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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의 의미 (2) (신8:2-6,15-18) / 녹취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8:2-6,15-18)

오늘은 만나의 의미를 생각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만나의 특징을 몇가지 생각했지요. 만나라는 것은 아침 일찍이 내려오는 것이고, 때를 놓치면 못먹는 것이고, 안식을 위해서 주신 양식이라는 거지요. 안식을 위해서 주신 양식이라는 것은 일 안하고 사람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뭔가 몸부림을 쳐서 인생을 힘들게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살리시는 가운데서 그 하나님의 주시는 것들을 받아누리는, 그런 부자 아버지를 둔 자식의 삶,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표가 바로 하루밖에는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요. 만나라는 것은 하루만에 바로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얻어먹고 사는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매우 불안한 삶인데, 바로 보면 그것처럼 좋은 삶이 없다는 겁니다. 한번 배급받으면 다음에 뚝 끊어지니까, 냉장고에 한달씩 넣어놓았다가 다 썩어가는 것을 먹어야 되는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이 매일매일 새로운 요리를 준비해가지고 우리에게 아침마다 배달해 주는 그런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정적으로 만나라는 것은 광야의 양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더 잘 먹고 더 잘사는, 사실은 더 잘먹는게 아니지요, 완전하고 더 바랄게 없는 완벽한 삶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힘을 얻도록 주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들, 우리의 재물과 건강과 육체 우리시간 모든 것들, 이건모두다 한편으로는 만나라고 할수있는데, 이건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우리가 나중에 완전하게 누리게 될 때까지 지금 살려놓기 위해서, 지금 힘을 얻어서 그길로 나가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양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딱 보게되는 순간, 우리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다 날아가 버릴 것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참 잘했어요’ 하고 도장 꽝 찍어주고 이런게 전혀 필요없다는 사실을 그때가면 당장 알게 될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때는 성경의 말씀처럼 ‘네 오른눈이 너를 범죄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 오른팔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그랬는데, ‘두팔 다 있어도 모자라는데, 한팔을 찍어내버리고 불편해서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이냐? 그게 무슨 구원이냐?’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도 주님이 그와같은 말씀을 하신것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팔 다 있어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으로 만일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그깟 아무것도 아닌 두팔이 장애물이 된다면, 한팔 찍어내 버리고 영생을 얻는쪽으로 도움을 받으면 낫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만나라는 것은 본래 그런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를 많이 먹어도 되고 적게 먹어도 되고 별 차이도 없어요. 만나라는 것도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그 음식 한가지지만, 오늘 우리의 만나라는 것은 월급이 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고, 밥상이 좀 푸짐할 수도 있고 아주 초라할수도 있고, 그런것들을 다 다양하게 포함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좀 더 좋은아내와 좋은남편 좀 더 좋은 부모를 모실수도 있고, 형편없는 부모밑에서 우리가 태어나서 고생할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은 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음으로든 양으로든지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되고, 오늘보다 내일을 더 사모하게 되고, 안주하지 아니하고 앞으로 더 나가게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건 전부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만나에 목을 걸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나가 맛이 없을수록 뭘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빨리 앞으로 가자, 빨리 가나안으로 가자’ 이걸 생각해야지요.

이제 오늘은 만나의 그와같은 특징적인 의미를 생각한 것에 이어서 만나라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게 뭡니까? 만나라는 것은 광야 길을 위한 양식이라는 거죠. 광야에서 먹는겁니다. 그래서 만나를 생각하면 우선 우리는 광야생활을 반드시 생각해야 됩니다. 광야생활 떼놓고 만나라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만나의 의미를 알려고 하면, ‘광야생활이 왜 주어졌느냐? 광야생활의 의미가 뭐냐?’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죠. 이것은 불가분리니까. 모세는 지금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신명기 8장에서 ‘광야생활은 왜 주었느냐?’ 이것을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은 왜 줬다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지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또 그보다 먼저 이야기 된 것이지만, 주요 목적은 아니고 보조적인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가? 안 믿는가?’ 그것을 테스트해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광야생활을 왜 하게 하는가? 이 광야생활이라는 것은 현재에 있어서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금 우리생활이 광야생활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나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지금 가나안에 영 안 들어와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집트에 있는 것에 비하면 광야생활도 뭡니까? 벌써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은 겁니다. 가나안 안에 완전히 들어가서 사는것은 아닐지라도 이집트의 노예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구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절반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모든 죄와 모든 사망의 굴레를 완전히 던져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시달리고 있고, 여전히 욕심에 시달리고 있고, 사람사이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을 겪고 있고 이렇지요. 하나님이 그걸 완전히 벗겨가지고 완전히 그런 자리에서 건져가지고, 아무런 정죄도 없고 죄도 없고 사망도 없는 그런자리에 우리가 있게하실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광야생활입니다. 광야길입니다.

이 광야길은 두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자리에 살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거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우도록 하기 위한겁니다. 그러면 못배우면 어떻게 되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모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못 들어갑니까? 이런 질문을 할수 있습니다. 못 배우면 어떻게 되는가? 교리적이고 교과서적인 대답은 우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실증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겠죠. 만약에 이 교훈을 못 배우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보여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삶이 눈에 보이는 물질과 눈에 보이는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게 뭐였습니까? 일단은 막막한 황야, 광야길 아닙니까? 그 다음에 적들이 그들을 항상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누가 ‘어서 옵쇼’ 하면서 기다리고 있나요? 모든 과정속에 뱀이 있고, 전갈이 있고, 바람부는 모래사막 바람이 있고, 뜨거운 땡볕이 내려쪼이고 있고, 모든 면에서 환경은 그들이 보기에 결코 안식하고 마음편하게 생각할만한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는 삶이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왜 그렇지 않은가?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낸 것처럼 가나안땅으로 반드시 넣어줄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보증하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뜨거운 햇볕이 쪼이면 어떻게 합니까? 구름을 그 머리위에 드리워가지고 양산을 딱 씌워주시지 않습니까?. 춥고 메마른 광야길에서 하나님이 불기둥을 주시고, 여기서 오늘 읽은 말씀에 나온것처럼 40년동안 그 길을 걸어가는 데도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옷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양식도 꼬박꼬박 하늘에서 내려오고 바위에서 물이나오고 이러한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이런것들을 통해서 그들은 생명의 소망을 피우고 그걸 가지고 ‘나는 산다, 나는 살아있다’ 이것을 계속 자기안에서 굳혀가야 될텐데, 이 하나님의 손길안에서 산다는 사실 이것을 망각해 버렸을때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불안해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계획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미래를 생각하고 그러니까 어둠의 그림자가 확 그들을 덮쳤다가 마침내 그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못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배워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약에 이것을 배우기전에 죽어버린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사실을 알게되기 전에 죽는다면, 그러면 그 문제가 어떻게 될지 잘모르겠습니다. 예수는 믿었는데, 아직 믿는다는게 고작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다’ 하는 그런 지식적인 정도만 겨우 꿰고 있는 상황에서 죽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은 문제가 오히려 간단해 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 죽었습니다. 앞으로도 안 죽을 겁니다. 우리가 금방 죽지 않아요. 왜그러냐 하면 그게 그냥 우리가 오래 살고싶어서, 하나님 한테 그렇게 오래살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안죽는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마귀의 왕국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땅에 퍼트리고 또 다른사람들을 구원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오늘 우리를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잘 죽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을 전제로 해야되요. 그러면 이 사는동안에 우리는 우리인생이 사는것 답게 살고, 그 다음에 삶의 생기와 삶의 그 열정과 보람 이런걸 느끼면서 살아야 그것을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죽지못해서 '오늘은 뭐 이렇게 집문에다 넥타이를 걸어서 오늘 함 하다가 미끄러져서 못죽었다, 내일은 어디가서 지하철에 미끄러졌는데 그것도 안됐다', 어떤사람의 글을 보니 그런 게 있더라구요. 그래서 다섯번 여섯 번씩이나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어떻게 하면 내인생이 고통없이 잘 끝날까?’ 그것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자살을 할려고 하는것은 아닐지라도, 아무 의미없이 그냥 하루하루 목숨만 연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죽은거나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그렇게 살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이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반드시 사는 것처럼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환경을 보고 사는게 아니고요, 내 신체 내 육체적인 여건을 보고 내 인생을 영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그 말씀과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가는 법을 힘이 아무리 들더라도 우리가 꼭 배워야 됩니다.

그것 배우는데 우리의 70년이나 80년되는 인생중에서 한50년을 소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가 있어요.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몇 년 배웠습니까? 원래 하나님 계획대로 하자면 한 1년 배우면 사실은 충분한 겁니다. 이런거 배우는데 무슨 몇십년 필요합니까? 그런데 안되어가지고 40년이나 되는 세월을 광야에서 이렇게 다니면서, ‘이상하게 안죽네. 이 광야에 40년 있었으면 반드시 죽든지 병신이 되든지 뭐 해골바가지 정도로 이렇게 골골골 하게 되든지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발도 부르트지도 않고 옷도 안떨어지고 먹는것도 멀쩡하고, 이거 안죽네? 어째서 이렇지? 우리는 농사짓는 땅에 들어가서 잘먹고 잘 산 것도 아니고, 목욕을 한것도 아니고, 전염병 예방주사를 맞은것도 아니고, 여기는 지극히 어려운 환경인데 어떻게 이리 멀쩡하게 살아있지?’ 그것을 통하여서 ‘삶이 어디서 오는가? 삶이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하는 것을 배웠어야 된다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 광야길을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나라는 것도 그 안에서 해석을 해야지요. 광야생활이 주어진 이유가 어디있는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울수 있도록, ‘삶이 무엇이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삶이 유지되는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공부할수 있도록 그런생활을 시켜본겁니다.

오뚜기는 반드시 그 오뚜기의 오뚜기됨을 입증하기 위해서 거쳐야 될 일이 있습니다. 오뚜기라고 누가 물건을 하나 가져오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겼을 수 있잖아요? 오뚜기라고 하면 사람들이 제일먼저 해보는 일이 뭡니까? 넘어뜨려봅니다. 오뚜기는 제일 먼저 자빠트려봅니다. 오뚜기라고 안했으면 자빠트리지 않는데, 이게 오뚜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넘어트려봅니다. 왜? 그 무게중심이 밑에 있으면 발딱 일어서 버리니까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자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광야길을 거쳐가야 되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체감하고, 속에서 확신하기 위해서라도 험한환경, 이건 그대로 놔 놓으면 죽을건데 하는, 환경에 던져봐야 됩니다. 그러니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구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뿐아니라, 그러한 환경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확실하게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을 해야 됩니다.

여기 징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신8:5) 광야생활을 통하여서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사실 이것이 뭐 징계란 말이 적합할 정도로 엄청나게 어려운 생활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런생활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수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징계란 말은 본래 의미가 뭡니까? 처벌하는 거지요. 일단 외형적인 양상이 벌입니다. 징계라는 것은 종아리를 때린다든지 오늘 밥투정을 했다고 하면 ‘너 오늘 저녁먹지마’ 이런 것들이 징계입니다. 괴로움으로 벌을 받는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벌이아니고 성경에서 강조하는것은 공부라는것입니다. 훈련,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통해서 체질을 강화하고 모르는것 배우고 희미한것 확실하게 하는겁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인생의 과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학벌사회하면서 학벌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학벌 속이는 사람 한참 소동을 벌이고 했었는데, 학벌을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여전히 중시합니까? 왜 학벌, 학벌하고 앉았습니까? 실제 공부많이 해봐야 사회나와서 큰 도움되는 것도 없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수학이다 영어다 뭐 그 다음 기타 여러과목들 공부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인생이 딱 그대로 비례해서 인생이 풍요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학벌을 중시합니까? 실제로 살아보면 지식이라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엄청난 것을 갖다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왔다 그러면 돈을 재겨놓고 박사학위를 받는것도 아닐테고요, 우리말로 글써서 박사학위를 받을수는 없잖아요, 그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어떤사람들이 미국가서 공부를 해왔다면, 옛날사람은 더더욱 말할것도 없구요, 이 사람들은 정말로 가서 접시닦고 죽을 고생하고 집에서는 심지어 처자식 놔놓고 손가락 빨고 앉았는 그런것을 눈물로 보면서도 ‘어찌하든지 기다려라 내가 출세해서 갈게’ 그렇게 하면서 가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그 연단의 과정을 거친겁니다. 그것을 소중히 사는거에요. 거기서 꼭 무슨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고, 그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가 문제가 아니고, 없는 돈에 다 그 부모가 소팔고 논팔아서 공부를 시켰고 그 사람도 공부를 하면서 힘들게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공부라는 것은 인간이 원래 하기 싫은 건데), 하기싫지만 계속 종이 닳도록 자꾸 머리를 쓰고 하기싫은 몸을 채찍질하고 이렇게 하는 세월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거지요.

실제로 우리만 하더라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학벌을 소중히 안 여긴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맹탕맹탕 놀고, 형편도 그렇지도 않은데도, 학교도 전혀 안나오고 초등학교쯤 나오고는 나와가지고 내내 놀았다는 그 사람하고,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하다못해 고등학교라도 야간으로 나왔다 그러면 다르게 사람을 생각하잖아요. 그것은 실제 그 사람안에 있는 지식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고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난. 징계를 받고 연단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에서 꼭 실제로 어떤 간판되는 학교를 만일 안 나와도,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과정을 볼때 그 사람이 참 자기인생을 힘들게 여러 가지 훈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나왔다라고 보이면 존중하지요. 그런 사람을 우리가 멸시하지 않지요. 그러나 일류학교를 나왔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로는 기만하고 가짜 박사학위 같은거, 주로 목사나 이런사람과 기독교인들이 많이 딴다고 하는데, 이런것들은 사탄이 집중적으로 이 사람들을 공격한 겁니다. 십자가의 연단의 세월, 징계와 고난의 세월 이것을 생략하고, 그런것들을 될수 있으면 안받고 그 다음에 어떻게 은혜로, 기독교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로, 얼렁뚱땅 은혜로 그냥 인생이 영광스럽게 되고, 그냥 인생이 풍요롭게 되기를 추구한 결과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이런데 제일 잘 걸려드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겁니다. 사탄이 집중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공격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훌륭하신 목사님들, 영적인 지도자들이 가짜박사 따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등입니다. 얼마전에 신문에 나왔더라구요. 우리나라의 가짜박사의 제일 큰 비중이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박사학위라고 하더라구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짜박사학위를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징계와 고난을 될수있으면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사라든지 혹은 훌륭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가운데서 그들의 권세와 영광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무슨 길을 거쳐야 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권세있는 지도자고 권세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 예수 믿는다 하더니 정말로 뭔가 있네’ 이걸 보이려면 뭘 해야 되겠습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실제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려서 섬기고, 희생과 수고를 하고, 그렇게 살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것이 10년, 20년, 30년이 누적되면 그 사람의 인생과 인격이라는 것은 하늘의 별과같이 빛이 나게 되어서, 박사학위가 아니라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권세있게 여기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왜 종잇장에 불과한 가짜박사를 사모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일류대학교를 간판이라도 꼭 가지고 싶어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배우게 하시고자 하는것, 또 인생의 체질을 아시는 분께서 정말로 반드시 거쳐야만 된다고 하는 그것을 안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만나라는 것은 그러한 광야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공급과 격려가 우리에게 내려오는것을 상징합니다. 만나는 그래서 광야생활과 불가분리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만나를 사모해야 됩니다. 만나를 사모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말하면 '광야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광야생활하는데 만나가 필요합니다. 광야생활 아니면 만나가 필요없어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것처럼 ‘아, 살아서 뭐하노? 빨리 내 좀 안데려가나? 하루라도 빨리 죽는게 속 편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이 만나의 의미를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용하게 여기셔서 ‘너는 세상에서 쓸모가 없다 나에게 소용이 없다 세상에서 별볼일 없으니까 빨리 죽어가지고 세상의 딴사람 일하는데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빨리 비켜라’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만나의 의미를 그다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라도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은 광야생활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고, 그 광야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이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고 하는것 처럼 보이는 그런 생활속에서 잘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만나는 이걸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 예수님께서 기적 베푸신 일들, 오병이어의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신 것과 병도 고쳐주는 이런 일들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예수님을 계속해서 그들의 생활을 보살펴 주는 분으로 모시기 위해서 죽자살자 따라다녔습니다. 그럴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6,27) 라고 그랬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질문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것이다”라고 그랬습니다. 인자라는 것은 주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당신을 믿을수 있도록 표적을 한번 보여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증거가 뭡니까?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1) 당신은 우리에게 무얼 줄 수 있습니까? 이걸 물은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해서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베푸신 것처럼 계속 했더라면, 이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안하지요. 지금 계속해서 우리에게 모세가 만나를 준 것처럼 당신이 계속 우리를 먹여주니까 ‘아!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겠습니다’ 이러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제 생각에 사람들에게 떡을 주시는 기적을 베푸는게 두 번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그 떡을 먹고 사람이 살도록 된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불고기먹고 살고, 우리가 채소먹고 살고, 우리가 밥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불고기나 채소나 밥을 통하여서 사람을 살게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에게 붙어있어서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무슨차이가 있습니까? 불고기나 채소나 밥이 아니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굶고 광야에서 고통스럽게 배웠던 첫 교훈, 첫 체험이 바로 그겁니다. 40일간 굶는다는 것은 밥이나 고기를 먹는게 아니잖습니까? 월급받고 사는 게 아니잖습니까? 40일간 굶는 것은 사는게 아니에요. 그것은 굶어서 죽어가는 과정인데, 그런데 주님안에 어떤 진리가 밝히 드러났습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게 극단적인 예가 어떤거냐 하면요. 바울이 다니면서 수없이 굶주렸는데, 위장병이나 굶어가지고 생기는 병들, 비위생적이고 몸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들을 하나도 겪은것이 없다는 겁니다. 뿐만아니라, 돌에 맞아서 죽을 뻔한 때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돌로 머리를 찍었는데, 사람들이 쳐죽인다고 사형을 집행한 거에요, 그래서 이사람이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밖으로 시체던지는 그런 곳에다 바울을 휙 던져버렸습니다. 만약에 성위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시체라 생각하고 휙 던지면 떨어지면서 죽잖아요? 그런데 돌로 찍어서 죽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털고 일어나서 길을 갔다구요. 독사에게 물렸는데도 안죽어가지고 옆에서 본 사람들이 전부 기절초풍을 하고, ‘이 사람은 무슨 신인가보다’ 그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는 이런 난리가 일어난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것입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것도 아니고, 위생관리로 사는것도 아니고, 뱀에 안물리고, 남한테 안맞고, 남에게 상처입는 그런 팍팍 쏘는 말이나 이런거 안듣고 항상 이쁘게 ‘니 잘났다’ 하는 이 말 들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 건강하고,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 편안하고, 그래야만 안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사람이 우리를 날마다 저주를 하고, 바늘같은거 가지고 이렇게 옛날에 장희빈이나 이런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그 인현왕후입니까? 누구의 인형을 만들어서 가슴 같은 데를 꾹꾹 찌르는 것처럼, 온 세상사람이 우리를 매일 같이 저주해도 우리는 관계없어요. 온 세상 사람이 매일 지나가며 침을 뱉고, 온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매일같이 멀리하고 ‘너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래해도 우리는 아무 지장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우리가 그렇게 되면 안좋지요. 우리는 마땅히 사람의 사랑안에 있어야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음식들을 적절한 때에 규모있게 잘먹고, 잘쉬고, 뱀에게도 물리지 말아야되고 그렇게 살아야되요. 그런데 궁극적이고 원천적인 생명의 근원이 뭔가 하는것을 하나님이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런 일반적인 생리의 원리를 벗어났을때 우리가 그와같이 ‘안 죽을수 있다’라는 것을 한번씩 보여주시는 겁니다.

광야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만나도 그런겁니다. 그래서 '만나가 맛이 있고 만나로 인해서 우리가 우리생활이 참 적절하게 아무 어려움없이 잘 유지될수 있을 것이다' 그런걸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월급을 한 50만원밖에 못받는다고 합시다. 그럼 그걸 갖고 살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를 한달에 수입이 50만원밖에 안되는 자리에 두셨다면, 그 50만원을 받으면서 ‘나는 죽겠구나 나는 왜 이런신세인가’ 그걸 생각하지 말고, ‘사람이 돈 100만원이나 200만원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자다 하나님이 오늘 그 코에다 호흡을 불어넣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사람이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저주하면 한달에 5000만원을 수입으로 잡는 사람이라도 살수가 없다라는 것을 이 시간에 배우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치라는 것이 아니고, 그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끔 우리를 당연히 500만원을 손에 넣어야 되는데, 50만원을 그냥 주고서는 하나님께서 입을 딱 닫아버리는 그러한 시간들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만나라는 것은 절대로 그것자체로서 인생을 배부르게 하거나, 사람에게 편안하게 ‘아이구 이젠 됐다 이정도면 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 하지 않습니다. 만나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참 먹다가 보면 반드시 입에서 단내가 나고 질리게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만나밖에 없구나” 이스라엘 백성이 민수기 11장에서 불평하지요. 그게 당연한 겁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민11:4-6) 만나밖에 없으면 만나만 먹고, ‘아 맛있다 산해진미가 이거구나’ 그말 하라고 그럽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만나만 먹고 그곳에 앉아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만나를 먹으면서 빨리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야지요. 빨리 가나안을 향하여서 앞으로 뛰어가야지요.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나의 의미는 ‘이 만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만나를 제대로 먹었더라면 그들은 영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47-50) 만나라는 것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게,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만나 자체가 맛이 있느냐 배가 부르냐 그걸 먹으면 행복감이 느껴지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요. ‘만나라는 게 무슨 떡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이게 소똥이라 하더라도 괜찮아요. 이게 소똥이나 개똥처럼 너무 맛없고,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관계없어요. 왜? 이것은 하나님이 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만나가 하나님을 몰고왔다는 것입니다. 만나안에는 하나님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떡을 먹을때 ‘희안하다 이 광야에서 어떻게해서 양식이 나올수 있는가? 이건 하나님이 사람을 살게하시는 기묘한 방법이다’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만나를 주셔서 감사할 뿐 아니라, 만나 아니라도 괜찮아요. 만나를 안주고, 그냥 무슨 귀뚜라미나 고고한 무엇처럼 이슬만 먹고산다고 해도 괜찮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속에서 아무것도 안먹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갈수 있었으면 나는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나와 아울러서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고기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도 뭔가 육체의 욕망과 감각에 맞는 게 없으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종자들이니까 그것이라도 준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밥 안먹고 살 수 있으면 더 좋지요. 밥 안먹고 우리가 비상한 시국에 일만 열심히 해야된다면, 예를 들면 ‘오늘까지 이 숙제를 다 해야된다’ 그래서 '아침먹을 새도 점심 먹을 새도 없다' 그러면 안먹고 지나가면 더 좋잖아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광야의 길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지금 한시바삐 쫒아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얻고자 하는 이런 희망에 차있는 시간들입니다. 이때 밥 못먹고 좀 달려가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뭘 먹더라도, 뭘 받더라도 그걸 통해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접할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유명한 말씀 여러분 아시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다” 이것은 사람이 한번 죽는것이 사람에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만나를 먹더라도 한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죽는 그것은 거치는 과정이라고 치고요. 그 다음에 다시 살아날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것 아닙니까? 그럴때 우리는 살아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한번 죽는것은 나중에 거쳐가는 과정이니까, 한번 죽는다라는 그점을 빼버리고 나면,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주님이 부득이 붙인 말이 그겁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그냥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안죽는다는 겁니다.

만나라는게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나를 먹을때 ‘이거 먹으면 진짜로 안죽습니까? 99살 되도 안죽습니까?’ 그런 바보같은 질문 하지 말고, 왜 안죽기를 바랍니까? 죽어서 썩어질 몸은 벗어버리고 바울이 말한것처럼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몸,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몸으로 덧입기를 우리가 바래야지 왜 안죽고 싶어합니까? 그래서 그 생각은 우리가 빼고요.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전부 먹으면 안죽는, 먹으면 정말로 영생할수 있고 행복할수 있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족이 있습니까? 우리의 늙은 아버지, 어머니, 병든 부모님 또는 아내와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고, 장애를 가진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있고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이 뭡니까? 이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만나입니다. 오늘 그 사람들을 우리가 데리고 살면서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고 그 사람들 안에서 인생의 격려를 받고 재미도 얻고 그렇게 산다면 그게 우리의 만나입니다. 그런데 그게 대단하냐 하면 절대로 대단하지 않습니다. 대단하지 않지만, 그걸 통해서 우리가 무얼 받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어떤 딸이 내몸에 있는 주름과 몸에 있는 점과 딱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엄마가 좋아, 나는 엄마가 참 너무 좋아’ 만약에 이렇게 말을 한다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나는 너를 참 너무 좋아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엄마가 이쁘다’ 하는 것처럼, 나의 이 수많은 죄와 허물과 못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만나를 통해서 먹고살게 하는 겁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되요. 내 딸이, 혹은 나의 아내가 완전하냐 어떠냐 그런걸 생각하면 안되요. 그건 만나인데 만나가 무엇이 완전하겠습니까? 광야의 양식인데. 진정한 양식은 가나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우리가 들어가서 죄도 없고 사망도 없는 세계에 들어가면, 그때 가면 우리가, 뭐가 날아오면 몸을 활짝 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뭐가 오면 어떻합니까? 반사적으로 탁 웅크리죠. 눈을 딱 감고 그 다음 반사적으로 웅크리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지금 방어해야만 되고, 우리는 지금 뭔가 우리를 해치고, 우리의 생명을 축내려고 하는 이런세력들 가운데 둘러 쌓여있어서 그렇습니다. 밤에 잘 때 문을 잠그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가서 우리가 하나님 주신 것들로 인해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그때에 ‘이것은 맛이 어떤가? 이것은 무슨 재미가 있는가?’ 하나하나 따지십시오. 지금은 생명을 보존하는 그 목적으로만 모든 것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광야의 생활을 위한 것이고, 훈련을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 그때 광야길을 제대로 걸어갈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아내, 그런 남편, 그런 형제 그것이면 족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갈5:26) 했는데, 헛되게 너무 많은걸 기대하지 마십시오. 만나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추구하십시오. 나에게 양식이 필요하면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그러고, 사람의 사랑과 격려와 기도가 필요하면 그런사람 붙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왜 나는 항상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적절한 만나를 주셔서 그로하여금 광야길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실겁니다. 그리고 그 손길안에서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힘을 내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길을 끝까지 잘 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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