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사탄의 속임수
딤전4:1∼3
오늘 우리는 지난 몇 시간 연속적으로 함께 생각하고 있는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가정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이러한 미혹에 우리가 빠지지 않고 승리할 것인가? 이것을 함께 생각하는 연속되는 시간으로 같이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나타나게 될 사탄의 교활한 공작에 대해서 미리 경고해 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지금 읽은 말씀이.  "성령이 밝히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 이런 것이 아니고 이건 뭐 틀림없이, '세상이 두 쪽 나더라도 사탄은 틀림없이 이런 짓을 할 것이다.' 하는, 그래서 사람들 속에 어떤 역사를 하는데 먼저 양심을 불로 지진다는 것입니다. '화인을 맞는다' 라는 말은 불로 도장을 찍는다 여러분들 보면 소나 뭐 그런 데에 쇠로 가지고 낙인을 만들어서 찍어 놓는 것들 그런 것들이 화인이죠.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사탄에게 속아서 사탄의 도구로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전혀 모르고 자기는 진리를 좇고 있고 자기는 예수를 위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알고 보면 사탄의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게 참 무서운 것인데 이렇게 해서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의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런 이야기죠. 자! 이건 바울의 시점에서는 후일에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는 이런 일은 이미 계속되어 온 일이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속아서 거짓된 믿음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야 적지만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어떤 갈망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 보려고 하고 경건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게 도루묵이 되도록 사탄이 계속 만드는 겁니다. 자기의 거짓된 믿음을 자기 혼자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걸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퍼뜨려서 '아! 저 사람들에게도 내가 이것을 말해줘야지.'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지적한 이러한 사탄의 거짓말, 사탄에게 속아서 헤맨다고 하는 이런 거짓말의 '가장 현저한 어떤 현상, 특징이 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오늘 배우는 본문에서 살펴보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하는 것입니다. 혼인을 금하라. 하는 말은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깁니다. 결혼하지 말고 그 다음에 먹는 것을 금하라 하는 것은 밥도 먹지 마라 하는 것은 아니고 육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식을 하면 안 된다.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결국 금욕을 말하는 거죠. 하지만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외식은 겉으로 경건한 척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외식이고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탄에게서 온 진리가 아닌 사람을 교묘하게 속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이런 현상이 있으리라고 했는데 말세야 어제도 말세고 오늘도 말세고 내일도 말세고 항상 말세죠.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벌써 상황이 다 말셉니다. 말세라는 것은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천 구백 구십 몇 년부터 말세다. 이런 것이 아니고 그 시대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은 언제나 신선하고 깨끗하지 않습니까? 물건을 처음 만들어도 그렇고 아이도 처음 태어나면 아주 깨끗하죠.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애가 나이가 70살 먹었는데도- 그러면 애가 아니죠- 그런데도 애가 생생하고 포동포동하면 우리는 그것을 늙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어리다' 그렇게 말합니다. 나이는 70인데 말세라 하지 않고 이것을 초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이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말세가 언제부터냐?' 하면 아담이 타락한 그 때부터 말셉니다. 사람이 딱 지음 받아서 몇 날 있지 않아 사탄의 말을 듣고서 이게 완전히 돌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개도 주인을 알아보고 따르는데 하나님이 지은 이 백성이 하나님을 몰라보고 헤매고 앉았다. 이걸 보고 말세라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나타나는 특징은 속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챙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지음 받았으니까 속에 그런 성질이 남아 있어서 그렇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욕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대로 실제로 따라 갈려고 하니까 너무 힘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취하는 방법이 겉으로만 경건한 척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양심과 하나님의 속에서 자꾸 "너 착하게 안 살래? 너 이렇게 안 할래? 사랑 안 할래? " 이렇게 요구하는 것을 무마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세의 현저한 특징을 이루는 이러한 사탄의 미혹은 신자들이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채워서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화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참 경건에 이르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육신의 모양을 내는 거짓 경건으로 외식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23절에 나와 있는 건데 조금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  요 근래 보니까 "안상홍 증인회"라는 어떤 무리들이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라는 진리를 자기들이 새삼 깨달았다 면서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안상홍이라는 사람이 몸담고 있던 선배 집단이 안식교입니다. 그 안식교에서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하는 그 안식일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 자! 이런 것들이 다 뭐냐하면 결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육신의 모양을 어떤 식으로 갖추라고 부추기는 사탄의 거짓말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본래 성경에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 했습니다.  '이런 것은 다 가짜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왜 이런 말을 썼느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이걸 명했거든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걸 하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하라고 해서 하는 거니까 네가 무슨 말이냐?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몸이란 말은 실체를 말합니다.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왔는데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흔적들에 대해서 붙들고 그리스도는 도로 거부를 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냐?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면서 편지를 주물럭거리고 사진을 들여다보고 하는 것은 없을 때야 좋지만은 사람이 왔는데도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고 편지만 늘 붙들고 앉아 있고 다 쭈그러진 증명사진만 펴서 '아! 사랑합니다.' 하고 그렇게 있다면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는 육신의 모양으로 경건을 냈습니다. 일요일날 교회에 나오고 교회만 다닙니까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경건한 모양으로 '내가 하나님 말씀을 사랑합니다.' 표를 내야하고 일요일날 장사한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이런 것을 하지 않음으로서 '나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 바쳐서 이 일에만 전념합니다.' 이 시늉을 해야 된다 말입니다. 옛날 같으면 성전이 있어서 거기에 사람이 가서 다른 장소에는 있지 않고 오직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지정한 제사를 드리고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어떤 모양으로 표현을 해야만 됐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실제로 없으니까.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 없고 실제로 자기와 접촉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야! 이 네모 짜리 통에, 이 법궤에 내가 십계명하고 이런 것을 적어 넣은 이 통을 만들어 놓을테니까 네가 이걸 하나님인줄 생각하고 이걸 모셔 놓은 집에 너희들이 오너라." 이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들과 만날 수 없으니까 성령이 오시지 않았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냈는데 이게 예수님이 와도 '너는 필요 없다' 그러고는 성전으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니 이게 얼마나 거꾸로 된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런 육신의 모양으로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일들을 계속해서 사탄은 사람들에게 자꾸 하라고 사주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구약시대만 하더라도 성전의 가치는 그 안에 있는 법궤에 있습니다. 성전의 진정한 핵심은 지성소에 있고 지성소의 핵심은, 그 컴컴한 커튼으로 가려놓은 지성소, 그 안의 핵심은 법궤에 있습니다. 그런데 법궤는 빼앗겨 버렸어요. 나중에.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면 이것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다못해 사람의 죽은 관이라도 넣어 놓고 그 위에다 봉분을 만들어 놓은 묘지보다 못한 것입니다. 묘지야 사람은 없지만 시체라도 그 안에 들어앉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 버린, 법궤가 사라져 버린 성전이라는 것은 이거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인데 그래도 사람은 그것을 죽자고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지요. 돌로 닫아 놓았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죽은 예수 끄집어내어 부활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들이 계속해서 무덤을 빙빙빙빙 돌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다면 이게 딱한 노릇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찌하여 산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하고 천사가 첫날부터 그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들로 여전히 미혹을 받고 있고 여전히 헤매고 있다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이 머린데 그 분의 말씀을 안 듣고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그 음성에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 눈으로 보고 내가 감각으로 느끼는 종교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경건을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을 빼앗기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을 빼앗긴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라고 하는 진짜 복을 내가 못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본 것을 의지하고 육체의 마음을 좇아서 행동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도 여러분들 무릇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외모에 휘둘리는 것을 우리가 더 입이 아파서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인물 좋고 속은 안 좋은 사람하고 인물 없고 속은 차있는 사람하고 둘 중에서 골라라 하면 열이면 열 뭘 고를지 뻔히 보면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라도 만약에 정신을 바짝 차려서 눈으로 보는 대로 행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것들을 따라서 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표현한 대로 "육체에 마음을 좇아" 이게 아니고 실제를 추구할 수 있다면 이런 문제는 안 나오겠지요.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시집 장가 갈 때 사람을 껍데기로 보고 친구 사귈 때 껍데기로 보고 음식도 때갈 좋은 게 맛있다 생각하고 빛깔 좋은 것부터 먼저 좋게 여기는 사람이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그의 외모를 넘어서서 진짜 그것을 금방 금방 그렇게 판단하고 가려내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지금 완전히 성령께 의지해서 정말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소경이올시다. 지뢰밭을 지나가는 소경처럼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 이 문제에 대해서 인도를 받아야 됩니다. 안 그러면 자기를 믿으면 안돼요. 경건한 목사, 사람 좋아 보이는 어떤 형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신학교 교수, 박사가 이야기하는데 태연히 "예수가 없다." 는 이야기도 하고 이런 것이 오늘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그냥 육체를 의지하여서 육체의 마음을 좇아서 그 보는 것을 의지해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의문이라는 것은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실제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이것이 골로새서 2장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앞에서 디모데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사실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말세의 현저한 현상입니다. 성경에서 아주 말세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나오죠. 디모데후서 3장 1절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그렇게 한참 이야기하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디모데후서 3장 4절에서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자! 이것이 얼마나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지 모릅니다. 조금도 모호함이 없어요. 여러분들 오늘날 교회에 가면 경건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선 교회에서 제일 경건한 사람이 목사라고 봐야 되니까 목사들은 우선 이런 양복 입는 것도 사실은 충분치 않다고 해서 검은 두루막이나 무슨 가운 같은 것을 입고 그렇게 서서 말도 집에서 보통 하는 말을 쓸 수 없고 경건한 어조로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경건에 대한 부담은 강한데 경건의 부담이 강하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경건하신 그리스도를 받아 들여야 됩니다. 사람 가운데 선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발버둥이 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될 것 같으면 이스라엘이 1500년의 역사 실험을 통해서 그들이 실패했을 리가 없지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랬지만 그들 중에 예수님이 왔을 때에 참 경건 가운데서 주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경건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일은 참으로 거룩하시고 선하신 그분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의 생명을 내가 누리는 것에 이제 착념해야 될 텐데, 우리가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될 텐데 이것을 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으로 자기는 경건하지도 않은데 사람들 보기에, 자기 눈에, 다른 사람 보기에 자기 양심을 무마하는 그 정도까지 어떻게 꾸미는 일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상한, 처음에 여러분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마는 저는 사실 교회에 잠바나 다 떨어진 추리닝 같은 것을 좀 입고 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실제를 어떤 식으로든지 외모로 꾸며서 덮는 이것부터 벗겨내야겠단 말입니다.  벗겨내고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그대로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병원에 오는 사람이 안 아픈 척 하면 안 돼요. 병원에 오는 사람은 자신의 실상을 그대로 나타내야,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집으로 돌아 갓! 하면 되는 거고 아프면 입원하든지 수술하든지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먼저 진단해야 내가 죄인이라는 걸 알고 내가 경건치도 않고 내 속에 선도 없고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고 상한 심령을 갖고 그 분 앞에 엎드려서 그의 구원을 절실하게, 절박하게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외모로 경건을 꾸민 사람들이 실제로 경건의 내용이 없어요. 경건의 능력이 없어요. 왜 그런가? 자기가 얼른 볼 때에 그만하면 꽤 괜찮은 것으로 착각해서 그래요. 제가 우리 교회에서 누가 헌금을 얼마 내는지 왜 그걸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마 다 아실 것입니다. 왜 헌금 시간도 없고 헌금을 어디에 이름을 적어서 내도록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속에 만약에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형제를 섬기고 선한 일에 기여할 마음이 있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고 없으면 안 했다고 누가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누가 봐서 따지는 사람도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 진실한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마음도 없고 누구에게 줄 마음이 없으면 안 하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이름을 붙여서 안 하면 부담스럽게 만들어 놓으면 속에는 경건이 없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없는데 돈주머니는 어쨌든지 풀려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외식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시는 부담을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옳다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기쁨과 안식과 만족을 주는 요거 하나만 보고서 우리의 모든 삶이 실질적으로 움직여지도록 우리는 삶의 틀을 짜야 됩니다. 어릴 때는 규율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 "알아서 해라" 하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제 멋대로 할 테니 아주 어릴 때는 우리가 규율을 줍니다. 뭐 세수 안 하면 엉덩이를 친다든지 어른이 되면 잘 알아서 할 일인데도 어릴 때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가 언제입니까? 구약시대입니다. 성령이 오기 전입니다. 그러나 오늘 신약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복된 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이, 하나님의 영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을 친히 장악해서 가르치고 인도하고 위로할 것을 위로하고 책망할 것을 책망하고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법도 필요 없어요.  주일 성수니 십일조 준수니 이것이 다 필요 없어요. 왜 필요 없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을 율법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되지도 않을 일을 강조하는 것보다 백 배로 더 사람들 속에서 그 일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하나님께로 사람을 가져다 맡겨 놓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은 해야 되겠는데 우리가 매일 느끼는 부담이 그것입니다. 경건은 해야 되겠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자기를 내어 맡기고 생명의 연단을 받는 이것은 싫으니까 육체로 경건의 모양을 내는 외식을 안 할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세에 이렇게 경건의 능력은 없고 모양만 자꾸 내는 풍조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에 예외인줄 아십니까? 우리는 예외겠습니까? 우리도 이 시대의 아들입니다. 우리도 다 이 시대에 속한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부모를 멸시하고 생명의 근원은 멸시하면서도 생명의 풍성함만 자꾸 추구하고 삶의 뿌리는 잘라 가면서도 삶의 열매만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맺히기를 원하는 이런 이중성과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 상당 부분 침투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이 이미 거기에 배어 있어요. 여러분 매일 텔레비전 보시죠? 매일 사람 만나고 매일 사람과 부대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사회에 오래 있다 보면 그것을 기본으로 사회를 판단하고 삶의 상황을 진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회에서 받을 스트레스를 그 사람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스웨덴이나 이런 나라에서 왜 자살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습니까? 왜 영국이나 이런 나라에 거지가 많고 왜 그런 나라에서 정신병자가 많이 생깁니까? 문명화되지 못해서 사회가 합리적이지 못해서. 도망간다고 해서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내 내면에서 나를 격동하고 있는 사탄을 좇아내고 나의 이 무지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결핍되어서 가난하고 허덕이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이런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의 원흉인데, 나 때문에 한국 사회가 더럽고 우리 교회가 시끄럽고 내가 우리 가족들 가운데서 말썽의 원인인데 내가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입니까? 내가 도망가면 내 있는 자리를 또 그렇게 만들 것인데. 어느 한 사람만 만약에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만 빠지면 된다든지 그러면 되겠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원인이겠습니까? 다 따지고 보면 다 자기 자신이지. 금욕이라는 것이 헛되다는 것은 육신의 모양을 바꾸거나 육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모양이 이러해서 문제라면 저렇게 바꾸면 되지요. 육신이 문제가 아니고 진짜 문제는 사람의 육신을 통제하는 속에 있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이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계에 전기를 안 꽂으면 돌아  가지를 않아요. 멀쩡한 기곈데. 에너지를 꽂아야만 돌아가는 것입니다. 컴퓨터에도 메모리라든지 주요한 CPU같은 칩을 빼버리면 이 기계는 먹통입니다. 사람 속에도 이 고기 덩어리를 움직이는 것은 정신입니다. 사람의 영이 혹은 생명이라고도 하지요. 이것이 사탄의 말을 듣고 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고 진리에서 멀어지고 자기를 지으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를 망하게 하는 원수 마귀의 말을 듣는 이런 식으로 고장이 났기 때문에 몸이 통제불능 상태에 있어서 몸도 괴로운 것입니다. 육체 자체가 원인이 아니에요. 고기를 먹으면 사람이 나빠지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풀만 먹어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뭘, 여러 가지 사람들 속에서 시달리니까 사실은 어려움이 있지요. 그래서 혼자 조용히 절간이나 산 속에 가서 도를 닦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절에 있는 중들 마음에 사실 그런 평안이 있는가? 진실한 승려들이 있어요. 도 닦는 사람 중에 진실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자기 속에서 자기를 스스로가 기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책이나 글로 내놓은 것을 여러분들이 보려면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안 먹거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식욕이나 성욕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생활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런 사탄의 가르침 이런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깨닫고 우리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 하는 것을 우리 속에서 확증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실제로 해 보면 이게 다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먼저 우리 안에서 식욕이 사라져야 되고 식욕이 사라지려고 하면 다른 종류의 욕망으로 우리가 채워져서 뭘 먹을까 뭘 마실까 어느 집에 국수를 잘 하는가 어느 집의 고기가 맛있는가 이런 것들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게 되어야만 해방이 돼요. 이게 안 되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런 것 하지 마라 저런 것 나쁘다 그렇게 하니 시간 버리고 돈 내버리고 사람이 매일 먹는 이야기만 하니까 보기 안 좋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돼요. 내가 공허한데 뭐.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그 여자에게 그런 일이 얼마나 부도덕한 일인지 압니까? 하고 아무리  그 앞에서 설교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도 남자가 좋은데 어째요. 그런데 뭐 무슨 수가 있어요. 답은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참 만족이 되는 신랑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가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제까지 네가 마음에 공허한 것들을 찾기 위해서 신랑도 좇아 가보고 친구도 쫓아 가 보고 영화관도 가보고 술도 마셔보고 남보다 튀는 행동도 해 보고 그래서 네 삶의 의미를 찾고 네 공허함을 메워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다 너에게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받아들이고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 이렇게 하니까 그 여자의 문제는 그냥 다 날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가서 "나는 구원받았다. 여러분들!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다 여기 와 보라." 여자는 이제 남자를 쫓아서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금한다고 해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들을 때야 '옳은 말이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면에는 여전히 육체를 억압하고 억제하고 육체를 통제해서 여러분들의 삶에서 뭔가 평안을 찾고 여러분들 시끄러운 속과 혼란스러운 삶을 좀 평정시키고자하는 습관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나는 형제들 안에서 늘 그것을 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오랫동안 계속하면 결국 인생을 낭비하게 됩니다. 계속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어디를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이걸 찾아서 이 해법과 저 방법을 찾아서 여러분들 더 이상 헤매지 말고 진짜로 우리가 이론으로, 관념으로는 입이 닳도록 말해온 것이지만 이제는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를 실체대로 알고 접촉하고 그와의 관계를 가져보도록 해야 됩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어 봅시다. 예수 안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 사마리아 여인을 해방시켰고 예수가 그에게 온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과 구원을 준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반드시 그대로 체험되어 집니다. 육신이 타락과 범죄의 도구고 표현수단이긴 하지만 결코 원인은 아닙니다. 영이 죽은 것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죄와 육신의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어쩌든지- 여러분들에게 다시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어서 속에서부터 영이 살아나고 생명이 회복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되지 육신 자체를 억압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아무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결국은 이걸 통해서 헛수고와 시간 낭비를 하게 만들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경건으로 나가게 하는 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거짓 경건은 그냥 본전이 아니고 사람에게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나는 오늘날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안 나오면 좋겠어요. 마음이 없으면, 형제들이 보고싶고 사랑스럽고 이 안에서 정말로 이 사람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그 재미를 내가 어찌 놓칠 수 있으랴! 이런 마음이 없다면 교회에 좀 북적거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참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데 교회에 나오면 그 사람은 뭘 하겠습니까? 뭔가는 그래도 시간을 들여서 힘들여 왔는데 뭔가를 추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안에서 자기를 자랑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아니면 사람들 안에서 재미있는 거리를 찾고 앉았다든지 큰 교회 같으면 장사를 한다든지 뭐 그런 거를 해야 되는 거지요. 예수 쫓기에 바쁜 사람은 교회 와서 그런 것을 할 새가 없어요. 형제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입을 딱 주시하면서 '이 형제가 무슨 하나님 말씀을 나에게 하려고 하나?' 이런 것에 신경 쓰기 바쁜데 언제 앉아서 육신적인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스트레스를 주거나 싸우고 할 새가 어디 있어요. 오직 예수에게 바쁜 사람은 진짜 예수가 필요하고 진짜 형제가 사랑스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을 만끽하고자 하는 사람만 교회에서 다른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겁니다. 자! 그러므로 영이 문제고 육신이 문제가 아니고 생명이 문제이지 행동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문제지 음식도 여자도 술도 문제가 아닌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탄의 술책은 언제나 경건을 가장해서 사람을 참 경건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외식하게 하는 이것이라는 것을 깊이 깊이 기억하고 우리가 여기에서 헤매지 않도록 그리고 단지 외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참 경건, 참된 영광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또 그분에게 순종하고 성령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체험해야 되겠지요. 그래야만 가짜에도 우리가 시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58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9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