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그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자기의 믿음을 확증해 보라는 말을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13:5)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하여 보고,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모르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표준새번역)

자기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자기가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이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믿음을 진실하고 완전한 것으로 다져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육신의 연약함과 사탄의 시험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예수를 진정으로 믿고(받아들여서) 따르게 된 사람도 다음에 계속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문을 잘못 들어섬으로 인해 전혀 믿음의 길을 갈 수 없게 된 경우도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믿음에는 문이 있을 뿐 아니라 길도 있다. 문은 처음에 믿음으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 영생을 얻으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문으로 한 번 제대로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 아니고 계속 길이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것은 자동차와 같지 않고 전차와 같다고 했다. 그것은 자동차는 한 번 기름을 넣으면 목적지까지 갈 수도 있지만 전차는 매순간 그 줄을 전기선에 붙여 있어야만 목적지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 믿는 것은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는 날까지 계속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문도 잘 들어서야 하고 길도 계속 잘 가야 한다. 한 번 문을 들어서면 끝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는 길이 있는 것이다. 문을 잘 들어서는 것은 첫 단추를 바로 끼우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잘못되면 진보와 성장이 없다. 오래 길을 갔는데 그 결과는 처음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이다. 즉 들어가야 할 문으로 제대로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섰지만 좁은 길로 계속 가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그 길을 계속 진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한 번 은혜를 받고 놀라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 바로 자기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누리는 자리로까지 인도할 줄로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다고 해서 가나안 땅을 즉각 다 얻은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힘써 (믿음의) 싸움을 한 끝에 실제로 땅을 얻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도 약속을 받는(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즉각 다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매일 믿음으로 사는(싸우는) 가운데서 실제로 조금씩 누려 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두 측면에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 믿음의 문과 길 두 측면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으며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고린도교회의 많은 실패한 신자들처럼 헛되이 믿고 있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후서 두 편지를 썼다. 여기서 바울은 수많은 점검 기준들을 제시했다. 그가 고린도교회를 향해 한 모든 말은 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며 진정한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권면이든 책망이든 자기 고백이든 교회를 향한 바울의 모든 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빛을 비춘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요한과 야고보, 베드로 등 모든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글에서 한결같이 잘못된 믿음에 대해 지적함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 안에서 행하도록 도우려고 했다. 특히 야고보의 다음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확인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14-22)

믿음이 없는 행위는 죽은 것인 것처럼 행위가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즉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에 따르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믿음은 거짓된 것이다. 집에 불이 난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그런데 불이 난 것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방에 평안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는 불난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참으로 주님께 맡겼다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일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태도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사람의 행동과 태도와는 달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된 것이다.

믿음의 가장 큰 증거 또는 열매는 '안식'이다.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3,10)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도움을 받는다면 즉 하나님을 믿는다면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유능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이는 고아와 같이 범사에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다음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4:19-21)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런 면에서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작은 문제를 놓고서 세상과 싸우고 형제들과도 싸웠다. 그것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그로 인해 형제들과 늘 다투고 싸웠으며 세상 방법을 썼고 세상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그밖에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많았다.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그들의 여러 문제를 지적했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진단하게 만드는 척도가 되었다. 바울이 지적한 고린도교회의 문제 및 그것과 대비되는 참 믿음의 실상은 다음과 같이 비교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가 참 믿음을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많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이기심}과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마음} 곧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에 깊이 매여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그들에게 참으로 주님을 믿지 않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 있지 못하고 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일이나 진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혹은 인종과 성별, 지위의 낮고 높음, 능력의 차이 등 여러 요소들을 근거로 하여 항상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분열했다.(고전1,3,11장) 바울은 그러한 그들의 실상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참으로 믿음에 섰는지(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를 확증하도록 계속 일깨웠다.

참 믿음의 증거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자기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종됨을 깨닫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참 믿음을 가졌다면, 참으로 주님을 보았다면, 우리는 범사에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안에서 오직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그것만을 나타내기 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 믿음은 자신의 죄와 허물과 약함을 깊이 깨닫게 만든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마음은 약하고 허물이 있는 다른 형제들에 대해 겸손과 온유와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을 기꺼이 용납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도록 만든다.

또 참 믿음은 같은 생명을 지닌 형제들을 세상 무엇보다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존귀하게 섬기도록 만든다. 또한 믿음은 형제를 내가 마음대로 판단하고 좌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게 만들고 오직 그를 주님이 사랑하셔서 세운 주의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여겨 귀히 여기며 혹 그에게 문제가 있더라도 (내게는 그를 판단하거나 거부할 자격이 없으므로) 그에 대해 주제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며 오직 용납하며 하나님이 그를 바로 세우고 온전케 하기를 기다리게 만든다.
무엇보다 참 믿음은 형제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통로라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그 안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존귀히 여기며 진정으로 연합하며 교제하기를 원하게 만든다.

<둘째>,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여전히 {육신의 정욕}에 매여 있었다. 시기와 분쟁도 그들이 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는 증거가 되지만 그들 안에서 자행되고 있던 음행과 각종 부도덕하고 무절제한 생활 역시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었다. 심지어 그들 안에는 부모의 첩과 음행을 하는 자도 있었고 교회는 그런 자를 그대로 버려두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세상 법정에다 그것을 가져가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고전3,5,6,7장)

또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늘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서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을 사모하며 세상을 기웃거렸다. 즉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좇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세상 쾌락도 좇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형제들과의 교통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벗이 되어 짝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고후6장)

그러나 참 믿음은 우리는 이제 홀로 있는 자도 아니요 또한 내 마음대로 내 몸과 시간을 사용할 수 없는 자며 오직 그리스도께 바쳐진 정결한 신부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일깨우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고 절제된 생활, 성별된 생활로 이끈다.  

<셋째>,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 자녀(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일깨우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공부, 취직, 결혼, 자녀, 미래...)과 세상 일에 매이지 않도록 만들며 그런 것들로 인해 염려하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고전7장)
그러나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그렇지 못했고 세상에 매였고 생활에 매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일에는 인색했고 주님께 제대로 헌신하지 못했다.(고후8,9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에 긴장하고 짐을 져야 하고 마음을 써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될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그것들을 다 맡김으로 인해 안식과 자유를 누린다. 신자가 마음을 써야 하고 근심해야 할 부분은 성령이 그에게 짐을 지우는 일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이 매이는 곳은 오직 성령이며 진리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 육신적 삶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또한 최소한으로 매이게 되므로 거기서 남는 모든 여력을 선한 일에 사용할 수 있다. 참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육신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인색하게 행동하고 선한 일에 대해서는 후하게 행동하게 만든다.

<넷째>, 일부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육신의 생각과 사탄의 거짓말에 깊이 매여 있었다. 그들은 영으로 행하고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오직 육신의 생각과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외식(外飾)하는 자가 되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취할 때도 외모로만 취했다.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있는 거짓 경건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참 형제요 선생인 바울을 배격하고 거짓 선생들의 거짓말을 받아들여서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후11장)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참 믿음이 없다는 증거였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범사에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판단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영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행한다.(고후3-5장) 이런 눈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지 않고 귀히 여길 수 있다.(고전8,11장)
또 사람의 영광이 바깥에 있지 않고 속(인격과 생명)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외식하지 않고 오직 생명대로 행하며 생명의 능력을 확대하기를 힘쓴다. 그리고 일할 때도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은사대로 분수대로 조용히 봉사한다.(고전12-14장)
또 어디서나 형제는 형제로 알아보고 사랑할 자는 사랑하며 거절할 자는 거절하는 것이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참 믿음의 사람은 또한 질서를 존중한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영적 질서를 분별하며 거기에 따르는 것이다. 섬길(위에 있는) 자는 섬기며 사랑할(아래 있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질서대로 행하는 것이다.(고전11,14장)

우리 안에는 이러한 참 믿음의 판단 기준들이 이미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항상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자신이 바로 서 있는지 아니면 넘어져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길을 계속 가고 있는지 아니면 멈추어 서 있거나 뒷걸음질 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곁 길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58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9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