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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인사이자 축복이다. 여러분은 이 구절에 대해 매우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이 구절이 보통, 집회 끝에 목사가 성도들을 축복하는 축도(祝禱)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를 말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신령한 복의 근원이다. 주 예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감추진 것이지만 은혜는 그 사랑이 밖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실제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 사람에게 전달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성령님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전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역사를 발견하게 하시며 붙잡게 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요구 곧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며 그 생명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마음을 열고 순종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렇게 하여 그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복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만드신다.

다른 모든 서신은 끝의 축복과 인사에서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만 했는데 오직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도 말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고린도교회가 성령의 교통하심을 깊이 누려야만 할 특별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언급한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그 모든 것들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강조점은 분명히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고린도교회는 확실히 성령의 역사에 대해 주목하고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소위 성령의 은사는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은혜의 전달자로서의 성령은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좀더 성령과 깊이 사귀고 성령과 깊이 씨름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 혼자서 다 이루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함께 이루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만 말해도 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역사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베푸신 하나의 비유 말씀을 살펴봄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씀들은 잃어버린 인류를 되찾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 곧 사람을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지는지를 볼 수 있다.

첫째 비유는 잃은 양과 그를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둘째 비유는 잃은 동전(드라크마)과 그것을 찾는 여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셋째 비유는 잃은 아들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주님은 한 가지 비유만을 사용하지 않고 세 가지 비유나 사용하셨을까?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인류가 잃어버려졌다는 사실을 다 말할 수 없었을까? 또는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잃어버린 인류를 되찾으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다 말할 수 없었을까?

주님이 세 가지 비유를 함께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목적이 단지 '사람이 잃어버려졌다는 사실'(인간의 타락)만을 말하거나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려 하신다는 사실'만을 말하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건지기 위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다 상세히 말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이 단지 잃은 자(죄인)에 대해서만 말씀하려 했거나 그를 불쌍히 여기며 찾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씀하려 했다면 한 가지 비유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 그 잃은 자를 건지시기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자세히 말하고자 했기 때문에 세 비유를 동시에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세 비유는 다 필요하며 어느 하나라도 생략될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는 잃은 자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역사 곧 사람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와 아들 하나님(그리스도)의 역사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린도후서 13:13의 축복에서 언급된 내용과 일치한다.  

첫째 비유는 선한 목자로서의 주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자기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양을 찾으러 나서며 양을 얻기 위해 위험과 목숨을 잃는 것까지도 감수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실현하신다.

둘째 비유는 잃은 동전을 부지런히 찾는 여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비유와 첫째 비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비유에서 선한 목자는 밖에서 양을 찾는데 비해 둘째 비유에서 여자는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다. 그러므로 찾는 장소가 다르다. 이것은 주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집 밖으로 나가서 양을 찾는 선한 목자 곧 우리 주 예수님은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나서 세상으로 오셨고 천하를 다니며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나 성령을 상징하는 두 번째 비유의 여인은 집 안에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잃은 양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구원을 성취하셨고 성령님은 사람 안에 진리의 빛을 비추사 잃어버려진 마음을 회복하심으로써 그 구원을 실제로 누리게 만드신다.  

이 모든 역사는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을 건지고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그리스도가 오셨고 또한 성령이 부어졌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두 가지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안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하지 않고 한 가지만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말씀만 전하고 주님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라고 하신 말씀은 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객관적이고 근원적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성경책이 진리의 책이지만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해서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보혜사는 그리스도라는 은혜를 전하여 알게 하며 누리게 하며 유지하게 하는 분이다. 그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은혜는 사람에게 실제로 작용하여 사람을 살려내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실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님을 보내주셨을 뿐 아니라 그를 실제로 누리도록 빛을 비추시며 감동시키는 성령님도 보내주셨다. 이 빛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말하는 만큼 성령의 빛 비추시는 역사 즉 사람 안에서 사람과 교제하시며 하나님을 알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이 두 비유가 나온 후 비로소 세 번째 비유가 길고 자세하게 설명된다. 마지막 비유는 집 나간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려면 주 예수님이 잃은 아들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비로소 의로우신 아버지는 아들(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속을 사람들에게 전하지(비추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상태를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며 감히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비유에서 말하는 바 주님의 구속 역사가 없고, 둘째 비유에서 말하는 바 성령님의 빛 비추시는(감동하시고 교통하시는) 역사가 없다면 셋째 비유에서 말하는 바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일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 아버지께 돌아와 안기는 구원에 대해 말씀하기 위해 주님은 그 앞에 선한 목자가 와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에 대해 말하셔야만 했고 또한 성령께서 빛을 비추시며 사람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말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성령의 빛이 없이는 아무도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달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리스도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미움과 다툼과 자랑과 시기와 분열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시며 구원하셨으며 함께하신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매일 함께하고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았는데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는데 실은 사탄에게 속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그 구원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없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 안에서 있었다면 사랑과 연합과 거룩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죄와 불의와 교만과 분열이 여전히 득세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들이 성령과 깊이 사귀지 못하고 있으며 성령의 감동과 교통 안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령을 주목하지 않으며 성령께 순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사람이 자기의 죄나 의나 심판에 대해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깨달을 수는 없다. 성령의 강력한 빛에 의한 책망이 없으면 진정으로 회개할 수도 없고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도 없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써 구원을 이루시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것을 사람에게 알리사 사람으로 담대함을 얻게 하고 하나님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도록 만들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그리스도의 그 구원을 힘입어 실제적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은 특히 우리 안에서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신다. 주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다. 하나님 아버지는 탕자가 설사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 역시 주님의 죽으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주님이 죽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주님이 죽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의와 모순되거나 충돌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의 사함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고 엄중한 일인 것처럼 주님이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한 마디도 책망이나 조건을 달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주님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셨으며 모든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성령께서 빛으로 역사하사 벌써 그의 죄를 깨우쳤고 주님의 피를 의지하여 그 죄의 용서를 받았으며 다시는 범죄하지 않게끔 그의 마음에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암시하는 두 번째 비유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선한 목자로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고 하나님 아버지가 집에서 기다리신다 하더라도 만일 성령님이 빛을 비춰주지 않는다면 탕자는 여전히 죄악과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죄를 깨닫도록 하고 자기의 처지를 보게 하며 주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즉 주님은 성령님이 오시면 세상에 대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실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7-11)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죄란 첫째,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사탄이 시키는 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범죄하며 인생을 허비한 것이며, 둘째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는지(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깨닫게 하신다.

또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만 책망하시는(일깨우시는) 것이 아니라 '의'에 대해서도 일깨우시며 그리하여 우리로 의에 대해 확신을 가지도록 역사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심으로써 하나님께 (우리의 구속주로) 인정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의롭게 되었으므로 그를 위해 살 수 있고 그에게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음을 확신시켜주신다.

또 성령님은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즉 사탄은 주님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아서 더 이상 세상의 지배자가 아니므로 그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왜 아직도 사탄을 따르느냐고 물으신다.

이 모든 일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신 것과 함께 성령께서 그 구원, 그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역사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의 역사는 곧 죄인에 대한 책망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책망은 곧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의 책망으로 인해 우리의 죄와 문제들을 보게 되고 마침내 빛(진리)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역사만 주의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빛 비추시는 역사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로 강조해 온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나 막연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기는 했지만 그 아버지 사랑의 내용과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요 표현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진리의 빛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제로 깨닫고 받아들여서 누리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더욱 소홀하게 다루었다.

어떤 교회들은 그보다는 낫게 해왔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는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소홀히 했다.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말했지만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반대로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에만 관심을 두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왔다. 그들은 성령에 대해 주의하고 성령을 체험하기를 원했지만 성령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역사하시는 분인지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마치 성령님의 주된 역사가 사람들로 어떤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인 것처럼 가르쳤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에 주목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에만 주목한다면 그것은 기초 없는 공사를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사역 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파이프는 물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파이프가 성령님이라면 물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파이프가 없으면 물이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고 물이 없으면 파이프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 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에게 함께 있을지어다" 라는 말을 한 것은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잘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은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사랑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은혜이다. 바울이 그의 마지막 축복과 인사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역사로 실체화되고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시작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신다. 여기서 '교통'이란 말은 사귐, 친교(communion, fellowship)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누가 그것을 우리 앞에 던져놓고 현안 문제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고 많은 문제들과 관심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생과 천국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보물이라도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눈을 열어서 그것의 가치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취하는 일의 급함에 대해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 세계에 접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사람의 죄와 그로 인한 저주와 심판과 멸망이 실제적이고 심각하고 급한 문제일지라도 사람의 눈은 그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시며 사람 안에 불을 던지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 길을 찾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 및 사탄의 존재와 역사, 사람의 죄와 무능과 실패 및 그리스도의 승리와 구원에 대해서 사람이 주목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려면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사람과 사귀며 가르치며 설득하시며 책망하시며 씨름하시는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혼자 사람을 속으로 사랑하시지 않고 그의 사랑을 밖으로 표현하신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사랑 곧 은혜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그 은혜를 실제로 누리게 해 주신 것에 대해 더욱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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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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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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