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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오늘은 고린도후서 마지막 말씀을 상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까지 생각하면 약 2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고 또 고린도후서만 보더라도 1년 이상의 기간을 통해서 죽 상고를 해왔는데 이제 오늘로 이것이 마쳐지게끔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언제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다 똑같이 하나님의 정신이 깃들여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각 사람의 심령 안에 역사를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과 아버지를 자기의 복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양식과 자기의 생명과 기쁨으로 생각하는 아들의 정신 이것이 다 깃들여있는 것을 우리가 느낍니다.  오늘 이 마지막 말씀을 생각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처음에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형제들에게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또 아버지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아는 그 지식과 그 눈으로, 그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면서 이 교회는 매우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복이 있다. 이 교회는 앞으로 정말 잘 되고 하나님이 마지막에 자기 백성들을 거두어 갈 때 반드시 하나님 앞에 취하심을 입을 것이다. 이런 축복을 한 것과 같이 이 마지막에도 그와 같은 축복과 인사의 말로 이 교회를 향한 자신의 사랑,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아마 여러분들이 모두 익숙하게 느끼는 말씀일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보통 집회 끝에 목사가 성도들을 축복하는 축복문, 기도문에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축도라고 해서 하나의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여기에 익숙하지요.  자, 이 말에서 바울은 세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고 그 다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고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이것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 다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러한 모든 신령한 복의 근원을 언급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타난 거지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이 성령님의 교통하심인데 이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란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표현되어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에게 실제로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감동하고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와 사귀고 하는 이 교통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편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원래 있는 감추어진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이 마음이 밖으로 표현되어서 뭔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선물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지만 말을 전혀 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실제로 도달하지는 않습니다.  꽃을 사다 준다든지 "사랑합니다" 하고 볼에다 입을 맞춘다든지 그렇게 우리가 표현할 때 이 사랑이 실제로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화' 된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지요.  그런데 눈이 어두운 사람은 이걸 못 봐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실제로 시각장애자라고 하다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꽃을 전해주든지 미소를 짓고 있든지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못 본단 말이죠.  못 보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하면 누가 와서 손을 이렇게 딱 갖다대 주면서 얼굴을 만지게 하든지 아니면 "아무개가 꽃을 당신에게 주고 있네요" 하고 말을 해주고 또 손으로 만지게 해주고 하면 우리가 알게 되지요. 이 마지막 행위 이것을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세계를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못 누린다는 겁니다.  귀가 어두운 사람이라면 말로 이렇게 해줘도 안 되지요.  그러면 손에다 써준다든지 이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이 세 가지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신 역사의 내용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간단하고 짧은 말이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를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다른 모든 서신에서는, 여러분들이 재미 삼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만 로마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보낸 편지든지 그냥 일반적으로 쓴 편지든지 간에 그 모든 편지 끝에는 인사가 똑같이 있어요.  거의 똑같은 인사가 나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이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인사다운 인사지요.  우리가 가치 있게 추구할 만한 것은 사실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의와 거룩함과 구속과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담아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만 말하면 그게 진짜 축복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길 원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부자 되세요" 요새 그런 축복이 있는가봐요.  부자가 되라고 말하든지 "건강하십시오" 라고 말하든지 "안녕하십시오" 라고 말하든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고작 인사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주 피상적이고 실제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떤 상품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데 옆에서 말하기를 "다 집어치우고 백화점을 내가 당신에게 왕창 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은 완전하고 확실한 대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라고 축복하면 될 터인데 왜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울러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사실까지를 함께 말하는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서신에는 어디에도 이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성령의 교통하심을 언급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어떤 말이 있다고 하는 것에 거기에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가 성령의 교통하심을 깊이 누려야 할 만한 특별한 형편, 특별한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자,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한 것과는 상당히 비중을 달리 한다고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했기 때문에 거기에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라서 말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되어 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원천까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요.  그래서 그냥 그리스도의 은혜만 말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을 함께 말하려면 하나님의 사랑도 함께 말하든지 그렇게 해야 되니까 아마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고린도후서 13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어떤 성경에서, 다른 편지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어떤 강조되고 있는 점을 특별히 말하면 이것은 분명히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미 모든 성경이, 모든 서신들이 일관되게 계속해서 밑에 깔아놓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교통하심에 대해서는 특별히 많이 언급한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이것이 특별히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안하고 한 번 주의 깊게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실상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주목하고 깊이 체험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서로 자랑했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그리스도의 전달자라는 측면에서 성령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성령과 좀 더 깊이 사귀고 성령과 깊이 씨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바울의 마지막 편지의 끝 무렵에 이르기까지 떠나지 않는 속의 어떤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 뒤에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함께 말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 혼자서 다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또 그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은혜만 말해도 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는 이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베푸신 하나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느 비유인고 하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흔히 말하는 탕자의 비유가 나와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면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는 그 비유 앞에 두 가지 비유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비유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다니는 비유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붙어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잃어버린 동전을 어떤 여자가 자기 집안에서 등불을 들고 비로 쓸면서 동전을 찾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물론 이 세 비유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려진 한 죄인 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것은 바리새인이 예수님께서 한 형편없는 죄인을 아마도 창녀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형편없는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실망해서 '왜 위대한 선지자가 저런 일을 하는가' 하고 속으로 생각할 때에 주님께서 설명을 하기 위해서 하신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쌍한 죄인을 매우 사랑하시고 되찾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 비유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말해도 될 것인데 왜 이 비유를 세 가지나 꼭 말해야 되는가 하는 점을 우리는 어떤 때에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 잃은 양과 그를 찾아 나선 선한 목자에 대해서만 말하든지 아니면 잃은 동전과 그것을 찾는 여자에 대해서만 말하여도 될 것인데 또 덧붙여서 잃은 아들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세 가지나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버렸다든지 잃어버려진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불충분했던가?  또는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하나님이 이렇게 잃어버려진 인류를 찾으려고 하는 의향을 갖고 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충분치 않은 것인가 이런 의문을 우리는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생각건대 주님이 이 세 가지 비유를 동시에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목적이 단지 사람이 잃어버려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렇게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비유는 다 필요한 것이고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 왜 이 비유를 지금 언급하고 있겠습니까?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잃어버려진 사람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역사들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와 그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그 다음에 성령님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되어져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에는 이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역사가 합력하여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간략히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비유를 말하자면 이 첫째 비유는 선한 목자가 어린, 그 잃어버려진 양들 불쌍한 양들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이 선한 목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이 선한 목자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주님 자신이 직접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는 양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으며 그래서 찾도록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찾는데 험한 산길과 골짜기를 지날 뿐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 위에까지 올라가시는 희생을 치르고 사람들의 목숨을 대신 찾아낸 것입니다.  이 선한 목자는 양을 얻기 위해서 위험과 목숨을 잃는 것까지도 감수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 마음에 있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성취한 것입니다.  이래서 사랑은 은혜로 변했습니다. 그러면 충분한데 왜 두 번째 비유가 또 따라왔을까?  자 두 번째 비유는 말고 세 번째 비유는 뭘까 라고 미리 혹시 궁금해 하실까 싶어 미리 말씀드리는데 세 번째 비유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왜?  이것은 목적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려진 아들을 지금 집으로 받아들여서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세 번째 비유이니까 사실은 이 비유의 핵심은 세 번째에 있습니다.  그런데 앞의 두 비유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비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짤막합니다.  짤막하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께 들어가서 넙죽 안기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으로서 불의한 자를 수용하거나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 불의한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접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게끔 먼저 일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 비유에서 설명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비유는 무엇을 말하겠는가?  우리는 이 범위를 좁혀서 생각해보면 결국 이것이 성령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는 어떤 직관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수록 그렇다는 확신이 드는 거지요.  두 번째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여인이 집에서 동전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이 동전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잃어버려 보셔서 알겠지만 집에 어디 넓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면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인은 등불과 빗자루를 들고 비추면서 군데군데를 쓸어가면서 '어디 있는가?' 하고 찾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집밖에서 양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둘째 비유에 나오는 여인은 집안에서 '드라크마' 이 동전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역사가 어떻게 각각 다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집밖으로 나가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다니고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구원의 기초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상징하는 이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여인은 집안에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이니까, 뭡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잃어버려진 마음, 죄에 대해서 무디고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세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계시는지 사탄이 존재하는지 장차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 지옥으로 굴러갈 것인지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자는 사람처럼 무뎌진 심령 안에 들어와서 빛을 비추시고 비로 쓸면서 그 안에 진리의 말씀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시는데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을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빛을 비추시는 역사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역사는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과 영원히 함께 살고자하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마지막 세 번째에 나오는 비유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사람을 건지시고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이 영원한 계획은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으면 안되고 성령이 부어져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 큰 구원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게 하는 이 일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아요.  탕자가 어떻게 돌아왔는가를 여러분들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또 그것의 실현이 그리스도의 은혜 그 다음에 성령의 교통하심에 대해서 전부를 다 고루 말하고 강조하고 가르치지를 않고 어떤 한 가지 사실의 중요성에 너무 착안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소홀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실에 대해서만 강조를 합니다.  그러고는 무엇을 빠트리느냐 하면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하는 말씀은 빼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객관적이고 근원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적용이 되어 그 구원을 누리게 만들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경책이 진리의 책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책이지만 이 책이 집에 모셔져 있다고 해서 다 구원을 실제로 받고 다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닌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다하더라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으면 이것은 남의 집에 있는 떡입니다.  내 배가 고픈데 남의 집에 떡이 많이 재어져 있다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을 뿐 아니라 그를 실제로 누릴 수 있도록 빛을 비추시고 감동하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씨름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셨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꼭 우리가 주목하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빛의 역사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말하는 만큼 성령의 빛을 비추시는 역사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사람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시며 하나님을 알게 만드시는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비유가 나온 후에 비로소 세 번째 비유가 길고 자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드는데 제일 중요한 기촙니다.  그 다음에 성령은 왜 필요한가?  탕자를 보십시다.  탕자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환경이 너무 너무 안 좋으니까 우리가 생각키로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고통과 양심의 가책 이런 여러 가지로 사람이 시달리면 다 회개하고 다 아버지께 돌아가든지 '우리 아버지 집은 부자로 먹을 게 많은데 내가 그리로 가야지' 그 생각을 할 것 같은데 그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 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금 말한 대로의 생각이지요.  '야! 내가 왜 나와서 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가?  우리 아버지는 부자인데 나는 여기서 돼지 꿀꿀이 통 건지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가? 가서 아버지 앞에 내가 사죄하고 같이 살아야지 그러면 최소한 내가 굶어 죽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죠.  이 생각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저절로 오는 것입니까?  저절로 온다면 성경책 들고 있는 사람마다 다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고 마음속에는 기쁨이 충만해져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이 저절로 고난과 환란과 죄악의 구덩이에서 빠져서 고통 당하게 되면은 다 아버지 생각이 나고 천국 생각이 나고 영생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될 터인데 안 그렇단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의 환경 속에서 함께 역사해서 그 환란으로 본향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악과 비참한 모습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회의하고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 넣어 생겨난 결과라는 겁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구속의 역사가 빛을 발하는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받는 것이 아무 중간 과정 없이 그냥 덜렁 어느 날 생각을 해서 또 아들도 덜렁 어떤 생각이 나서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아버지도 과정 없이 덜렁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끄러웠습니다.  너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아버지 앞에 도저히 '내가 아들입니다. 이 집에 와서 내가 한 자리 차지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없으니까 장문의 연설을 준비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땅을 대하여 죄를 얻어서 이 불쌍한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쩌고 저쩌고 ……" 그렇게 하려고 작정하고 갔는데 아버지는 여러 말 할 것도 없고 한 마디도 책망하지도 않고 훈계하지도 않고 막 바로 '싹'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  이미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고 그의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미 성령이 그에게 깨우칠만한 것은 다 깨우쳤고 가르칠만한 것을 다 가르쳤고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이놈아 창녀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아느냐?" 하고 말하지 않아도 성령이 이미 그 사람 안에서 그것을 깨우쳤고 그래서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사망과 고통과 그 비참한 모든 상황에 대해서 듣고 왔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에게 한 마디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완벽하게 하나님이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과 성령과 함께 이 구원의 역사를 단계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이고 완전하게 이루셨기 때문에 돌아오는 사람이 아무 바탕도 없이 와서 도로 되돌아가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거기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사랑이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또 그리스도도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 안에는 미움과 다툼과 자랑과 질투, 또 분열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과 하나님 안에 있는 연합이 나와야 될텐데 나온 것은 사탄이 나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듣는 것 같은데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에서 이 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서로 간증을 하기도 하고 그것을 귀담아 듣는 것처럼 앉아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만 실은 사탄이 자기를 속여놓은 그 거짓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에 직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모든 일은 이미 다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내버렸습니다.  이것은 벌써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마음을 먹을까 말까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인류에게 하나님이 확실하게 베푸신 과거지사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갖다 쓰기만 하면 되는데 왜 지금도 가난하고 왜 지금도 궁색하고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누리지 못하고 옹색하게 두들겨 부수고 싸우고 형제의 머리 위에 있는 티끌을 뜯어먹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작은 말 한 마디만 들어도 견디질 못하고, 어제 아래 보니까 어떤 교회 신자가 목사를 칼로 찔러버렸다고 그래요.  그런 일들이 왜 있습니까?  교회 운영하는데 티격태격하다가 목사, 전도사, 집사가 서로 두들겨 패고 칼부림을 했다는 겁니다.  이런 일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우리가 체험하고 소유하고 있지 못하는 것들의 극단적인 한 표현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잖고 절제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 없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이 부유하고 풍성하고 진실해지지 못한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완전하게 변해지지 못한 상태로 있더라도 그것을 표현을 잘 안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원색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여유롭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진실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작은 떡 하나를 놓고서도 감사할 줄 알고 그리스도와 같이 아무 것도 없어도 머리 둘 곳도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만족하고 안식을 누리고 이렇지를 못하단 말입니다. 그게 왜 그런가요?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교통하심이 신통치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이와 같은 세계를 알게 하시고 비춰주시는데 사람들이 성령께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께 의논하고 성령과 사귀고 성령을 좇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적인 노력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선한 일을 하려고 발버둥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이 되게끔 하시는 일은 성령의 몫입니다.  성령이 다 하시는데 그 성령께 내가 마음을 열고 성령 앞에 내가 나를 내려놓으면 되는 것인데 교만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든지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지 않아도 나의 능력과 나의 의지와 나의 지식으로 내가 얼마든지 예수도 잘 믿을 수 있고 하나님도 잘 믿을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도 잘 가질 수 있고 내 인생도 잘 가져갈 수 있다 생각하고 주의 영에게 자기를 내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어린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젖먹이와 같이 매일 싸우고 있고 은사는 많다 하면서 그 은사는 뭐 하라고 준 은사겠습니까?  서로 섬기고 사랑의 도구로 써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그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윤택해 지도록 하는데 봉사하는 도구인데 이것은 안하고 자랑하고 이것을 가지고 누가 크냐 키 재기 하다가 만약에 내가 더 쪼글랑스럽고 작다고 생각되면 상대에 대해서 질투해서 그냥 싸우고 거절하고 이런 식으로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다 성령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기의 죄나 의나 심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는 일부 깨달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이것을 깨닫고 또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피차 가르치고 권할 때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죽은 옛 사람이 아니고 더 이상 죄나 짓고 더 이상 '나는 육신인데 어쩌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냥 세상 죄인들처럼 살아갈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서 자신을 얼마든지 드릴 수 있고 얼마든지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 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일깨우고 그 다음에 동시에 성령이 우리의 피차 가르치고 기도하고 위로하고 붙잡아주는 이 역사를 통해서 혹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보든지 기도를 하든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사람 속에서 계속해서 사람과 관계를 가지시니까 거기에 꼭 주목하고 순종하시오 이것을 서로에게 늘 일깨워줘야 됩니다. 성령에게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붙어있고 성령에게 주목하고 성령을 떠나지 않도록 우리가 서로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 편으로는 성령의 도굽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를 대하여서 어떤 체면과 어떤 인간적인 형식을 어떤 때는 좀 떨쳐버리고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해야 됩니다.  나를 좀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있습시다.  이렇게 말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구체적인 교회생활 이것이 성령의 공동체로서 말하자면 성령을 실제로 누리고 성령과 함께 하는 어떤 장(場)이고 기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말하면 "아이구! 나는 부끄럽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니까 내 근처에는 좀 얼씬거리지 말고 좋은 사람 찾아가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좋은 사람이 어디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그 다음에 내가 인간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오늘 이 자리까지 왔고 지금도 어떤 때는 육신적으로 죄를 쏟아내고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또 분명히 성령의 도구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사람이니까 우리가 형제들에게 그 위치를 말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서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가운데서 확실하게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 일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쓰는 어떤 노력이라든지 선을 행하려는 노력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혹시 스스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는 그렇게 원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마는 그래도 그 때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율법을 주어서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니까 너희가 다 내 자식이 되었으니까 너희도 다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  하여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그 때는 사람들이 그것을 하려고 노력을 했어야 됐어요.  뭐 안식일을 지키든지 도둑질을 하지 않든지 간음을 하지 않든지 그들은 하나님이 깨끗한 분이면 나도 깨끗하게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적어도 품어야 되고 그걸 위해서 노력을 했어야 됩니다.  그러나 이천년간 그것을 실험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서 그런 욕망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의 능력이 도무지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없는 형편없이 무능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노력은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빚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런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다 문제 해결을 해 주셨고 말하자면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셨고 그 다음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을 내가 하나님께 대해서 진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이 역사를 성령이 우리에게 갖다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성령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주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노력해야 될 것은 오직 성령을 좇는 것입니다.  성령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가장 현안의, 우리가 가장 안 되고 있는 문제와 결부 지어서 이야기한다면 이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성령께 복종한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뒤집어서 말하면 이것은 좀 가만히 있고 좀 조급하게 스스로 뭔가 계획하고 나서고 또 그것이 잘 안됨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스스로 화를 발하고 다른 형제에게 대해서 비판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조급하게 하지 말고 인간이란 다 이런 것이니까 그 인간의 어떠함에 대해서는 우리가 내 자신을 볼 때라도 내가 아무도 비판할 자격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고 왜 이 모양인가 하고 실망할 필요도 없어요.  개가 길에서 엉덩이 드러내고 똥 싸는 데에 대해서 실망하는 개가 어디 있습니까?  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개는 당연한 것이지요.  우리가 육신으로 놓고 우리를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정당하고 합당한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이 화장하고 꾸미고 옷으로 포장하고 점잖은 말로 자기를 꾸미는 그것이 인간의 실체이겠습니까?  목구멍까지 죄가 가득 차 있고 손과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모든 행동이 다 악독이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드러나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주저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실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요.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지요.  그럴 때 우리가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든지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내놓고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도 그런 문제로 인해서 걸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걸릴 필요가 없어요.  실망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 교회 와서 다 보면 선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니까 그런 점이 있겠지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육신적인 부끄러움과 약함에 대해서 너무 많이 반응합니다.  그래서 간증을 할 때도 형제들이 주님을 그냥 찬양하면 되는데 또 자기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들을 그냥 말하면 되는데 늘 자기의 육신적인 부끄러움 지금까지 내가 신앙생활 잘못 해왔다든지 요즘 내가 기도를 안 한다든지 성경을 안 본다든지 교회 안에서 내가 여러 가지 활발하게 사역을 못하고 있다든지 이런 것들에 걸려서 찬양을 못한단 말입니다.  이건 다 뭘 말합니까?  여전히 자기를 붙들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뭘 말하려고 마이크를 붙들지 못하고 뭘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자기 안에서 뭔가 자랑스럽고 자기 안에서 뭔가 떳떳한 것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다 성령을 좇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은 상한 심령의 바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늘로부터 의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하늘로부터 온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소개하시고 이것을 지적해서 '이것이 있다.  내가 내 안에는 의가 없지만 하나님이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직접 세우시는 이것이 있다' 하고 성령이 나에게 말할 때 나는 그것을 의지합니다.  나는 황소나 수소를 드릴만한 힘도 없지만 설사 그것을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는 상한 심령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널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겸손하고 가난하고 물같이 낮아진 심령 이것밖에 원하지 않으시니 나는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우리의 찬양이 그런 면에서 분명하지 못하고 자꾸 뭔가 자기가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가 이만큼 믿었습니다 라는 공적(功績) 차원에서 자꾸 생각을 하고 그 때쯤 되어서야 떳떳하게 형제들 앞에서 간증을 할 수 있겠다 라고 말하니까 주님을 찬양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찬양을 하더라도 자기를 찬양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후의 찬양모임이든지 이 자리든지, 아침의 이것도 찬양 모임 아닙니까?  이 자리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서 모였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을 누릴려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지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얼마나 벌어졌으며 그 경과 보고를 하려고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의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떠나시기 전에 성령이 곧 올텐데 성령이 오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살고 육신의 정욕대로 범죄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이것을 책망하는데 성령은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와서 그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왜 지금까지 믿지 않느냐 이것을 책망하는 것 같아요.  성령은 죄에 대해서 책망하는데 이 죄 중의 죄가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 이것보다도 그것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이미 주어졌는데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주어졌는데 왜 예수를 믿지 않느냐 이것을 매일 책망하시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 책망하실 뿐만 아니라 의에 대해서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해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는 것이 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의를 위해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러 갑니까?  뭘 잘못해서 죽었겠습니까?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확실한 일인지 몰라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시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이 떠나신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떠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제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상태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겁니까?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매일 이와 같이 의에 대해서 세상을 일깨우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심판에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자, 성령님은 심판에 대해서 뭘 말합니까?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심판을 받아서 더 이상 세상의 지배자가 아닌데 너는 왜 사탄을 따라가고 있느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령은 이것을 일깨우십니다.  심판에 대해서 이미 주님이 모든 것을 다 끝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을 따를 필요가 없고 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육신 타령을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육신을 발판으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너 약하지? 너 죽는 것을 겁내지? 너 병들고 망하는 것이 겁나지?"  사탄은 늘 사망 권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무찔렀습니다.  부활했으니까 죽는 게 문제가 아니지요.  여러분과 저는 무엇을 받았습니까?  부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죽어도 문제가 안돼요.  이 자리에서 망해도 망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데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고 세상이 망하면 예수님과 함께 망하는 것이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허공에 있다면 떨어질 자리가 있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는 땅바닥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흙이로소이다' 하는 자리에 내가 있을뿐더러 또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만국을 다스리는 아들로 이미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떨어질 데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육신에도 종노릇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서 목구멍이 무슨 몽둥이 들고 포졸처럼 따라다니면서 "너! 죄 안 지으면 안돼!" 라고 할 때 단호히 그것을 거부하십시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포도청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사람의 육신을, 목숨을 빼앗거나 죽이거나 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의 영혼을 지옥 불에도 던지고 천국에도 데려갈 수 있는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뭘 두려워합니까?  이 세상 임금이 벌써 예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생각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하시는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그분에게 청종하면 우리 인생은 그것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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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58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8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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