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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고린도 교회에게 믿음을 점검해 보고 참 믿음 위에 설 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지금 우리가 읽은 말씀대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진리를 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고 도저히 진리를 거스릴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길과 운명을 이야기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이야기죠. 바울에게는 주님의 뜻과 별도로 자기 계획이나 야망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그렇지만 혹시 그런게 있다해도 이 사람은 자기의 계획이나 뜻대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 하는 이야기죠.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이 길대로 이 진리의 길대로 밖에는 갈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위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죠. 이런 사람의 길은 아주 확실하고 아주 단순하고 하지 않겠습니까 육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육신이 있는데 육신이 있어도 육신대로 살아보면 안되고 그것이 그럴 수가 없고 오직 성령이 자기를 주장하는 대로 밖에는 갈 수 없는 이런 사람을 우리는 진리의 종이고 진리에 묶인 자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의 일생이 꼭 이러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기 위한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감정적으로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 자기를 반대하고 따라와 주지 못하고 이러니까 서운하다든지 밉다든지 이런 것이 혹시 있다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형제들과 싸우거나 형제들을 거스려서 해로운 일을 한다든지 이런 일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그 말입니다. 너희들이 믿음에 섣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해 봐라. 만일 예수가 너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은 너희는 큰 일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죽 책망이든지 권면이든지 어떤 때는 쓴소리를 한 것은 너희들이 버리운 자가 되기를 내가 바란다든지 너희들이 미워서 나를 알아주지도 않고 이러니까. 미워서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사람이 한 이야기가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위할 뿐이고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우리는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서 정욕과 거짓을 따라 살던 옛날의 길에서 돌이켜서 이제 생명과 진리의 길로 나가게 되는 것은 진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 그리고 또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뒷받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돌이킬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자로 진리를 따라 사셨고 거기서 승리하고 거기서 영광을 거두고 그 다음에 성령님이 그런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소개하고 사람에게 비추어 가지고 사람으로 감동을 받게 하는 이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진리로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았다고 하는 그 진리의 길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늘 모여 가지고 매일 하는 이야기가 그거죠.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에게 자기를 드려서 순종하고 그러니까. 아들로 사는 겁니다. 그러고 범사에 그 아들의 생명으로만 살고 사탄의 모든 거짓말과 자기 속에서 충동질하는 모든 것들을 다 거부하고 살아가는 이것이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이제 함께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을 볼 때 형제로 보이게 되고 그냥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또 그들을 어떻게든 더 살리고 더 잘되게 할려고 애를 쓰는 이런 삶이 뭐랍 말입니까? 이것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란 말이죠. 이렇게 하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세상이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천지가 되니까 이게 하나님의 나라죠. 이것이 모든 것이 길대로 가는 겁니다. 진리대로 가는 겁니다. 주님이 제일 먼저 이 길로 갔습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이 이런 주님의 길을 우리에게 소개 한거죠. 우리는 그런 것을 못 봤으니까 뭐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건지 다 제 각각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 왔습니다. 공자님도 말하고 부처님도 말하고 철학자도 이야기하고 다 이야기 하지만은 다 자기대로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가 진실로 사람의 대표자이고 사람의 참 원형이라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사람으로 와서 한 생애를 사심으로써 아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의 본래 삶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거죠. 바울은 이걸 본 겁니다. 바울은 뭐 다른 것을 본 것이 아니고 그 예수를 봤고 예수 안에 있는 참 사람의 걸어가야 될 길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번 보고 그저 마이동풍 격으로 뭐 바람이 불긴 불었는데 어디 갔는지 없고 이게 아니고 그 사람 안에 깊이 감동이 되게끔 성령이 아주 강력하게 이 진리를 바울속에다 심어 놨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평생 여기에 묶여 살았던 것입니다. 아 이것은 사람이 죄의 종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종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인생 길을 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진리의 종이 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진리를 명확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참 길은 요것뿐이다. 하는 것을 이 사람이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고려조차 할 수 없었던 거죠.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은 어떤 필요가 있어서 그걸 전한게 아니고 그거 밖에 말할게 없어서 그걸 이야기 한 겁니다. 그것만이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이게 때문에 이 사람이 그걸 이야기 한 거예요. 이런 저런 생각과 이런 저런 말 할 것이 있는 중에서 이번에는 내가 진리를 말해봐야지. 이래 가지고 진리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 말하자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자기 속에서 그 말 밖에는 할 수 없도록 그냥 쑤시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어떤 타율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진리로 무장된 자기의 이 새로운 인격이 그것 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고 그것 밖에는 알고 있는게 없고 그것 밖에는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자기 속에서 아주 확고해졌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단순하고 이런 분명한 생각과 이런 인격 이것이 어떤 사람을 참 분명한 삶으로 이렇게 몰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바울안에서 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진리 뿐 이면은 진리대로 갈 수밖에 없고 진리만 말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으면은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결국은 제가 말씀 준비 같은 것을 해 보면은 여러 주일 것을 미리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 주일 것을 준비를 하기가 힘든다는 것도 있겠지만 준비를 해도 헛일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를 들어서 3월달 것을 제가 첫 주에 4개를 다 구상을 해서 말 할 것을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첫 주에 그것을 다 이야기 해버려요. 왜냐 하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데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건 너무 중요하고 너무 좋은 이야기인데 이걸 말해야지. 이래가 다 말해버리니까. 그 다음주에 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몰라야 거기까지 한계가 되는 거지 알고 있으면 그것까지 다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조절 해 가지고 안배를 해 가지고 아 요렇게 조금 조금씩만 하면 되지 할 것 같아도 이게 학교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 같으면은 그렇게 할 수 있죠. 그러나 이것은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라고 적어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확신하고 어떤 작업을 하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거 다음주에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다음에 실패하도록 내버려 놓고 요번 주는 요까지만 진리를 말해야 되겠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데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 속에 그래서 뭐가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해요. 하나님 말씀만 들어가면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뽈끈 붙잡혀 가지고 그것 밖에는 사실 할 수가 없어요. 다른 것이 뭐가 들어가면은 뭘 아는게 있고 이 세계도 골프 재미있는 것을 너희들도 아느냐? 너희가 째즈의 재미를 아느냐? 뭐 이런 식으로 그 아는 것이 많으면은 그 재미와 그 세계에 대해서 결국은 사람을 또 넌지시 그 쪽으로 끌어들입니다. 그것을 말하게 됩니다. 모르니까 예수 밖에 없으니까 예수를 말하는 이게 바울의 실상이었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데는 도저히 관심도 가질 수 없고 여유도 가질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생각 할 수도 없게끔 한 길로 몰아 붙혀가지고 날마다 죽노라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던 이유입니다. 그래야만 그것만 이야기 하니까 그러니까 문제는 내용이고 문제는 빛이지요. 사람 안에 이 길도 보이고 저 길도 보인다면은 어찌 한 길로만 가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가야 할 한 길만 분명하게 보이고 나머지는 다 가서는 안 될 길로 그렇게 확실하게 보인다면은 그 한 길로만 가지 별 수 없는 겁니다. 살길과 죽을 길을 분명하게 보고서 죽을 길로 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거 딱 살길이요 하나 분명하게 보이면 딱 고 길로만 가는 겁니다. 아무리 일시적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헤매고 있고 격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어느 정도 갈 만한 길이라고 그 사람에게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장난질을 하고 있다면은 이게 진리가 아니고 어떤 엉뚱한 데를 지금 헤매고 앉았다 이겁니다. 잠시라도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라도 이것도 내가 발 디딜만한 길이구나 하고 그 사람 눈에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이 반드시 죽을 길이고 반드시 즉시 망할 길이라고 확실히 보인다면은 잠시라도 누가 그리로 발을 들이밀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의 길로만 간다는 것은 빛이 확실해 가지고 그 길 외에는 전혀 다른 길이 없고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이것은 필히 멸망한다는 이게 그 사람 안에서 아주 확실히 보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서 많은 혼란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격길로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분명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면 됩니다. 이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나 사실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빛이 희미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빛을 희미하게 비춰서 그런게 아니고 사람 안에 다른게 너무 많아 가지고 하나님의 빛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말하자면 단순함이 없고 복잡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어려움을 격고 있다. 그런 이야깁니다. 빛이 희미하다는 것은 다시 말씀 드리지만은 이 길로 가도 될 것 같고 저 길로 가도 될 것 같아 보이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걸 빛이 희미하다는 겁니다. 혹은 이 길로 가기는 가야 되겠는데 이게 길 같은데 저 길도 곧 줄을 것 가지는 안하고 어느 정도 가봐도 안되겠나? 이렇게 보이는 것을 뭐라고 말하는 겁니까? 빛이 희미하다는 겁니다. 주님이 가신 길도 길인 것 같고 세상 사람들이 가고 있는 그것도 또 그런대로 갈 만한 길로 이래 보이고 이게 바로 빛이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 보이면은 결국은 이리도 가보고 저리도 가보게 됩니다. 아무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안 그렇다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 이 한 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겁니다. 나는 안 그렇다는 겁니다. 내가 뭐 잘나서 그런게 아니고 잘났던 못났던 어쨌든 내 실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여기의 진리라는 것은 고린고 교회가 잘 되고 굳게 서고 그래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온전케 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확고히 서게 되는 이걸 진리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위해서 나는 일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약하게 되고 내가 망하게 되고 내가 고생과 죽도록 고생해 가지고 만물 가운데 찌꺼러기 같이 이렇게 되더라도 나는 당신들이 잘 되고 당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고 온전케 되는 이것 밖에는 생각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난 참으로 이러한 바울의 서 있는 자리를 진실로 흠모합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그리스도가 찬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찬양하는 사람으로서야 됩니다. 그리스도 혼자 영광을 받을 수가 없어요. 도저히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을 라면 누가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 영광을 돌리려면은 지금 그 내 눈에 가시 같고 꼴 보기 싫고 못났고 죄악 덩어리인 이 사람들이 어쨌든지 살아나 가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닮게 되고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것이 나와야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밉다고 내가 내다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거예요. 만약에 내가 장가를 가야 되는 총각인데 세상에 열 명의 처녀가 있는데 다 하나 같이 꼴 보기 싫어서 밉상스럽고 어디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명은 내가 장가를 가야 될 판이라면은 아무리 미워도 그 사람들이 바뀌어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게끔 내가 일을 하고 거기 협조를 해야지 밉다고 내 버려 놓으면은 내만 손해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세상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 미운 사람입니다. 사탄에게 속아 가지고 거짓으로 행하고 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이렇게 속아 있는 판에 고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라도 찍짜 붙을 것 하나 뜯어 가지고 하면 다 문제 있는 사람이죠. 바울은 하나님이 네가 누구며 네 옆에 있는 형제가 누구며 세상이 누구 것이냐? 이것을 보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딱 보고 나니까 이게 전부 내 것이란 말입니다. 만물이 우리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서야 될 사람들이고 천하 만국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또 내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될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보이니까 너희는 나를 밉다 곱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수밖에는 내가 무슨 다른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나라를 보게 되고 또 그 나라에 사람이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가 또 교회가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가를 보게 되니까. 바울은 할 일이 딱 하나 밖에 없게 되요. 한 길로 자기 운명이 딱 찍혀 버리는 거예요. 바울은 딴 길은 다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 그에게 확실해 졌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항상 외골수의 분명한 삶은 산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또 저도 먼저 사람이라는 거는 이렇게 진리에 깊이 사로잡혀야만 진리대로 살수 있고 그래야 뭐가 된다고 하는 사실 진리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이것부터 먼저 확고히 알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게 안되면 다른 것은 그 뒤에 문젭니다. 그리스도 외에 딴 길은 없고 다른 길이라 하는 것은 전부 길처럼 가장 된 죽음의 구덩이라 이렇게 봐 버리면 그렇게 보여 버리면 그 다음에 진리로 가는 거는 이거는 어쩔 수 없는 이미 딱 기정 사실인 것입니다. 온통 진리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으면 진리로만 가고 진리만 말하고 진리를 권하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잖아요.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입는다. 이건 참 좋은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에게 그는 교회 안에 앞으로 어떤 혼란이 올 것인데 그 혼란은 누가 주동자가 되느냐 하면은 진리의 사랑을 입지 아니한 자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한 자가 주동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2장 9절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를 "악한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랬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은 유혹을 받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또 사탄이 거짓 표적과 거짓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꼬실 때 달랑 따라가고 그렇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자기가 진리의 길로 가지 않고 허무한 엉뚱한 짓거리를 하거나 잘못된 일을 할 때 그 이유로 이것을 말합니다. 내 속에서 자꾸 댕기니까 어떻게 하느냐 이겁니다. 육신의 욕구 육신의 정욕이 너무 강하고 육신이 약해서 그렇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죠. 댕기는데 뭐 별 수가 있습니까 자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의 길로 가지 않는 참된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모르는게 아니고 나는 아는데요. 이렇게 다 말하고 싶겠지요. 그러나 진리를 확실히 알면은 누구나 그 길로 밖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진리를 확실히 가면은 그 길로 가지 딴 길로 가는 거는 잠깐 머뭇거리는 거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옛날에는 쥐가 참 많았죠. 요즘 집에 쥐 있는 집 있습니까? 구경 한 번 가 봅시다. 옛날에는 집이 아주 허스럼해서 쥐도 들락거리기도 쉽고 해서 쥐가 많았는데 저희 집에는 제가 학생 때 식당이나 제과점 이런걸 함께 늘 했어요. 그러니까 먹을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온갖 동네 쥐가 다 오는 것 같아요. 그냥 자는데도 천장에 우루루루 쥐가 운동회하고 그래 쥐 잡는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했는데 고양이를 몇 마리 키우는 거는 기본이고 그 다음에 심지어는 공기총을 어디서 구해 가지고 공기총으로 직접 쥐를 사냥 할 때도 있었어요. 그 때 저희 집이 장사 할 때 자식들이 많다 보니까 장사를 여러 가지 했는데 그 때 저희 집이 공기총 사격장을 했거든요. 그래 그것을 어디 가지고 와 가지고 쥐를 잡기도 했거든요. 이런 수를 썼는데 그래도 제일 일반적으로 쓰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쥐약을 놓는 거죠. 음식에 다 쥐약을 타 가지고 놓는 이것을 제일 많이 쓰죠. 자 이게 인제 쥐가 다니는 길목에 먹음직한 음식을 갖다 놓는 겁니다. 자 이걸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 쥐약을 넣은 음식을 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먹지 않죠. 우리 집은 요즘 말로 하면 다 세대 주택 이런 건데 옛날 다 세대 주택이라는 것은 방 하나 부엌 하나 이런 집들이 죽 이어져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득실득실 붙어사는 그런 데죠. 그러니까 거기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굶어서 눈이 튀어나온다 해도 쥐약을 넣은 음식을 먹는 사람은 못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걸 먹으면 죽는 줄 아니까 그렇죠. 살라고 밥 먹는건데 암만 배가 고파서 배가 그걸 댕겨도 지식이 반드시 그걸 이기죠. 내 머리 속에 저건 먹으면 죽는다. 저건 먹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아는 이상 그걸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어떤 배가 고픈 사람이라도 쓰레기통은 뒤지면 뒤질까 깨끗하게 쌀밥에다가 아니면 과자에다가 보기 좋게 쥐약을 섞어 가지고 딱 놔 놓는데 그것이 집안에만 있는게 아니고요. 여러분 옛날에 다 보셨겠지만 그 여러 집들이 살면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나 골목 요런데 쥐구멍 어디 담벼락에 파져 있는데 그런 앞에 그 사람들이 보고 다 먹을 만한 자리에 갖다 놓는 거예요. 그렇지만 누가 실수로 먹을 법도 한데 누
진리라는 것은 따져 보면 하나의 사실 아닙니까? 이것은 검다 이건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인격이 아닙니다. 그 내가 진리에게 사로잡힌다라는게 검다고 하는 어떤 사실이 나를 사로잡는다라는 것으로만 말한다면은 그게 좀 그 힘이 없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이런 진리들을 머리 속으로 잘 이해해 가지고 그렇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기만 하면은 그러면 진리가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고 그 사람은 진리의 종이 되어 가지고 항상 진리대로 살수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렇게 안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사실은 진리 이전에 어떤 사실 이전에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인격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기에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이 오늘날 거짓말을 하고 범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범죄하고 거짓말하는 인격인 사탄에게 먼저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 사람 안에서 거짓의 애비요. 살인자로 싸우는 자로 미워하는 자로 그 안에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역사를 하기 때문에 그에 반응해 가지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미워하는 겁니다. 그 진리가 먼저 그 사람 안에 어떤 사실이 먼저 들어가서 그걸 자리잡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어떤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하는 이런 잘못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붙들어 와 가지고 참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이 결박당해 있는 사탄에게서부터 그 사람을 풀어 줘야 돼요. 풀어 주고 그 다음에 성령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관계를 가짐으로써 붙드는 작업부터 먼저 해야 돼요. 다시 말하자면은 성령이 없으면은 진리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우리 안에서 머리로 이해가 되더라도 이게 우리 안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하고 악한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가지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그 일을 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가지고 생각을 하고 말하는데 들어보면은 다 옳은 말만해요. 다 옳은 생각만 한다고요. 공자님의 이런 이야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멘하고 찬성하지 반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반대되는 한 인격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의 거짓말 사탄이 사람들 안에 이미 그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이성이라든지 뭐 혹은 굴러다니는 어떤 복음 진리 이런게 사람들 속에 어느 정도 들어가서 뭔가를 깨우쳐 놓아도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고 사탄의 거짓말을 그냥 그 사람 안에서 밀어줍니다. 막 밀고 나가는 겁니다. 인격이 실제 보다 먼저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거짓된 말과 행동에서 돌이켜서 진리에 단단히 사로잡히려면은 반드시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에게 성령에게 먼저 사로잡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 성령을 오늘날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이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한 이 말은 성령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일깨움과 인도가 오늘 우리 안에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참 특권이고 큰 복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시고 단순히 진리를 알게만 하실 뿐 아니라 그 진리를 우리로 깊이 받아들이고 그 길로만 가도록 사람을 쪼으고 밀고 그 다음에 그 다른 것들이 들어오면 그걸 격퇴하고 진리로 행하도록 책망하고 감동시키고 이런 일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모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렇게 형제들에게 이야기 해 놓고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이런 반문 형식의 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 안에 이미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말한 겁니다. 이미 너희들 안에서 예수가 말하지 않더냐? 너희들이 음행을 행하고 도둑질을 하고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소송을 벌리고 서로 판단하고 이렇게 할 때에 성령이 너희 안에서 그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더냐 이것입니다. 그런 걸 할 때 편하더냐 이겁니다. 성찬이라고는 벌려놓고 앉아 가지고 부자는 부자들끼리 맛있는 것 다 먹어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저쪽에서 불평 원망을 하고 있을 때 다 편하더냐 이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너희들 안에서 말씀하시더냐 이것입니다. 아무도 변명할 수도 없고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면은 우리는 변명할 수 있죠.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나는 모릅니다. 이래 말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난 모른다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성도의 양심은 이미 진리의 의해서 규정되어 있고 진리의 의해서 전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겉 사람이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과 이유를 대면서 진리를 거스려 행할지라도 속 사람은 처음부터 그것이 분명하게 틀렸어 그것은 틀렸고 그럴 수 없는 것이라고 자기를 찌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에게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여러분이 이제 다시 한 번 복습을 해 보셔요. 고린도 전서나 후서나 다른 모든 바울의 이야기들을 잘 보시면은 이래해라 저래해라 하고 오만 상황에서 모든 구체적인 답변을 다한 것이 아니고 다만 네가 누구인지를 알고 네 속에서 역사 하시는 분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귀기울려 들어보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네 속에 계신 분이 너를 어디로 인도하며 뭘 요구하고 있는지 네가 거기에 순종하고 거기에 반응하면 될 것 아니냐 그 걸 모르느냐 아무 말도 안 하더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요한 일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은 요한도 마찬가지죠.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단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가 분별하고 어떻게 경계를 해야 됩니까? 하고 질문이 왔을 때에 이 사람이 한 이야기가 아까 말한 것처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도 없고 그가 다 참되고 거짓이 없이 너희에게 가르치니까 그대로 하면 된다" 그 답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 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약에 이모저모로 어떤 식으로든지 하이튼 멀리하고 거부하고 그러면은 그것은 다 이단이고 가짜다 그 이야기를 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하면서 동시에 말하기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영원한 생명 성령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고 하나님 아는 생명을 창조해 가지고 우리가 새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밝히 깨닭고 따라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말하면은 여러분은 매사에 누가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씨로 떨어져서 작용을 하고 있는 이상 우리 안에서 기다리면서 그 분의 음성에 우리가 청종하기만 한다면은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물론 형제들로부터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야 되고 공급을 받아야 되죠. 우리는 이제까지도 사실은 형제들 안에서 도움을 받아서 다 이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될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이렇게 형제들과 교통하고 서로 가르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성령과 별개의 역사가 아니고 그것이 전부 성령과 교통하는 과정이고 수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이런 종류의 모임과 교제와 가르침이 그 모양과 형식은 사람끼리 모이는 것 같고 사람끼리 가르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이게 모두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 주고받고 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성령을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에게 공급하는 이 작업이지 다른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래라 저래라고 가르치는게 아니죠. 알고 보면 말은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는 것 같아도 주님이 말씀한대로 "내 말이 너희에게 영이요 생명이다" 라고 했는데 어떤 때 우리가 서로 싸우는 사람을 볼 때는 형제여 우리는 서로 싸울 사람이 아니고 함께 영원히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이 말은 그 말만 딱 떼어놓으면은 분명히 윤리죠. 그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 사람을 서로 사랑합시다. 하는 도덕 윤리가 되겠지만은 이게 우리가 형제가 서로 교회 안에서 그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게 아니고 내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 진리의 빛이 그 사람 안에 지금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착하게 살아라 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 자체가 사랑이고 그 말 자체가 예수의 생명을 그 사람에게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우리는 성령안에서 다 된다고 알아야 되죠. 가르치는 거라도 그래요. 가르치라는 것도 이게 가르쳐 가지고 그 사람 모른는건데 아구 내가 집어 넣어줘야지 그래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럼 그 사람 안에서 그걸 받아낼 만한 영도 없고 그 사람안에 동일한 생명이 없는데 그 말을 해 주면 그 사람안에 그것이 들어갑니까? 그것이 안 들어갑니다. 그것이 지식으로는 들어갈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 사람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해요.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동안 참 공을 많이 들여가지고 밑천을 많이 깔아놓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다른데 가서 이야기하면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해요. 왜 못 알아듣습니까? 말이 어렵고 새로운 말이어서 그런게 아니고 성경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설교집도 많고 시중에 얼마든지 이만한 지식 정도야 늘 천지 늘리고 깔렸습니다. 그래도 왜 말을 못 알아듣습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붙어 가지고 사귀지 않았으니까 예수 안에서 서로 공들여 가지고 교통하다는게 그게 전부 성령으로 서로 친하게 비비다 보니까 성령이 서로 안에 들어가 가지고 막 역사하고 주고받고 예수의 생명이 예수의 영이 모두 안에서 공급된 것입니다. 이 작업을 다 해놓고는 이 말을 알아듣고는 좋다하든지 어떻다 하든지 하는거지 그게 없이는 안 돼요. 자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다 머물러 있어야 되고 진리에 살고 진리에 딱 붙들려 가지고 꼼짝달싹 못하고 그건 자다가 벌떡 일어나도 진리 밖에는 말할 수 없고 그 길밖에는 갈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럴려면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겁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사귀어야 돼요. 바라보고 그를 흠모하고 그와 씨름해야 됩니다. 그와 싸워야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하고 붙어서 싸워서 이겼다는 이름입니다. 하나님하고 서로 무관하게 그냥 잘 지냅시다. 우리 별 일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하고 당신이 내게 복을 안 주면 너 죽고 내 죽고 둘 중에 하나는 끝장냅시다. 하고 비비더라도 사귀면은 그 안에서 뭐가 굴러나옵니다. 우리가 같이 살면은 동화가 되요. 그 사람 세계를 내가 전혀 안볼 수 있습니까? 전혀 내가 영향을 안 받을 수 있습니까? 암만 미워도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나도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겁니다. 이래서 서로의 정신이 교통되고 서로 안에 있는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진리는 진리의 원천에서부터 우리가 퍼다가 쓰는 거죠.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사귀고 그 다음에 그 예수를 내 혼자만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각자 다 예수와 사귀고 예수에게 두드려 맞고 예수에게 생명을 받고 예수에게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을 때 이 사람들이 또 사귀어야 돼요. 이 사람들이 피차 예수의 영을 가지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붙들고 서로 책망하고 이렇게 사귀면서 그 생명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게 진리 안에 견고히 서는 길이 되지요.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앞으로 또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가시며 이 진리외에 어떤 길로 나가더라도 우리를 그냥 편하게 그 길로 내닫지 못하도록 우리 안에서 크게 간섭하실 것을 기대하고 또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심정으로 우리가 피차 진리를 권하고 피차 진리 안에서 정말 요동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길을 형제들 가운데 비취도록 합시다. 그러면은 우리가 그 세계안에 있는 한은 우리도 꼼짝달싹 할 수 없어요. 우리가 거기서 되지 않는 자랑을 한다든지 되지 않는 엉뚱한 세상의 것을 들고 와 가지고 그걸 보람으로 삼거나 재미로 삼거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 다 거하고 또 진리로 피차 붙들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도 바울처럼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확고한 진리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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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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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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