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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지난 주일에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 형제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는 믿음을 한 번 확인해보라고 하는 권면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믿음이 참된 것인가를 확증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사실상 고린도 교회에 주는 마지막 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것은 인사고 축복인 것이니까. 실제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이 편지를 통해서 할 말을 하고자 할 때 그 마지막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또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건 어떤 의미에서 권면이랄까,  단순한 그저 가르침을 베푼다 라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좀 무서운 협박 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우리가 참 믿음을 가졌는지를 확인해 보고 그것이 희미하게 나타나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버리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하고 상관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냥 교회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저 와있었을 뿐이지 사실상 하나님과는 상관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지요. 왜 그는 마지막 이야기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 이유, 그가 이런 말을 한 목적이 이제 오늘 읽은 13장 7절부터 10절 사이에 설명된 겁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조금도 악을 행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왜 내가 너희에게 이런 아주 강도 높은 말을 하면서, 사실은 이때만 이런 말을 한 게 아니고 고린도전서, 후서를 통해서 전반적으로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사정없이 막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로 외형으로 볼 때 일단 악을 좀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버리운 자가 아니다. 나는 확실히 버리운 자가 아니라는 것을 너희들에게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만약에 하나님이 나중에 와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들먹이면서 "너는 아니다. 너는 버리운 자다" 이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나는 적어도 너희들은 버리운 자로 끝나지 않게 되기를 원하여서 너희들에게 믿음을 확증해 보도록 내가 갖은 말로 너희들을 책망도 하고 삶의 각종 문제들을 다 지적하고 들추어낸 것이다 라고 그것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믿음을 확인해 보라" 그리고 만약에 희미하면 다시 시작할지언정 그런 희미한 상태를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적당히 덮어 넘어가지 말고 이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가정하고 나는 예수의 길에 들어서 있지도 않은 하나님과 사실 무관한 사람이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런 말을 그가 한 것은 그래야만 그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진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아끼면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풍성한 생명의 세계로 진보를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종류의 자극에 직면해야만 됩니다. 작은 성취에 스스로 만족하기 쉬운 것이 사람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재미가 있어서 게임 같은 것을 하는 아이들처럼 말려도 너무 재미있으니까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는 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돌아보나마나 내버려놔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로 가서 육신을 거슬러서 앞으로 나가야 될 길이라면 여기에는 끊임없는 점검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게 만드는 각종의 외적 환경들이 작용해야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믿음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다지고 또 다지는 것은 그것을 얼마든지 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이러한 종류의 역사가 결국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러한 자기의 강력한 권면을 통하여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좀 어떤 의미에서는 형제들에게 찝찔한 마음이 있지만 오해가 되지는 않을까? 또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지는 않을까? 이런 부담이 있었지만 결국 담대하게 권면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가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지난 주일에 믿음을 확증하고 그건 권면을 받아서 그렇게 하든지 스스로 그렇게 하든지 어찌하든지 우리 안에 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된다 하는 것에 이어서 이런 종류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온전케 하고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게 되는 이 작업이 대개의 경우에 쓴 소리를 포함한 형제들간의 권고, 서로 세워주고 붙들어주고 하는 이런 말의 작업, 이걸 우리는 권면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권면이 결국 이런 사역을 가져오는 것이니까.  권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또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지, 어떻게 행해져야 되는지에 대해서 바울의 말들을 통해서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5절부터 10절 사이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형제들에게 권면한 내용을 잘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예수를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착하고 의롭고 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좀 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참 믿음은 그 행동을 통해서 생활 속에서 나타나지는 그 사람의 하나 하나의 행위를 통해서 참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를 역으로 추적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를 떼 놓고 참 믿음을 판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 8절과 9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자, 오늘 여기에 나온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보면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너희가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원해서이다 라는 것입니다.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이 말을 한다고 해서 너희가 오해를 해서 "너희만 잘났다 너희만 옳으냐"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어떤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받으실만한 삶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외형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어떤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는가 아닌가로 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방법적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는지를 주목하라" 이것을 계속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착하고 더 선하고 선한 일에 더 열심을 내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조금 하다가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충분히 흡족해 하고 그래서 인정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 안에서 그냥 자기 만족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깊은 만족이 샘 솟아날 때까지 그렇게 더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리를 억지로 가고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대로 오리를 가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십리를 더 가주는 이것을 우리 안에서 요구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우리의 의가 못할 수가 없고 못해서도 안 된다는 얘깁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바울이 쓴 편진지 어떤지 우리가 불확실하지만, 이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면에서 아주 확실하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어찌 피하리요 이런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등한히 여기기 쉬운 환경에 살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권면의 내용 가운데에 빠져서는 안 되는 두 가지는 우리 안에 극히 약하고 육신의 정욕에 매여서 잠깐 눈에 보이는 편한 것과 이익과 세상에서의 재미 여기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이러하다고 진짜로 예비해 놓으시고 또 우리에게 비춰주신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눈이 가리워 지는 것을 일깨우는 겁니다. 이것을 자꾸 사람들에게 말을 해서 일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약함을 극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는 일, 이게 믿음이지요. 이것과 우리 안에서 얼마나 우리의 약함이 우리로 땅으로 자꾸 꺼지게 만들고 갈 길도 자꾸 주저하게 만들고 또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곁길로 새게 만드는 이런 문제가 깊이 내재해 있는지 그리고 사탄이 그러한 우리의 약함을 틈타서 우리로 더 실패하고 더 주저앉게 만드는 방해를 하고 있는지 이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경계하게끔 하는 것이 권면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권면이 거의 이러한 두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3장 12절에서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섰는가? 확인해 보라는 말이 나올 뿐 아니라 믿음에 섰는가 정도로 그저 한 번 찔러 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믿음에 서있지 아니하므로 그냥 버리운 자와 같은 사람들 속에 우리가 있으면서 그들과 비슷하게 신앙도 아니고 이건 세상도 아니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따라가지 않는 것도 아닌 그런 가운데 우리가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또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이걸 하면 안되고 다음에 '그 사람 안에서 이런 문제가 한 번 더 나오면 기도해 줘야지, 말해 줘야지, 내 속에서 이런 것들이 더 심해지면 내가 그 때는 조치를 취해야지'  그러지 말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죄의 유혹은 한 번만에 왕창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그냥 똥통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놔두면 점점 심해져 나중에 가면 성령이 암만 이야기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먹통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미리 미리 찔러서 완전히 허무한 자리에 떨어지지 않게끔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하지 않고" 파한다는 말은 곪을 때까지 곪아서 다 썩어서 이제는 손댈 수도 없고 관 뚜껑 열어서 그냥 담아 갖다 내버리는 일밖에는 없는 지경으로까지 그냥 짓물러지지 않게끔 하려고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이렇게 쓰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권면은 때가 있는 겁니다.  권면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때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지막에 지옥에 떨어질 때 붙들어서 "아이구! 이러면 어떡합니까?"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 안에서 어떤 문제가 드러나서 부끄럽게 될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완전히 나중에 멸망하는 자리로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패를 꼭 한 후에 우리가 말할 필요는 없어요. 어떤 경우에는 멀쩡하게 잘 있는 사람을, 외형으로 볼 때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을 우리는 붙들고 다지고 흔들어보고 찔러보고 또 격려하고 세워주고 그렇게 할 필요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만나볼 때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권세를 따라 엄하게 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냐 이겁니다. 13장 10절에서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갔을 때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여기 13장 2절에서 이야기했는데 죄 지은 사람은 용서를 못 받는 겁니다. 이건 바울이 용서하고 안 하고 문제가 아니고 누군가가 자비를 베풀거나 봐주거나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고 그는 자기가 정하신 질서에 구속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을 행한 자는 반드시 멸망입니다. 이건 심판이고 하나님 나라에 함께 살수가 없습니다. 악이란 것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고 선과 의와 진리와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하나님과 같이 살 사람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으로 살수가 없어요. 우리는 고양이와 쥐를 한 통에 넣어놓고 '같이 평안히 잘 살아라'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양이와 쥐를 한 집에 넣어두면 하나가 없어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같이 살려면 그 고양이의 생명이 바뀌어야 돼요. 고양이가 쥐를 먹는 생명이 아니게끔 되어야 됩니다. 우리 안에 악이 있다는 말은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섬기고 사람과 함께 연합할 수 있는 이 생명이 아들의 생명이고 우리 안에 이런 생명이 없고 악이란 게 뭡니까?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 생명을 축내고 도적질하든지 때리든지 욕을 하든지 무엇을 빼앗아 오든지 이게 악이 아닙니까?  이런 종류의 것들로 시기와 다툼, 질투, 미움, 분열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어찌 사람 사는 곳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형적으로는 사람의 가죽을 덮어쓰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결국 죄의 유혹으로 강퍅할 대로 강퍅해 지고 마지막에는 결국 몽둥이를 들고 가서 심판하는 것밖에는 예수가 할 일이 없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왔을 때 무슨 가마니 같은 것을 메고 와서 "이건 다 썩었네. 싸 가지고 갖다 내버려야지"  이렇게 예수가 우리를 맞이하러 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장에서 기자가 다시 하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쉬심에 따라 우리도 쉬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우리도 일을 능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여유를 따라서 어떤 일이든지 쉽게,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면서 악을 저지를 필요도 없고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고 자리의 문제고 생명의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그는 급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 분에게는 불평과 원망이란 게 하나도 없어요. 예수를 가만히 보면 가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는 자식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미래도 없고 심지어는 목숨도 없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 죽일지 모르는 가운데에 하나님이 이 끈만 딱 놓으면 마치 자동차 경주하는 차들이 엔진을 달구어서 출발 신호만 내리면 '웽' 하고 나가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를 죽이려고 압제하는,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금이다" 하면 바로 목 졸려서 날아갈 판인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평안한가? 왜 아무 염려가 없고 걱정이 없고 사람들을 대해서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야 자기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자기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나 이것은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겁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갈 때는 거름 밭을 지나갈 수도 있어요. 아래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밭에다 얼마나 거름을 많이 뿌려 놓았는지 한 십 분간 지나가는데 코를 들 수가 없어요.  그래도 그건 그거라고요. 그래도 그거지 별 것 있습니까? 한 십분 지나가면 괜찮은 것이지요. 지나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그 분과 우리와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그 분에 의해서 진실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설정되어 있는 자리를 우리가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누리고 이렇게 간다면 우리는 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형제들 가운데 계속 일깨워 줍시다. 우리가. 서로 이 사실을 일깨워 줍시다. 광야에 있는 나그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분명히 나그네 길 인줄 자기도 알고 남도 알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삶의 모든 것을 건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일희일비했지요. 그 상황이 조금 좋으면 좋아하고 "아! 됐다" 하고,  그 상황이 조금 어려우면 저쪽 가나안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계없고 그냥 그 자리에서 다 죽는 사람처럼 원망하고 싸우고, 우리는 그런 순종치 아니하는 본이 우리 앞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우리는 순종한 사람들의 본이 있는 것에 대해 더 감사하고 그 다음에 그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그래도 순종치 아니한 본이 그 앞에 명확하게 있어서 홀라당 다 멸망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서 정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로서 담담하고 담대하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고 어떻게 그렇게 자유롭고 어찌 그리 평안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우리 앞에 있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우리 믿음의 앞선 형제들이 모든 상황 속에서 환경과 관계없이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건 마치 초월한 사람이에요. 초인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기쁨으로 앞으로 걸어갔던 것을 우리가 봐야 되고 또 우리 안에서 작으나마 하나님께서 그런 역사를 이루는 부분이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자 이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히브리서 4장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연속으로 이야기합니다. "자 안식할 때가 있나니 하나님의 백성에 남아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해 놓고는 뜬금없이 하나님 말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그네의 목표는 빨리 이 여로를 벗어나서 피곤한 이 출장 길, 피곤한 거름 밭을, 지금 지나가는 냄새나는 곳을 빨리 빨리 지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영원한 안식처 우리가 참으로 가야 할 그 목적지로 집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리로 갈 수 있는, 제대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지금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앞선 형제들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그 사람들이 있지 않는데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겁니다.  지금 그리스도가 어디 있으며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어디 있어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겠느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바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들이 말한 것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들의 삶의 체험이 있고 그들의 간증이 있고 그들의 승리의 노래가 우리 앞에 들려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 말씀은 그들의 영이고 그들의 생명이고 그 말씀은 그 때 그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께서 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역사하는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은 얼마든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인격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체험될 수 있게 만들고 그 때 그 사람들이 누렸던 진리를 우리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이 말씀을 붙들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이야깁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이런 차원에서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 지식을 전한다 라는 차원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가야 할 길이 명확하지 않습니까?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세계는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들어갔고 그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안식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지금도 안식하고 있습니다.  앞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우리 앞에 있었던 송양원 목사라든지 이런 분들을 봐도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기가 감옥에 들어가서 무고하게 고통 당하고 할 때도 항상 그 내면에서 평안하고 담대하고 얼마 전에 송양원 목사님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 딸이 쓴 새로운 전기가 나왔더라고요.  근데 그것을 읽어보니까 자기 아버지가 체격도 작고 형편없이 약한 몸을 갖고 있는 분으로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 때 정말 누가 봐도 저 자리에서 불평이 나올만한데 무슨 힘인지 항상 그 안에서 찬송과 감사와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여유 있게 격려하고 위로하고 그렇게 지내왔다는 겁니다. 해방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보니까 몸무게가 한 30, 40㎏밖에 안 될 정도로 바싹 말라서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을 정도였다고 표현을 해 놓았어요. 그런데도 그 안에서 풍모가, 그 권위와 그 권세와 그 능력과 어떤 위엄이 풍겨 나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  딸인데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러한 능력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이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라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 앞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살고 그 안식을 누리고 또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죽어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은 우리가 말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이것들을 우리가 계속해서 서로 일깨워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희미하고 '뭐 나중에 가보면, 뚜껑을 열어보면 알겠지.' 라는 식의 불확실한 신앙의 세계를 사람들이 내버려 놓도록 놔두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사실 남의 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도 다 신통치 못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고 형제들을 붙들고 이런 일을 하기에 버겁다 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자신들이 그런 면에서 어떤 자격도 없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만한 용기가 별로 없어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살고 내가 살아야 이 사람이 살고, 우리가 한 몸이라고 말할 때 서로 살리고 서로 세우고 아까 말한 것처럼 매일 피차 권면하여 -피차라는 것은 너하고 나라는 겁니다. -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 강퍅하게 되고 믿음에서 떨어지고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이렇게 되지 않도록 역사해야 됩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는데 있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던 흔적이 우리가 지난 한 일년이상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늘 느껴졌습니다.  그 변명이 많다는 겁니다.  어떤 말을 할 때마다 "혹시 이 말 때문에 오해하지는 않을까 너무 마음이 상하게 되지 않을까 너희가 또 너만 잘났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런 말을 말 한 마디  하고서는 답을 달고 한 마디 하고서는 또 설명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도 사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남을 정죄하기 때문에 나 잘난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형제들에게 때로는 우리가 주지시키면서 그러나 그런 것을 주지를 시키든 안 시키든 어쨌든 실제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들을 형제들에게 말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 살아야지요.  특별히 바울이 오늘 여기서 아까 제가 말한 대로 좀 강한 어조로 무슨 협박이나 위협 같은 식의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깊이 이해해야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서 6장에서, 6장 1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보면 상당히 강력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영원한 심판 이런 것에 터를 다시 닦지 말고" 그런 것은 다 초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가라는 겁니다.  완전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 이런 것을 넘어서는 완전이란 결국은 우리 안의 인격과 우리의 생명이 현저하게 풍성해지고 여유롭게 되어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를 잘 하고 사람들에게 후하고 그런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 쪽으로 발전하라는 겁니다.  교회 사업 잘 하고 전도 잘 하고 이것도 참 귀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인격적으로 자라나는 것이 완전하게 가는 길이죠.  그런 면에서 교회가 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 그는 이야기합니다. "한 번 비침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그러고도 타락한 자는"  그러고도 타락했다는 말은 뭡니까?  그러면서 진보가 없다는 말입니다.  타락이라는 말은 그러면서도 한 발자국도 실제로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변화가 없는 사람은 어떠한가?  "이런 사람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 은혜 이상의 새로운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같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시는 방법, 놀라운 구원의 방법, 놀라운 은혜를 베풀었다면 이 이상, 이것 가지고 안 되면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를 두 번, 세 번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계속 내면 어떻게 됩니까?  버림을 당하고 저주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3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너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식이다."  이 말을 하는 것과 같은 무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더욱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협박이 아닙니다.  뭡니까?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실제를 말하는 겁니다.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상처가 되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우리로 편안치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것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안 들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나중에는 말을 들려주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혹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최종 목적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게 버리운 거지 무슨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때는 이러한 말과 같이 형제들에게 두려움과 근심과 그 속에서 떨고 눈물로 고민하고 밤잠을 못 자고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사실도 직시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라도 해서 그 사람의 생명이 참된 믿음 참 생명으로 온전케 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권면의 내용에 대해서 쭉 이야기했습니다.  자 바울이 어떤 권면을 했는가, 또 히브리서에서 기자가 어떤 말을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따라서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또 서로에 대해서 이러한 권면들을 해야 될 것입니다.  권면하는 하나님의 마음 권면하는 바울의 심정에 대해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조금 조금씩 또 함께 이야기했는데 히브리서 6장에서 지금 말한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한 다음에 기자는 자기 심정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분위기가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덧붙임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같이 말하나 너희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신 분이니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인하여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에게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열매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것이 이 권면을 하는 사람의 심정을 말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9절에서 바울이 말한  " 이 모든 것을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하는 말과 일치하는 거지요.  우리 안에는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우리죠.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 바울이 했던 이 이야기 또는 히브리서 기자가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우리가 이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도 이미 성도를 섬겨왔습니다.  우리도 행위가 있고 그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섬겼을 뿐 아니라 이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그런 정신으로 여러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실을 적당히 묵과하고 그냥 덮어놓고 우리에게 뭘 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기억력이 총명하고 하나님이 이런 사실에 대해서 낱낱이 모든 행위들을 하나 하나 체크하고 기록하고 '어떻게 사는가? 내 자식이 어떻게 행하는가?' 이것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을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수룩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고 하고 안 살기도 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 어떤 형제들은 이런 부지런을 나타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붙들어 주어야 됩니다.  처지는 사람은 우리가 길을 갈 때 어떤 사람이 다리를 다치면 들것에 들고 자기가 걸어가기도 힘든데 네 사람이 한 사람을 들것에 매어서 같이 들고 가지요.  우리는 약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는 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우리는 어쨌든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바울의 심정이고 우리의 심정입니다.  고린도 교회라서 해서 다 죄만 짓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밤낮 그 사람들이 죄만 지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악이라도 나오면 이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 가운데 여기 있는 이 집들을 봐도 이 가운데서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걸어가고 우리가 사모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누리는 사람이 몇 명 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제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 우리 눈에 보이는 수많은 집에 들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저 한 열 사람, 백 사람, 난 그렇게 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아요.  이런 세계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겁니다.  이건 매우 비싼 것입니다.  비싸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정말 이 뜻을 이루고자 한 만큼 정말 너무 너무 이것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서 이 일의 성공을 기다리고 소망하고 있는 일인 것을 우리가 안다는 말이죠.  그러하다면 우리 안에서 어떤 방법과 어떤 수단,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반드시 우리는 믿음의 목적,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됩니다.  여기에 못 가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 편에서 믿음이라는 것 내지는 구원이라는 것의 기준, 그 용어의 정의를 완화시켜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해 주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동이 '다 그만하면 되었다' 는 식으로 말해 줌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게끔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요.  그래서 교회만 나오면 우리는 다 되었다고 쳐줍시다.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죠.  우리도 다 구원받고 하나님도 행복하게 되고 많은 자식들을 얻어서 잘 살게 될 테니까 참 좋겠죠.  그러나 실제가 그렇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어떤 의미에서 초대 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긴장 상태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열매가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돈과 정욕과 자기 자아가 살아서 이렇게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과거에는 일반적인 가정에서도 부모에게 대체적으로 순종했고 그렇게 사악하게 토막살인이나 이런 것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를 믿어서 맺은 열매들이 우리보다 못하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교회 안에서 단 한 명이라도 어떤 사람이 음행과 세상과 짝하는 것과 시집, 장가가는 문제와 취직과 자식 키우는 문제와 이런 것에 매여 헤맬 때 바울은 사정없이 칼날을 들이대고 이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지금 시대에 지금 우리의 위치에서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하지 않아도 하나님 눈에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세계가 어떤가 이것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어떠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가 이것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의와 그 거룩  하나님의 질서 이것밖에는 하나님의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어떠하냐? 하나님의 그런 세계에 대해서 내가 동의하느냐 긍정하고 좋게 생각하느냐 이런 것으로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실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그 의와 그 거룩과 진실함과 착함과 선함과 그 자비로움, 그 용납하는 이것이 우리 안에 견고하게 있을 때만 우리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 때만 우리가 안식할 수 있어요.  그 때만 우리가 권면은 집어치우고 그저 형제들을 찬양하면서 서로 쳐다보고 '좋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우리가 이것을 멈출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이제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고 예수의 운명을 받아 들여서 거기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단순히 그저 한 이론으로 또 앞에서도 말한 대로 그저 선망하고 동경하고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하나의 어떤 이상으로 생각할 뿐 실제로 이것이 제 안에서 저를 구속하는 줄을 그렇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만히 보니까 저 자신과 또 여러 형제들의 삶 속에서 아! 이것이 전에는 우리가 이것에 선택적인 여유가 있어서 그저 좋은 마음으로 내가 여기에 동의나 할지라도 어쩌면 내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버릴 수도 있고 이 길을 안 갈 수도 있고 또 내 삶의 환경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그냥 다르게 변경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갈수록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이것은 어떤 종류의 거대한 힘과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 십 리 길을 갔다, 만 리 길을 갔다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합력해서 결국 당신의 뜻 안에서 우리가 꼼짝 달싹할 수 없도록 이렇게 움직여 가고있는 그 세계 속에 우리가 들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격이 없고 말할 용기도 없고 부끄럽지만 내 문제 뿐 아니라 내 코가 이만큼 빠져서 들락날락해도 다른 사람에게 어쩌면 또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긴장과 이 부담을 우리에게 이제 없애고 내려놓게 하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앞의 선배들이 안식에 들어갔듯이 우리도 어느 땐가는 우리의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이제는 우리 육신의 모든 문제와 사탄과 세상과 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경계하고 이런 것들로 서로 일깨우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또 속에서 근심하고 떨리고 하는 이런 과정들을 더 이상 체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리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오늘이라 일컫는 이 날이고 또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구원받을 때입니다.  은혜의 때입니다.  이때는 기회지요.  기회 때는 열심히 이 기회를 잡고 또 살려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도 노력하고 피차 붙들어 주고 해서 다 살도록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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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8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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