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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13장 11절 말씀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향한 바울의 마지막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인사와 권고의 말, 이 두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사라는 것은 "위로를 받아라" 이런 말이라든지 혹은 "평안해라"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런 게 인사지요.  "복 받아라" 이런 게 인삽니다.  그 다음에 "기뻐하라, 온전케 되어라, 마음을 같이 하여라" 하는 말은 권고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자, 먼저 이 "위로를 받으라" 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위로를 받아야 되니까 그렇지요.  이 사람들이 아무리 부끄럽고 또 실패와 허물이 많은 교회이지만 그래도 교회니까 다시 말해서 악한 세상 가운데 놓여서 예수로 인해서 핍박도 받고 어려움도 겪고 하는 그런 교회니까 "위로를 받으라" 는 말을 한거죠.  그 다음에 "평안하라" 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인사말이라고 앞에서 소개했지만 인사말로도 볼 수 있고 또 어떤 권고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말한 이유도 앞의 "위로를 받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은 교회가 편치 못하니까 편안해라, 평안해라 그렇게 말한 겁니다.  뭐가 편치 못하겠습니까? 밖으로는 세상의 환란과 핍박이 있고 또 환란과 핍박이 없어도 우리가 그냥 세상 살아도 힘들지 않습니까?  이 세상살이가 저주받은 땅 위에서 우리의 약한 몸으로 살아가기가 참 힘들지요.  그래서 마음이 편치 못한데 평안하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내부적으로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이건 뭐냐하면 하나님을 잘 못 믿는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으면 환경이 안 좋아도 마음이 편안할 건데 믿음도 없으니까 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불안과 염려, 걱정 이런 것들이 항상 있지요.  그 다음에 이제 더 나아가서 사탄에게 속아서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찌그럭거리며 싸우니까 편치를 않지요.  그러니까 이런 각종 안팎의 문제들로 인해서 안에 평안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너희 복 좀 받아라" 라는 차원의 인사말로 "평안해라"는 말도 할 만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것은 명령이다. 제발 교회가 평안해야 되는데 예수 믿고 좀 평안해라 하나님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내면으로부터 깊은 평안을 유지를 해라 " 이런 어떤 권면과 하나의 명령의 성격을 띤 말로도 이 말을 할 수 있다 이거죠.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종류의 말씀을 하신 것을 우리가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이 같은 이야기지요.  이것은 다 하늘의 평안을 땅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기를 바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의 평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인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어야 돼요.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평안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담대하고 안식이 충만한 생활, 이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믿는 것이 문제죠.  문제는 역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믿음의 눈으로 사느냐, 육신의 눈으로 사느냐 이것이 관건이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겁니다.  눈떠진 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의 환경과 모든 여건들과 일과 사람 이걸 믿음의 눈으로 보는 거예요. 그것으로 보면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한 것과 장차 우리에게 누리게 하실 것으로 약속하신 것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확' 보이게 되죠.  믿음이 없으면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복된 위치로 부르심 받았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줬는지도 안 보이고 오직 사람들이 나를 압박하고 환경 속에서 짓눌리는 그것만 보이는 겁니다.  그 다음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 소망이 없지요.  미래에 내가 무슨 앞으로 승산이 있는가 오직 세상에서의 환경과 여건에 수판을 놓고 계산하는 것밖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천하만물이 다 우리 것이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하는 이런 약속의 말씀들은 안 보이는 거죠.  그리고 그 길을 받아서 걸어가는 사람일지라도 가는 길이 어렵단 말이에요. 가는 과정이 힘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낙심하고 피곤하고 지치고 선한 일 하다가 진리를 따라가다가 참다가 그냥 포기해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신다.  지금 길을 걸어가는 노정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면 힘을 얻어 계속 갈 수 있을텐데 그것을 못 보는 사람은 그냥 사탄이 자기를 위협하는 것만 보이겠죠.  자기 약한 것만 또 보이겠죠.  그러니 승리를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예수를 믿으라는 이야깁니다.  믿음으로서 마음의 평안함을 가지고 있으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들을 못 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누가 옆에서 "평안해라" 말한다고 해서 평안이 되겠습니까?  내 마음이 편치 않고 평안할 것도 없는데 억지로 "평안하라"고 말한다해서 평안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평안하라 고 말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이 평안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평안할 만한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까 그것을 보고 평안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물질적인 환경과 세상의 형편만 쳐다보지 말고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이 복을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행기에 어떤 사람이 타고 앉아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꾸 앞만 쳐다보면서 "나를 좀 높여달라, 나를 좀 띄워달라, 나를 좀 날라 다니게 해 달라" 이렇게 말을 한다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뭡니까?  "바깥의 창을 한 번 내다 보라"는 것입니다.  바깥의 창을 '쓱' 내다보면 아! 자기가 날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건 간단한 거예요. 그냥 눈이 어둡고 그것을 못 보니까 계속 앉아서, 방안에 앉아서 계속 쳐다보면 하늘에 있으나, 땅에 있으나 지하로 들어가나 뭐 방이지요.  그런데 내다보면 '아! 내가 공중에 떠있구나, 가라앉아 있구나' 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눈이 오직 이 복 없는 시각으로 고정된다면 그건 참 복이 없는 겁니다.  매일 누가 나에게 괴롭게 하고 어제도 누가 전화로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오늘도 직장에서 누가 나를 긁고 있어서 내 신경이 날이 서고 하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면 그건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평안하라, 기뻐하라"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 대책 없고 되지도 않을 그런 말을 빈말이라고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 그러하다고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먼저 눈을 열어서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을 열어서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형편만 자꾸 쳐다보면서 불평과 원망과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눈을 들어서 위를 쳐다봐야 돼요.  우리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위를 봐야 돼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4절에 바울이 한 이 이야기는 바로 자기 실상을 보지 못하고 매일같이 사탄의 거짓말만 귀 기울여 듣고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오그라져 있는 사람들에게 제발 눈을 열어 실상을 좀 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런 인사말과 더불어 바울은 형제들이 기뻐하고 온전케 되고 또 마음을 같이 해서 하나가 되고 연합이 될 것에 대해서 또 권고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바울의 이야기가, "기뻐하라, 온전케 되라, 마음을 같이 하라" 하는 이런 말이 단순한 권고라고도 느껴지지 않고 거의 명령에 가까울 정도의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볼 때마다 받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바울이 이것을 한 번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군데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뭘? "기뻐하라, 그리고 앞으로 나가라, 온전케 되어라" 하는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통틀어서 바울의 이 교회를 위해서 계속 강조해 오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 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뭐 어느 군데든지 교회마다 거의 똑같이 하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뻐하라는 문제와 온전케 되는 문제 또는 완전으로 나가라 하는 이 문제 -진보의 문젭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연합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 모두가 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뜻을 품고, 그래서 한 몸을 이루는 이 문제, 이것은 정말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관해서 우리가 바울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는 보통으로 그저 인사말로 들을 정도가 아니고 이것이 정말 우리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로서 아주 강력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선 여기서 기쁨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확실한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성령의 현저한 열매라고 몇 가지를 쭉 이야기하는 중에 제일 먼저 뭐가 나왔습니까?  성령의 열매라고 제일 먼저 말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사랑과 희락, 희락이라고 하는 것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사도행전 2장 28절에서 말한 이것이 답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이런 말을 했는데 생명을 얻은 사람은 다시 말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틀림없이 기뻐하게 되어 있으니까 성령의 열매가 기쁘다는 것입니다.  왜 생명을 얻으면 이렇게 기뻐하게 되는가?  하나님이 그것을 딱 노리고 그것을 목적으로 사람을 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재미와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야! 너무 좋다,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이 정말 너무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서 너무 너무 나는 기쁘다' 이렇게 찬송하라고 사람을 건져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건진 사람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기쁨이 없으면 이것은 가짭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생명의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내적인 현상입니다.  '내가 기쁘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깥으로 표출되면 어떻게 됩니까?  기쁨이 감사와 찬송으로 나오겠죠.  기쁘니까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자랑을 하게 되죠.   나에게 이 큰 덕을 베푸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 덕을 내가 선전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좋으면 자연히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도하고 지금 사람을 건져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적인 평안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안에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으면 바깥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꼭 안에 있는 것은 언제든지 밖의 현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안에 평안이 있으면 바깥에는 여유와 관용이 나오고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있어서 내가 평안하고 급한 게 없고 내가 아쉬운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밖으로 행동할 때 조급하지 않습니다.  첫째 가장 큰 특징이 조급하지 않습니다.  그건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화를 낸다든지, 각박하게 군다든지, 멱살을 잡고 "내 돈 내놔라" 하는 이런 것이 아니고 좀 여유 있게 행동하게 되지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기름지게 하면 내가 빡빡하지 않고 내가 위로부터 받아서 넉넉하고 헐렁한 사람이 못되면 그건 뭐 아무리 내가 바깥으로 여유 있게 행동하고 싶어도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 항상 빡빡하고 깐깐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기쁨이라는 것은, 이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아주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다면 그 개인적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은 예수를 참으로 믿고 있지 못하다 라고 봐야 될 것이고 교회로 말하자면 이 교회가 기쁨과 그로 인해서 감사와 찬송이 있고 또 그것 때문에 여유가 있어서 서로 사랑하고 하는 것이 없다면 다른 것은 다 구비했다 해도, 그 교회에 다른 굉장한 것이 있다해도 이것은 다 온전치 못한 것이고 다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는 기쁨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왜 기쁨이 없었을까요.  기쁠 일이 없으니 기쁨이 없는 거지요.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뒤로 보나 어디를 봐도 기쁠 일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가 또 그렇게 보면 참 기쁠 일이 없어요.  뭐가 하나 '탁' 터지고 뭐가 돼야 그래도 기쁨이 있는데 예수 믿고 세상 살아가다 보면 되는 일은 일년에 하루 있을까 말까 이고 안 되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그 다음 이것을 예수를 믿어서 꼭 그렇다 라고 말할 것도 없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그다지 기쁘지 않아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기뻐할 일이 없으니까 기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그러나 문제는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위를 쳐다보고 기쁨을 주시는 분을 바라볼 줄 모른다는 것 이게 문제지요.  세상 사람들은 만상을 찡그리고 살아도 그건 당연한 거예요.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도 이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야 할 것만 자꾸 보고 마음을 오그라뜨리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교회를 향해서 "기뻐하라" 고 말한 것은 아까 "평안해라" 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눈을 좀 크게 떠 보라 하는 말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떠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이 놀라운 역사,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이 생겨요.  그러면 기쁘게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 기쁨이 없는 것 만큼이나 고린도교회 안에 또 없는 것이 마음을 같이 하는 이것인 것 같아요.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뜻을 같이 하고 말도 같이 하고 일도 같이 하고, 이러면 좋은데 이 교회가 그게 안 되는가 봐요.  그래서 마음을 같이 하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은 이 교회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직 어린아이고 젖먹이에 불과한 그런 수준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죠.  자, 이 기뻐하는 것이나 온전케 되는 것이나 형제들이 마음을 같이 해서 하나가 되는 이 문제는 다 너무 중요하고 또 깊이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기 때문에 한 시간에 이것을 다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오늘은 다른 것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기뻐하는 문제만 계속해서 좀 더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자 이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빌립보서 4장 4절이지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하는 이 말씀입니다.  이 기뻐하라고 하는 것이 제가 아까 권고이자 명령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왜냐하면 꼭 그렇게 해야 하니까, 그런데 말씀 드린 대로 당위성이 있다고 해서 기뻐해야 되니까 기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되죠.  이것은 어떤 현상에 따르는 자연스런 반응이지 누가 옆에서 막 찌른다고 해서 그 기쁨이 없다가도 생기고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이 말을 할 때 어떤 상황에 있었던가? 우리가 아는 대로 감옥에 갇혀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는 어떻게 기뻐했고, 자기도 기뻐했고 그 다음에 형제들보고 기뻐하라 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뭣 때문에 그렇게 했는가?  바로 그 4장 4절 자체에 답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앞으로 올 때가 가깝다는 말이 아니고 영어 번역에 보면 Lord is at hand. 손 닿는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at hand.  또 Lord is near. 옆에 있다 이런 뜻이죠. 아까 말한 것처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신다" 는 것과 같은 말이죠.  그 이유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형편으로는 감옥에 갇혀있으니까 전혀 기뻐할 형편이 안되죠.  감옥에 갇혀있는 것만이 사실상 이 사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는 더 괴로웠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으면 돌아다니지 않아도 차라리 좋았다고 말할 그런 형편으로 바울이 사실상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기뻐했지요.  이것은 세상과 육신의 형편이 자기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것보다는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면서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 안에서 재미있게 하는 것이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마약 하는 것을 이야기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마약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또 술 마시면 안 좋다는 것을 다 알지만 그것을 왜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누가 비난하고 돈 들고 몸 상하는 것보다도 그 순간에 내가 이것을 '훅' 들어 마시는 데서 오는 기쁨이 더 크니까 그런 것을 하죠.  사람은 딱 저울질해서 '내가 그 때 술 안 마시고 맨 정신으로 앉아서 몸 건강하게 되어 버틸만하면 버티죠.  근데 그게 내 인생에서 더 재미가 없고 내가 선택할만한 일이 못 되고 그 때 차라리 내가 몸이 상할지라도 내가 이걸 퍼다 마시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도 이건 절대로 억지로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지금 그런 종류의 기쁨이 얼마간씩 있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 보다 세상이 우리를 누르는 것이 더 크다면 우리는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이것이 잠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이 사람이 지금 이야기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문제 같으면 이것은 더 내 속 사정이 어떠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될 것입니다.  만약에 내 내부적인 형편이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바깥에 어떤 기쁠 거리가 조금 있다해도 잠깐 기쁘지 어떻게 항구적인 그런 기쁨이 오겠습니까?  

"너희에게 이것을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자 여기서 기쁨의 근원이 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 기쁨이 너희 속에 들어가서 너희를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의 환경이 좋고 네가 잘 낫고 돈이 많아지고 인물이 잘 생기고 이런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다 내 기쁨이죠.  근데 내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지금 기뻐하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 내 기쁨이 아니고 남의 기쁨을 가져와서 내가 기뻐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기쁨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문제를 우리와 관련을 지어서 아주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기도에 보면 요한복음 17장 13절에 이런 기도가 나오는데 "지금 내가 아버지께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왜 아버지께로 가야만 했는가? 왜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가?  왜 세상에 오셨고 고난을 받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을 하려고 애를 썼고 그 다음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했어야 했는가? 그것이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우리의 기쁨의 어떤 원동력, 기쁨의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우리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를 기쁘게 만들고 그것이 또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늘 함께 있는 거니까 항상 우리를 기쁘게 만드는 이런 어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이런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기쁨이란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든지 사업이 쫄딱 망했다든지 하는 이런 사람이 있는데 이건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멍하게 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에서 코미디프로를 보는데 어떤 개그맨이 어떻게나 웃기는지 한동안 배를 잡고 웃는다 그래서 기쁨이 생긴다.  이런 식입니다.  이게 아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건 언제나 순간적이지요.  내 속에는 기쁨이 없는데 밖에서 어떤 것이 잠깐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죠.  술 마시는 게 이런 것이고 마약 하는 것도 이런 것이고,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항상 괴로운데 아이가 어느 날 일등을 했다든지 하는 이런 것이 다 그런 기쁨입니다.  돈 없는 사람이 사업에서 어느 날 돈이 '슬슬' 벌리기 시작해서 성공했다든지, 엊그저께 55억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사람처럼 그런 게 하나 '뻥' 터진다든지 하는 이런 것이 다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중병이 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자기는 아들이 죽고 부인이 죽고 다 망했는데 밖에서 누가 잠깐 웃기는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건 결코 자기 것이 될 수가 없어요.  복권이 자기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가 복입니까?  밖의 돈이 굴러왔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은행에 매일 앉아 사는 사람도 기쁘지 않잖아요. 은행의 직원은 매일 돈 보따리 안에 들어앉아 있는데 뭐 별로 기쁘지 않잖아요.  회장님이 돈 수억원씩, 수십억원씩 가지고 주머니에 넣어서 매일 풀어도 그런 사람들이 행복해서 죽겠다 하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어요.  우리는 우리 안에서 밖에 있는 것들이 우리 것이 되어지지 않는 한 그야말로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 기쁨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밖의 것이더라도 우리를 항상 기쁘게 만들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밥을 먹고 고기를 먹는데 그것이 내 피부를 막 윤택하게 하고 그래서 나를 건강하게 하고 살찌우게 된다면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웃고 기뻐한다 이것은 아닐지라도 내 몸은 그것을 기뻐하겠지요.  또 그것은 내 것이 되었으니까 어떤 쌀과 고기, 나물이나 야채나 이런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지요.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내 것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돈이나 이런 것은 그런 것도 되지 못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 생명이 되고 우리의 정신이 되고 우리의 인생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되어서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 안에서 어떤 생각을 이루어갈 때 그 때 내가 가만히 돌아보면 평안하고 기쁘고 그리고 이것은 내가 아프나 건강하나 내 손에 돈이 좀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이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항상,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이 내 안에서 나를 항상 만족하고 항상 기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변화된 인격,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서 기쁨이 생기고 만족이 생기는 이것 아니고서는 우리를 항구적으로 기쁘게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깥의 사정이 항상 좋을 수도 없고 또 항상 좋다해도 주관적으로 내 속에서 그것을 기쁘게 여기지 못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거지가 볼 때야 부자는 매일 기뻐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는 밥만 있으면 너무 너무 좋은 사람인데 그 사장님은 매일 앉아서 고기나 뜯어먹고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속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 속이기 때문에 그 사장이 고기와 함께 앉아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의 속에 주님이 계셔서 삶의 의미를 불어 넣어주시고 기쁨을 계속해서 생성해 주시는 것을 경험할 때 그 사람은 밖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항상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시 말해서 사탄의 거짓말이나 매일 듣고있고 사탄이 심어주는 망상만 받아들여서 매일 오르지 못할 나무만 쳐다보면서 맨 날 이것 성취하고 나면 그 다음 것, 또 더 높은 것 더 높은 것 매일 이렇게 쫓아다니는 사람은 밖의 일이 얼마나 어떻게 만족되어야 그 사람 안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자 우리는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기뻐해야 되는가?  또 우리는 왜 기뻐하는가?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참 기쁜 삶을 살았습니다.  웃고 돌아다니는 것은 우리가 못 본 것 같지만 그 내면에 큰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했기 때문이죠.  마태복음 3장 17절에 보면 이 분이 벌써 세례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변화산에서 모습이 아주 영광스럽게 변할 때도 또 역시 베드로에게 같은 음성이 들렸지 않습니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그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다시 살리려고 할 때 이 이야기를 받아서 자기 말로 했습니다.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여 항상 내 말을 듣는 것을 참 감사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늘 자기를 기뻐해서 내가 말만 하면, 내가 입만 벙긋하면 '오냐 오냐' 널름 널름 들어주는 분이니까 기쁘지요.  사람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고 자기 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기쁠 수 가 없는 겁니다.  우리 집의 아이나 식구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 밥도 잘 먹고 인물도 잘 생기고 뭐 아무 부족한 게 없어도 누가 그 사람을 기뻐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기쁨이 없어요.  매일 따라다니면서 뭐 까다로운 시어머니처럼 "청소가 잘못 됐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 너는 뭐 어떻다. 옷을 비뚤하게 입었다. 98점 받으면 왜 99점 못 받았느냐?" 이렇게 말하면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영점 받은 사람에게라도 "아! 영점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영점을 받았느냐? "하고 기뻐해 주면 그 사람은 기쁘죠.  그리고 그 기쁨이 자꾸 자꾸 사람 속에서 샘 솟아나면 그 사람이 그 바보 멍텅구리 말하자면 딴 사람이 볼 때 기뻐하지 못할 그런 사람이었다가도 기쁠만한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것 참 신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는 사실은 기뻐할 만한 인간이 못 돼요. 우리가.  이 죄인이고 형편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기뻐하신다니까요. 기뻐하는데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니까 아! 우리가 정말 기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마음이 기뻐할 뿐 아니라 내가 마음이 기뻐하는 것도 그렇지 내가 정신이 돌은 사람도 아니고 나를 쳐다보면 형편없는 사람인데 매일 아무리 봐도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그게 기뻐서 되겠습니까?  실제로 기쁠만한 사람으로 바뀌어 가니까 자기도 기쁜 것이지요.  순서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그 다음 하나님이 매일 매일 나를 찾아와서 나를 기쁘게 하시고 성령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교회 생활하는 가운데서 막 서로가 용납해 주고 축복을 하고 "너 잘 났다" 하고 이런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정말 기쁘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내가 기쁜 사람이 진짜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기쁨이 나오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기쁨은 아버지가 그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며 택했구나.  기뻐서 나를 오늘까지 기쁜 사람이 되도록 진짜 기쁜 사람이 되도록 나를 빚어 가셨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에베소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하게 천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뭔데 주님이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며 이렇게까지 돌아보시며 이렇게까지 건사를 해 주십니까?  시편에서 이 말을 한 기자의 심정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천지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니까 내가 기쁜 사람이 안 될 재간이 있느냐는 겁니다.  왜 우리는 기뻐합니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왜 우리는 기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니까. 그리고 그 기뻐하는 내용이란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서 만들어진 참 기쁠만한 그런 영광된 사람이니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걸로 태어났으니까 우리가 기쁜 것이죠.  키가 150센티미터라도 기쁜 사람인데 180이 되어야 기쁜 것이 아니고 130이라도 기쁘다는 말입니다.  코가 여기 붙어 있어도 기쁘지만 코가 이상하게 되어서 저기 붙어 있어도 기쁘다는 말이죠.  내가 코가 여기 붙어있어야 기쁠 사람이라면 그건 기쁨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으로 기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코가 머리 꼭대기에 붙어 있는지 발바닥에 붙어있든지 어찌되었든지 우리를 그냥 지으시고는 '아! 참 기쁘다 내가 심히 만족스럽고 보기 좋다.' 하나님이 그것으로 오늘 일을 끝내신다 이겁니다.  천지창조는 완성이다. 사람을 만들고 난 뒤에 너무 너무 좋다 이겁니다.  너무 기쁘고 너무 좋다 이것입니다.  자식 못 낳는 사람이 한 십 년만에 아들 낳은 것처럼 낳고 나니까 너무 너무 좋고 기쁘다는 겁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기쁘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 다른 무슨 기쁜 사유를 갖다 붙여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건 다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건 다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또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여자들을 보면 얼굴이 예뻐지기 위해서 갖은 노력들을 하지요.  그래서 겨우 예뻐지고 나면, 우리가 그런 처녀들을 보면 '미스코리아' 이런 곳에 한 번 나가고 싶어합니다.  그 '미스코리아' 이런 곳은 말석이라도 붙기 힘든데 '진, 선, 미' 라도 하나 걸리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게 되고 나면 만족하고 행복해서 '나를 지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사느냐하면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고 요즘은 미스코리아 나오고 나면 다음 길이 뭐냐 하면 탤런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톱 탤런트 이런 것 해서 뜨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뭐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미스코리아도 얼마나 많습니까?  일 년에 몇 명씩 나오는데 그것이 십 년이나 이십 년 축적되면 그것도 버글버글하다 그래요. 그런데 뜨는 프로그램에 주연하는 것은 하나, 둘 밖에 없으니까 그게 얼마나 박이 터지겠어요.  미스코리아도 한 해에 잠깐이고 몇 년 지나면 자꾸 늙어가고 그 아름다음도 사라져가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가면 또 불안하고 견딜 수 없고 PD나 연출가에게 어떤 사람은 몸을 갖다바치고 난리를 치고 해야 되니까 그 어디에 안식이 있고 기쁨이 항구적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미스코리아가 아니고 거꾸로 코리아, 우리 나라에서 제일 못 난 사람을 뽑아도, 내가 거기서 일등으로 당첨되어도 기뻐할 수 있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셔서 사람 안에 미스코리아 반대를 뽑아도 사람을 뽑는 것인데 개는 안 넣어주고 사람을 뽑는 것 아닙니까?  근데 내가 사람으로 당첨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는 것입니다.  사람인 것이 기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그 분이 나를 뭘로 생각하고 있느냐 이것만 생각하면 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이겁니다.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괴롭지요.  미스코리아에 뽑힌 사람은 귀신들린 것입니다.  그 날부터 팔자가 사납게 되는 겁니다. 사탄에게 속아 자기가 잠시라도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관념에 마구 사로잡혀서 화장을 항상 다듬어 해야지요.  자기가 어떤 특별한 위치에 있지도 않는 자기를 올려놓은 사람은 그 얼마나 매일 불안하겠습니까?  자기가 매일같이 자다가 눈곱이 낀 채로 일어나도 항상 아름다우면야 괜찮겠지만은 그게 아니고 꾸민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없는 자기를 만들어서 매일 유지를 해야 되니까 그게 귀신들린 자처럼 늘 어떤 뭔가에 종이 되어있는. 이건 사람의 지위에서 오히려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환경을 감사하고 그것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생명의 본성대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게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든지 그것이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이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똑똑히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보니까  그 사람이 장가도 안 갔고 인물도 없고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지만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는 아들로 삼고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기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되느니라 이러고 앉았으니까 이 사람이 기뻤다 이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 그리스도 안으로 '쏙' 들어가니까 우리도 우리가 예수보다 나으면 낫지 못할게 어디 있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난 예수보다 못한 사람이 여기 어디 있습니까?  오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옛날에 다윗이나 이런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열 배, 백 배.  다윗이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먹었겠습니까?  다윗이 오늘처럼 적어도 고등학교라도 나왔겠습니까?  들판에서 양이나 따라다니고 똥 치고 하던 사람이 아무도 우리가 사람으로 볼 때는 그 누구보다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런 참 사람의 가치를 보는 눈이 그 사람들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만 딱 열어서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이 참 나를 이렇게 지으셨구나 나를 이렇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짓고 참 만유 가운데 내가 우뚝 서서 아무 것도 아닌 내가 만물 가운데 머리 꼭대기에 천사도 부러워하는 면류관을 쓰고 이렇게 존귀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복되냐 이 말입니다.  내가 이것만 볼 줄 알고 이것만 내가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우주 가운데서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이 되는거죠.  여러분!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헤매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른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완전케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꽁지에 불이 난 것처럼 좇아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되지도 않을 일일뿐더러 그것이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육신적인 아름다움과 육신적인 영광과 육신의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뱁새가 가랭이가 찢어지게 좇아가도 황새가 되겠습니까?  황새하고 똑같이 좇아간다 하더라도 황새하고 걸음이 똑같다 이거지 황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 아닌 사람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그 자리에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뻐할 때 진짜 옳은 영광과 기쁨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얼마나 "항상 기뻐하라" 가 되는지 몰라요.  이러한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겨 먹은대로 기쁨이니까, 내가 내 속에 있는 이 생명 자체가 기쁜 생명이니까 이 얼마나 "항상 기뻐하라" 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모르고 항상 기뻐하려고 애를 쓰니까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지요.  이게 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니까 매 순간마다 기도회를 열어야 되고 그래서 수도원에 가 보면 하루에 일곱 번씩 예배를 드립니다.  다윗이 일곱 번씩 예배를 드린다는 그 이야기를 베껴서, 그 베네딕트라는 사람이 처음에 만든 규칙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수도원들 대부분 적어도 일곱 번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한 번 더 해서 그보다 낫게, 그러니까 보통 여덟 번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죠.  하루종일 바쁜데 하루 한 번 하기도 힘든데 하루 여덟 번씩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립니까?  그러니 일도 안 하고 매일 노는 것이죠.  그러니 사람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거기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자기가 기도하는 자가 아니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 가 안 되는 겁니다.  자기 생명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고 있고 하나님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으로 채워진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실상 그게 기도하는 거예요.  외형적으로 우리가 기도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 속의 생명이 기도의 생명인 사람은 그런 기도를 일곱 번이나 열 번이나 하겠지요.  그것이야 당연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 생명이 기뻐하는 생명이 아닌데 항상 기뻐하려고 매일 어떤 경건한 목사나 경건한 신자들이 얼굴을 항상 미소를 반쯤 머금은 것처럼 사진 찍어도 위선적인 국회의원들처럼 말이죠.  목사들 사진 찍은 것 보면 어찌 그리 다 웃는 상으로 나오는지, 그건 좋은 것도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람 안에 어떤 강박관념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러니까요.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이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는 이것으로 인해서 기뻐지면 기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딱' 들어 있는 것을 볼 때 마치 복권 55억 짜리 추첨했는데 거기에 내 번호가 나오고 내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발견되는 것처럼 기쁘다는 겁니다.  미스코리아를 뽑든지 무슨 시상식에서 입선하는 자리라도 자기 이름이 거기에 붙어 나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55억 짜리 복권에서 발견되겠지만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매일 매일 산해진미를 먹고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재벌 2세는 히로뽕이나 이런 것을 맞는다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기쁘게 될 수가 없어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어질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는 아들로 나를 받는 것을 내가 보게 될 때 우리가 기뻐하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이 기쁨이 다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기다려봐도 별 것이 없습니다.  별 기쁨이 오지도 않을 겁니다.  뭐든지 기쁠 것 같아도 내 속 사람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으면 기쁨거리를 내가 기쁨으로 받지를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 이거지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여길지니라 하는 사람은,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도 그 사람은 족한 줄로 여기는 사람인 겁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감옥에 들어앉아 있어도 기쁘고 바깥으로 나와도 기쁘고 어디를 가도 언제나 변치 않고 자기니까, 자기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밤낮 자기를 좋아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영생을 예비하고 지금 기다리고 앉아 있으니 면류관을 예비해서 "이리 오너라" 손짓하는 것만 보이니까 이 사람이 똥통에 들어앉아 있으나 어디를 가나 매일 기쁘지요.  그게 자기 속에 그 마음이 없고 그 믿음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지금 우리 안에 이 시각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완전한 구원이고 이것이 완전한 기쁨의 현장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진실로 우리가 영구히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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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8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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