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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바울의 이 말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향한 마지막 말로서 인사와 권고 두 종류의 말로 되어 있다. '위로를 받으라'는 말과 '평안하라'는 말 그리고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은 인사말이고, '기뻐하라'는 말과 '온전케 되라는 말'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권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위로를 받으라는 것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아무리 허물과 실패가 많아서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교회라 할지라도 그래도 교회니까 즉 악한 세상 가운데 놓여 있는 주님의 교회이니까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환난을 당했고 십자가의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평안하라는 말은 인사말로도 볼 수 있고 기뻐하라는 말처럼 권면의 말로도 볼 수 있는 말인데, 이 말을 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고린도교회가 평안치(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는 안팎의 사유로 편치 못했다. 바깥의 사유로는 세상으로부터의 환난과 핍박 및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들 수 있겠고, 내부적 사유로는 하나님을 굳게 믿지 못함으로써 신자들의 마음에 걱정 근심과 불안, 두려움이 있는 것 그리고 사탄에게 속아서 형제들끼리 미워하고 다툼으로써 마음이 편치 않게 된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절실히 필요했다.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요14:27)처럼 바울도 그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전하고자 했다.
하늘의 평안은 곧 그리스도의 평안이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는 평안이다. 우리 삶이 평안하고 안식을 누리는 삶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문제는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사느냐 아니면 육신의 눈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과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도록 약속하신 것을 보는 것과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그 복된 약속의 길로 달려가는 길이며 또한 그 길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어려운 세상 여건과 연약한 육신의 형편 및 사탄의 위협만 본다면 우리는 도저히 안식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다. 바울이 형제들에게 마지막으로 권고한 것은 믿음의 눈을 열어서 그들이 복된 위치를 보라는 것이다.

마음이 편치도 않고 평안할 것도 없는데 억지로 평안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평안할 수 있는 상황에 있으므로 눈을 열고 그것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축복과 인사이기도 하지만 권고와 명령이기도 한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물질적, 육신적, 세상적 형편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모든 복과 범사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역사하시는 상황을 좀 쳐다보라는 것이다.

비행기에 타고 있으면서도 앞이나 밑으로만 쳐다보며 자꾸 나를 좀 높여주고 나를 좀 날게 해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창문을 통해 바깥을 한 번 내다 보라"고 말해 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신적 외부적 형편만 쳐다보며 불평과 원망,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이러한 인사말과 더불어 바울은 형제들에게 '기뻐할 것'과 '온전케 될 것'과 '모든 형제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연합할 것'을 권고했다. 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기뻐하고 온전케 되고 마음을 같이 하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거의 명령에 해당하는 강력한 권면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첫째, 그가 이 사실에 대해 여러 군데서 자주 말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가 이러한 요소들을 믿음의 핵심적인 증거와 징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우선 기쁨에 대해 말하자면, 기쁨은 참으로 믿음의 열매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성령의 현저한 열매로 꼽은 것 중 첫째가 사랑이고 둘째가 바로 기쁨(喜樂)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행2:28) 이 말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생명을 얻은 사람 곧 구원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건지신 목적이 바로 그러한 기쁨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믿음(성령의 역사)의 분명한 열매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틀림없이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온다. 그리고 기쁨과 평안은 내적인 현상인데 이러한 내적인 평안과 안식, 내적인 기쁨에는 외적인 표현(열매)이 따른다. 내적인 평안은 밖으로 드러날 때 여유와 관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내적인 기쁨은 밖으로 드러날 때 감사와 찬송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주님을 믿고 있지 않은 것이며 교회에 기쁨과 그로 인한 감사와 찬송이 없고 평안과 안식 및 그로 인한 여유와 관용이 없고 또 그로 인한 사랑과 서로 섬김과 연합이 없다면 그 교회는 다른 모든 것을 다 구비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불완전한 교회이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안에는 기쁨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들 눈에는 앞을 봐도 기쁠 일이 없고 뒤를 봐도 기쁠 일이 없고 옆을 보나 밑을 보나 어디를 봐도 기쁠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기쁨이 없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지 못했다. 즉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모든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았을 뿐 성령 안에서 보지 않았다. 그러니 오직 문제만 보이고 어두운 것과 괴로운 것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바울이 기뻐하라고 한 것은 평안하라고 할 때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라"는 말을 한 것이다. 믿음으로 위를 쳐다본다면, 그래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놓으신 놀라운 역사와 하나님의 그들과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게 된다면 그들은 당연히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는 것만큼이나 고린도교회 안에 없는 것이 바로 형제 사랑이었다. 사랑이 없으므로 연합이 안되고 늘 다투며 나누어졌다. 이것으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어린아이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마지막 권면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또 바울은 그들에게 "온전케 되라"고도 권면했다. 온전케 되라는 것은 예수를 온전히 믿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랑과 기쁨이 없는 사이비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케 되라는 것은 그런 상태에서 진보해서 형제 사랑 및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다른 것이 다 있다 해도 성령의 최우선적 열매로 꼽힌 사랑이나 기쁨이 없으면 온전치 않은 것이다.


바울이 말한 이 세 가지 사실 곧 기뻐하는 것과 온전케 되는 것과 형제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다 깊이 다룰만한 중요한 주제들이므로 한 시간에 이것들을 다 다루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기뻐하라는 이 한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말고 다른 곳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빌립보서 4:4 말씀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그밖에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의 권고이자 명령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위성이 있다고 해서 그리고 명령한다고 해서 없는 기쁨이 억지로 생기겠는가? 기쁨은 옆에서 누가 기뻐하라고 말한대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현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어떤 일로 인해서 생긴 결과가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면 기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할 때 감옥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뻐했으며 또 형제들에게도 기뻐하라고 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기뻐했으며 무엇 때문에 형제들에게 기뻐하라고 했는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Lord is at hand." 또는 "Lord is near." 이것이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며 충분한 이유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이 말을 할 때 감옥에 있었으므로 육신적 형편으로 말하자면 전혀 기뻐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세상과 육신의 형편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보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이 훨씬 크고 강력했기 때문에 그는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주님이 계신 것보다 세상이 그를 누르는 것이 더 컸다면 그는 결코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기뻐하는 것말고 항상 기뻐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적 사정에 달려 있다. 내부적 형편이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항구적인 기쁨과 평안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이 말씀들은 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기쁨을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어떻게 다른가? 세상 기쁨 곧 아담 안에 있는 기쁨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 속에는 기쁨이 없는데 바깥으로부터 잠시 기쁨을 취함으로써 기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업이 망했거나 자식이 죽었거나 해서 전혀 웃을 형편이 못되는 사람이 TV 코메디 프로에서 개그맨이 몹시 웃기므로 순간적으로 기뻐하는 것과 같다. 속 사정이 안 좋은 사람은 바깥의 사정이 좋을 때 그것으로 잠깐 기뻐할 수 있으나 결코 항상 기뻐할 수는 없다. 바깥 사정(환경)이 어떻게 항상 좋을 수 있겠으며 또 설사 남들이 좋다하는 환경이 있더라도 내 속에서 주관적으로 그것이 좋지 않다고 느낀다면 기쁨이 없는 것이다. 거지가 보기에는 부자가 고기를 먹는 것이 항상 행복할 것으로 보이겠지만 부자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바깥의 상황이 아니라 내적 상황이다.  

속에 주님이 계셔서 삶의 의미를 불어 넣어주시고 기쁨을 계속 생성해주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바깥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것과 관계없이 항상 기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 곧 사탄의 거짓말과 망상을 받아들여서 항상 헛된 야망을 가지고 허무한 일을 추구하다가 그것이 성취가 안될 때 불평과 원망과 낙심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항상 기쁠 수 없고 도리어 항상 괴롭고 답답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기뻐해야 하는가?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17:5)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그리스도의 기쁨 곧 아들의 기쁨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쁨과 만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부터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자기 안으로 이끄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천지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주의 중심과 머리로 삼으셨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왜 항상 기뻐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항상 기쁠 수밖에 없는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식물도 동물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 아담 안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타락하여 저주받고 멸망할 인생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도 기쁠 일이 더러 있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 기쁜 것이지 영원한 기쁨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이 기쁨은 영원하고 항구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이 지위 곧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이 새 피조물로서의 지위는 없어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성(恒常性)과 항구성(恒久性)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쁨도 일시적인 것이나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기쁨이 아니라 '항상 기쁜 것'이다.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돈이 많거나 없거나, 성공을 하거나 실패를 하거나 관계없이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아들이므로 항상 기쁜 것이다.  

그렇다. 우리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로 인해 만족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서 온 기쁨이므로 하나님이 죽거나 변치 않는 한 우리 기쁨도 사라지거나 변치 않는다. 우리 기쁨이 이런 영원한 기초 위에 있는 기쁨이 아니고 세상 여건에 기초한 기쁨이라면 결코 항상 기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매일 산해진미를 먹으며, 어떤 사람은 매일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히로뽕이나 엑스타시 같은 마약에 취해 있다. 그것은 다 기쁨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 속에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 없다. 잠시 기쁘고 즐거운 다음에는 긴 허무와 고통이 따라온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영원한 기쁨'은 결코 나 자신 밖의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내면적이고 생명적인 것이다.

바울은 이 기쁨이 너무 충만하고 좋았기 때문에 이 기쁨에 배치되거나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다 내다버렸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질 때 얻는 이 기쁨은 너무나 확실하고 큰 기쁨이기 때문에 다른 기쁨은 전혀 취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생명 외적 기쁨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고 그것이 없음으로써 아쉬워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기를 원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얻고 어디서 발견되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어서 말한다면, 내 손에 큰 재물이 쥐어질 때 나는 '부자(富者)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고 내게 큰 인기나 명예가 주어진다면 나는 '인기 연예인이나 스타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 손에 큰 재산이 쥐어지고 내 귀에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들려오더라도 그것으로 내가 즉 내 생명이 영광스럽고 가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재산은 내 손에 있다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기도 하는 것이고 칭찬과 인기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 곧 내 인격과 생명을 '내게 주어진 외부적인 것들'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부자로 발견되거나 인기인이나 권력자로 발견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직 영원한 가치를 지닌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발견되기를 원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죄와 저주로 썩어지고 사라질 인생이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을 그대로 물려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때 우리는 진정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되고 진정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발견될 때 우리 안에서는 기쁨과 감사와 자랑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서 발견되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발견되어지기를 고대하지 말라. 일등 하는 자리에서 발견되기를 원하지도 말고,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듣는 자리에서 발견되어지기를 고대하지도 말라. 시험을 치는 사람이나 일등을 놓고 경쟁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 중에서 뽑힐 때 기쁨을 얻지만 영원히 계속 이기기만 하고 계속 일등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보다 더 한 것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다가 노름판이나 퇴폐 이발소나 유부녀와 간통을 하다가 남편에게 들통나는 자리에서나 마약을 하거나 밀수를 하는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TV를 보면 그런 사람들은 잠바로 얼굴을 가리고 숨기 바쁘다. 우리는 어디서 발견되기를 원하는가? 부끄러운 자리에서 발견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발견되기를 원하는가? 더 나아가서 잠시 기쁘고 영광스럽다가 오래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발견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생명과 진리로 충만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자로 발견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기쁨이고 하나님의 만족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다. 그는 55억짜리 복권을 거머쥐는 사람보다 복이 있고 회사에서 유능한 사원이라고 사장의 칭찬을 듣는 사람보다 복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 예쁘다고 인정받고 뭇 남성으로 사랑을 고백 받는 여성보다 복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안에서 내가 발견될 때 우리 기쁨이 가장 크고 완전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가 바로 내가 만족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인해 만족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아들로 드려질 때 가장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 기쁨을 따라 우리를 더 기쁘게 하신다. 우주의 주권자가 기뻐하는 자리에 있는 자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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