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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에게 믿음을 점검해 보고 참 믿음 위에 바로 설 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이것은 자신의 길과 운명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는 주님의 뜻과 별도의 자기 계획이나 야망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설사 그에게 그런 것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그것대로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진리의 길대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위할 수 없는 자이고 육신대로 살 수 없는 자였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과 맡기신 교회들(사람들)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과 그의 운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세우고 온전케 하기 위한 제물로 드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혹 감정적으로 형제들이 밉고 서운하다 하더라도 그는 본질적으로 형제들과 싸우며 대적하거나 형제들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는 없는 사람이고 오직 그들의 유익을 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서 정욕과 거짓을 따라 살던 옛길에서 돌이켜 생명과 진리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은 진리를 위한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로서 진리를 따라 사시고 성령님은 그러한 그리스도를 사람 안에 비추시고 적용시키시는 것이다.

진리의 길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에게 자기를 드려 아들로 순종하고 범사에 그의 생명대로 삶으로써 (함께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형제로 알고 사랑하며 마귀의 모든 거짓말을 거부함으로써)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사는 것이다. 주님은 먼저 이 길을 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이러한 주님의 길을 주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감동시키신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세계(길)를 보았고 거기에 감동하여 묶인 것이다. 이것은 곧 사람이 죄의 종에서 벗어나 진리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진리의 종이 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진리를 명확히 보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참 길은 그것뿐임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갈 수 없었고 심지어 고려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전할 때는 바울은 어떤 다른 필요가 있어서 그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밖에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즉 그것만이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전한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과 계획이 있는 중에 "이번에는 내가 진리를 말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 곧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 혹은 진리로 무장된 자기의 새로운 인격으로 어쩔 수 없이 진리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진리뿐이면 진리대로 갈 수밖에 없고 진리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 속에 여러 가지가 있으면 여러 가지가 나오게 마련이다. 문제는 내용이고 문제는 빛이다. 사람 안에 이 길도 보이고 저 길도 보인다면 어찌 한 길로만 가겠는가? 그러나 오직 가야할 한 길만 분명하게 보이고 나머지는 다 가서는 안될 길로 분명하게 보인다면 그 한 길로만 가지 별 수 없는 것이다. 살길과 죽을 길을 분명하게 보고서도 죽을 길로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일시적일지라도 곁길로 간다는 것은 그것도 어느 정도 갈만한 길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길이 반드시 죽을 길이고 반드시 망하는 길로 확실히 보인다면 누가 잠시라도 그리 가겠는가? 그러므로 진리의 길로만 간다는 것은 빛이 확실해서 그 길 외에는 절대로 길이 없으며 다른 길로 가면 필시 멸망한다는 사실이 자기 안에 확실하게 보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서 많은 혼란이 있고 곁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빛이 희미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빛을 희미하게 비추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에 다른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빛이 희미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말하자면, 이 길로 가도 될 것 같고 저 길로 가도 될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또는 이 길로 가기는 가야 하는데 저 길도 곧 죽을 길 같지는 않고 어느 정도 갈만한 길로 보이는 것이다. 주님이 가신 길도 길인 것 같고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도 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빛이 밝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면 이리로도 가보고 저리로도 가보지 어찌 꼭 한 길로만 가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고 그것은 다 길처럼 가장된 죽음의 구덩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항상 외곬의 분명한 삶을 산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보다 이처럼 진리에게 깊이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기를 바란다. 바울은 진리가 온통 자기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리의 길로만 갔고 어디서나 오직 진리만 말한 것이다. 본 것이 있는 사람은 안 본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그리고 본 것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이리 저리 다 가거나 이것 저것을 다 말할 수 없고 오직 한 길로만 가고 하나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은 진리의 사랑을 입은 자요 진리에게 사로잡힌 자였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중요한 특징이다. 반대로 거짓 무리의 특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즉 진리의 사랑을 입지 못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형제들에게 장차 있을 교회 안의 혼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짓 신자들 곧 사탄의 거짓말에 사로잡혀 허무한 말과 행동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해 바울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로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자기가 진리의 길로 가지 않고 허무한 일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유로 '자기 속에 육신의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속에서 당기니까 별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의 길로 가지 않는 참된 이유는 그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리를 확실히 알면 누구라도 그 길로만 가지 다른 길로는 갈 수 없다. 잠시는 머뭇거릴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꼭 자기가 아는 그 생명의 길로만 가지 다른 길 곧 죽는 길로는 결코 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보자. 그전에는 쥐가 많았다. 우리 집은 특히 식당과 제과점을 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많아서 항상 쥐가 득실거렸다. 그래서 쥐잡는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했는데 고양이도 키우고 심지어는 공기총으로 직접 잡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음식에다 쥐약을 넣어 가지고 쥐가 다니는 길목에 놓아두는 것이었다. 그 음식은 먹음직한 것을 준비해 놓았다. 자 여기서 생각해 보자.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 음식을 먹을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당연히 아무도 먹지 않는다. 그때 우리 집은 요즘 말로 하면 다세대 주택이어서 한 건물 아래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거기에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배가 고파서 눈이 튀어나올 지경에 있어도 그 쥐약 넣은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먹으면 죽는 줄 아니까. 쥐약 넣은 음식이라고 무슨 푯말을 붙여놓은 것도 아니므로 누가 실수로 먹을 법도 한데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쥐가 다닐만한 길목에 놓여 있는 음식은 무조건 그런 음식으로 알고 경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쥐조차 그것을 알고 먹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무리 빛깔이 곱고 냄새가 향기로워 먹음직해도 그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한 결코 그것을 먹지 않는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참된 생명의 지식은 결국 육신의 정욕과 생각을 이긴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제대로 알면 절대로 헤매지 않는다. 사람이 헤매는 것은 살길을 몰라서 헤매는 것이지 아는 데도 헤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오락가락하고 이러저리 방황하는 사람은 자기가 길을 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아는 것 같지만 실은 모르는 것이다. 혹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이 생명의 지식이 될 만큼 분명하게 아는 지식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운명을 진리 안에 묶인 운명으로 말한 것은 그 인생이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인생이며 참으로 흠모할 만한 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당신의 세계를 이처럼 명확하게 보여주셔서 그와 같이 행할 수 있기를 원한다.

진리의 빛을 얼마나 분명히 보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 바울은 혹 의도적으로 진리를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려고 하거나 편의를 위해 진리의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말하거나 적당히 변형시켜서 육신이 좀 편하게 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가 진리대로 갔으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고정된 운명이었다. 생명이 진리의 생명이므로 다른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뿐 아니라 함께 부르심을 입은 모든 형제들에게 항상 이 사실을 일깨웠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4)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도 진리의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가 예수 안에만 있고 우리 안에는 없어도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새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안에도 다 있어야 한다. 새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런 자로 지음을 입었고 그런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그것을 알고 있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대로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그는 여기서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큰 실패와 부끄러움 가운데 있는 약한 자들이지만 그래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형제임에는 분명하므로 그들도 자신과 같은 운명 곧 '진리를 거스려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인 자기 운명'을 깨닫고 함께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7)

주님은 만인의 왕이 아니고 오직 진리에 속한 자의 왕이시다. 그의 말을 듣는 자에게 쥬주고 선생이고 인도자지 안 듣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 속한 자고 주님으로부터 난 자라면 그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는 자거나 주님이 가신 길로 갈 수도 있고 다른 길로도 갈 수 있는 자라면 우리는 주님과는 상관없는 자요 세상에 속한 자이다.  

"사랑은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6)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한 이 말은 우리 생명이 어떤 생명이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밖에 없는 자인가를 말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사랑의 생명인데 무릇 사랑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온전케 하는 것이므로 그 안에 불의와 거짓이 결코 조금도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와 거짓은 사람을 세우는 것과는 반대되는 작용 곧 사람을 죽고 망하게 만드들기 때문이다.


진리의 종이란 진리가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의 사실이고 무인격적이다. 진리가 사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진실) 자체가 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어떤 사실이나 거짓말에 사로잡혀 있기 전에 어떤 인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가 가르치고 주입하는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인류는 이미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거짓말에 또한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기에서 돌이켜 진리에 사로잡히려면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성령님)께 먼저 사로잡히지 않으면 안된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이것은 우리가 성령 아래 놓여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신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귀와 그의 죄 및 그의 거짓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육신의 정욕에서 자유케 된 한편 그리스도의 진리의 길로만 가도록 항상 요구받고 있다. 그는 우리 안에 항상 진리를 가르치시며 진리로 우리를 일깨우시며 진리 안에 거하도록 책망하며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한 후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라고 반문 형식으로 말한 것은 그들 안에 이미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성령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일깨우심과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바로 신약 성도의 가장 큰 복이고 특권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고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모른다고 해도 안되고 나는 몰랐다고 해도 소용없다. 성도의 양심은 이미 진리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진리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다. 겉 사람이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과 이유를 대며 진리를 거스려 행동할지라도 속 사람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그것이 틀렸으며 그럴 수 없는 것이라고 자기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행동하라고 여러 말로 다 말하지 않고 다만 "네가 누구인가를 알고 네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인도를 따라 행하라"고만 말한다. 이것을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네 속에 계신 분이 너를 어디로 인도하며 네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들으라"는 것이다.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적그리스도에 대해 즉 이단에 대해 형제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그리고 그 다음에 앞의 요일2:27의 말씀 곧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이든 다른 문제든 모든 답은 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영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가 다 가르치시며 다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거하면 다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사에 누가 우리를 따라다니며 일일이 우리를 가르쳐야만 갈 길을 알고 할 일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와 교통하면 되고 나머지는 이미 본질적으로 다 필요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형제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형제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공급을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가르침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이고 오늘 이 진리의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성령과 교통하는 과정이고 수단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이런 종류의 모든 모임과 교제와 가르침은 그 형식과 모양은 어떤 것일지라도 사실은 다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 간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며 위로하고 책망하는 것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생명을 돋우고 세우는 일이지 결코 할 일을 가르치고 행위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능하신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 안에서 그 행할 바를 완전하게 가르치시며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형제를 대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며 그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참되고 신실한 분으로서 그를 온전한 길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고 다만 그에게 그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붙어 있을 것과 그에게 순종할 것만 말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말세에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 때 그 이유와 발판이 되는 소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바울이 말한 것이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6:3-5)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6:6-12)

궁극적으로 진리를 거스려 행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진리를 거스려 행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허무한 일을 추구하며 세월을 허송한다. 물론 진실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가서 그것들의 허무를 깨닫고 돌이켜 진리의 길로 행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 동안 사탄은 그 사람의 인생을 붙잡고 이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려져 사용되어야 할 인생을 썩히고 묵히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돈에 매이는 것은 곧 생활에 매이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미래를 스스로 대비해야 하고 현재 삶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리지 않고 미래의 삶을 위해 무언가 축적하고 준비하는 일에 온통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참으로 예비하신 축복과 부를 깨닫지 못하며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부하게 되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것으로 그 인생은 쓰지도 못할 것을 위해 온통 허무한 투자를 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딤후3:1-8)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4:3,4)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것과 생활의 염려에 매이는 것, 그리고 육신의 안락으로 인해 한가하고 몸이 가려워지는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매일 십자가의 단련을 받으며 주님을 위해 몸을 쓰면 이런 상태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 최선의 방지책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헌신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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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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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42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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