 길로 가버리니 답답해서 도저히 걸음을 계속 걸어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과는 어찌 되든지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고 나는 그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일합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결과를 산출해 내도록 맡기고 나는 결과가 보이든 안 보이든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인내를 요하는 훈련이 되겠습니까? 매일 매일 정말 죽을 맛을 보며 사는 인생이 되었을 겁니다.

이러한 훈련 곧 이러한 인내의 훈련이 진행되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일이 아무리 고달파도, 아무리 끝이 보이지 않고 망망해도, 아무리 많은 반대와 핍박과 방해가 다가오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받은 '모든 참음'의 단련입니다.

그가 오늘 여기 12절에서 '내가 모든 참음을 사도의 표로 내 놓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내가 너희들 가운데에서 하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핍박과 조롱과 반대와 멸시를 받아왔는지 아느냐? 그리고 그런 모든 상황으로 인해 내 안에서 얼마나 많은 회의와 낙심과 좌절이 있었는 줄 아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은 내가 내 자신의 뜻과 필요에 의해 스스로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의 사도로 부르시고 강권하여 이리로 보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대하는 거 다 들었다면 벌써 일을 중간에 집어치웠을 것이고, 스스로 일을 시작 했다면 벌써 포기했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 전할 열정이 있어서 '이거 참 좋은 생각이다. 이걸 사람들에게 퍼뜨려야지, 보급해야지' 이래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한다면 그 일은 틀림없이 끝까지 계속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늘 하늘에 떠 있을 수만 없는 것이고 늘 감동과 감격으로 충만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다시 밑으로 내려와 골짜기에 있게 되지요. 그러니 자기를 의지하고 일 하면 절대로 끝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끝까지 참았고 하니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강제로 일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가 되겠습니까? 반대와 핍박을 받고, 실망과 절망의 순간들을 맞으며, 자신의 과오와 실패로 인해 자책과 사탄의 고소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걸려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친히 일할 때만 가능합니다.

바울의 일생은 가히 인내와 자기 부인의 연속이었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한 것보다 바울의 사도 됨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대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답게 행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과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격 또는 그것에 대해 오늘 깊이 말하고 있는 바울과 같은 앞선 하나님의 종들의 인격을 깊이 흠모하고 사모하고 바라보는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도 주님이 범사에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자기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군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자기 삶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부르신 자를 기쁘게 하는데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입니다.(딤후2:4) 우리는 주님이 인류를 대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오래 참으신 것을 남의 일로 알아서는 안되고 바로 우리 자신의 일로, 우리 자신의 길로 알아야 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자리에서까지 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의 행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대상인 세상의 모든 형제들을 대할 때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의 참음은 오직 주님의 나라 때문이며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이 주님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이고 모든 사람을 아버지(의 뜻으)로 인해 용납하고 섬기는 것이 주님의 자리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자리이며 우리가 반드시 나타내어야 할 인격이라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생명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소위 하나님의 사람들이 표적과 큰 능력 같은 것을 행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굉장한 말을 해서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거나 병을 고치며 축복과 저주를 말 한 마디로 시행할 수 있는 권세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참 신자며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종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안되면 하고 하다 못해 방언이나 이상한 말이라도 하거나 특별한 체험이라도 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계속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만, 하나님의 부름의 입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 가장 큰 능력과 권세는 모든 겸손과 온유와 사랑과 용납으로 형제들에 대해 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 오래 참음으로 인해 형제들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만들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참 교회를 세우도록 섬기는 능력이 가장 큰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표를 삼으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십자가 안에서 깊이 처리된 인격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사모하지 않으면 없지요. 사모하고 추구해도 될까 말깐데 아예 십자가를 거부하고 피하니까 어찌 그것을 누리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단련(연단)이 없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성숙하고 그 완전한 인격에 결코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단련 없이는 소망이 없습니다. 또한 단련이라는 것은 인내의 때를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운동 안하고 몸이 튼튼해질 수 있습니까? 정기적으로 반복하여 역기를 들든지 철봉을 하든지 해야 팔에 근육과 알통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역기를 들거나 철봉을 한다는 것은 결국 팔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입니다. 팔에게 심한 스트레스와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동이란 몸에게 매우 힘든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인내의 과정 없이는 단련(훈련)은 없습니다.

인내는 어디서 옵니까? 인내는 환난의 때를 거침으로써만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환난의 때도 필요하지요. 편한 가운데서는 절대로 인내를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환난의 때를 만나야 할 수 없이 고생을 하며 인내를 배우는 것이지 누가 일부러 고생을 하며 인내를 배우겠습니까? 쌀독에 쌀이 수북히 쌓여 있는데 누가 일부러 굶는 연습을 하겠습니까? 아무도 때리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맞을 사람이 있으며 누가 참는 것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길 가는 사람에게 내 뺨 좀 때려주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 소망은 연단이 가져오고 연단은 인내가 가져오고 그 인내는 환난이 가져오는 것이지요. 환난이 없으면 소망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환난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에게만 깊이 누려진다는 말이지요.

아무도 환난을 원치 않지만 그것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주어지는 거지만 알고 보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인격으로 연단 되려면 환난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환난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이유가 있으니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학교 다니는 학생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면서 얼굴이 백짓장 같이 하얗게 되어 가지고 차에서도 단어장을 외우면서 중얼중얼하며 다니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한참 놀고 뛰어 다닐 때에 파 김치처럼 되어서 다 죽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불쌍하지요. 그러나 그런 학생을 볼 때 아무도 "저 놈은 미쳤다. 정말 불쌍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학생일수록 정상으로 보이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지요. 오히려 그 반대로 공부는 안하고 먹기는 잘 먹어서 혈색이 불그레해가지고 매일 해운대로 송정으로 여학생하고 돌아다니며 노는 학생을 볼 때 "저 놈은 옳은 인간이 아니구나" 하지요. 뒤의 학생은 펄펄 살아서 생동감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앞의 학생은 거반 죽어서 사람 사는 꼴이 아니고 코피를 쏟고 있는데 왜 뒤의 사람 보고는 기뻐하지 않고 앞의 사람을 보고 안심하며 기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과정만 보지 않고 결과를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운대 바닷가로 아가씨하고 돌아다니는 녀석을 볼 때는 "저 놈은 앞으로 깡통 차겠구나" 하고 보이고 도서관에서 코피 쏟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을 볼 때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구나"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목적에 어떻게 쓰셔서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만들 것인가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과정 과정들은 오직 이러한 시각으로 판단하고 해석하고 느껴야 돼요. 그런 시각을 못 가지고 있으면 늘 육신의 감각대로 판단하고 우려하게 되지요.

육신대로 살았던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멋진 삶에 대해 아무도 부러워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일생을 살고 십자가의 길로만 내달았던 바울과 수많은 신실한 선배들에 대해서는 잊지 않으며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했던 고생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연단된 인격이 오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두고 두고 빛을 발하며 영광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비한 모든 은혜를 남김없이 누려야 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털어 바쳐서라도 그것과 바꾸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은혜 중의 은혜인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주셨고 성령님은 그것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어떤 과정을 겪든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그 생명을 받아서 누리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이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소망(그리스도)을 실제로 누리게 만든다면 반드시 환난을 통과해야 하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학생은 공부 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반드시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그것을 안 하면 머리가 텅 빈 사람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그를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아무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한 점 남김없이 완전히 비워져야만 그가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라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누림 없이는 믿는다는 것은 허무한 말 장난에 불과하고,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것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지금 밖에는, 죽으면 어쨌든 하나님께로 가겠지, 교회를 다니면 결국은 천당을 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서 조금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은 어찌하든 요리 조리 회피하며 살아가는 이름뿐의 신자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소망은 그야말로 소망일 뿐입니다. 그들의 희망이 한낱 꿈이 아니라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실제로 받아들여야 돼요.

인격은 한 사람에게 하나입니다. 한 사람에게 한 정신, 한 사람에게 한 마음입니다. 한 사람 안에 두 인격,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나를 장악한 주인이 되려면 나는 없어져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가 없어지려면 뭘 해야 되겠습니까? 뇌 수술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치매에 걸려야 되겠습니까? 오직 십자가의 길을 거치는 수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 걷는 길은 좁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 생명은 본질적으로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의 길은 좁고 고통스럽더라도 그의 행보는 당당하며 평안하며 순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의 결과 말고 중간 중간의 과정만 보더라도 그들의 삶이 상당히 영광스럽고 좋다는 것을 느낍니다. 바울은 12:14,15에서 자기가 얼마나 여유 있고 부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라 내가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부자입니다. 항상 풍부합니다. 왜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자기 것으로 누리기 때문입니다. 내 육신에 뭐 넉넉하냐? 내 육신에 속한 것이 넉넉하냐? 궁색하냐? 이것이 문제가 안되고 언제나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매일 갖다 쓰니까. 이것이 늘 주는 삶은 살죠. 빈털터리라도 매일 줍니다. 이 사람은 주면 하나님이 또 채워주고 그냥 그래 사는 거죠. 자기 것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밑천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인내하고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한 번 두 번 세 번 하다가는 폭발해 버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밑천이라는 것이 세 번까지도 못 갈 것 같아요. 세 번이나 가나어디 한 번만 딱 참는 것도 참 힘든 일이라구요.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 혹시라도 우리한테 와서 뭐 가져갈라 하는건 아닌가하고 그래 우려할까 싶어서 금방 이야기한 이 말을 해 준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주고 너희를 위해서 뭔가 저축하지 너희가 뭘 나를 섬기겠느냐?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그 이야기를 지금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겁니다. 누구라도 어차피 자기 것으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공급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쓰든지 누구한테 얻어 쓰든지 부모한테 타 쓰든지 간에 결국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이리 저리 유통해 가면서 사는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창조적인 일 하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제가 약 20년전 신학교 다닌다고 서울에 있을 때에 먼 친척 형님 집에 자주 왕래를 했는데 그 형님의 처남인 사람이 그 집에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저하고 비슷해서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이 사람은 늘 저더러 말하기를 당신은 왜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 즉 생산적인 일을 안하고 교인들에게 돈을 얻어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저는 그에게 멋지게 해 줄 말도 잘 생각이 안 나고 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때는 속으로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젊고 건강한 사람이 왜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들 도와주고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10년이 지나 그 사람 소식을 들으니 술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남에게 술 팔아 가지고 자기 먹고 산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멸망과 다툼과 사망을 파는 것입니다. 술을 팔아서 다른 사람을 병들고 죽게 만들고 가정 싸움 나게 만들고는 그 돈으로 자기가 산다는 것 아닙니까? 그게 얼마나 생산적입니까? 그게 얼마나 창조적인 일이겠습니까?

세상에 제일 창조적인 일이 뭐겠습니까? 아마도 농사 짓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농사지어 가지고 만든 것을 중매하거나 소매로 팔아서 사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는 농사를 짓지 않고 남이 농사지어 놓은 것을 가지고 와서 소비자에게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지요. 거기 비하면 직접 씨를 뿌려 가지고 곡식을 생산하거나 고기를 잡아오는 사람은 굉장히 창조적이죠. 하지만 그 제일 창조적이라 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은 하나님이 주신 씨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비를 맞게 하여 생산하는 겁니다.

세상에 자기 것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은혜로 받아 가지고 이리 저리 돌려가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걸 트럭을 싣고 와서 파는 것도 아니고 그 음식이 입에 다 들어가 소화 다 된 후 똥으로 나오면 그것을 치워주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밥 먹고 신진대사가 이루어져 몸에 때가 생기면 목욕탕에서 그것을 밀어주고 그걸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돈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가치는 하나님이 사람들 쓰라고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리 저리 돌려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돈을 벌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법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돈 가진 사람에게 이런 저런 서비스 해 주고 그 사람 가지고 있는 돈을 받아서 삽니다.

이렇게 볼 때 돈은 도는 것입니다. 돈을 쓴다는 것은 돈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돈을 혼자만 지니고 있지 못하며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없습니다. 돈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가치(돈)를 그 필요에 따라 제 것으로 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이자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돈이 있어야만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뭔가 가진 게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자기 것으로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자선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자기 돈을 합니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에서 제일 큰 사업은 국가가 공공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돈을 합니까? 국민들의 돈을 거두어서 하는 것입니다. 공무원 자기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필요하면 얼마든지 일을 하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동의하기만 하면 돈은 얼마든지 있으며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또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사장 자기 돈을 사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어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업이 타당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당성이 있고 돈 벌 가능성이 있으면 은행은 돈을 빌려줍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회사들도 다 남의 돈을 가지고 장사하는 것 아닙니까? 일을 크게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들이 하는 일은 남의 돈과 인력을 빌어서 일을 벌여 놓고는 자기가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도록 홍보하고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고아원을 운영하거나 복지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그렇게 합니다. 주위에 알리고 참여하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관리자의 일입니다. 돈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리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저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살고 있기만 하는데 그것도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한 푼 두 푼이라도 보태게 되는 것입니다. 일은 그렇게 합니다. 일이 있으면 돈은 모여들게 돼 있어요. 문제는 마음이고 믿음이고 실행입니다. 어차피 돈이 많거나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것과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는 오직 일할 마음과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풍성을 사람들에게 퍼 주어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갖다 쓸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누구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자녀를 위해 저축을 하는 부모이지 부모로부터 돈을 받는 자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위치가 주는 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부모가 됩니까? 부모 마음이 있는 사람이 부모가 됩니다. 그러나 늘 받고자 하는 마음 곧 자녀의 마음밖에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자녀밖에 안되겠지요. 주는 자와 받는 자를 결정짓는 것은 줄 수 있는 마음과 믿음 유무입니다. 재물로 봉사하든지 몸으로 봉사하든지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봉사하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고 남을 용납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시간이 남보다 10시간쯤 더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속이 썩는다는 말이 있는데 스트레스를 받고도 참으면 속이 썩겠지요. 그러나 속이 서너 개쯤 되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도 하나는 썩게 내버려두고 다른 것으로 살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상황, 환경이 다 똑 같이 주어져 있지만 주는 사람은 늘 주고 용납하는 사람은 늘 용납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늘 기다릴 줄 압니다. 왜? 자기 것을 가지고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그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쓰는 사람은 자기 형편과 상관없이 여유롭게 행할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하게 단련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나누어주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12:11절과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자기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혹은 체험에 대해 말한 것이나 형제들을 권면하고 책망한 그 모든 것이 자기의 이익이나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떤 품성을 지닌 사람인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매우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주절주절 자신에 대해 많이 말하고 변명한 것은 누가 보나 그다지 품위 있게 보이지 않는 행동 곧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어리석고 품위 없게 된 것은 그들 때문이고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어리석은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잘한 것은 잘한 거란 말입니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변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덕을 세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직하고 단순한 사람인 것이죠. 일관성 있게 하려면 어리석은 것은 감추고 품위 있는 모양만 나타내려고 했을 것인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리석은 것은 어리석은 대로 나타내고 생명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그대로 또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건 별로 모양이 없네. 어리석은 꼴이군" 하고 말하고 동시에 "그러나 나는 너희 때문에 그렇게 했으니 잘했다. 따라서 나를 무시하지 말고 칭찬하고 고맙다고 말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건 그것대로 사실이고, 그러나 그래도 자기가 다른 사도들에 못지 않게 수고했고 역사했다는 것은 그것대로 사실인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놓고 보면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지요. 사람은 구원 받기 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 은혜로 사는 것이고 은혜로 일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내 안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내가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어떤 사도보다 못하다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진실하고 단순한 말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 우리는 (그의 연약함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말해 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정치적인 행동을 하곤 합니다. 이것은 늘 있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논리적인 일관성이나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가처럼 말을 맞추어 하지도 않았고 사람의 마음을 맞추기 위해서 말을 구부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솔직하고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진실이 최선의 정책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직성과 단순성을 배우기 원합니다. 면전에서는 꼭 해주어야 될 말을 해주지 못하면서 뒤에서는 은근 슬쩍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습관도 그렇게 좋은 습관은 아닙니다.

물론 정직하다는 것이 감정대로 다 말하고 감정대로 다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 버리는 것이 정직하고 솔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화내는 생명이 아니고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서 마구 다 나타내는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든 행동으로든 사람을 마구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단순하다고 해서 사람 앞에서 그가 무안을 당하도록 하고 싶은 말을 다 그냥 해버리거나 감정대로 화를 내고 책망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직함과 단순함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려면 한 가지 조건이 따라 붙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함은 순수함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단순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마치 세상 사람들이 맨 정신으로는 말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으니 술이나 한 병 먹고 취한 후 앞뒤 안보고 마구 갈기는 것밖에 안됩니다. 만일 우리 안에서 형제를 위하는 순전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이 결여 된 상태에서 정직함과 단순함이 발휘된다면 그것은 사람을 상하게 하며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형제들에게, 있는 그대로 자기 자랑도 하고 책망도 했지만 그것은 다 그들을 사랑하고 살리려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인격이 참으로 순수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인격이었기 때문에 그의 그런 모든 말들은 형제들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이 있으면 무익한 말은 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 같으면 진짜 많이 자랑했을 법한 일들 곧 셋째 하늘에 끌려갔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체험이었고 자기의 권위를 나타낼 만한 근거가 되었지만 형제들의 유익을 위하는 데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많이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는 14년 동안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꼭 필요해서 겨우 한 마디 정도 하고는 거두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 즉 형제들을 살리고 교회를 온전케 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자랑을 해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고 책망을 해도 살리는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은 순수성은 없는 채로 정직하고 단순한(직설적인) 사람이 돼 버린다면, 우리는 아마 자기 장점과 자랑거리는 늘 정직하고 솔직하게 다 말하고 단점은 다 감춰 버리며 반면에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는 늘 정직하고 솔직하게 다 말하고 그의 장점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못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사람과 그 남은 그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치 아니하리라."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바울이 한편으로는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담대하고 단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고 진리를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진리대로 안가고 생명의 길로 안 가면 사정없이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을 보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보다 더 권위자라고도 할 수도 있는 베드로가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 사정없이 책망했습니다.

일이나 재물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는 그리스도를 더 생각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일보다는 사람을 귀히 여겼습니다. 다른 모든 일이 안 되어도, 천하 만물이 다 없어져도, 한 생명을 얻고 한 영혼이 살아난다면 그것이 더 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위치에 있다면 그런 천만의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알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더 귀하다고 여겼습니다. 사람 노릇 못하는 천만의 사람보다는 진리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더 귀하다는 이러한 생각 역시 모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지니고 있는 생각의 특징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사람을 살려내는 자가 되게 될 것입니다. 위로할 것은 위로하고 책망할 것은 책망하며, 격려할 것은 격려하고 징계할 것은 징계할 때 우리는 사람을 정말로 살릴 수 있습니다. 참 부모는 자녀를 징계할 때 징계합니다. 눈물이 나고 피가 나더라도, 속으로 한없이 부끄럽고 두렵고 떨리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진짜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자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함께 담대함과 단호함을 필요로 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진리의 길로 걷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요즘 말로 해서 왕따를 시켜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단호하고 무서운 말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혼자 독재를 하거나 모든 일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떤일에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독단을 부리지 않고 언제나 형제들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려고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12:18을 보면 디도에 대해서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나는 혼자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형제들과 함께 행동하고 함께 일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홀로 있는 자가 아니고 형제들의 생각과 행동에 연동되어 있고 제재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몸 안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가 형제들과 동일한 생각을 하고 동일한 보조로 행했으며 또한 형제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와 형제들이 동일한 성령을 받았고 동일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인격이 상당히 정직하고 단순하며 또한 상당히 담대하고 단호하지만 겸손하고 부드럽지 못해서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가를 반성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까지 충분하게 하나님 앞에서 부서지고 단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단련된 인격은 언제나 자기를 낮추며 자기를 절제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연합은 요철의 원리처럼 하나가 튀어 나와 있으면 하나가 들어가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튀어 나와 있으면 둘 중에 누가 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이 순대로 하겠습니까?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생명 순대로, 생명의 분량대로, 성령의 인도를 세게 받는 순서대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먼저 자기를 양보하고 낮추면 꼭 좋겠는데 그가 기어코 안하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결국 내가 먼저 하는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생명이 우위에 있고 더 풍성하고 더 여유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이것을 잘 살펴야 합니다. "너는 나보다 나이가 밑이니까 네가 이래라." 우리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또 "당신이 연장자니까 양보하시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생명대로 스스로 알아서 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질서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세계를 보여주셨고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할 수 있고 이 일을 양보할 수 있고 내가 이 일에서 좀 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큰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울은 형제들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디도를 보냈지만 아무 걱정도 안했습니다. 왜?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고 있었으니까요. 꼭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내 형제가 있어도 된다는 겁니다. 내가 없어도 형제가 내 할 말 다 하고 내가 없어도 형제가 내 할 일을 다 잘 하니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바울 안에서 형제를 믿는 마음과 형제와 조화를 이루어 같은 보조로 행할 줄 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바울의 모든 덕목 중에서도 이런 것이 제일 부럽고 사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교회에 가장 필요하니까요. 교회라는 것은 둘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풍성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만 있어도 안되고 똑 같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어도 좋지 않습니다. 오직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다양하게 그러나 조화롭게 표현하게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잘 난 것만 알고 자기 생각과 주장만 고집하면 잘 난 재료 집합소는 될지 몰라도 교회는 안됩니다. 십자가를 거친 바울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어찌 오늘 이 한 시간에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약 1년 동안 고린도후서를 공부해왔고 그 전에 고린도후서도 공부해왔습니다. 이것들은 다 바울의 개인 간증집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입니다. 이것도 이제 거의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남는 것이 있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지요.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바울이 했던 말들이나 일들을 머리에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바울의 글들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한 보잘것없는 죄인을 불러다가 이렇게 영광스럽고 풍성한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주님을 더욱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그와 같이 주님을 계속 깊이 따라가서 그가 누렸던 삶을 누리고 그가 섰던 자리에 서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58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8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