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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확증함
 고후 13:1-5
우리가 예수 믿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문제가 언제나 이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언제나 예수를 믿어 왔고 또 예수 믿는다는 점에서 내가 특별히 의심할 만한, 예수 안 믿는다고 누가 말할 그런 상황은 아니니까 이것은 언제나 '문제가 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 바울이 고린도후서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해 보라 하는 이야기를 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종종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마음에도 이런 부담이 온다는 말입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느냐?"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네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네 속에서 역사하고 너를 움직여 나가고 네게 말도 하고 너를 책망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느냐? 이렇게 묻는 거죠.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다. 그랬습니다. 버리운 자라는 말은 다른 번역에 보니까 실격자라고도 표현을 해 놓았는데 예수를 헛 믿었다는 이야기죠. 앞으로 영원히 멸망될 것이다. 그런 말로 꼭 볼 것은 아니나 하여튼 현재는 예수를 안 믿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자주 자주 우리의 믿음을 진실하고 완전한 것으로 다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이것이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지음 받은 원래의 사람은 어떤지 우리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타락해서 있는 지금 우리는 극히 약하기 때문에 예수를 처음에 제대로 믿고 받아들여서 예수를 따라가던 사람도 계속해서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문을 잘못 들어와서 엉뚱한 길로 가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가도 예수 안에서 진보가 없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란 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잘 맞지 않는 구조로 사람이 이상하게 변형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사탄은 이것을 관망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곁길로 빠지고 멈추고 혼란 속에서 헤매고 이렇게 하도록 옆에서 자꾸 부채질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지금 그냥 보아서는 예수도 안 믿고 있고 교회까지 다 나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를 믿는 그 믿음에 대해서 확증하고 확인하고 시험하고 왜 자꾸 그렇게 해야 되느냐? 육신의 연약함과 사탄의 시험, 방해 이것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랬습니다. 믿음에는 두 개의 과정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문이 있어요. 좁은 문이라는 게 있어요. 그 다음에는 협착한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이죠. 좁은 길이죠. 문이라는 것은 처음에 믿음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물론 우리는 제대로 들어서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오고 십자가의 문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유인할 때 그렇게만 말하면 그것이 세상 사람이 전혀 귀가 뚫려 있지 않은 상태에서 뭐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그러니까 좀 달콤하게 알아듣기 쉽게 내가 말을 해 줘야지. 이래서 우리가 문이 아닌 데를 문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네가 사업에서 큰 성공을 할 것이다. 라든지 집안이 잘 되고 모든 우환이 가시게 된다든지 이런 쪽만 강조해서 그게 뭐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여하튼 그 것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 이렇게 제시를 할 때 이것은 가운데로 제대로 들어와야 할 문이 아니고, 집이 아니고 어디 뒷골목으로 바로 새버리는 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데로 인도하면 들어오는 사람이 그 문으로 통과해서 "아! 나는 예수 믿었다. 나는 이제 교회 다니고 찬송도 부르고 헌금도 하고 설교도 듣고 하니까 이제 나는 예수와 같이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가는데 이게 천국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엉뚱한 데로 그냥 가고 있는 겁니다. 문을 처음에 잘 선택해야 된다는 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 결국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야기한대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했는데 그가 전하는 내용이 그렇다는 얘기죠.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저를 다 포함하여 옛날의 죄 많고 문제 많고 허물 많고 약한 인생은 끝장 내버리고 예수가 부활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다시 살려내어 우리를 온전케 한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길도 없고 문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십자가의 길밖에는 없습니다. 십자가 다음에는 부활이니까 십자가는 부활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니까 십자가의 도라는 말을 쓰지요. 문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가 참 믿음의 시작으로 봐야 되지요.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서 여유가 있고 넉넉한 사람들은 이 길로, 이 문으로 못 들어오죠. 누가 자기 죽는 길로 들어오겠습니까? 오직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다 죽은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없는 살림 엎어 치나 메치나 한 가지 아니냐?' 할 수 있는 사람밖에 결국 이 문으로 못 들어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께로 들어 왔는데 우리의 첫 관문이 분명하게 이것을 통과했는지를 자주 자주 생각해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참동안 진리에 대해서 듣고 동의하고 또 여기에 함께 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를 부인하는 이 점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진보가 없다면 내가 처음에 자기를 부인하는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고 이 길을 들어서지 못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한 번 확인을 해 보아야 됩니다. 자! 그 다음에 십자가의 문으로 들어오면 다 된 것이냐? 들어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길이 이어집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십자가의 원리라는 말도 되지만 한문으로는 도니까 길이죠.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십자가의 원리고 십자가의 삶인데 삶이 붙어 있는 동안까지는 매일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되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과는 같지 않고 꼭 그것은 전차나 전철 가는 것과 같다." 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니 자동차라는 것은 한 번 기름을 넣으면 500㎞나 얼마를 갑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도 한 번 기름을 가득 채우면 한 번만에 가는 겁니다. 그러나 전차나 전철은 어떻습니까? 위에다 전기 줄을 계속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놓으면 바로 서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 문제는 한 번 내가 예수를 믿고 한 번 큰 깨달음을 얻고 한 번 은혜를 받고 감격하고 결심을 하고 '야! 참 나는 구원받았다.' 하는 걸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고 출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종착역까지 계속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을 통과하는 문제뿐 아니고 문을 통과해서 길로 계속 나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라는 것은 문도 잘 들어서야 되고 길도 계속해서 잘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문을 들어서면 끝이 아니고 계속 길이 이어지니까. 만약 계속 안 가면 어찌됩니까? 진보가 없는 거지요. 문을 잘 못 들어선다는 것은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뒤에 가서 아구가 안 맞게 되어서 그건 아무리 해도 제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오래 오래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느냐? 아니면 중간에 멈추어 서느냐? 하는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먼저 첫 관문을 잘 통과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여기 있는 형제들은 그 점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서로 교통을 통하여서 이 점을 확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복이나 받자고 육신이 잘 되고 형통하자고 앉아있기가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그렇게 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진보가 없는 부분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많다는 말입니다. 오래 오래 길을 갔는데도 진보가 없다, 성장이 없다, 발전이 없다. 이것은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문을 잘 못 들어선 것입니다. 그것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면은 진보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면은 도무지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안 바뀌는데 채찍질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이 계속해서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으면 말에 못이 박혔다든지 배가 고프든지 병이 났든지 근원부터 추슬러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채찍만 때린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는 믿음을 문을 통과했다. 십자가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어떤 진리의 하나 하나의 측면에서 이건 제대로 점검되지 못한 부분이다. 라고 발견될 수 있는 여지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점검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더 문제는 가다가 중단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섰지 만은 길이 워낙 가기가 힘드니까 몸도 저항하고 사탄도 훼방하고. 그래서 결국 못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간증하거나 설교들을 때는 '아멘! 아멘! 아! 좋은 이야기다.' 그러면서 실제로 몸이 거기에 적응되도록 충분히 연단을 받고 충분히 십자가의 길에서 부활의 능력도 체험하고 우리의 약한 중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얼마나 대단한 건가 하는 것을 맛도 보고 이렇게 밀고 나가야 되는데 조그만 시험, 조그만 어려움 오거나 조금만 피곤하면 그만 멈춰 서버리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갖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부부간에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고 실제로 부부로 살고 있어도 그냥 원수 비슷하게 덤덤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조급하고 인내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이라는 것도 칡뿌리 씹는 것처럼 오래 오래 꼭꼭 단물이 나올 때까지 씹어야 되는데 혓바닥으로 슬슬 핥다가 '이거 아무 맛도 없네' 하면서 내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삶이란 것도 삶이죠. 삶. 사는 것이라고요. 누구하고 사는 겁니까? 예수하고 사는 것이고 성령이 우리 속에서 매일 우리와 사귀면서 인격으로 우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하고 살려면 좀 기다릴 줄도 알고 소리를 좀 들을 줄도 알고 좀 안 듣는 것 같아도 내가 그에게 한참 말도 좀 해야되는데 이게 급해서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진보가 없지요. 형제들과 사귀는 것도 우리는 예수 까닭에 사귀는 것 아닙니까? 아무개 형제지만 알고 보면 예수의 어느 지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흘러나오니까 그 사람하고 내가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고 사귀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 안에서 기분 나쁘고 마음에 안 들고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예수의 성분이 내 속에서 충분히 나올 때까지 내가 그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좀 보기 싫어도 쳐다봐 줄 수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믿음의 길로 가는 겁니다. 믿음의 문을 들어서는 것은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할 때 '맞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필요합니다. 예수가 필요합니다. 성경 봐야 됩니다.' 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래야 되겠다. 결심하고 마음에 감동이 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게 믿음의 문으로 들어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있더라도 계속해서 실제로 그 상황을 맞이하여서 쭉 누려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 담배 끊겠다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지만은 실제로 그걸 끊어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길로 계속 가는 것, 그 차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지만 가나안 땅을 금방 다 그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공부하고 있지만 이것은 수십 년을 걸쳐서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내용이지만 이것을 수십 년에 걸쳐서 싸우면서 믿음의 싸움을 한 끝에 그들이 직접 칼을 가지고 적을 때려잡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엉뚱한 일을 하든지 간에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겁니다. 이 싸움을 싸운 끝에 조금 조금씩 실제로 땅을 확보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얼마나 현실이고 얼마나 삶이고 생활입니까? 이것은 어떤 지식이나 이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도 약속을 받는 그 순간에 즉각 다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약속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런 세계를 보고 '이게 좋구나. 이리로 가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내가 받아내야겠다.' 이렇게 감동하고 믿는 이것을 이야기하는데 그 순간에 다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서 다른 표현으로 하면 믿음으로 싸워 가는 가운데서 실제로 조금씩 누려 가는 이것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측면에서 지금 제대로 되었는가?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이것을 반드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왜 지금 이렇게 헤매고 문제가 많은가? 바로 이 양면에서 근본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추진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 이르기까지 다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무가 인삼이 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도라지도 인삼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인삼의 씨를 뿌려야 됩니다. 같은 인삼이라도 그렇죠. 인삼이라도 아무 데나 심으면 무 비슷한 효과밖에는 없어요. 그러나 산에서 제대로 자란 산삼은 큰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그 산삼을 캐서 그 씨를 밭에 뿌리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장뇌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그것은 기른 삼입니다. 집에서 기른 산삼이지요. 그것은 효과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씨와 이것이 어떤 단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계속 그 길을 오랫동안 이어 왔는가 하는 이 두 가지 문제가 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필기시험에 합격해서 벽에다 붙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어차피 살기는 살아야 돼요. 예수 안 믿어도 사람들이 할 수 없어서 살기는 다 사는 건데. 자기 주먹을 믿든지 빽도 되지 않는 무슨 벼슬자리, 대통령 한껏 해야 5년 하는 것, 거기에 붙어서 또 대통령의 사돈의 팔촌까지 '어디 국물이라도 튀겼나?' 해서 붙잡아서 살려고 버둥거리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살려고 하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좋은 길이 있고 완전한 길이 있고 또 그 동안 생판 모르는 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 살아 계셔서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 안에서 날마다 기쁨과 삶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을 체험해 온 이 길인데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해서-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무슨 설문 조사하는데 내가 신경을 써서 굳이 힘써서 이것을 풀어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식으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집에서 싸우고 바깥에 나가 누구와 싸우고 스트레스 받고 잠 못 자고 머리 빠지고 하는 에너지의 십분의 일만 투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우리의 혈기와 - 그 싸우고 하는 것이 다 혈기 때문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어떻게 십자가에서 그가 확실히 처리하셨으며 그리고 성령께서 어떻게 살아 계셔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 죽을 것은 죽고 처리될 것은 다 처리되어 버리고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우리를 다시 살려 놓으신 것을 내 안에 적용을 해 주는지, 십분의 일 시간만 투자해서 십분의 일 신경만 써서 주목을 한다면 큰 시간과 돈을 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곧 돈 아닙니까? 엉뚱한 곳에 가서 엉뚱한 노력을 해서 밥도 안 나오는 걸 찾으려 하지 말고 예수 믿는데 투자를 하십시오. 말씀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저는 형제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도 내용에 상관없이 형제들의 이야기가 일단 너무 좋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귀가 뚫어지게 듣습니다. 형제들이 그냥 지나쳐 하는 말일지라도 억지로 그 자리에서 마지못해 하는 말일지라도 저는 그 말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대충하는 말일지라도 그저 넘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거기서 도움을 받아서 살아야 되니까. 그저께도 어떤 형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교회를 왜 나오느냐? 필요해서 나오지요. 살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형제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기도를 하든지 뭘 하든지 이게 다 무엇 때문에 합니까? 삶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삶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자기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수판 놓고 계산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속에서 내 인생을 다 알아서 설계해 놓고 이끌어 가시고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만들어 놓은 그런 삶이 우리의 차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믿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골똘하고 이 문제를 뚫지 않으면 안 돼요. 이건 대충 넘어가서 될 일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진짜 믿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확인하고 확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을 우리가 이 자리에서 특별히 논할 필요도 없어요. 왜냐면 그것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써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쭉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왔으니까요. 바울이 한 수많은 말들, 그것이 권면이든 책망이든 자기 고백이든 교회를 향한 바울의 모든 이야기는 전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 가운데 비춰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모든 말은 우리가 자신의 믿음


그 저자들은 모조리 한결같이 어떤 측면에서는 책망의 형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이건 잘못된 믿음이다.' 이렇게 책망하는 형식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음으로서 어떻게 그 속에서 기쁨과 안식과 위로를 얻는지를 말하는 형식으로 -이건 아주 적극적인 방식이죠- 그런 방식으로 모두 참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야고보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자주 자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반추해 보게 만드는 말씀이죠. 야고보서 2장 14절부터 나오는 말씀이지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 없는 행위는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음 없이 행함을 자꾸 내세우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관문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것이죠. 천주교 같은 곳에서는 그냥 선한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왜 선한 일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선하신 생명을 가진 선한 아버지로서 내 속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내가 당연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냐? 이래야 되는데 이게 아니고 죽고 난 다음에 어디 좋은데 갈려고 그렇게 한다.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문을 잘못 통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오늘 왜 돌이켜지지 못하는가를 생각한다면 여기에 그 반대편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 만한 행위도 나타내 보이지 못하니까 갈 데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입만 '나불나불' 하는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면 자기들이 잘못 되었으니까 뭐 완전한 게 있으면 가겠는데 천주교에 다니다가 개신교에 갈려고 하니 뭐 아무 열매가 없는데 진짠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가 죽은 것처럼 행위 없는 믿음도 똑같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따르는 삶이 나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비유를 들어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났다고 이야기합시다. 그 말을 믿느냐? 믿습니다. 믿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빨리 팬티 바람으로라도 밖으로 뛰어 나가야지요. 그런데 믿습니다. 집에 불이 난 것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방안에 그냥 평안히 앉아있다면 불이 났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참으로 주님께 맡겼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태도가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맡겨 놓고도 염려하고 맡기고도 근심하고 맡기고도 불안해하고 맡기고서도 속에서 화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갑갑증이 일어나고 그래서 사람을 원망하고 싸우고 하는 이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이고 큰 증거를 안식에서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안식과 평안 또 이것은 다른 말로 안식하고 평안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있지요. 여유와 기쁨이 나오니까 우리의 관용과 우리의 기쁨 이것을 포함한 우리의 안식 또는 어떤 평안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믿고 있나 아닌가를 점검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인 지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짜증을 자꾸 내거나 막 인상이 오만가지로 우그러진 상태로 현대인들이 만나면 웃는 낯으로, 뭔가 보는 사람이 마음이 풀어지도록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지요. 집에 들어가도 남편이 부인을 봐도 부인이 남편을 봐도 자식이 부모를 봐도 맨 날 우거지상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면 그 우거지상을 만들어 낼만한 생활의 염려가, 생활의 문제 거리가 존재하더라도 그 문제의 처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좀 태평스럽게 되어지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될 일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의 기본적인 특권이고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교회를 나와도 덤덤하고, 무슨 세파에 산전수전 다 겪고 막 전투에서 사람 수십 명을 죽이고 나와 앉아 있는 것처럼 무슨 이야기를 해도 감동도 없고 '빨리 안 끝나나?' 이렇게만 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일단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약함으로 인한 할 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렇다해서 그것을 '왜 그러하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편이 좋으나 안 좋으나 죽으나 사나 안식일을 지키게끔 요구를 받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장사꾼이 제일 장사가 잘 되는 일요일에 문 닫아야 되는 이런 고충과 마찬가지의 고충을 그들에게 안겨주었을 법한 일입니다.  그들도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잘 되면 좋은데 잘 안 될 때도 많다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쉰다는 것이 할 법한 일이겠습니까? 갈 길은 바쁜데 여기는 하나도 재미가 없고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손 다 풀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너무 불안하고 너무 너무 답답하고 죽을 맛이라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안식을 권고할 때 이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다. 라고 느낄만한 상황에 여러 사람이 처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야 배가 부르고 아무 걱정이 없으니까 그렇지' 라고 생각한다든지 어떤 때는 그렇지만 어떤 때는 내가 지금 어떻게 이 상황에서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어떻게 내가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따지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런 태도로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그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지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짊어지게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짊어져라' 이것입니다. 그 문제를 누가 모르느냐 이것입니다. 인생을 지은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사탄도 알고 있고 우리의 죽음도 알고 있고 우리의 병도 알고 있고 우리의 문제가 '태산같다' 하는 것은 물론 뻥이지요. 사실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와 같은데서 내일이면 굶어 죽는 만큼 여기에 위기가 있습니까? 그래도 어쨌든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서 좇아왔는데 무슨 급한 타령을 자꾸 하면서 '하나님도 내 사정을 모르니 그렇지 나더러 기뻐하라 평안하라 감사하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이 참 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전도를 하고 이런 증거를 하기에는 예수가 딱 적합하고 바울이 딱 적합하고 날마다 죽노라 하는 체험이 있는 사람들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야 딴 사람이 믿으니까.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형제들에게 "기뻐하라 갇힌 자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기뻐하라, 관용하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도 육신의 형편이 좋아서 육신을 따라서 예수 믿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혹 전하는 자가 육신적인 형편에 있어서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우리가 연마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의 형편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정을 자꾸 돌아볼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확실하게 이루셨는지를 보고 믿음으로 안식하는 자리로 우리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사랑입니다. 자! 이 사랑에 관해서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잘 이야기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앞에서 나온 4장 18절에서는 믿음은 안식과 평안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참으로 체험했다면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 이것은 예수를 참으로 믿었다면 두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것과 무관하게 보이는 것 같은 한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역시 참된 믿음의 증표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뭡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이라는 것은 제일 처음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한다면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곰보든 째보든 바보멍텅구리든지 그 다음에 육신적으로 그런 것까지는 우리가 참아줄 수 있다하더라도 행동이나 그 사람의 사상에 대해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좋지 못한 습관과 우리가 그 사람 가까이 있으면 좀 거북하고 거리끼고 '저 사람 저런 행동을 안 하면 좋을 텐데. 저런 말이나 저런 태도를 좀 안 취하면 좋을 텐데' 라고 가까이 있을 때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내가 미국사람 옆에 가면 마늘 냄새, 김치 냄새 풍기는 누리탱탱한 사람인 것으로 그들에게 거부될 수밖에 없어도 내가 사람으로서 가치가 있고 내가 살아야 되는 것처럼 그 사람도 그런 흠과 약점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살려서 내 옆에 세워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행위와 외모와 그 사람의 약점, 심지어 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일단 용납해야 됩니다. 받아야 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보니까 내가 전에는 훌륭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다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가 아니지요. 나를 좋아하고 나하고 있고 싶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나를 자기들 곁에 두었고 나와 함께 있는 줄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하나님 만나보고 나니까 나 같은 똥 덩어리가 없다는 겁니다. 나 같이 냄새나는 사람이 없고 나 같이 다른 사람에게 문제투성이인 사람이 없는데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나를 생명으로 그냥 사랑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서 났으니까 무조건 사랑하고 똥을 싸도 사랑하고 좋아도 사랑하고 공부를 잘해도 사랑하고 못해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을 만나보고 나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나는 지옥가야 될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를 자기 아들로 삼고 나를 붙들어서 '너는 내 것이다' 하고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 죽게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붙들어 왔다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누구를 대하여서 화를 내고 누구를 대하여서 '저럴 수가 있나'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냐는 겁니다. 우리가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이 믿음이란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아닙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쫒고 만약 두려움이 있다면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바르다면 이건 참 믿음을 말하는데 참 믿음이 있다면 우리 안에 두려움이 없어요. 우리 안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없다면 누구든지 두려워하지 않지요. 하나님을 안 믿어도. 그런데 왜 두려워하고 불안합니까? 자기가 약하고 문제가 많고 실수가 많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보니 하나님은 그걸 말 안 하거든요. 하나님은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고 약한 사람에게 의사와 환자가 실력 발휘할 기회를 더 얻어서 '좋다'하고 좇아오니까 이게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두려워하게끔 만들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두려워하게끔 만든다고 해서 내가 몽둥이를 가지고 교회형제들을 두들겨 패는 게 아니고 내 속으로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거절하거나 '싫다' 하는 그것이 두렵게 하는 거죠. 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대할 때 사실은 제가 여기 연세 많으신 어른들도 몇 분 계시지만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제가 세상적으로, 뭐라 할까요 교회 목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여러분들을 대해서 제가 두려움이 없고 아무라도 언제든지 반갑고 좋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아요. 교회 목사라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싸우고 칼날처럼 서로 예리하게 대립되어서 첨예하게 외줄 타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는 이것이 결국 내가 하나님을 알고 보니 사람을 대해서 내가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고 내가 또 다른 사람을 두렵게 할만한 그럴만한 사람도 아니고 나도 매일 실패, 실수해서 마누라한테 욕 얻어먹고 자식들한테도 어떤 때는 "아빠 왜 이렇게 해요?" 라는 말을 듣는 사람인데 우리 아버지에게 꾸중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사람인데 내가 다른 사람보고 잘 하니, 잘못 하니? 라고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또 나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언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 만할 때는 저보다 훨씬 못했는데 요새 아이들이 공부든지 행동하는 것이든지 얼마나 영악하고 행동은 잘못 따라와도 적어도 지식 면에서 우리가 그 나이 때 확립되었던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우리 청년들이나 어떤 형제들이 지금 저 비슷한 정도로, 제가 서있다면 반쯤 앉아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하더라도 나는 깜짝 깜짝 놀랍니다. 이 사람들이 내가 공 들여서 이제까지 와서 이만큼 겨우 된 것을 벌써 이때 다 알고 다 말을 하고 다 흉내라도 낸다는 것이 나는 너무너무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맛보는 가운데서 저절로 생기는 시각이고 습관입니다. 아마 형제들도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겠지요. 이 점에서 만약 우리가 부분적이라도 희미한 측면이 있다면 빨리 점검해서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도 불투명하다. 여기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어떻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어떻게 오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가에 더 주목하고 더 바라보고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외형적인 열매의 부족함, 불충분함 이런 것들이 극복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런 안식과 평안이 없었다든지 형제를 사랑하는 이런 것이 없었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다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후서라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가 없었다면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할 새도 없고 그냥 찬송만 하다가 편지를 끝냈을 것인데 문제가 많으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게끔 여러 가지를 잘 말해 주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고린도전,후서를 통해서 지적된 문제를 한 서너 가지로 정리를 한다면 아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는 고린도교회 안에는 이기심과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이게 자기 영광이지요. 여기에 매여 있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기심이 있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일이나 진리에 대한 견해 차이가 생길 때, 견해 차이는 당연히 생기지요. 한 집에서 태어난 형제들 간에도 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똑 같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생길 때 미워하고 '저 놈은 왜 나하고 다르냐? 저건 틀렸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그 다음에 분열이 생깁니다. 나는 무슨 파 너는 무슨 파 너는 진보파 나는 보수파 너는 찬물파 나는 성령파. 다 갈 데로 가자는 거지요. 자, 그러나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처음부터 지적을 합니다. 지적을 하면서 왜 너희들이 나누어졌느냐? 이러니 너희들이 육신에 속한 자들이고 믿음에 성숙한 사람이 아니다. 바로 지적을 하면서 고린도서를 시작합니다. 여기 대비되는 참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범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과 주님의 영광이 어떤 식으로든지 교회 안에서 나타나도록 협조하는 겁니다. 누가 말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네가 주장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어떻게 해서든지 도출되어서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도록 사람들에게서 말이 나오도록 기다리는 겁니다. 그 태도가 참 믿음의 태도고 이것도 우리가 중요한 좌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내가 할 말인데 사돈이 먼저 해버리면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것은 맞는 말인데 내가 말을 해야하는데 왜 저놈이 먼저 말을 하는가? 기분 나쁘다 이겁니다. 내가 말했을 것 같으면 이것이 아주 중요한 진리가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기를 원할텐데 다른 사람이 말해버리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묵살하고 넘어가든지 티끌을 잡든지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서 믿었다 라고 하는 실체가 불투명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형제에 대해서 자기의 죄와 허물과 약함을 깨닫는 이 바탕 위에서 용납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가 서로 타투고 시기, 질투, 분열한 것에 대응하는 참 믿음의 모습이라 해야겠지요.
형제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바뀐다는 점을 또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가타부타하는 사람을 보고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세운 하나님의 하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네가 남의 하인을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느냐? 고 하는 겁니다. 네 하인을 네 마음대로 하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의 하인을, 내가 청와대의 비서보고 " 너 좀 잘 해라" 라고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건 대통령이 할 이야기지, 그럼 너나 잘 해라 하겠지요. 내가 왜 남의 사람에 대해서 가타부타하느냐 이겁니다. 여기 남의 하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말하는 거지요. 우리는 형제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중히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육신의 정욕에 매인 모습들이 보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사람들이 음행을 하고 세상 사람들을 좇아 그들과 짝하고 하는 것들이 고린도후서 6장에서 표현되고 음행한 것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표현됩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는 줄 모르느냐?" 교회 안에서 온갖 부도덕한 일들이 용납되고 횡행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고 성령의 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이 엉뚱한 곳에 받쳐지고 있으면, 지금 창녀에게 갖다 바치는 사람은 우리 중에 없겠지요. 그런데 아무 데나 멍하게 생각 다 주고 마음을 다 주고 텔레비전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시간을 다 주고 앉았다든지 세상의 엉뚱한 일에 넋을 다 빼고 앉았다든지 하는 이것은 다 몸을, 몸이란 것은 결국 시간이고 시간이 생명인데 이 생명을 엉뚱한 데다 투자하는 것입니다. 쇼핑하러 돌아다니거나 다 마찬가집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기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망각한 것입니다. 작은 이익 때문에 세상 법정에 형제들을 소송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런 일도 다 작은 명예와 작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부끄럽게도 산 사람이 죽은 사람, 시체에게 가서 사람이 개에게 가서 "야! 멍멍아 이것 재판 좀 해 주라"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다 거꾸로 믿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억울하거든 억울함을 좀 당하십시오. 당하고 화병 나거든 화병 나서 죽어 버리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믿어주고 여러분들을 알아주고 챙겨주지 않으면 세상 어디를 가도 풀 데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믿고 사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신원이고 나의 반석이고 나의 재판장이고 나의 상급이고 하나님이 나의 저축해 둔 보물이라고 믿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그 작은 이익과 작은 명예와 작은 억울함과 누가 나에게 한 마디 더 했는데 이것까지 다 풀어내려고 그렇게 따져 가면서 수판 놓고 그렇게 살지 맙시다.
마지막으로 생활에 매이는 것에 대해서도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라는 이야기를 바울이 쭉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재산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이 생활의 염려에 매여 있다는 말입니다. 생활의 염려와 세상일에 단단히 매여있어서 주의 일에는 인색하고 도무지 시간도 못 내고 돈도 못 내고 선한 일에는 전혀 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뭐 하는 인생입니까? 밥통 인생인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배에다 밥 털어 넣으려고 죽자고 인생을 다 털어 넣고 그 다음에 밥 먹고 똥 싸고 무덤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생활의 염려에 매인다는 것은 불필요한 인생의 낭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맡기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  제대로 할 일만 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될 줄 아시는 하나님이 다 더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우리의 이 길로 들어왔다면 -안 들어왔다면 이 길로 지금이라도 들어오시오- 이 길로 가야 합니다. 들어오기는 이리로 들어왔지만 그 다음에는 '내 밥그릇은 어찌하든지 내가 챙겨야 되고 노력해야 되고 그것을 위해서 공부하고 뭐 하는데 예수고 뭐고 다 팔아먹고 신앙 생활하고 말씀 나누고 기도하고 천국을 생각하고 아이고! 사치다 요즘 세상에 그런걸 어떻게 하고 사느냐?' 이렇게 되어버리면 인생이 참 처량하고 한심하게 되는 겁니다.
자, 오늘은 몇 가지 믿음을 확증하는 기준을 이 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이 외에도 얼마든지 우리 믿음이 참 믿음으로 바로 섰는지 어떤지 확인해 봐야 할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앞으로 더 생각을 하든지 못 하든지 간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늘 일깨웁니다. 일깨워서 네가 참으로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당연히 이것이 나타나고 이것은 또 안 나타나야 되고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걸 들어야 합니다. 매일 들으면서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인생 길을 유지를 해야지 그렇게 되지 못하면 세상도 없고 세상 영광과 성취도 없고 천국 적인 어떤 그것도 없고 사람이 쪼다가 되고 말아버리죠. 다 주님을 확실히 믿고 어차피 믿는 길로 들어왔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큰복을 준겁니다. 그러나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재수 없다 생각하든지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고 어쨌든 이 길로 들어왔으니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 길로 가서 여기서 뚫어야 돼요. 여기서 하나님 뜻을 보고 예수의 구원을 우리가 모든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적용해서 예수의 구원을 누려야 합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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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 13:13)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72
58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269
57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47
56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7
5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3
54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5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599
52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고후13:5-10) / 2002.3.3 이상봉 2010.05.02 4424
» 믿음을 확증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420
50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407
49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0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09
47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46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4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0
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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