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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는 왜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약함을 자랑했는가? 그것은 그에게 강함이 없어서 그런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인생이 그 약한 자리에서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영광과 능력과 승리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약하게 됨으로써 결국 망하고 죽는다면 누가 그것을 자랑하겠는가? 바울의 약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신 결과였다. 그리고 그 약함은 그로 진정 강하고 능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수순(手順)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 육체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진정한 영광 곧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넣고 폐기하신 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이때 사람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인간의 약함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우리의 약함 곧 하나님의 사람인 그리스도인의 약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단단히 붙여놓기 위해 조치하신 데서 온 것이다.  

사람은 본래 약하게 지음 받았다. 근본적으로 말할 때 사람의 약함은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나 실패했기 때문에 약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약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약함이란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와 같이 사람이 죄로 인해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서 병들고 가난하고 늙고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 없이 도무지 살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을 때때로 절망적인 약함 가운데 두시는 것은 그로 이러한 자신의 본래 위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찾는다. 즉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본질적 약함이든 육신의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약함이든 인생은 약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보통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뼈저리게 알아서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범사에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이 땅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그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원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풍성을 체험하는 사람은 많지 아니하다.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의 약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난과 실패 속에서 자기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풍성과 강함과 능력을 믿고 체험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 두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면 그는 반드시 실패한다.

사람 안에서 성령님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가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무능하며 하나님께 아무 소용이 없는 자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우리 일생을 통하여 계속 이 일을 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어떤 분이며 얼마나 풍성하시고 능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는데는 아무 조건이나 자격도 필요치 않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다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누리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는 일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을 단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행위에 불과한데 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람의 자아(自我)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격을 지닌 영적 존재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정신과 자유를 지닌 특별한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피조물이지만 거기다가 타락하여 본래의 영광과 권세를 대부분 상실해 버렸지만 그래도 매우 자존심이 강하고 자아가 센 것이 바로 사람의 특징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이 물리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서 구원을 얻도록 만들어 놓으셨다면 사람은 매우 좋아하며 그것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본래 나무의 가지처럼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것(하나님 없이 自力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람 안에 넣으셔서 그로 사람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시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자기의 이러한 지음 받은 원리와 자리를 바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넣으셔서 하나님의 생명대로만 움직이도록 해 놓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며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탄에게 속아서 그것이 자기의 수치와 멸망으로 생각하게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자존심 건드리는 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자신이 남아 있으면 주님의 풍성은 체험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 자기를 비워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약한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은 이를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자기를 비우도록 해야 한다. 어제 비웠지만 오늘도 비워야 하고 내일도 비워야 한다. 어제 비우고 오늘 비웠으면 다 비워진 것 같지만 얼마 후에 보면 또 비울 것이 남아 있다. 한 번 비움으로써 영원히 비워지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충만케 됨으로써 영원히 충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다 알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다 버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더 깊이 알아가며 계속 더 깊이 낮추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풍성하심에 대해서도 다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더 알아가야 한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1:53) 주님의 역사는 항상 주리는 자를 배부르게 하시며 목마른 자를 만족케 하시며 낮아진 자를 높이시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3-6)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준비된 자 곧 굶주린 자만을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집회에 올 때 혹은 성경을 읽을 때 여기서 무엇을 구경할까 무엇을 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약간의 성경 지식이나 얻으려고 하고 정말로 절박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갈망하는 상태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성령의 첫 역사는 언제나 사람 안에 [구하는 마음]을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삶, 영적 성장의 시작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고 더 풍성한 것을 사모하게 하신다. 즉 그는 우리 자신의 현재 상태가 보잘것없고 가난한 것임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고 복되게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탄식해야 할 일은 우리가 약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강한 척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자기의 어떤 일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내놓을 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안 가서 현재의 생활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적당하고 적합한 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현재 영적 상태에 만족을 느껴서는 안된다. 세상적 육신적 형편에 대해서는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 새롭고 나은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차피 썩어질 것이고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 즉 그리스도의 풍성에 대해서는 우리는 결코 만족해서는 안된다. 모든 실패와 퇴보는 자만(自滿)으로 말미암는다. 반대로 영적 성장은 언제나 더 좋은 상태를 사모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참으로 자기의 할 수 없음을 느끼는 마음과 더 나은 생활, 더 풍성한 삶을 갈구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런 생활을 누릴 수 있는지 방법을 잘 알지 못함으로 인해 실제로 그것을 얻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희망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나 자신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있다면 여러분은 안심해도 좋다. 그리고 반드시 주님의 풍성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비워놓으신 사람은 또한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생명으로 채워서 충만케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약하게만 만드시고 비우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국은 충케 하신다. 약화시키고 감소시키고 비우신 것은 채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갈급하고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 아래 있다는 증거이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가 아이성(城)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여리고의 승리를 아이성으로 가져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리고성은 큰 성이고 아이성은 작은 성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결코 여리고를 무너뜨린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당연히 작은 아이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의 승리로써 오늘의 영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일 뿐이요 현재에는 반드시 새로운 능력으로써 새로운 영적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새로운 체험과 새로운 공급이 필요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한 번의 승리가 영원한 승리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충만케 될 수 없다.


또한 산 믿음은 이전 행위를 본받지 않는다. 성경은 믿음의 인물들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그들을 따르고 본받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인물들이 지녔던 믿음(信仰)을 본받으라고 하지 그들의 '믿음의 행위'를 본받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믿음을 본받는 것과 믿음의 행위를 본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떤 형제가 주님을 믿음으로써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룬 것을 보고 우리가 그와 똑같이 행동한다고 할 때 우리도 그 일을 이룰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를 본받는 것일 뿐 그의 믿음을 본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동안 헛된 길을 간 후에야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의 믿음의 행동을 모방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능을 깨닫고 마음을 열어 진정으로 주님의 역사를 의지하며 받아들이는 행위이지 남의 행위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행위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자아가 살아있는 것이며 주님을 실제로 의지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남의 행위(승리)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의 행위(승리)를 붙잡고 재현해 보려고 하는 것도 헛된 일이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지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저는 아무 소용이 없는 자이고 과거의 승리도 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저는 지금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하고 겸손하게 엎드려야 한다. 이러한 겸손은 사람의 가르침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우리 뜻으로 일하게 될 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할 때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십자가 안에 넣어놓으셨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대단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십자가 안에서 폐기 처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없어졌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 있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셨다. 우리의 만족과 승리, 완전과 충만은 오직 우리가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자신을 철저히 비울 때 이루어진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리는 자리로 인도하셨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난하고 애통하고 목마른 자리로 인도하셨는가?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지극히 무력한 자라는 것을 절감하는가? 누구든지 완전히 비어있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모든 면에서 내가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와서 많은 것을 구할지라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열왕기하 4장에 기록된 한 일은 우리에게 하나의 영적 원리를 보여 준다. 한 선지자 생도의 부인과 아들에게는 오직 한 병의 기름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 병의 기름이 나중에 많은 그릇에 부었던 기름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기름은 조금만 있어도 되었다. 많이 필요한 오직 '그릇'이었다. 하나님의 종이 그 여인의 집에 도달하여 역사하기 시작했을 때 여인의 어려움은 기름의 부족이 아니라 '그릇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지시하여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왕하4:3,4) 그때 어떻게 되었는가?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왕하4:5,6)

여기서 기름은 성령에 비유할 수 있고 그릇은 사람의 마음 또는 믿음에 비유할 수 있다. 여인이 가서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어 마련한 것은 성령께 자리를 비워드린다는 것에 해당한다. 조금 빌지 말고 많이 빌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최대한 겸손히 낮추고 주님께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비우고 저것도 비우고 모든 것을 다 비우면 그만큼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성장은 오직 계속 비우고 계속 충만케 되는데서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는 결코 한 번 비우고 그로 인해 영원히 충만케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계속 비우고 계속 충만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두 번 비우고는 더 비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역사해야 할 영역은 끝이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자기를 부인해야 할 내용이 있다고 보면 된다. 십자가의 역사는 갈수록 많아진다. 처음보다 나중으로 갈수록 더 비울 것이 나온다.
여기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여인과 아들이 어디서 그 기름을 붓고 채웠느냐 하는 것이다. 여인과 아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기름을 부은 것이 아니라 오직 집에서 문을 닫고 기름을 부었다. 이것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만 은밀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형제와 교제하는 것은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고 직접 성령과 교제하는 것은 그것과 별개의 일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 다 우리 자신과 주님 사이의 일이요 어려움도 승리도 우리 개인의 일 또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일일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핑계해서는 안되며 오직 문을 닫고 성령과 직접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어떤 답이 나오고 좋은 것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도 안되지만 밖의 사람으로부터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사람을 통해서 어떤 역사가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선행된 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셔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친히 풍성케 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간구해야 한다. 달든 쓰든 성령의 역사이기만 하면 그것은 다 좋은 것이다.

왕하 4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은 아들이 어머니에게 "그릇이 없나이다"고 말했을 때 기름은 더 나오지 않고 그쳤다는 사실이다. 기름이 그친 것은 하나님의 기름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준비한 그릇이 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기름이 먼저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릇이 부족이 먼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무한정 비우기 원한다. 우리가 무한정 비운다면 성령님도 무한정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은 무한정 충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일이 잘 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기 안에서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도록 자기를 비움으로써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데 있다. 성령의 충만을 원하기에 앞서 자기를 비우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비우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물론 우리는 비우는 일도 성령께서 수행하신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어떤 과정으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를 더 깊이 파시고 더 낮추시고 더 가난하며 갈급한 자가 되게 만드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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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51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9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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