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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우리가 바울을 이렇게 계속 바라보고 바울 속에서 체험된 것들을 우리가 그의 간증 안에서 듣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중에 바울이 누렸던 생명의 풍성함을 조금씩 맛보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성경을 공부해서 어떤 지식을 축적한다 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 삶에 활력과 원동력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사람, 그리고 이 사람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모하게 되는 이런 마음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물론 저 개인적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만 아마 이것을 같이 체험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작은 한 마디의 말이라 할지라도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어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 하는 이런 표명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 왜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약함을 자랑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첫째는 그의 형편이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육신적으로 자랑할만한 강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데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약화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지금은 자랑할 만한 것이 없고 사람들에게 어떤 강한 것으로 본때 있게 보여 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이유는 그의 인생이 그 약한 자리에서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더 영광스럽고 더 승리가 되고 더 능력을 체험하고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약하게 됨으로서 결국 망하고 죽어버린다 면은 누가 그것을 자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그러나 바울의 약함은 하나님이 그를 진정으로 강하고 능력 있고 풍성한 인생으로 만들기 위한 수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 육체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란 것은 진정한 영광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이 섣불리 몸부림치다가는 그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곁길로 새버릴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안에 넣어서 그 사람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폐기 처분한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장사지낸바" 된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서 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죄로 말미암은 측면도 있지만은 이 그리스도인의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단단히 붙여놓아서 예수의 능력과 예수의 풍성한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조치를 취하신 겁니다. 억지로 약화시켜 놓은 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실은 본래 약하게 지음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자꾸 알아야 돼요. 어제도 제가 우리 집에 있는 자매하고 늦도록 어떤 이야기를 나눈 것은 "왜 사람이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는가? 이것이 누구 때문인가? 어떤 사건 때문이고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이런 것인가? "를 골똘하게 추적해 보게 되었는데 제가 그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잘못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 수단이 되어서, 매개체가 되어서 그 사람이 일을 일으킨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본래 사람이 약하게 만들어졌고 두 번째는 그나마 약한 주제에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와 같은 존재로 지음 받았으면서 그나마 하나님에게서 '똑 '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과 사람이 함께 저주를 받아서 인생 자체가 말하자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아담 그때부터 말해서 태초라 치고-그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이 한 번도 아무리 잘하나 못하나 팔자가 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고 살아가다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약함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로 처음부터 인생의 틀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무슨 잘못을 매일 저질러서 매일 그렇게 장애를 안고 삽니까? 무슨 잘못을 매일 저질러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병들고 늙어지고 가난해지고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에 상처를 주고 함으로서 피곤케 되고 속병이 나고 화가 나는 것을 어쩌면 당연히 여겨야 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개는 왜 매일 네 발로 다니는가?  무슨 죄를 지어서 네 발로 다니는가? 그것이 아니고 네 발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아주 하나님 앞에서 본래 자리를 말하자면 이렇지 않지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우리는 믿으니까. 예수의 자유와 영광과 그런 권세를 갖고 우리가 만들어졌겠지만 타락한 이 후로는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것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야지. 매일 그 원인을 찾고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아야 될 자인데, 나는 키가 150인데 180이 되어야 되는데 왜 150인가?' 그것을 매일 궁금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이 지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들 중 많은 것들은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런 저런 우리 자신의 문제로 말미암아 약한 중에도 더 약하게 되어서 운동도 안 하니까 몸이 약해지고 밥 잘 안 먹고 편식하니까 병들고 그런 것처럼, 공부 안 하고 일도 안 하니까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서 스트레스 받고 그런 것처럼, 많은 것들은 물론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고 왜 어떤 사람은 우리를 찌르고 왜 그런 고통의 상황들이 연출되게 되는가를 들여다보면 인간이란게 그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 누구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 추적해서 따져 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약함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더 들어가 보면 타락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나 실패를 했기 때문이 아니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서는 아담이 타락했다는 이것보다도 더 먼저 된 원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 원인이 뭡니까? 바로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 없이는 제대로 설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약함이란 것은 바울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육체의 가시가 있다든지 사람이 질병과 고통으로 약하게 되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그러나 어쨌든 이렇든 저렇든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처음부터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또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이러한 자신의 본래 위치를 깨닫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말하자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절망적인 약함과 절망적인 가난 가운데 두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다가 고난을 당하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바울의 모든 상황을 주장해서 그로 하여금 어떤 독을 마셔도 심지어 죽지 않고 뱀을 집어도 물려 죽지 아니하고 추위와 굶주림과 사람들의 핍박 속에서 지켜 보호해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는 들어가면서부터 형제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물에, 불에 어떤 사람을 빠지게 해서 '완전히  여기서   나는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어떤 때는 물리면 바로 죽는 뱀에게 물렸는데도 털어 버리고 일어설 수 있었는데 왜 어떤 때는 사람을 물 속에 빠지게도 하고 절망 속에서 '나는 여기서 끝장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끔 사람을 곤고하게 하고 피곤케 하고 미치도록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질적인 약함이든지 육신의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는데서 우리가 약하게 되는 것이든지 인생은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보통 아는 것이 아니고 아주 뼈저리게 철저하게 알아서 하나님 없이는 도무지 손도 꼼짝할 수 없는 그러나 하나님이 또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와 "내 아버지께서 일 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아버지께서 서 있으면 나도 서 있고 내 아버지께서 앞으로 나가시면 나도 나간다." 하는 간증이 우리 안에서 저절로 나올 수 있게끔 그렇게 범사에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옛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귀동냥으로라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축복에 대해서 들어보고 또 그것을 향유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이런 풍성함을 구체적 체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를

          둘째는 하나님의 풍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난과 실패 이것은 꼭 물질적인 가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인생이 곤고하고 피곤하고 약함 속에서 나의 무능과 나의 할 수 없음과 나의 그야말로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 됨을 철저히 깨닫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강함과 하나님의 능함과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범사에 늘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풍성은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을 애달프게 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향유하도록 하나님이 예비하셔서 지금 우리 앞에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참으로 부인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답이시고 우리의 해결이고 우리 인생이다.' 라고 참으로 알고 널름 받아들인다면 우리 인생은 반드시 풍성하고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람 속에서 어떻게 하든지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첫째 사역은 우리가 어떤 자인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무능하고 얼마나 결심을 해도 작심삼일밖에는 되지 못하는 인생인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알게 하기까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일 일해 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하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능한 분이신 가를 알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요?"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합니까? 아무 조건도 필요 없다고 말하지요. 하나님의 모든 것은 모든 생명과 풍성함, 그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은 은혜로 그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조건도 필요 없고 자격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래도 한 가지 조건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뭔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은 해야지요. 널름 받는 거는 해야지요. 받는다는 것이 뭡니까? 믿음 아닙니까? 예수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들이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보십시오. 지금 한 그릇의 밥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제일 먼저 널름 받아들여지게 될 것인가?"를 본다면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냐 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 사람의 어떤 특별한 상황이 이것을 널름 받아들이게 만들든지 아니면 미적미적 거리게 하든지 깨작깨작하게 만드는 가를 결정합니다. 무엇이 결정합니까? 그 사람의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이 이 밥을 널름 해치우게 만드는가?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가를 결정합니까?  배가 고픈 것이 첫째입니다. 어느 정도 내가 비어 있느냐? 내 속이 텅텅 비었으면 밥그릇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꿀꺽'해서 다 들어가겠지요. 그러나 내가 비어져 있지 않다면 내가 갈급하고 '하나님이 정말 있어야겠다. 하나님!  어쩌든지 나를 좀 도와주셔서 살려 주십시오. 나는 오만 지식을 다 가지고 오만 생각을 갖고 정말 뭔가를 해 보려고 하는데 도무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내 안에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제발 나를 다루시고 간섭하시고 나를 좀 이끌어 가십시오.' 이런 절박한 마음이 우리의 배고픔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림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기를 비우는 것이라고 다른 말로 정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기를 비운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절망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믿음의 실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잘 못 믿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혜로 그저 주시는데 왜 그것을 못 누리는 줄 아십니까? 자아가 그것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은혜를 대항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거지는 여러분들이 뭘 주려고 하기 전에 손부터 뻗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전이나 뭐가 날아오면 제 때 그것을 놓치는 법이 없이 딱 받지요.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품위 있고 여유 있고 권세 있는 어떤 사람에게 나의 작은 정성과 나의 작은 사랑과 마음을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작은 자요. 그 사람은 큰 자라면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만한 내용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 안에서 빈자리를 찾기가 힘든다는 것입니다. 북적거리는 식당에 자리 잡기 어렵듯이 그 사람 안에 많은 것들이 가득해서 내 같은 사람이 이걸 가지고 내놓을만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대단한 분이라고 모두들 생각하니까 내가 예수께로 가면 예수님이 나에게 당장 소용이 되어서 내가 그 분의 큰 도움을 받으리라고 다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측면을 한 번 강조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당연히 도움이 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보탬이 되고 해결책이 되고 우리에게 만족과 기쁨이 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그렇지만 주관적으로 볼 때는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가 목마른 자고 내가 주린 자고 내가 그런 사람의 음성이라도 듣기 원할 때에 그가 나의 필요가 되고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바쁠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도 다 소용이 닿습니다. '그래 그래 너도 와서 좀 거들어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정신과 하나님의 자유를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특수성이 없다면 개나 소들이 체면 없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어쩌면은 잘 누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권세를 부분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주제에, 게다가 타락해서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존심이 세고 자아가 펄펄 살아있는 이것이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은혜를 제 때 제 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게 물리적으로 그 일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이런 특성을 감안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뭔가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자기가 수고롭게 노력하고 열심히 뭔가를 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으로 어떤 구원을 이루든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게 하든지 이렇게 해 놓는다면 사람들은 좋다면서 그런 일을 지금보다는 훨씬 잘 받아들여서 행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본래 안 될 일입니다. 본래 그것은 되지 않을 일입니다. 왜? 사람이란 것이 본래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닮는 그릇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가지가 열매를 맺는 이런 일은 본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일을 시키지도 않고 그런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사람의 내용이 되시고 사람의 정신이 되시고 사람의 능력이 되어 사람을 빛나게 하고 사람으로 유력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 없이 사람이 스스로 뭔가를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본래 지음 받은 목적 자체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무슨 장식장에 얹어 놓고 쳐다보면서 자랑하려고 예쁜 아가씨를 모셔오고 멋진 신랑을 모셔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섬기고 나를 위하고 나를 좋다하고 그래서 나하고 재미있게 살려고 누구를 데려오는 것이지 나하고 관계없이 그 사람이 '삐까번쩍' 하는 것이면 결혼할 필요가 있습니까? 멀리서 그냥 두고 자기 혼자 잘난 것으로 두면 되지. 하나님이 사람을 왜 잘 만들었는가? 왜 하나님이 사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빛나는, 하나님께 보탬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기 혼자 잘 나서 일 잘하고 능하고 강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강하냐, 약하냐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지금 형편없고 초라하고 다 늙어빠지고 병들어서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담겨 있어서 하나님이 표현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 궁극적인 관심이고 궁극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이런 자기의 지음 받은 원리와 자기의 지음 받은 자리를 바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하나님의 생명대로만 움직여 나가도록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겠지요. 당연하게 생각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모르십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대책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그것 하나 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따라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뜻이 있고 나는 나대로 뜻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력도 없는 주제에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능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따라가든지 이래야 일이 될 것인데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기 뜻을 고집하면서 심지어는 하나님을 빌어서 하나님을 내 '알라딘의 마술 램프'에 나오는 종처럼 부려서 내 뜻을 이루려고 하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황당하고 어렵게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 지음 받은 자리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며 내가 왜 살아야 되며 무엇이 나에게 영광이고 완전한 자리인가를 다 잊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 나가는 것을 수치와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쥐어짜서 하나님이 우리를 꺾으시고 낮추어서 내가 약하게 된 것을 수치와 멸망으로 큰일 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객관적인 실체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꺾으시는 것이 맞지요. 자존심을 건드리고 나를 '죽어라'고 하고 자기가 내 안에서 자기 뜻대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이니까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맞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하나님 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마음과 심정으로 내가 모든 사물을 보는 눈만 가지고 있다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린 손톱을 깎습니다. 수염도 깎습니다. 아침마다 수염 깎는 것도 귀찮은 일인데, 깎고 이발도 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身體髮膚는 手指父母라 그러므로 감히 이것은 不毁損이라. 훼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미남이 되려면 면도를 하고 깨끗하게 되려면 손톱을 단정히 깎아야 되지요. 생각의 차이입니다. 이것을 수치스럽다, 내가 날아간다, 내가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감소되고 우리 자신이 약하고 가난하고 죽이는 자의 위치에 들어가서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충만하게 얻고 하나님으로 내가 풍성하게 채워진다면 얼마나 그것이 영광스럽고 그것이 목욕탕 가는 것과 머리 깎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어찌되었든 우리 자신이 우리 안에 남아 있으면 주님의 풍성하심은 체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을 연습해야겠습니다. 날마다 비워야 됩니다. 어제 비웠는데 오늘 또 비워야 되는가? 또 비워야 됩니다. 오늘 비웠는데 내일 뭐가 남아 있겠는가? 내일 가보면 또 비울게 있어요. 한 번 비움으로서 영원히 비워지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채움으로서 영원히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다 압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 알려면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다루심을 받고 모든 환난과 모든 죄악 속에서 우리의 실상이 다 폭로되어도 우리가 그것을 '알까? 말까?' 입니다. 그러므로 중단하지 말고 계속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여러분들을 지금 여러분이 겪고 계시는 아마 주관적으로 볼 때 여러분들은 다 '내가 지금 터널 속을 지나간다. 내가 지금 환난 속을 가고 있다.' 아마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그게 환난이라고 칩시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필요하다면 이 일을 죽는 날까지 계속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는 공부 안 하는 아이를 계속 때리기만 한다 해서도 공부를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변화를 줘 가면서 이모저모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누려가도록 다양하게 역사를 하시니까 우리가 너무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는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마리아가 찬양한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장 53절에서 예수님의 앞으로 행해질 그 사역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마리아는 이렇게 잘 말했습니다. "주린 자를 배불리시고 부자는 공수로, 빈손으로 보내신다." 예수님 자신이 나중에 사역할 때 첫 마디가 그거였습니다. 산에 오르셔서 산상보훈 말씀을 베푸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준비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이란 굶는 자입니다. 굶주리는 자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 집회에 와서도 또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보거나 기도를 할 때 '뭐 좀 들어볼까? 뭐 좀 재미있는 게 있나?' 이렇게 기웃거린다면 우리는 아무리 참석해도 아무리 그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약간의 성경지식이나 얻고 오늘 와서 그저 교회생활 하면서 '집에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편하니까 여기 와서 귀동냥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때우자' 해서는 정말로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우리는 절대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절박한 심령, 상한 심령, 성경은 아예 'broken-hearted' 깨어진 심령, 그 박살난,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고 작살난 그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 워치만니는 옥합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거기서 향유가 흘러나와서 온 집을 향기로 진동케 했고 예수를 적셨던 이것을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단단한 벽이 깨어져야 되는 것으로 비유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상태에 놓여져 있지 않다면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합니다. 진실로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려면 환난과 풍파가 필수적입니다. 배부른 상태에서는 그건 상상하기 어려워요. 배부른 상태에서는 내가 주님의 은혜를, 도움을 받아야겠다. 그런 마음도 들지도 않는데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도저히 구체적일 수가 없어요. 언제나 성령의 첫째 역사이자 매일같이 가장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역사는 사람 안에 은혜를 갈망하는, 갈구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삶의 시작이고 내용이고 영적 성장의 핵심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더 깊고 더 풍성한 것을 사모하게 만들고 현재 우리의 상태가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꽤 많은 것으로 우리가 채워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너무 너무 풍성하고 하나님의 세계가 너무 너무 영광스럽고 너무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우리로 도무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더! 더! 더! 더!…  더!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로 하여금 내가 주님을 향하여 지금까지 죽도록 달려왔지 만은 아직도 아무 것도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이전에 이룬 것들, 이전에 성취한 것들은 성취한 걸로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목표를 못 잡은 사람처럼 그저 앞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래서 이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내가 할 만한 것은 다 해봤는데 아직 죽는 것까지는 못 해봤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내가 체험하기를 원한다. 죽어야 부활이란 게 화끈하게 체험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뺨을 한 대 맞는다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것밖에는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목이 떨어졌다가 다시 붙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것입니다. 뭘 보았기에 뭘 체험했기에 어떤 사람이 이 길로 가는지? 이것을 우리가 그의 말을 듣는 가운데서 우리가 공감하고 깊이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곤란하고 시달리고 마음이 정말 파김치처럼 되어 있는 이 상태가 부끄럽고 큰일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약하면서도 본래 약하게 지음 받았으면서도 약하지 않음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고 약하면서도 강한 척하는 이걸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약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것, 이걸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것을 큰일난 것으로 생각해야지요. 약한 것은 자랑스럽고 복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 돈 안 되고 계산 안 나오는 그런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하나님이 무슨 가학적인 정신병자입니까? 왜 사람을 십자가로 몰아가고 왜 사람을 약한 데로 몰아가고 왜 사람을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자리로까지 사랑하는 자녀들을 끌고 가는지요. 수판을 놓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의 사탄은 그런 하나님의 역사에 맞불을 지르느라고 지금 바쁩니다. 매일 찾아와서 '왜 너는 매일 누구 때문에 괴로우냐? 왜 너는 누구 때문에 시달리느냐? 왜 너는 이리도 못 났느냐? 왜 너는 이렇게 잘 될 수도 있는데도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망했느냐? ' 매일 같이 와서 여러분을 들쑤시면서 여러분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신세 타령하게 만들고 누구를 원망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산처럼 쌓아 놓은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없음과 자기의 빈털터리로 인해서 신세 타령만 하게 만듭니다. 내가 돼지 쥐엄 열매나 먹고 있는 비참한 처지에 있으면 최소한 탕자처럼 고개를 들고 집을 바라보면서 내 아버지께는 많은 것이 있는데 가서 종노릇을 해서 빌어먹고 살아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가자. 이렇게 생각해야지요. 주님이 그렇게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와서 끊임없이 그 비유를 말씀하시고 형제들을 통해 부르시고 우리를 붙잡고 있는데 자꾸 사탄의 말만 듣는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이건 구제불능입니다. 자꾸 실패하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가고 안될 짓을 그 약한 데서 엉뚱한 탈출구만 찾고 있는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참 좋은 사람이고 자기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내놓을만한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들쑤시고 자극을 해 나가시면 '아! 내가 꽤 문제가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사람들에게 전에는 아주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가 보다.'   이렇게 슬슬 알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계속 따라가면서 주님의 생명을 진짜로 맛 보아가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것이 어느 정도 우리 안에서 가속이 붙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신없이 치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낮추어서 진짜 속에 있는 뼈가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몸의 때만 더러운 줄 알았더니 속에 들어가 보니 암 덩어리가 커다란 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욕탕에 가서 때를 벗기는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 결국 그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가서 이태리 타올로 때를 문질러도 아프고 괴롭지만은 뼈를 수술하고 심장을 수술하고 속을 들어내는 것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새롭고 완전한 길로 나가게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했고 여러분과 저도 비록 미약하지만 이 계시 안에서 오늘까지 예수를 따라온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이미 이 길로 들어섰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복된 자리로 불렀고 이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확증시켰는데 자꾸 흔들리면 안돼요. 다른 생각하고 다른 것을 보고 기웃 기웃거리고 그러면 안돼요. 참 감사한 일이죠. 하나님이 우리같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이미 어느 정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인생이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더 나은 삶을 갈구하게 만들고 예수 안에 있는 이 풍성한 삶을 소망하게 만든 것만 해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건 첫 출발이 아주 좋습니다. 이건 아주 희망적입니다. 흔들리지만 않고 헷갈리지만 않고 앞으로 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비워 놓은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약하게만 만들고 비워 놓기만 하고 그래서 텅텅 빈 사람으로 남게 하시는 분이 아니고 비운 것은 채우려고 비운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안에 만약에 진실로 오늘 갈급한 마음, 절망적인 마음, 하나님 없이는 안 되겠다 라는 이 분명한 마음이 있다면 이건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성령이 처음 하는 일이 그거니까, 제대로 어떤 일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 틀림없이 될 거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비우는 것은 우리 책임이고 채우는 것은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 겁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가 몇 주전 수요일에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에서 승리했지만 그게 아이 성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가 될 것 같습니까? 안 됩니다. 어제는 어제의 하나님 은혜로 내가 이겼고 오늘은 오늘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으로만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어제의 체험이 오늘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여리고 성은 큰 성이었지만 아이 성은 작은 성이었는데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하나님이 있었고 오늘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 몇 천명만 가서 그저 슬슬 손만 대면 될 겁니다." 그러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승리로서 오늘의 영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역사이고 현재는 반드시 새로운 능력으로 새로운 영적 어려움에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 새로운 공급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나님을 체험하고 어제보다 더 나은 어제보다 또 다른 재미의 하나님을 만끽하라고 오늘 또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는 겁니다. 그건 벌써 통과했는데 이제 나는 면젠데 왜 비슷한 체험을 또 하게 하시오 우리는 매일 불만이지요. 그만큼 볶았으면 되었지 뭘 또 계속하십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더 풍성합니다. 하나님이 가진 능력으로 어제의 밑 닦음 하는데도 버거웠다면 그만큼 했으면 우리는 이제 '해방'하면 되지.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로 당신의 생명을 계속 퍼서 써서 끝도 없이 승리하게 하시고 그래서 작은 승리가 아니고 온 우주를 뒤집어엎어 만국을 쇠방망이로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겁니다. 만국을 철장으로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그 자리까지 나가게 하시는 겁니다. 산 믿음은 매일 매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알고 받아들여서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풍성함을 쓰는 것이지 옛날에 있던 것 가지고 와서 땜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은 밥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 생각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약하게 한 것에 대해서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약함은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자초한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 할아버지 아담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고 인생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을 얻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반 쪼가리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뭐 불만 가질 게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아구가 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이건 요철 아닙니까? 이건 벌어져 있고 이건 끼워지게 되어 있으면 '아!  내가 왜 이렇게 빠져 있소. 이건 왜 구멍이 파져 있소.' 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걸 예비해 놓지 않았다면 이게 문제지요. 파져 있는 게 문제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걸 가지고 끼워서 하나되게 만들었다면 문제될 게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어차피 짝짝이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나는 병신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지으셨는데 그리스도를 안 준다면 큰일이지만 그리스도를 주셨고 지금도 그와 함께 모든 삶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 주님을 믿고 우리가 약한 가운데서 강함, 약한 가운데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를 의지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58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8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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