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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로의 등장과 조언 (출18장) / 녹취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 모세가 나가서 그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밑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이튿날에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 섰는지라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가로되 그대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찜이뇨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의 곁에 섰느뇨 모세가 그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편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그대에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실찌로다 그대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어서 소송을 하나님께 베풀며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이 겸전한 자를 빼서 그들로 백성의 두목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베풀고 쉬운 일은 자단하더라 모세가 그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니라” (출18장)

오늘 이 말씀은 모세가 그의 장인을 만나고, 또 함께 온 가족들을 재회하는 그 부분의 내용과 장인의 조언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길 봉사자들, 관리들이죠, 이 사람들을 세우는 내용을 담고있습니다. 먼저 여기 핵심적인 내용부터 살펴보십시다. 핵심적인 내용은 당연히 모세가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끙끙대면서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 이드로라는 그의 장인을 보내셔서 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 지혜의 내용이 뭐냐하면 ‘일을 나누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내용이고, 간단한 원리같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서 잘 실행이 되지 않음으로서, 우리가 인생길을 감에 있어서 안져도 될 무거운 짐을 지고서 힘들어 하게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이 부분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고서는 너무 중하여서 모세 자신도 견딜수가 없을 것이고, 또 백성들도 그렇게 기다리다가는 이 이스라엘 백성이 거의 200만명의 숫자인데, 200만명이 모세 한 사람에게 묻고 모세 한 사람에게서 결과를 다 듣고 갈려고 하면, 줄을 어디까지 서야 되겠느냐 이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모두 다 지쳐서 쓰러질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는가? 여러분들이 오늘날 종합병원에 가보시면 감기 걸린사람도 거기 다 줄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동네에 병원이 하나도 없어서 그렇습니까? 있지만 신뢰하지를 못하니 그렇지요. ‘동네병원에 가서 뭐 낫겠나?’ 사실은 동네병원도 갈 필요가 없고 집에만 있어도 되는데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우리 몸안에 하나님이 두신 능력으로 처리할수 있는 것 조차도 ‘최고의 기계와 최고의 사람에게 내가 갖다 보여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안에 많은 구성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교회를 자기 한사람등에다 몽땅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힘들게 교회생활 하고있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결국 지체들을 인식을 못하거나 아니면 신뢰를 못하니까 그렇지요. ‘나의 이 문제와 나의 이 짐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겠다 그래서 형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전달되어 오고, 내가 형제를 주목하고 거기에 복종하거나 그와 교통을 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사실 하나님과 사귈수 있는 길이 수백갈래 수천갈래로 우리곁에 다가오게 될텐데, 그렇게 생각을 못하니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 안하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문제가 있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문제가 있어서 ‘그 사람 말을 내가 들을 수가 있겠나?’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아무말도 들을수도 없고, 그 다음에 내 사정이나 이런걸 이야기해도 ‘그 사람한테 말해서 해결이 되겠나?’ 이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할 수 없지요.

혼자서 하나님과 더불어서 교통을 해야 되는데, 사람을 통하지 않고 정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서 진실로 순종하고 하나님과 교제할수 있다면 사람이 필요없어도 되지요. 하지만 그게 어려운 문제라는 말이죠.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 안에서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아야되는데, 이 신뢰관계과 없으면 결국은 몸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 혼자서 혹은 코 하나가 숨만 쉴 뿐 아니라 밥도 먹고 쳐다보기도 하고 걸어다니기도 하고 이걸 다 해야 될 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원리, 그리스도의 몸이 지니고 있는 원리를 항상 생각하고 가정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어느사회에서든지, 자기의 분수와 은혜와 은사의 분량을 항상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범위내에서 딴 사람과 함께 살고,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붙여주신 지체들과 같이 삶을 영위하고 일도 하는 그런 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모세가 민수기 11장에 보면, 지금 이때와는 상황이 다른 때였던 것 같은데, 이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불평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밖에 없나?’ 하고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할때에,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민11:11)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힘들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민11:16,17) 라고 그랬습니다. 70명의 지도자, 참모를 세우는 이런 일도 하나님이 일으키셨는데, 그것이나 오늘 여기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같은 이런것을 세우는 건 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아갈 때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서 짓눌리지 않도록 항상 짐을 나눌 사람들을 우리에게 붙여준다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은사만 생각하지 말고, 자기 살아있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옆에도 사람이 살아있고 그 사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하나님의 나라안에 함께 갖다 두셨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생각합시다.

이것은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막연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거대한 단체적인 인격 단체적인 사람으로 만드셔 가지고, 그래서 손가락 발가락 여러 가지 지체들이 함께 있음으로 한 몸을 구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살게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그것을 못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을 안믿는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든지,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든지 이런 일이야 없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걸 안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굉장히 힘든 삶을 혼자서 끙끙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신뢰하십시오. 남편도 아내를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가지고 함께 생명의 유업을 나눌 사람으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함께 생명의 유업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신뢰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신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할수 있는 훌륭한 통로가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주고 격려하면서 그 다음에 써 먹어야 합니다. 실제로 믿고 붙들어야 되요.

두 번째로 오늘 여기 이드로라는 한 사람이 와서 이러한 지혜를 모세에게 갖다 줬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때를 따라서 은혜를 베풉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베푸는 방법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뭔가 일깨워주는 겁니다. 아까 우리가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는데, 이 지체들이 다 제각기 용도가 있고 따라서 우리가 써먹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지체들 중에 우리가 반드시 써먹어야 되고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될 지체중에 노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드로라는 이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미디안의 제사장입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본래부터 섬기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훗날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것들을 체험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그런 사람이 되었겠지요. 지금 말하는걸 주욱 들어보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찬송하고 경배하고 제물을 드리고 이렇게 하는거니까,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을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일단 이방귀신을 섬기는 무당입니다. 이방사제란 말이지요. 그리고 이 사람은, 지금 모세가 나이가 몇 살이겠습니까? 적어도 80세 이상 아닙니까? 그런데 그의 장인이니까 나이가 적지 않았겠지요. 그때 모세가 40살 때 이 집에 가서 결혼을 했거던요. 그러니까 그 장인이 못돼도 60살은 되었으리라 봐지는데, 5~60세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 90~100살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고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그런 훌륭한 사자가 될수 있겠는가?’ 생각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어떤 국가적인 체계가 세워지는 그런 일이 지금 나왔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에게 국가적인 기틀을 마련해 준 사람은 정도전이라는 사람이죠. 그 사람이 경국대전이라는 것을 써가지고 나라의 틀을 잡았는데, 지금 이스라엘의 경국대전은 이드로가 썼습니다. 이드로가 이러한 체계를 알려줌으로서 그렇게 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혼자서 뭘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끙끙대던 모세가 '이제 해답을 찾았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서는 젊고 역동적이고 뭔가 쓸만하게 보이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냥 육체로만 봐서는 별로 신통치 않게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수 있다는겁니다. 이방인들, 이방인이 뭡니까? 밖에서 갓 들어와가지고 교회의 문화나 교회의 생활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 늙고 힘이 없는 노인, 이런 사람도 ‘몸에 꼭 필요한 지체다’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특히 우리는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이 나이든 노인을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노인은 반드시 사실은 우대받고 존중받아야 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든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것들을 이루어놓은 ‘현재 삶의 터전을 놓은 사람이다’ 그런 점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자신의 풍부한 인생경험을 통해서, 음으로든지 양으로든지 삶의 지혜를 배워서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앞에 실패한 사람들, 혹은 앞에 흘러간 이 사람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거기에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에디슨은 전등불 하나 만들기 위해서 6000번의 실험을 했다는겁니다. 그래서 그 불이 어떤 대나무를 아주 가볍게 태웠더니 거기에 전기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대나무 태워가지고 전기가 올줄 어떻게 알겠어요? 전기가 흐르는 이런것을 만들기 위해서 실험을 6000번을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5999번의 실패가 있었다는 겁니다. 5999번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6000번째 그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5999번의 실패는 그 마지막번째의 성공에 매우 중요한 밑거름이라는 말입니다. 그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온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실패한 사람이거나, 어떤 사람들이 지금은 힘이 없어 보이는 흘러간 인생의 과거와 같은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할때, 그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성공하고 나이가 들고, 권력이 많고 나이가 든 사람이면 우리는 쉽게 용납하고, 쉽게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게 아닌 사람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드로가, 이방인이고 또 우상을 숭배하던 제사장이고 또 나이가 100살이나 된 노인인데도, 모세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을 할수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지체가 약하게 보이고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체일지라도, 그것이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하다’라는 고린도전서12장에 나오는 그 원리를 우리에게 바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앞에 잠깐 나온것입니다만, 이드로가 올때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모세의 아내는 ‘십보라’라고 하는 이드로의 딸이죠.  미디안 여인이 결국 모세와 결혼해서 그의 부인이 된것인데, 모세 이사람은 참 이상하게 이때도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여인이 아닌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아마 재혼을 한 것 같은데, 두 번째 결혼도 역시 구스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겁니다. 구스여인이라는 것은 이디오피아 흑인입니다. 그래서 그 모세 가족의 대표로서 연장자가 누나 미리암인데, 비난을 했다는 말이에요. ‘왜 그런 사람과 결혼하는가?’ 이러한 사고자체가 역시 앞에서 말한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방인이고 이질적이고 우리와 같지 아니한 그 사람을 결국은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시킨거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해서 한거지요. 미디안에서 십보라와 결혼한것도 모세가 선택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를 마땅히 받아주고 사랑해주고 시집와야 될 그 동족에게는 배척 받았잖아요. 버림을 받았잖아요. 동족들을 건지려고 할때, 그를 결국은 살인자로 몰아서 내쫒는 그런 결과만 나오게 되었죠. 그런데 멀리 듣도 보도 못한 이방땅에 와서 이방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모세를 영접했습니다. 영접하고 또 시집도 오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방의 사람들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불러가지고 자기집의 권속으로 삼겠다고 하는 그런 의지를 여기서 표현한 겁니다. 요셉이 이집트 제사장의 딸과 결혼한것도 마찬가지에요. 이러한 것들은 전부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과 결혼을 한 것인데, 나중에 보면 이사람들 뿐 아니고, 살몬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아주 훌륭한 차기 지도자감인 청년이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과 결혼을 하고요. 그 다음에 그 살몬과 라합 사이에서 태어난 보아스, 그도 역시 이스라엘에서 아주 중요한 지도자인데, 그 역시 룻이라고 하는 이방 여인 그것도 재혼하는 여자하고 결혼하게 된것입니다. 이것은 다 뭡니까? 이방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서 함께 천국의 구성원이 될것에 대해서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생각할것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느껴질만한 말씀을 아주 강조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그 땅 원주민들이나 혹은 그 주변국가에 있는, 말하자면 이방인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여인들 혹은 이방남자들과 통혼(결혼)하지 말라고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봐야됩니까? 모세 자신은 이방인과 결혼하고, 이스라엘의 중요한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전혀 문제로 삼지 않는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 그냥 일반 백성들은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이렇게 철저하게 경계를 하시는가? 이 차이가 뭐며, 뭘 기준으로 이게 하나는 잘했고 하나는 잘못했다고 판단하는가? 이것은 오늘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방사람과 결혼한다든지, 반드시 결혼만이 아니라, 같이 일을 한다든지 사귄다든지 친구로 지낸다든지 이런것을 다 폭넓게 적용해서 생각할수 있는데, 우리가 어떤 경우에 멀리하고 어떤 경우에 가까이 할수 있는가? 기준은 ‘생명의 흐름이 어디로 지금 흘러가고 있는가? 어디로 진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삶의 주권을 누가 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흐름이 어디로 진행되는가?’ 하는 것은 무슨말인고 하니, ‘우리가 세상으로 가고 있느냐? 아니면 세상이 나에게 나오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삶의 주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는것은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거지요. 우리가 이 영적인 권세와 영광,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도로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우리가 세상의 빛처럼 드러나고 있는데 세상이 그것을 보고서 나방이 불을 보고 쫒아오듯이 ‘아! 좋습니다 우리가 가서 함께 즐깁시다 나도 좀 살아봅시다’ 이렇게 온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이 오면 올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결혼하면 할수록 좋은것이고 친구가 되면 될수록 좋은것이고, 얼마든지 우리는 대환영입니다.

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것은 세상과 친구가 되기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세상과 원수가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 오신것 자체가 세상과 같이 먹고 마시고 같이 친구가 되고 같이 결혼할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은 위험하지 않은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바 되어 있고, 그 속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밖으로 흘러나가는 이 상황이었기 때문에 넘친다는 것입니다. 자기안에 있는 의가 넘치고, 진리가 견고하고, 하나님의 그 말씀과 약속이 너무도 그속에서 확고하기 때문에, 이것은 밖에서 뭔가가 들어와서 흔들 수 없고, 오직 내게서 넘쳐서 흘러나가서 세상을 적실 수밖에 없는 이러한 확고한 삶의 주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작살나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하고 결혼하든지, 친구가 되든지, 앉아서 술마시고 놀든지 그 사람들은 전부 다 꺼꾸러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음으로 이러한 생명의 견고함이 없다는 겁니다. 없음으로 인해서 세상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있고, 시날산 외투를 바라보고 있고, 거기에 있는 금과 은을 쳐다보고 있고, 아름다운 여인을 쳐다보고 있고, 세상의 즐거운 술과 잔치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 접촉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우리 삶의 원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접촉을 할때, 반드시 할례를 받고 나오기를 원합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뭡니까? 십자가를 거치라는 겁니다. 그들의 세상을 버리고, 그들의 육체의 소망과 육체의 영광과 육체의 자랑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보여주신 하늘의 영광을 사모해서 그걸 좋아해서 나오기를 바라고 그 외에는 길을 열지 않습니다. ‘그 외에는 들어오지 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를 알고 행한다면, 우리가 어디가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또 분명한 인식, 또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는 영광과 소망을 제대로 붙잡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으로 자꾸 우리가 들먹들먹하고 흘러갈 그런 위험성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세상과의 관계를 스스로 먼저 차단해야 될것입니다.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이 십보라라는 사람이 출애굽기4장에서 먼저 한번 등장을 했는데요. 그때 모세에게 이 부인이 아주 뜨거운 난로를 만진 것처럼 한번 고생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의 아들을 길에서 돌칼로 가지고 할례를 시켰기때문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은, 첫째아들은 할례를 받았는데 둘째아들은 그럴새가 없어서 할례를 못 받고 자랐던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죽일려고 했습니다. 아들을 죽일려고 했단 말입니다. 부인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 무슨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 있고, 우리 남편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놀라게 만드는가?’ 해서 그 남편을 향하여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피남편'이라 했지요. ‘당신은 나를 피를 보게 하는사람이다. 정말로 나에게 골치아픈 존재다’ 그렇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교회는 어디서 나왔는가?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가 피를 봄으로서 교회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에게서 그친것이 아니라, 이제 교회에게까지 넘어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지금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만 피를 볼일이 아니고, 우리도 피를 봐야 될 상황입니다. 모세가 피를 본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지금 모세의 아내가 ‘이 정말 사람 피보게 만드는구나!’ 라고 했다는 것은, 모세의 아내도 모세 때문에 피를 보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말하지요?

하나님의 세계는 십자가 없이 어떤 사람도 그냥 제 발로 편안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체질,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건전한 생각을 포함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구조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도 들어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변혁을 겪어야 합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의 삶이 한번 깨어져야합니다. 우리의 그 은근히 마음속에 꼽쳐놓고 있던 그런 우리의 설계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구상 이런것들이 팍삭 깨어져서 향유가 흘러나오기 위해서 옥합이 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육체가 깨어지는 이 과정 없이는 하나님의 세계에 아무도 갈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 피남편이라는 말, 이런 개념을 우리가 성경안에서 여러사람들의 경우에 가족관계속에서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모세라는 사람은 가족들에게서 상당히 골치아픈 존재입니다. 남편을 볼수가 없으니까요. 지금 십보라만 하더라도 남편이 벌써 오랜시간 동안에 없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둘 사이를 띄워 놓은 거에요. 그러니까 십자가였죠. 그런데 모세입장에서도 이런 부인을 데려다 놓으면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왜? 내가 가지고 있는 소망,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가는 길 여기에 동참할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것을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모세가 짊어지고 가야 될 십자가에요. 부인도 남편이 십자가이고, 남편도 그 부인이 십자가에요.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 아내나 남편으로 혹은 자녀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경우를 수없이 볼수있는데, 대표적인 경우로 엘리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사사로서 훌륭하게 활동했지만 결국 그는 자식으로 인해서 쫄딱 망했지요. 엘리의 두 아들들이 부랑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엘리의 아들대신 아들처럼 엘리의 업을 계승한 사람이 누굽니까? 사무엘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사무엘 역시 나중에 그 아들들로 인해서 거의 십자가를 질만한 이런 신세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들도 역시 옳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다른사람을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누굽니까? 다윗이지요. 사무엘이 다윗을 뽑아가지고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을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에게서 있었던 고통이 그 십자가, 자식이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 훌륭한 아버지에게서 그렇지 않은 자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무엘로 넘어왔는데 사무엘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사무엘도 역시 동일한, 선생이 졌던 그 십자가를 똑같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다윗 역시 동일한 십자가를 졌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대부분의 아들들은 다윗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거스린 사람들입니다. 압살롬과 암논과 그 뒤에 있었던 대다수의 아들들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피남편이라는 이것이 피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다윗을 계승한 것은 정실로 나온 그런 자식들이 아닌, 결국 범죄의 열매라고 밖에 볼수없는 사람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냥 아무나 데려와서 ‘니가 그냥 왕 해라’ 이렇게 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솔로몬도 역시,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밝은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그의 아들대에 르호보암때 나라가 두 쪽 나는 결과가 왔습니다. 우상숭배와 수많은 문제들로 점철된 만년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전부가 사실은 그 가족들 때문에 그렇게 된거에요. 물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본인의 문제지만, 환경적인 상황으로 볼때 분명히 이것은 그들이 잘못 선택한 아내 또는 잘못 낳은 자식들이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경건한 왕으로 꼽힐 사람이 히스기야인데, 그 히스기야에게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불경건한 왕으로 꼽히는 므낫세가 나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피남편의 원리입니다. 아마 그 자식들에게 있어서 이 경건한 아버지들은 어떠했을까요? 그 아버지가 ‘자식들이 정말 나의 십자가다, 하나님이 왜 너를 나에게 붙였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자식들은 어떨까요?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도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아버지를 붙였을까? 왜 이렇게 오직 예수 예수 하고 오직 하나님 하나님 하는 그런사람을 붙여가지고 우리를 딴사람들처럼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그런 아쉬움과 불평을 지고 살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부인들의 경우에는 더 상황이 심각하겠지요. 나중에 그 다윗의 부인이 되었던 아비가일 같은 사람을 대표적으로 우리가 볼때 그는 남편이 나발이라고 하는 아주 형편없는, 이 부인에게 어느모로 봐도 걸맞지 않는 그런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결국은 수십년을 같이 살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자매들의 형편이 실제로 그러하지요. 남편들이 예수를 안믿는다는 말이죠. 그럴때에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을 왜 허락하시는가? 오늘 우리가 생각할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다 필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결국 그런것은 생명의 유지와 확대, 우리의 체질의 강화, 우리 영혼이 각성하고 깨어있도록 하기위해서 그런거지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공급으로 유지가 되는 건데, 하나님의 생명공급이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입니다.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바라는 것인데, 이걸 사모하고 붙잡을려면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줄들이 다 끊겨야 합니다. 앞에서 샘이 쏫아나는데, 멀리 물 길러 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늘의 생명, 하늘의 공급이라는 것은 사람에게서부터 오는 그 여러 가지 도움과 사람에게서부터 오는 어떤 것들이 차단되지 아니하고서는 그기에 눈을 돌리기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떤 부인과 살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야 십보라고 구스여인이라고 나와있지만,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지요, 모르는데 고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많은 후대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아내가 경건치 못한 남편으로 인해서 거의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고, 경건한 남편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속적인 부인으로 인하여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장치라는 것을 여기서 오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속에서 죽을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너무 염려하지 말고,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않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그 삶을 우리에게 가져올 것이고, 그로인해서 우리가 하늘의 그 생명으로 윤택하게 되고 더 살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걸 통해서 또한 생명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인데, 그 사람들 나중에 다 살립니다. 우리가 만일 옆에 가시가 있고 자극이 있어가지고 계속해서 긁히고 괴롭다면, 그걸로 인하여서 내가 괴로움을 당하는 걸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내가 체질이 강화되어가지고 나중에 가면 내가 그 가시를 변하여 부드러운 솜과 같이 만들어낼수 있다는겁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피남편이라고 외칠만한 십자가의 각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안으로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려운 환경들을 달게 소화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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