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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믿음, 행동 (2) (출14:15-20) / 녹취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14:15-20)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다음에 사람은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붙잡고 믿지요. 믿음이 뒤에 따라옵니다. 믿으면 사람에게서 행동이 나옵니다. 믿는데로 행동하니까. 하나님이 날 안지켜줄꺼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안가겠지요. 두려워하고 여전히 걱정하고 자기가 손쓸수 있는 방법들을 쓰고 이렇게 하겠지요. 약속과 믿음, 행동 이것은 한줄로 딱 꿰어져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 과정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는데 들여다보는 가운데 일련의 흐름을 보면 교훈을 얻을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겪는 어려움중에 어떤때에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될것인가, 어떤때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될 것인가, 어떤때 행동에 나서야 될것인가 이것을 분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봤지만은 오늘 읽은 말씀에도 있지요.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홍해앞에 이스라엘 백성이 갇혀 있으니까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도와주십시요" 하든지 "건너게 해주십시요" 하든지 기도를 했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는 말씀이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하는 겁니다. 부르짖는 것은 요즘말로 하면 기도한다는 것인데요. 지금은 기도할때가 아니고 행동할 때라는 얘기죠.
 
"지팡이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해라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처럼 건너가게 될것이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렇게 모세가 물을수 있습니까 정황으로 보면 말 안해도 그것밖에 없거던요. 안그러면 뒤로 돌아가야 될 판인데 뒤로가면 애굽으로 다시 가는거고 가나안땅으로 갈려면 물로 가는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물로 가는거라는 말이죠.
 
지난주에도 마태복음 8장 2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가지고 물이 배안에 넘쳐가지고 빠져죽는구나 했을때에 "왜 두려워하느냐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자들아"라고 꾸지람하는 것을 봤습니다. '아 두려워할만한 데서 두려워하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싶지만은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저편으로 건너가자 했는데 또 거기서 죽을까 걱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걱정이다 그런 얘깁니다.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약속입니다. 저편으로 건너가자든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라든지 너는 뭐 나를 위해서 이런사람이 되어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느냐 없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보고 "너는 훌륭한 노인이 되어가지고 힘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좋은 영향을 미치며 살게 될것이다" 그런 약속을 우리에게 줬다고 합시다. 그럼 우리는 아무 걱정없지요 노인까지는 될거니까. 중간에 가난해지거나 병들거나 무슨 사고를 만나거나 해도 나는 틀림없이 노인까지는 간다 이겁니다.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면 가나안에 들어간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된다 그건 '니가 이쁘고 니가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거기서 나의 나라를 세워서 영광을 받아야 되겠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겁니다. 뜻이 있어 가지고 오늘 나를 거기 참여할 사람으로 뽑아가지고 오늘 가나안에 집어 넣기로 했다면 중간의 문제는 가나안 일방으로 방향을 잡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자면 홍해가 가로막혀 있으면 열리는 거고, 바위가 있으면 터널을 뚫는거고, 뱀이 있으면 잡아서 뱀장어 구워 먹는거고. 뭐가 있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중간에 가로막혀 있는 것은 전부다 당연히 넘어가는 것이지, 거기에 걸려서 죽는다든지 돌아간다든지 하는것은 있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약속 있으면 있다고 해서 몸이 저절로 붕 날라서 어디 가는거는 아니고요. 사실 겁이 나지요 속에서 "이렇게 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벌벌 떨고 두려워하지요. 약속을 붙잡고 마음을 담대히 해서 힘써서 우리가 길을 가는 겁니다. 저절로 가는게 아닙니다. 힘써서 가는겁니다.
 
약속 다음에 믿음 그 다음에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자, 부르짖어야 할때는 언제인가? 약속이 없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아직까지 나에게 보장을 해주시지 않았을때 부르짖어야 됩니다. 하나님 갈까요 말까요 하나님 내 가는데 보장하십니까? 그러면 그 다음부터 확신을 얻고 기도 안하는 거에요 더 나은 표시가 있기에 기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하는게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 손에 아무것도 가진게 없지만 믿고 구한것은 받은줄로 여기라고 그랬지요. 자,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기도한것은 다 받은줄로 믿으라 그랬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손에 없지만 하나님이 내 기도하고 구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틀림없이 응답하실 것이고 그러면 내 손에 쥔거나 마찬가지로 보고 앞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 움직임이 바로 감사고, 찬송이고 그게 순종입니다.
 
마땅히 행동해야 할때 계속 부르짖기만 하는 것은 헛된 일이고 이것은 크게 볼때 불신앙적인 행동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과 믿음을 따라서 진행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보일때 뭐 일이 확실해져 가지고, 말하자면 '물이 딱 갈라졌을때 내가 걸어 들어간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안되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 말씀안에서 굳게 섰을때에 그리고 성령이 내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섰지 않느냐 움직여라" 그렇게 말하면 바로 움직이는 겁니다. 상황이  갈라지는 것을 다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11:29)

자, 믿음으로 행한다는 거는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행한다는 말이라 그랬죠? 약속이 없으면 행동 안해야 됩니다. 약속이 없는데 행동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냥 자기 희망, 자기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하다보면 어찌 되겠지' 하는 모험하는 것과 같은겁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분명한것을 손에 잡고 가는 겁니다. 눈에는 안보이지만 뭐 하나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잡고 있다는 겁니다.
 
자, 우리는 범사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두가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항상 우리에게 따라다니는 것이고 우리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는 성도고 하나는 신자입니다. 우리는 성도이고 신자입니다. 우리 생활은 항상 거룩하고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졸렬하고 치사하고 더럽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아요.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닮아가야 합니다.
 
그걸 뭘 가지고 하느냐? 믿음으로 하는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벌써 십자가에 못박아, 옛날에 무능한 사람은 제거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아들속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우리를 재창조 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는 사람으로 얼마든지 일할수 있다' 라는 것을 약속으로 받아가지고 있습니다. 인물이 어떻게 생겼는가 거울 쳐다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그것만 딱 보면 됩니다. 그것이 나 자신입니다. 그것이 내 능력이고 내실력이고 내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너는 범사에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가지고 나의 찬송이 되고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씀했으면 그것이 나와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자, 우리가 범사에 이것을 생활속에서 큰일이든 작은일이든 자꾸 실천하고 훈련해야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고, 육체적으로 말해도 그것이 인생을 제일 쉽게 살고 편하게 사는 길입니다.
 
죄 짓는 사람도 살려고 죄 짓는다고 그랬지요. 살려고 죄짓고 편케 살려고......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가까운게 주먹이지만 우리는 가까운게 주먹이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게 제일 가깝고 쉽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고생을 제일 줄이고 인생을 빙빙 돌아다니지 않는 첩경입니다. 인생의 온전한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려면 믿음이 있어야 되겠죠? 믿음으로 살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아는거는요 하나님 아는 지식을 몽땅 다 퍼부어 놓고는 그 다음에 그것을 실력으로 발휘하도록 하는게 아니고요. 조그마한 지식을 우리에게 처음에 주십니다. 딴 사람들 믿음으로 사는걸 보고 영향을 받을수도 있고, 성경을 보다가 깨닫는 것도 있고 이렇게 됩니다. 조그마한 믿음이 생깁니다. 조그마한 믿음이 어떻게 큰 믿음이 되느냐. 이것을 밑천으로 본전으로 삼고 이것을 장사밑천으로 삼아서 체험을 키워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 하나님을 아는 계시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생활속에서 조금조금씩 경험해 나가야 됩니다. 작은 체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훈련을 하는겁니다. 육신대로 살것인가 영의 인도대로 살것인가 이것을 작은일에서부터 실행해 보는겁니다.
 
우리 생각에 손쉽게 그냥 성질나는데로 하고, 내가 아는거니까 기도하지도 않고, 내가 아는거니까 하나님앞에서 기다리지도 않고 행동을 해버리니까 뒤에가서 일이 어렵고 생각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있는 사람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번에는 내 생각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꼭 참고 기다리면서 말씀대로 실천해보자' 이러한 실험을 하겠지요. 이러한 실험이 뭡니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겁니다. 영으로서 육신의 능력과 자신감과 육신의 생각들을 꺾는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하나씩 행동해 나가는 것을 훈련해나갈  때 우리는 큰 믿음을 가지게 되고, 점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나보다 더 똑똑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쉽고 편안하게 사는 길이구나 하는 것을 점점 체험하게 됩니다.
 
육신은 훈련받아야 됩니다. 절대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행동함으로서,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육신 즉 모든 것을 눈으로 본 다음에라야 안심하고 움직일려고 하는 이 육신을 훈련시켜 나가야 되고 꺾어 나가야 됩니다. 안그러면 이 감각이 살아가지고 나중에 가면 감각대로 안하면 그대로 주저앉아버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같은 경우에 말 안듣고 마음대로 할려면 회초리가 날아 들지요. 회초리가 날아 들면 말 안듣고 버티는 것을 오래 못하지요. 처음에는 때를 쓰고 땡깡을 놓더라도 몽둥이가 어른어른 해가지고 '아이구 그렇게 하면 고생이다 힘들다 괜히 욕 얻어먹고 훈계듣고 설교듣고 그러고 결국 해야 될일 해야 되는데 치우자 애초부터 하라는대로 하자' 이렇게 몸이 알아서 맞춰준다 이겁니다.
 
그런데 부모에게서 하나도 제재를 받지 않는 아이들 경우에는 안그렇지요. 중국의 소황제라고 해서 아이를 하나씩만 낳아서 왕자처럼 받들고 한 경우에 지금 그 자녀들이 남의 말을 듣는것을 하지 못한다고 그러죠. 직장에서 '야근하시오. 이것하시오. 힘든거 하시오' 그러면 '왜 내가 그거 해야 되는데'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상한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건데. 육신이 그 감각대로 마음대로 뻗을수 있도록 가지치기를 안해서 그런겁니다.
 
우리의 훈련이라는 것은 그냥 육신을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안에서 역사하고 있고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이 엄연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겁니다. 그런데 이 죽은 귀신인 마귀가 다 죽어서 없어져버린 옛사람을 들고 나와서 우리를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말 한마디로 대적해도 충분히 효과를 볼수 있습니다.
 
이상봉이는 죽었다 이상봉의 성질이라는 것은 없다 그거는 무덤에 들어가서 비석에다가 '아무개지묘'라고 붙여놨는데 그것이 성질을 내면 내는거지 그게 실생활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가 이렇게 이야기 해줄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것을 이렇게 실제 생활가운데서 체화해야 합니다. 홍해앞에 놓였을때 막 두려워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죽는게 아닌가' 이렇게 할때 "아! 앞으로 내가 공부좀 많이 해야 되는구나" 무슨공부를 하는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감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딱딱 맞아서 부조화를 이루지 않게끔 공부하고 훈련해야 되겠구나" 이겁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쳐다보지만 뭐하러 쳐다봅니까? 감정과 시각이 하나님의 감정과 딱딱 조화를 이루니까 그렇지요. 덩치큰 적을 봤다면 덩치 큰 적이라는 것은 무얼 말해줍니까?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생각할때는 저 덩치가 큰 장군같은 거인들은 우리를 밟아 죽이는 그런사람이 될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시각이 같이 가는 사람들은 저 덩치큰 적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잘 먹였으면, 우리가 갈려고 하는 그 땅이 얼마나 기름지면, 얼마나 잘 먹어서 저렇게 덩치가 크고 힘이 세냐.이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서서 복도 주지 않은, 복받은 백성이 아닌 그 사람들도 그 맨땅에서 그냥 곡식먹고 과일먹고 물마시고 공기마시는 그것으로 저 정도로 키울수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애초부터 집어 넣으시려고 작정하시고 복을 주신 우리는 얼마나 더 잘 될수 있겠는가 그것만 딱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감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딱딱 일치하는 인생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것이 아닙니다. 훈련해야 됩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훌륭하고 이쁘지 않은 것은 다 아는 일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과 그의 말이나 정신 이런것들을 밤낮 접하고 훈련받고 세뇌된 사람은 김일성 죽었을때 졸도해서 죽은사람도 여러명 있다고 그래요. 온나라가 기절초풍을 하고 발광을 하고 그랬다 그래요. 얼마전에 북한을 취재를 한 "national geographic" 기자의 취재 비디오를 보니까요. 김일성 동상이 있는데 그게 워낙 높고 크게 만들어서 카메라 앵글에 다 안들어 와서 그걸 몽땅 다 찍을려면 그 밑에 드러 누울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드러누워서 사진을 딱 찍었다는 겁니다. 거기 옆에서 안내하던 청년 안내원이 그 자리에서 사색이 되어 가지고 위대한 수령님 동상앞에 누울수 있는 놈이 왠놈이냐 하면서 '오늘 당장 나가라 취재허가 다 받았는데 다 필요없다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쫒아 내 버리겠다'면서 그 자리에서 사색이 되어 쫒아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그 사람을 착취하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마귀의 대변인 노릇이나 하는 그런 인생도 자꾸 쳐다보고 감정을 훈련하면 그게 하나가 된다는 예깁니다. 그런데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참 생명이 되시고 실제로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와 생각을 같이 하고 할때 우리의 육신이 거기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말하기를 "내가 육신이 약하다 내가 인간인지라... 사람이 별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말은 오늘 우리를 부활시킨 일에 대해서 모독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있는 영광스런 아들로 재편하시고 재창조 하신 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이 있으면 믿고 움직이는 겁니다. 움직이는 것은 몸이 움직이는 거니까 잘 안따라가지요 그러니까 훈련하는 겁니다. 경건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영이 육신을 이기고 통제하는 겁니다. 혼란에 빠지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감각대로 하나님을 따라갈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오랫동안 예수를 잘 믿는다 해도 육신의 감각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말씀을 실천해서 영으로 사는 법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해도 안죽네' 이걸 느껴야 됩니다. 육신의 감각도 자연스럽게... 훈련 잘 받은 아이들 보면 엄마가 말하면 아주 싫은일 뙤약볕에 나가서 줄넘기 하라고 해도 말하면 당연히 줄들고 기쁜마음으로 나갑니다. 그건 나중에 완전히 감각과 말씀이, 머리와 몸에 피부로 느끼는 온도계가 그냥 쫙쫙 같이 맞아 나가는 겁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그런것입니다. 말씀대로 해도 안죽을 뿐아니라 그것이 가장 쉽고 편하고 빠른길이라는 것을 체험해야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체험합니다. 육신의 감각대로 자꾸 해보지요. 하니까 가장 느리고 피곤하고 '이건 실패의 길밖에 안되는구나, 결국 도로 하나님 말씀대로 올수밖에 없구나' 하는것을 자주 체험합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느끼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영을 쫒아 행함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제일 쉽고 제일 편하고 좋은 길이구나'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체험을 못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은 꼼짝이지 않아요. 움직이지 않아요. 가만 있는거에요. 계속 기도만 하고 앉았는거에요. 눈에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이건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 결과 가나안에 못들어갔지 않습니까? 약속을 받았으면 약속을 믿음으로 힘써서 활용해야 합니다. 약속없이 행하는 것도 잘못이고요, 약속이 있는데도 행동 안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애굽군대는 아까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그랬지요.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약속 없는데, 하나님이 들어가라 안했는데 뛰어 들어갔다는 겁니다. 너무 용감해. 하나님이 말씀하지도 않는데 자기가 계획세우고  자기가 생각하는 걸 추진하고선 그 뒤에 기도를 갖다 붙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이걸 기뻐하시지요' 하나님을 뒷방 벙어리 영감님 만들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멘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지요.
 
약속이 있는데도 안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백성들. 아까 말한 정탐꾼을 보내가지고 저땅의 풍성함이 어떤가 다 보고서 말이지요. 들어가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상당히 녹아 있더라는 겁니다. 이스라엘만 오면 작살내줄게 하면서 펄펄 살아있는게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어땠는지 하나님이 작전을 벌써 펼쳐가지고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쫄아있고 벌써 얼어붙어 있는데, 여기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은 '우린 다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약속이 있는데도 적의 강한 모습을 보고서 두려워서 앞으로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것도 잘못된거지요. 약속이 없는데 행동하는 것도 생명이 안되고, 약속이 있는데 행동안하는 것도 생명이 안됩니다.
 
모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밤새도록 바람이 불게 했습니다. 바람을 어찌 불게했는지 물이 말이지 좌우에 벽이 되었다고 했는데, 깍아지듯 벽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물리적으로 볼때 그렇게는 안했겠지만. 어쨌든 바람을 양쪽으로 세게 불었는지 해가지고 맨땅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때 말이지요. 2세대가 앞에 있던 이 사람들 40년후에, 2세대가 가나안땅에 진짜 들어갈려고 할때 가나안땅을 들어가는 관문은 요단강 건너가는 그것이거든요. 요단강을 건너서 천당으로 가는겁니다. 갈때는 물도 갈라지지도 않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들로 하여금 물로 먼저 들어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가서 닿으니까 그때사 요단강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있든지 없든지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죄에 대해서는 죽은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자로 여기라 그러므로 너희몸을 죄에게 드리지 말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마라” 그러니까 죄가 너희에게 뭐라고 유혹을 하거던 저리가라 쫒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 조차라도 용서하라'고 이 얘기를 하면 '내가 그런걸 어떻게 해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무조건 나가라 이겁니다. 무조건 원수를 향해서 손을 내밀고 돈주머니에 열리지 않는 자물쇠 같은 것을 채워놓았다해도 무조건 뚜껑을 열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이 쥐고 있는것입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여는지 지켜보자' 하는 것입니다. 일단계 열고나면 이단계 고민이 시작되고 이단계하면 삼단계 고민이 시작되어서 '아이구 결국은 못하겠다. 작년에 실패했고 지난달에도 실패했고 그런데 오늘 머 되겠나' 사탄은 일,이,삼단계로 어떻게 하든지 그사람을 육신안에 주저앉힐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을 우리에게 주시고, '너는 할수있다 너는 내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한가지만 그냥 밀고서 그대로 여러설명없이 밀어부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하고, 행동할 때 행동하고, 찬송할 때 찬송해야 합니다. "너희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것이요" 그랬지요.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형제를 보내서 '아무개 죄를 용서하시고 낫게 해 주십시오' 할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째깍 낫게 할수도 있고, 아니면 낫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나의 삶을 고난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구나' 그런생각이 우리속에 들어오겠지요. 셋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문제 해결된 겁니다. 나아야만 다 보약인가? 하나님이 내속에 들어와서 간섭하시고 내 삶에 응답하시면, 형식이 어떻게 된것이든지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즐거워하는 겁니다. 즐거워 하는 사람은 찬송해야지요. 병 나을때까지 계속 말하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수영장에 데려가 주세요" 하는 아이에게 "내일 데려가 줄게 오늘은 이미 문닫았지 않냐" 저녁에 7시나 되어가지고 그런데 다음날 8시에 개장인데 8시까지 우는거야 8시까지 울면서 "수영장 데려가 주세요" 하고 운다면 좀 곤란한 거지요. 약속을 받으면 우리는 된겁니다. "너희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것이니라" 똑같은 상황속에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어느정도로 관계를 맺고, 어느정도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가 그 정도를 딱딱 체크해가지고 거기에 맞추어서 반응하는 겁니다. 아무 응답도 없고 하나님 말씀도 없고 망망한 가운데서 '에이 모르겠다 일단 하고보자' 이러면 안되요. 그거는 때가 아직까지 하나님 약속이 있는때가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겁니다. 자행자지 하는겁니다. 자기가 가고 자기가 서고 하는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들이리라" 또 다윗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리라"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삼고 만국이 우리앞에서 만물이 우리앞에서 발아래 무릎을 꿇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까지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키우시고 자라게 하신다"는 이런것이 우리안에 약속으로 있다면 그 다음에는 그 길을 향해서 나가야 됩니다. 자꾸 앉아서 뭘 쳐다볼려고 하지말고.
 
여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가지 징조가 있는데요. 19절~20절까지 나오는 구름기둥과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이스라엘 진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서 뒤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왜 뒤로 갔는가? 애굽군대가 쫒아오기 전까지는 앞에 있었는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 갈 길의 인도자 노릇을 했습니다. 구름기둥이라는 것은 구름이죠. 구름이 광야에서 땡볕을 막아주지 않습니까? 모자를 쓰든지 파라솔을 쓰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지 모르는데 아마 그리스도라 봐야 되겠지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파라솔이 되어 딱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적이 쫒아오니까 뒤로 홀랑 가서 적과 우리사이에 벽이 딱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잘보세요. 구름기둥이라는게 사자하고 같이 다녀요. 구름기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호하시는 손길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적에서 보호하든지 위험에서 보호하시는 그런 어떤 손길이고 능력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가는곳으로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뒤로 가면 구름기둥도 뒤로 따라가고 그리스도가 앞으로 가면 구름기둥도 앞으로 갑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볼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든 능력,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주신 모든 선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별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것, 그리스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별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으로부터 인내를 얻는것, 사랑할수 있는 능력, 이런것은 별도로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해서 얻는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내가 하나인 것을 눈을떠서 쳐다보는 순간 내것이 됩니다. 주님안에 있는 모든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하심이 전부 내것이 됩니다.
 
이게 세상과 우리사이에 좋은 안전장치, 방패막이가 됩니다. 우리가 이 뭔가를 볼때 눈으로 보지 말아야 되지만, 육신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이라는 것도 상황을 모두 종합해서 판단해서 두려워하거나 안심하거나 하는것 아닙니까? 상황이 어렵지도 않는데 괜히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상황이 안보이면 어떻습니까? 한결 도움이 되지요.
 
자, 뱀이 세상에 마구 돌아다니지요. 그렇지만 내 앞에서 혀를 낼름 안하니까 우리는 겁도 없이 산에 불쑥불쑥 들어가지요. 산에 뱀이 자기 코 앞에 나타나서 낼름 거리는것을 경험한 사람같으면 산에 아마 갈려고 안할것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사탄이 있습니다. 보이든 안보이든 사탄이 있구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악의 세력과 공격들이 있습니다. 많은 질병이나 이런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사탄의 손에서 나온 것인 것도 사실입니다. 질병들을 꾸짖고 대적하는 문제들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들, 우리의 연약함, 세상, 이런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때 구름기둥이 요앞에 와서 사이를 막아버린다는 겁니다. 뒤에 애굽군대가 왔는데 이스라엘이 그거 보기만 해도 사실은 졸도할 판입니다. 애굽군대가 쳐들어왔으면 홍해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자리에 앉아가지고 심장마비로 다 죽을지도 몰라요. 그럴때 하나님이 구름기둥이 쫒아오니까 뒤로 가서 딱 막아버리잖아요. 이스라엘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포근한 손길밖에 없습니다. 구름기둥밖에 없지요 적은 안보이고.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육신 그리고 우리의 죄, 우리와 우리의 연약함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름기둥을 갖다 놓을겁니다. 그리고 우리와 세상사이에, 우리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들, 우리의 곤경 사이에 갖다 놓을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죄와 우리의 약함을 보려고 해도 눈에 띄지 않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렇게 할때 우리가 자꾸 옛날에는 뭔가 일만 생각하면 '나는 안돼' 이게 보였습니다. 보이는데 자신감이 생길수 있나요. 형제를 볼때도 마찬가지, 형제를 볼때 자꾸 그 사람의 약점과 문제점 그게 보이는데 존경이 되고 용납이 되나요. 좋은일해도 그 사람이 밉다니까요. 주는것 없이 밉다는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구름기둥,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우리의 약함속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안전장치가 작동하면 우리는 형제의 약점을 안볼수 있고, 내 자신의 약점과 나의 실패와 무능을 안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 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을 눈으로 보면서 슬퍼하고 불안해 하는대신에, 자기 눈에 보이는게 뭡니까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감사와 찬송을 부를수가 있습니다. 광야생활에 요게 꼭 필요합니다. 꼭 필요해요. 하나님이 오늘도 이 하나님의 사자와 사자옆에 졸졸 따라다니는 구름기둥을 우리에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마음만 잘 안정시키면 됩니다. 겁낼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 보이는게 있어야지.
 
이 믿음을 사용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을 볼때도 적은 안보이고 땅만, 좋은 땅만 보입니다. 적의 어떤 모습은 안보이고 얼마나 토질이 좋은가 그것만 딱 보이고,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니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렇게 보였던 겁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우리의 모든 삶에 최고의 장치가 된다는 것을 보시고, 범사에 십자가안에서 범사에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 한가지로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을 해나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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