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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를 건넘 (출14:21-31) / 녹취

2010.05.03 15:28

이상봉 조회 수:6086

홍해를 건넘 (출14:21-31) / 녹취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었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1-31)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손길로 인해서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되는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건너갈수 없는 것을 건넜다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갔는데, 뒤에 따라오던 애굽 군대, 애굽 사람들은 물에 다 빠져 죽었다는 것은 이것이 누구든지 정상적으로는 건너갈수 없는 골짜기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생각해야 될것은,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벌렸느냐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를, 이스라엘 사람을 건져내는 과정에서 이일이 중요한, 그들이 반드시 체험해야 될 과정인데, 훗날 바울이 모세의 이때의 일을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이렇게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10:1,2)
 
자, 이 지금 홍해 바다 가운데로 지나간 것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이전에 구름기둥이 덮고 있는게 있었죠. 그것은 구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고, 바다를 지난 것은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뭐냐하면 물이 그들을 덮어 적셔주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구름을 벗겨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홍해를 건넌 이것도 마찬가지인데, 물이 갈라지지 않고 덮이면 죽는거지요. 구름기둥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기둥을 벗겨내면 광야에서 익어서 땡볕에 타죽던지 그렇게 되겠지요.

죽어야 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홍해물이나 광야에서의 뜨겁게 내리쬐는 땡볕, 이 모든 과정들은 전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이전에도 여러 가지로 나타났지요. 먼저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일이 있었고, 다 물먹고 다 사는 것인데, 이집트가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된것은 그 나일강 덕택입니다. 그것을 피로 변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심판한 겁니다. 또 그기서 나오는 여러 가지 곡식들을 메뚜기 보내서 하나도 남지 않도록 먹어치우도록 만들고, 햇빛을 흑암으로 사흘동안 가리는 이런일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맏아들을 다 죽이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이스라엘은 다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그땅에 같이 있었는데. 멀리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지역에 있었는데 다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로 나왔는데, 앞으로 더 긴 세월동안 광야생활하는 것을 생각하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동안에 발이 부르트지도 않고 병이 난다든지 또 일사병에 걸려서 땡볕에 죽는다든지 이런일이 없고 다 지나왔다는 이런것들을 종합적으로 바울이 생각하면서 이것은 전부가 우리조상들이 모세시대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물이라고 하는것은, 특히 하나님의 심판, 심판너머에는 구원이 있죠. 죽음너머에는 부활이 있는데, 죽고 살아났으니까 심판을 뚫고 나온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 그러죠. 심판을 받아야 구원이 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그런의미에서 심판을 말하고 또 심판 너머에 있는 구원을 상징하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3:20)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3:6,7)
 
이 세상은 물로 인하여 멸망을 했다 이랬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입니다. 노아홍수때도 그랬고, 지금 출애굽하는데도 세상의 대표가 뭡니까 이집트 아닙니까 그 이집트 군대를 거기다 몰살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보면서 느껴야 할것은 애굽사람만 여기서 장사되었는가 하면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실제적으로는 장사된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장사가 되는것입니다.
 
유월절에도 맏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집트안에 있는 모든 맏아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죽었다 말입니다. 사실은 안죽은게 아니고 누가 죽었지요. 누가 죽었습니까? 그집에 있는 양이 대신 다 죽었습니다. 맏아들의 총대를 대신 메고, 맏아들의 이름표를 붙이고 대신 다 사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안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면할수 없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노아시대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홍수로 사람을 심판하는 그런 수단이 안되었습니까. 그런데 홍수라는 것은 비가 많이 내리는 건데, 이 비를 노아는 안 맞았습니까? 노아는 홍수를 안겪고 마른하늘에 단풍놀이 이렇게 할수 있었습니까? 노아도 홍수를 맞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노아도 죽은 것입니다. 죽었는데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인류는 거기서 전멸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새로운 종자를 가지고 새 인류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 오늘 홍해를 건너는 이 이스라엘 안에서 생각해야 될것은 이것은 세례다 이것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3,4)
 
바울은 이 세례라는 것이 우리의 죽음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전개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것은 안건너도 되었습니다. 안건너고 옆으로 바다아닌 마른땅으로 얼마든지 가나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길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그 길로 가던 이스라엘을 갑자기 돌이켜서 바다앞으로 몰아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유월절의 체험을 다시한번 확실하게 그들속에 새기고자 하는것 이상으로 다른것이 아닙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병주고 약주고 아닙니까? 그냥 마른땅으로 가게 할 일이지 물앞에 놔놓고 불안에 떨게 하다가 그것에 기적을 베풀어서 지나가게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해주고 싶은것은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을 새 사람으로, 새 피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새 피조물이라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것 같으면 새 피조물이 아니라 그냥 피조물이죠. 그런데 새 피조물이라는 말은 이전에 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집을 지었다 하면 맨땅에 집 짓는 것을 말하지 않지요. 새집이란 헌집을 헐고 거기다가 새로 집을 지었을때 새 집이라 그럽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저는 새 피조물이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죽을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뼈속까지 각인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사람들은 홍해를 건너오다가 다 죽었습니다. 한명도 남김없이. 애굽의 정신, 애굽의 소유였던 사람들, 애굽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애굽의 자랑이 되고 애굽의 영광이 되고 애굽에서 벌어먹던 사람들은 거기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서 새로 지음받은 새 사람들이 거기를 통과해 나온것입니다.
 
우리가 화장을 하면, 사람 죽었을때 화장 하잖아요. 시체를 펄펄끓는 기름불에다가 집어 넣는 것입니다. 그걸 집어넣으면 탈거는 다 타버립니다. 나중에 보면 하얀 뼈 몇 개 나옵니다. 사실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뼈는 꺾지말고 보존하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도 다른사람들 같으면 죽었나 안죽었나 확인하기 위해서 사형수의 뼈를 꺾어봅니다. 다리를 부르뜨리던지 목을 꺾어버리든지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확실히 죽지요. 그런데 예언서에 뼈를 꺾지 않도록 예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워낙 예수는 몸이 약한것을 보고 '에이 이거는 죽었겠지'하고 뼈를 꺽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뼈를 보존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전에 있던 사람이 영 없어져 버리면 뒤에 새로 나오는게 딴 사람이니까 뼈라도 가지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담안에서 하와 창조될때 갈비뼈를 꺼내가지고 했죠. 이것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앞에 있는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는 연속성이 있는 한사람인데, 이건 사람은 엄연히 딴사람으로 나왔지요. 이전사람하고 지금 우리는 물론 한사람입니다. 한사람이지만 불을 거쳐 나왔고 물을 거쳐 나와가지고 이미 옛날것은 완전히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안탈것만 딱 남은것입니다. 화장하고 남은뼈 이것은 뭡니까? 이거는 안탈것만 남은것입니다. 탈만한 것은 모조리 다 태워버리고 이것은 안탈 성질만 딱 남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것은, 태워서 탈수있는 것은 거기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안타는 것만 들어갈수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제 속에서 지금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를 시험해서 우리를 흔들고 약을 올리고, 남편이 아내를 약을 올리고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그런다고 합시다. 우리가 그럴때 흔들려가지고 내 인생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천당으로 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하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말에 의해서, 그 다음에 도둑놈이 와서 뭘 훔쳐가버렸다 할때 그것에 의해서 내인생이 급전직하로 땅바닥으로 떨어질수 있는 인생이라면 이것은 불에 탈수 있고 물에 빠져 죽을수 있고 누군가가 훔쳐갈수 있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요즘 학위에 관한 여러 가지, 이 시대에 한 바람이 불어가지고. 가짜학벌 이걸로 난리죠. 학벌을 붙이면 사람이 살고, 떼버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질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에 타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에 탔는지 안탔는지는 태워보면 압니다. 물에 빠져 죽지않는 그러한 생명, 견고하고 진동치 못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이것은 물에 빠뜨려봐야 아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구합니까? 기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하고 마음에 원하는 것을. 여러분 안에 있는 흔들리는 성질의 것, 그리고 탈수도 있고 무너질수 있고, 홍수가 나면 모래위에 쌓은 집은 무너진다 그랬는데, 그럴수 있는것을 여러분이 추구하고 있고, 거기에 결핍과 부족이 있어가지고 뭔가 하나님이 온전케 해주시고 채워주시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따라다니면서 처음에는 물에 빠뜨리고 다음번에는 불에다가 집어 던지고 그 다음에는 달달달 흔들리는 데 얹어가지고 결국은 쓰러뜨리고 말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해가지고 마침내 그속에서 떨어질것은 다 떨어지고 탈거는 다 타버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성질, 이것은 돈하고도 상관이 없고, 학벌, 인물하고도 상관이 없고, 그 무엇과도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그 성질만 남도록 이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헛된 소망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체험하게 한 역사들을 자꾸 반추를 해야 합니다. 새로 배우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요. 홍해를 건너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은 굉장한 것을 보고 배운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죽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 보다 강하고 헤엄도 잘치고 자기들보다 훈련을 받은 애굽의 군대들이 왜 지금 아무도 없느냐는 것입니다. 무덤도 없지요 물속에 다 휩쓸려가 버렸으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있는가? 우리는 산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있던 그 아무개로 살고 있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그분의 소용에 닿는 새사람으로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배웠어야 했습니다. 배웠어야 했는데 못배운겁니다. 못배웠으니까 이 사람들이 가면서 계속해서 그 체험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이 심판과 장사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이 죽은 애굽사람들 안에서 드러나는 것보다 우리안에서 훨씬 더 확실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십자가와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우리의 죽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을때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에 대해 죽었고, 이전 사람의 정과 욕심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랬는데 '뭐가 꼭 되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우리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잘모르겠습니까? 잘 모르겠으면 여러분들이 현재 스트레스 받고 있는 그것이 바로 나의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현재 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의와 진리, 진리의 사랑을 입지 못하고 있는것, 말하자면 진리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는것 이것입니까? 그것이라면 여러분들은 정말로 여러분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고 정말로 여러분들이 붙들고자 하는 것이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안에서 계속 진보를 해야 하는데 내가 왜 주님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과 같이 이렇게 되지 못하고, 여전히 졸렬하고 여전히 가난하고 빈약한 자리에서 흔들리고 그렇게 머물고 있는가 이런 것으로 탄식하고 후회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에 곱씹고 그러면 이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고있는 많은 부분들은 그런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많은 것은 우리가 육신안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을 채우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것은 돈이고, 우리의 사랑하는 것은 자식이고, 우리의 사랑하는 것은 나의 건강한 몸과 안전이 보장되어지는 미래, 이런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은 홍해에서 빠져죽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것이 아닙니다. 홍해에서 빠져죽지 않았다면 다음에는 태평양이나 대서양에서 빠져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한 것들을 사장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새롭게 지어지는 한 인생, 한 영광스러운 집이 설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에서 장사가 되었고, 그 다음에 살아나옴으로서 하나님안에서 새로운 인생으로 부활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경험했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그들은 애굽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 똑같은 정신으로 매일매일 삶에 임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은 부득이 40년동안 그들을 광야에 붙들어 매놓고 그 사람들을 계속해서 인생을 흔드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것은 인생에서 절반 이상아닙니까? 절반이상의 삶을 계속 때리고 흔들고 가르치고 꾸짖는 일을 해야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얼마나 미워하고 얼마나 의붓자식이길래 그렇게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거죠. 미운사람에게는 떡을 하나 줘서 그냥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리고 살아야 할 사람이면,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얹고 자기의 모든 것들을 유업으로 물려줘야 할 처지였기에 그를 반드시 온전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서 결혼을 시킨것은 하나님이 십자가를 여러분안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하기위함입니다. 우리를 가난한 부모와 까다로운 부모밑에서 태어나게 했고, 까다로운 형제들이 있어서 내 삶이 왜 이렇게 피곤한가? 예를 들어서, 맏아들이다, 혹은 형들에게 구박받는 몇째아들이다. 왜 나는 이러한 환경에서 있어서 여러 가지로 짐을 지고 여러 가지로 피곤한 인생이 되어있나? 왜 나는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거나, 혹은 병든 사람을 낳거나 그리했는가? 이런것들을 하나하나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안에서 평안을 얻어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평안이라는 것이 가장된 평안이 아니고요. 실제로 생명의 견고함으로 인해서 확실한 평안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만드신겁니다.
 
만일 우리를 배부르고 여유있는 자리에 갖다 놓으면, 예를 들어서 땅짚고 헤엄치는 자리에다 어떤사람을 갖다 놓았다 합시다. 헤엄을 잘치는지 안치는지 알수가 있습니까? 조금있다가 어떤일이 있느냐 하면 밑을 알수없는 엄청난 시퍼런 푸른바다를 건너서 어디까지 헤엄을 쳐 가도록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야만 살아남고 안그런 사람은 빠져죽게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사람은 체력을 단련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엄을 쳐야 될거 아닙니까. 근데 그사람을 수영장에 가서 며칠 연습을 시켜놓았는데 제대로 배웠는지 안배웠는지 알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연습삼아 결국 시퍼런 물에 빠뜨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괴롭지요. 죽으라고 흔들어야 되는것입니다. 근데 만일 그런 고생을 뭐하러 시키나 그래가지고 허리도 안오는 그런곳에다 퐁당 빠뜨려놓으면 땅짚고 가만히 서있는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헤엄을 칠줄 아는지 모르는지 알수가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여기 있는 이 모든 썩어질 것과 죽어질 것과 쇠하여 질 것들은 안고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받아낼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안에 있는 모든 탐욕과 우상숭배, 탐심이라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말고 허무한 것들을 쫒아갈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갖다 놓으면 하나님을 버리고 거기서도 마귀를 쫒아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지옥이 되는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데려올수 있겠어요. 하나님 나라에는 숟가락이 긴것이 있어도 서로 떠먹여줘서 얼마든지 다 행복하게 잘먹고 잘살수 있는 나라라는 우스개 동화도 있지요.
 
그것이 그 마인드인데, 그런 마인드가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안그러면 다 굶어 죽는거라구요. 숟가락 긴거 놓여있는 자리에서 다 밥 못먹고 말라죽을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마음이 형성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하나님이 체크를 해야 되는것입니다. 그럴때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방법은 뭡니까? 그냥 짧막한 숟가락을 놓고서 마음껏 편안하게 떠먹을수 있게 하지 않고, 긴 숟가락을 놓아서 이건 불편해서 견딜수가 없고,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까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두실 수밖에 없는데, 미워하는 사람은 안되요. 형제보고 라가라 하는 사람은 지옥불에 떨어질것이라 그랬습니다. 자,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다음에 형제에 대해 뭔가 원한이 있거나 그런것을 풀지를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사를 드릴때 만약에 조그마한 고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안받아주니까 그걸 풀고 오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알수가 있나요 그런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거는 매일 고소할만한 사람, 매일 '바보야 멍청아' 라고 말할만한 그런 남편과 아내를 옆에다 붙여놔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야 내가 그것이 통달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수있습니까.
 
홍해의 체험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끝났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알게 하기위해서 두신것입니다. 끝난 것은 그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때 이미 우리는 끝난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그랬습니다. 이미 이전에 우리는 착한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우리는 사람을 용납하고 절대로 정죄하지 않을 사람으로, 그리고 더러운 것이라고는 입밖에도 담지 않을 사람으로 이미 처음부터 우리생명이 결정되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걸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그런사람이 되어가는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피조물이라,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예수의 생명을 받아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그런 종자가 된것입니다. 전혀 우리는 이전에 그 종류가 아니에요. 오직 내 새끼만 챙기고, 오직 내 입만 즐겁게 하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안에서 모든면에서 거룩하고 모든면에서 자비와 긍휼이 많고 모든면에서 진실한 그러한 사람으로 이미 처음부터 근원적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런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으니까 육체가 자기의 상전이고, 자기의 하나님이고, 자기인생의 전부인 걸로 착각하기 쉬운데, 마귀가 와가지고 부채질을 막하면서 그렇다고, 그렇다고 하면서 '너는 세상에 가치있는게 뭐가 있느냐 눈에 보이는게 뭐가 있느냐 내 몸밖에 없다' 이겁니다 '그럼 몸을 위해라' 그러는 것입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가 아니고 거짓된,썩어져가고 망해져가고 이미 하나님이 폐기처분하신 그것을 자꾸 쳐다보도록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득이 여러 가지 과정들을 일으켜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이렇게 떠 있는데, 밑에 빵꾸가 났다는 것입니다. 배가 꺼져 내려가는 것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배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뛰어내려야 되는데 못 뛰어내리는 거겠죠. 뛰어내리는 것은 바다 한복판으로 퐁당 뛰어내려야 되는 것이고, 배에 있는 사람은 그래도 뭔가 물이아니고 배에다가 발을 디디고 있다는 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배에 발을 디디고 있는것이 아니고, 배와 함께 빨려들어가서 밑으로 수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명조끼라도 입고 물속으로 퐁 뛰어들면 사는것입니다. 지금은 안보이지만 헬리콥터라도 와서 살려줄지 혹은 그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현재 당장 빠져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배에 발을 디디고 여기에 기반을 계속해서 두게 되면은 죽는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과 저가 홍해에 빠져 죽었다는 이 사실을 하나님이 정말로 일깨우기 원하신다고 저는 믿는데, 이 삶이 바울같은 사람에게도 뒷날에 계속 공부하도록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과정들을 열어가신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도후서 1장에서 아시아에서 엄청난 환란을 당했다고 그랬습니다. 그 엄청난 환란은 그 사람이 불신자로 있고, 죄를 짓고 있을때 당한것이 아닙니다. 그사람이 전도를 하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크게 수고를 할때에 당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귀한 자기 자식을, 자기의 종을 어찌해서 어려움가운데 빠트리시는가. 바울은 그문제에 대해서 오래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협조를 해도 시원찮은데 왜 이런 어려움속에 빠트리는가?'
 
나중에 지나보니까 어느듯 바울같은 사람조차도 자기를 의뢰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능력과 자기가 그동안 선하게 살아왔잖아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그러니까 바울 스스로 감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서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는 그러한 자신이 어느때 딱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물속에 빠트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것은 나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사람은 이와같이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그 아름다움과 영광과 소망에 대해서 안놓을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러분 안에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괴롭다 죽겠다 싫다' 하는 여러내용들을 이 자리에서 하나님앞에 꺼집어 내놓고 의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뭐 때문에 그런가요? 그것은 누구 때문이기도 하고, '무슨 일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남편, 아내, 자식, 부모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어려운 환경들, 대부분은 사람때문이지만, 어쨌든 '그러한 환경들이 안좋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왜 이러한 자리에 나를 두시나?' 하면서 괴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닙니다. 실은 여러분들이 죽었는데, 그래서 그때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되는것인데, 좋은 사람이 내옆에 있든, 나쁜사람이 내옆에 있든, 십자가를 거쳐나오기 이전의 문제지, 지금 나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는데 '창녀가 옆에 있으면 괴롭고, 우아한 귀부인이 옆에 있으면 예수에게 즐거움이 있는가?' 그런것을 상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장가를 가거나 아이를 낳거나 재산이 있거나 혹은 좋은 승용차를 타느냐 아니면 조랑말을 타느냐 그런것이 예수에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예수의 인생에서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부담이 될것이라고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그려본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좋은 아내나 좋은 남편을 원할까요? 그가 내 육신에 보탬이 되고 내 인생에 그것이 띄웠다가 낮췄다가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홍해에 빠져 죽었습니다. 홍해에 빠져죽은 것 뿐 아니고 양이 죽을때 죽었고, 나일강이 물로 못 먹을때 이미 죽었고요. 광야에서 밥도 없고, 떡도 없고, 물도 없을때에 이미 그때 다 간것입니다. 그때 죽어야 될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아니 40년동안 어떻게 신발도 없고 목욕도 못하고 아무 상비약도 없고 한데...
 
요번에 아프카니스탄 갔다온사람들 40일인가 50일 있었다고 그러는데 그동안에 제일 죽을지경이 됐던게 벌레 한테 물려가지고 파리 모기한테 뜯겼는지 어땠는지, 온몸이 성한데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막비슷한 여기 말하는 광야생활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일이 아니고 40년을 거기 있었다는 겁니다. 근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어야 될 사람이 살아있는거에요. 오늘 하나님이 우리속에서 말씀해주시고자 하는 것은 너희는 딴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지금 굶어 죽어야 되는데 왜 안죽고 있냐는 것입니다. 그거는 밥먹고 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너희조상도 알지 못하던 떡을 내가 너희에게 먹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나중에 40년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신명기 8장에서 모세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여러분과 저가 오늘 여기 앉아가지고 하나님앞에서 행복과 불행을 생각하고 말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사실은 하도 불쌍해서, 예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고 병도 고쳐 주신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푸념을 듣고 '내가 좀 이쁘게 건강하게 자식들 공부잘하게 해줄게' 해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 인생에서 뭐냐 이겁니다. 죽은 귀신을 위로하는것 밖에 아닙니다. 그런거 함으로 내 몸이 조금 뜨고 조금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좀 사는거 같고, 그것은 고기덩어리를 온도계로 측정해서 밑에서 라이타 불로 가지고 온도 높이면 조금 올라가서 50도 가고 얼음밑에 가면 0도 떨어지고 그것밖에 아닙니다. 여러분 여름되면 뜨겁고 겨울되면 춥고 하지만 인생은 그대로 가지 않습니까. 추우면 어떻고 더우면 어떻습니까.
 
우리안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조성해놓은 인생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좋은 남편에 의해서 더 좋아지는것도 아니고요. 나쁜남편에 의해서 더 못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관계없어요. 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몸이 건강하고 무사무탈함으로 인해서 내인생이 영향을 받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울고 무엇 때문에 웃고 무엇으로 불안해 하고 염려하는가. 홍해에서 다 죽었는데. 세례받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다 죽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돌아보는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하도록 합시다.
 
단 한번이라도 이런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시간이 아무리 들어도 괜찮아요.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단 한번이라도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롭게 조성된 새인생, 부활에 대해서 확실하게 여러분들이 인식하고, 믿음으로 나는 지금 발은 땅에 디디고 있지만,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나간다 하면서 과감하게 나가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하늘에 속한 자로서 둥둥 떠다닐수 있습니다. 내가 부한데 처하든지 가난한데 처하든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인생이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홍해를 건너오는 바람에 애굽으로 갈수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이 사실은, 거기 있는 사람도 이리 오지 못하고, 나도 그사람들의 세계에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6:14, 15)
 
여러분안에서 육체의 모양은 아무문제가 안된다는 사실을 이 옛날 이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도 배우시고, 여러분 안에서 이미 그동안 단 몇 번이라도 여러분안에서 하나님이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겪게 하신 과정들이 있다면 그걸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걸로 족하다 이렇게 끝내면 우리 인생은 더이상 십자가에 덜죽은 사람을 또 못박고 또 뼈를 꺾고 거기다 독주사를 또 놓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계속 죽이는 그런 확인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전천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어디든지 하나님이 쓸수있는 그런 사람으로 우리인생이 나아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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