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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하나님 (출15:22-16:5) / 녹취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찌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15:22-16:5)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꺼집어 내었습니다. 이전에 있던 자리가 뒤에 읽은 구절에서 백성들의 불평속에서 표현되었지만, 과연 고기가마 곁에 또 떡을 배불리 먹던 호강하던 좋은자리인가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야 되지만,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애굽에서 고통스럽고 괴로워할때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도 않았고 생각도 해본적이 없지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건져내었는데, 이제 건져내어서 바로 참 죽었더라면 이 사람들은 좋은 것만 보고서 죽었을 겁니다.

미국에 이번에 보니까 복권에 3000억원에 당첨된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구요. 지금이 아니고 몇 년전인 모양인데, 그래서 그 슈퍼볼인가 하는, 3000억 짜리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있는데, 휘트니라고 하는 어떤 60살쯤된 남자가 당첨되었는데, 벌써 앞에도 몇 번 기사가 났었습디다만, 이번에 보니까 총정리를 해가지고 자기가 인터뷰를 했는데, 왜 그것에 당첨되었는가? 죽을맛이다 이거지요. 왜 그러느냐 하니까, 그것에 당첨되고 난 다음에, 자기가 음주와 도박 또 여자 이런데 다 빠져들어 가지고 돈을 탕진하고 자기의 삶을 망쳤을 뿐 아니라, 자기의 자손들 가족들이 다 망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손녀가 17살인데, 그 아이는 결국은 마약 이런걸 하다가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지금 심지어 빚이 남았다고 그래요. 원래 그 사람은 백몇십억 되는 그런 송유관을 판매하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원래 부자였어요. 그런데 복권이 되고 난 다음에 더 큰 부자가 되는 바람에 인생을 날렸다 이것입니다. 원래 이사람은 예수도 믿는 사람이고, 처음에 당첨되었을때 기부를 많이 했답니다. 교회에다 헌금도 많이 하고 이렇게 했는데 별수 없더라는 겁니다. 돈의 위력이 워낙 세니까 쓰러져 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한 말이 뭐냐하면, “내가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겠고, 둘째는 당첨되고 바로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 당할 때에 엄청난 고통속에서 '이것만 벗어나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자마자 바로 육체의 안식으로 들어간것이 아니라, 고난의 또 다른 종류의 험한 인생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지요.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제자들은 그대로 다 땅에 남겨두셨으며, 오늘도 우리가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 육체는 이전에 놓여있던 자리에서 건짐받아 가지고 다른 험악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도록 그렇게 구원하셨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여기 15장 찬송에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을 한것을 보았지요.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출15:17,18) 이렇게 찬송을 맺었습니다. 이건 무슨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신 것은 우리 육체가 단지 어디 가시가 박혀 있으면 그걸 뽑아주고 빨간약 발라주고 해서 아프던게 안아프도록 만드는 그걸 할려고 부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그의 아들이 되게 하고 그의 모든 영광과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하늘의 복을 여기서 우리가 다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뜻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세우신 계획과 목적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졸렬한 인생들은 '나는 사탕 한 알만 있으면 만족한데, 그 이상 너무 많은 것을 주니까 부담스럽습니다' 그렇게 말하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큰 구원을 주셨는데, 사람은 사탄에게 늘 종노릇 하다가 겨우 안다는게, 밥 먹을때 그저 '밥 한 숟가락 더 먹었으면, 반찬이 세가지인데 네가지 정도 먹었으면 더 바랄게 없겠다' 그렇게 하는 꼴입니다. 우리는 이것부터 치료를 해야 됩니다.

오늘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가지고 우리 인생길을 가는데, 이것은 싸움이라 해도 되고요 그것을 행복의 순례라고 해도 되고, 보는 각도에 따라 그것을 뭐라고 봐도 좋은데, 우리에게 기분좋고 편안하고 즐겁게 느껴지든, 힘들게 느껴지든 간에 여하튼 우리는 이 길을 가야됩니다. 가야되는데 이길을 갈 때는 반드시 한가지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 큰 뜻, 우리를 향하여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계획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품으신 이 큰 뜻에 대해서 근접해야 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조그만한 개구리에게 사랑해주려고 이뻐해주려고 내가 다가가지만, 그는 놀래가지고 기절하고 도망을 가고 이렇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가 없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우리시각에 따라서 '떡이나 하나 더 주세요 점수나 일점 올려주세요' 늘 그 말만 할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엄청난 하늘의 축복을 어떻게 줘야 되나' 이걸 가지고 궁리하게 될것입니다.

여기 물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읽은 첫 기사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마라의 쓴물이지요. '마라'라는 말자체가 '쓰다'는 그런 뜻이라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광야에 왔는데 광야에 누가 수도파이프를 설치해 놓은것도 아니고 물이 없지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먹고 마시는 문제에 걸려든 것입니다. 우선 물 문제에 걸려들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식은 들고 왔으니까요. 그들이 나올때 한달치 정도의 양식을 들고 왔어요. 그런데 물이 없으니까 입이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고 불평을 한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샘을 발견했는데, 그 물이 써서 못먹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소금기가 있다든지 무슨 그런 성분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물에 "나무 어떤 가지같은 것을 넣어라" 이렇게 했더니 물이 달아져서 사람들이 순하게 먹을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출15:25) 법도와 율례를 정하고 시험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이 아니고,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주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겁니다. 무슨 시험을 하느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출15:26) 쓴물을 만나고, 그 다음에 못 먹을 물을 하나님이 치료를 했잖아요. 어떻게 해가지고 손을 쓰니까 마실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6) 이 말은 다른말로 하면 병주고 약주는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병주고 약준다는 말이 뭡니까? 어려움을 앞에다 던져놓고 그 다음에 말 잘들으면 그것을 싹 해결해 주는 하나님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당근과 채찍으로 말을 유인해서 자기 원하는 데까지 끌고 가겠다고 하는 주인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인생은 이 죄의 몸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주 수준이 낮은, 하나님의 요구에 민첩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육체를 가지고, 이 자아를 가지고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반드시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그 훈련의 최종목적은 딱 한가지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잘듣는 사람이 되는겁니다. 하나님을 잘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데, 우리가 스스로 찾아갈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큰 구원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그 길로 끌고 가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잘 따라가야 되는데 왜 못따라 가느냐는겁니다. 왜 못따라 가겠습니까? 좋은 것을 주는줄을 알면 우리가 따라가지요. 우리눈에 그것이 정말 좋게 보이면 따라가지요. 그런데 아까 뭐라 그랬습니까? 이스라엘의 시각이 하나님의 그 엄청난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하게 반응할 만큼 눈이 밝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적이 다른말로 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잘따라가기 위한 것 곧 말을 잘듣기 위한 것이라고 그랬는데, 다른말로 바꾸면 우리눈이 밝아져서 이 하나님의 세계를 충분히 보고 이해하고 공감할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병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내렸던 재앙을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가 아니고 실제로 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라”(출15:26)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병 들었을때 치료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말은 ‘나는 너희에게 이 재앙을 하나도 안내리겠다’가 아니고, 너희들이 큰 목적을 이루도록 하기위해서, 정말 구원받도록 정말로 너희들이 육신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매여가지고 큰 인생을 날리지 못하도록,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 정신을 차리게끔 계속해서 이 물이 쓴데 거기다가 조치를 취해가지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각오하고 있어야되요.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면 각오고, 좋게 생각해야지요. 좋게 생각하면 우리는 좀 앞으로 얼마나 스릴있고,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하루하루 배워갈 것인가' 이렇게 기대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형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뻐가지고 애굽에서 다 건져내고 복된 땅에 심을려고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 아들로 삼아가지고 거기에 하나님이 기대어 살려고 그런겁니다. 그래서 형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이걸 죽일려고 한다든지, 갖다 내버린다든지 병신을 만들겠다 이런생각은 절대로 있을수 없어요. 여기에는 반드시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닥친다 하더라도 훈련을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연단의 손길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 그랬는데,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다른말로 바꾸면 ‘빠따를 치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바꿀수 있습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 연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연단이라는 말속에는 훈련과 치료, 병주는게 있고 풀어주는게 들어있지 않습니까. 연단의 하나님을 알면요, 우리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인생이 되어서 이 연단을 많이 받지를 않고 찬송을 많이 하는 시간들을 보내도록 인생을 잘 선택하고 그렇게 꾸려나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둘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행복해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같이 나누어먹고 그래서 사는겁니다. 요거는 산다고 말하죠. 이걸 ‘생명을 누린다’라고 거창한 단어를 붙이면 그렇습니다. 그게 사는데로 사는겁니다. 정상입니다. 그게 안식이라 할 수 있고 그게 자유라고 할 수 있고 행복이라 할 수 있고 평안이라고 할수 있는 그런 어떤 이름을 붙일수 있는 삶입니다. 그걸 하던지 아니면 삶을 잃어버리는거 이 둘중의 하나입니다. 살든지 못살든지 둘중의 하나입니다. 못산다고 해서 죽는거는 아니고요. 사는것 같지 않은 삶을 사는겁니다. 왜 그런삶을 사는가? 훈련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아담은 결국 살게 됩니다. 범죄했지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바로 구원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죽여버리면 인류자체가 없어지지요. 그럼 구원받는 사람이라는 종자자체가 없잖아요. 뒤에 에녹과 노아와 이런 사람들 나오고, 아브라함 나오고 우리도 다 나왔는데, 이 사람들 어디서 나옵니까? 아담과 하와에서 나와야 될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는 주체고, 아담과 하와가 필히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 됩니다. 이 사람들 참 희안한 사람들이죠. 자기가 범죄해놓고 자기가 제일 먼저 구원받는 대상이 되는거에요. 그래서 그걸 딱 깨닫고 아담이 자기 부인보고 ‘너 오늘부터 이름을 하와라고 해라’ 하와란 뜻은 뭡니까? '살았다'는 뜻입니다.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자기부인보고 ‘우리는 살았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그 자리에서 딱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요. 그렇게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안에는 사는 것 같지 않은 삶, 지금 말하는 뭡니까? 이 못 사는것, 또는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고난의 세월이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3:18,19)

여러분들 여기 아이들 학생들도 참 인생을 산다고 수고가 많으신데, 되지도 않는 공부를 죽으라고 할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 쓰지도 않는 말, 우리는 다 한국말하고 사는데, 이거 하기도 바쁜데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해야되지요, 그 다음에 뭐 오만것을 우리가 다 집어넣어야 되는데, 이런것 모두 참 이마에 땀이 흐를 일입니다. 어른이 되어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생활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죽지못해 산다고 할 만큼 힘든일의 연속입니다. 대부분이 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에요.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 해서 그렇습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안에서 아무런 질병도 걱정도 근심도 없고, 바나나만 따먹고 그냥 살도록 그렇게 해놨으면 우리가 안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쫒았어요. 왜 내쫒았습니까? 죽일려고? 괴롭힐려고? 아까 제가 그럴수 없다고 그랬지요.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되었버리면, 만약에 죽거나 갖다 내버린다면 하나님이 골치 아프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나라가 없어져요. 주의 산에 기업으로 심으신 백성 이걸 위해서 지금 이스라엘을 건져냈다고 했는데, 이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쫒아내는 것도 훈련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쫒아내가지고 이마에 땀이 흐르고 고통스럽게 되고 공부하는것도 힘들고 일하는 것도 힘들고 죽는것도 힘들어요. 늙어가지고 중풍걸리거나 치매 걸려가지고 고생하는 분들 보면 죽으면 참 안식이 되겠는데, 죽는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요. 너는 쉽게 죽어도 안된다는 거에요. 고생을 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가운데서 '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눈을 돌리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는것도 어렵고 죽는것도 어렵게끔 해놓은 이것이 뭡니까? 이게 아까 말한 바로 인생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안식하고 바로 사는거고, 하나는 고통스럽게 배우는 것입니다. 삶은 이 두종류밖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지혜를 가져야될것 아닙니까? 지혜는 뭡니까? 인생을 더 잘 사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두 개있으면 두 개중에서 제일 좋은거 선택하는것이고, 세 개 있으면 세 개중에서 좋은것 선택하는 겁니다. 지혜라는 것은 언제나 잘 사는쪽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모든 훈련의 목적은 한가지라 그랬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어떤 계획을 갖고 있고,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기에 공감하고 순응하는 것입니다.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잘했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게 제일 좋습니다’ 그렇게 공감하고 찬송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의 길을 열었습니다.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출15:26) ‘의’라는게 뭡니까? ‘의’라는 것은 부자나 힘있는 사람에게 내가 잘해주고, 힘없고 나보다 약한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본개념이 이겁니다. 구약에서 의의 기본개념은 공평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형제들간에 언니가 있고 동생이 있고 형이 있고 이래 있어도 함부로 힘이 있다고 해서 동생을 때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있으니까. 부모가 딱 보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의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시고 똑같이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을 봐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심지어 하찮은 피조물들, 작은 동물들 하나에 대해서라도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이것은 하나님이 이뻐서 만들어 내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대응을 하는겁니다. 이게 의의 기본 개념입니다. 이게 우리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나는 너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우리를 그런 새사람으로 만들었으면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왜 그렇게 합니까? 나는 그렇게 하기 싫소. 내보다 힘없는 사람은 내가 심부름시키고, 내가 막 구박하고 부려먹고 이래야지 내가 왜 그 사람에 대해서 그냥 똑같이 존중해주고 합니까’ 이렇게 하면 이게 뭡니까? 지혜가 없는 겁니다. 그건 쪼다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불러가지고 자기 자식을 만들기로 택했다면 앞으로 갈길이 훤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앞으로 그냥 절대로 둘수 없거던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반드시 이 의에 대해서 인식이 있어야 되고, 의로운 정신을 가져야 되는데 이 종자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의를 배울때까지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6) 이 말은 ‘나는 내가 목적하는 그 상태가 될 때까지 너를 만가지 질병으로 괴롭히는 하나님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 말은 해석하면 참 좋은 말이지요. 얼마나 우리가 복을 받았길래 하나님이 오만 방법을 다 써가지고 우리를 자기와 같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그런 존재로 살도록 이렇게 자꾸 하나님이 애를 쓰시는가 그런얘기니까 좋죠.

그러나 어쨌든 현재의 우리의 시점에서 볼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것은 우리는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똑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믿음으로 화합해야 합니다. 저 약속, 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 큰 의도에 대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머리를 갈아끼우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적어도 이해를 해야됩니다. 영양이 부족이면 밥을 두그릇씩 먹고 그렇게 보충해서 똑똑해져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것에 대해서도 다 괜찮습니다. 우매해도 괜찮고, 머리가 안돌아가고 느리고 둔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세우신 큰 뜻과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의하거나 진실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그 사랑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해가지고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하거나 어떤 사람을 차별하거나 증오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자기의 형상을 이루시기를 작정하고 우리 인생을 당신의 세계로 끌고가는 동안에 우리는 힘써서 해야 될 일이 딱 그 한가지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문제 다음에 이 사람들이 불평한 내용이 떡문제입니다. 밥문제입니다. 먹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수순 아니겠어요. 먹고 마셔야 사니까.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니까 먹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왜 등장합니까? 한달치 정도 양식을 들고 나왔는데 이제 다 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먹고 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나왔을때 그들은 처음부터 무얼합니까? 사실은 염려도 할 필요가 없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등장을 했구나' 이걸로 끝나야죠. 등장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6) 어떤 훌륭한 분이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대로 하면 되는건데, 이 사람들은 등장했는데 염려하고 걱정하고 기절초풍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어떤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앞에 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이 자기들을 정말 기절초풍할 수 밖에 없는 능력으로 자기들을 건져내셨고, 그다음에 홍해를 건너왔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뭐라고 말합니까?  “더러운 말은 너희입밖에도 내지 말라” 그랬는데 정말 읊기도 좋지 않지요.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이제는 하나님이 기절초풍을 하실 차례가 된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이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신뢰할수 없는 종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길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명기까지 출애굽의 역사를 다룬 내용을, 우리가 출애굽기 해봐야 한주에 몇절씩 하는 수준이면은, 이 출애굽기 공부하는 그 부분만 읽지 마시고, 출애굽의 전역사와 그들에 대한 해석, 하나님의 시각 그런 것들을 두루 다 보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마지막까지 쭈욱 계속 반복해서 읽으십시오. 에베소서 할 동안 에베소서도 그렇게 읽으시고, 그렇게 함으로서 한책 한책들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완전히 터득하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시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걸 한번 하면은 십년이내에 우리가 이걸 다시 들여다 보겠습니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출애굽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기대를 사실은 속으로 거의 다 접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체질을 아시니까. 저들의 체질을 아시니까 하나님께서 이사람들에 대해서 정말 그 마음에 어떤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런 역사를 읽도록 하나님이 이걸 남겨놓았는데, 우리는 뭘 배워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은 걸 배워야지요. 뭘 배우면 좋겠습니까? 이거 읽으면서 이거는 후대의 사람들이 교훈을 얻도록 하기위해서 남겨놓은 기록이라 그랬습니다. 시편에서 구약성경을 왜 기록했는가를 목적을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뭘 배워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체질이 바로 이런 체질이다 하는것을 일차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가지를 배워야 되는데, 첫째는 '우리가 바로 이 종자구나! 우리 육신이라는게 이렇게 연약하구나!' 우리는 아담이 타락한 그 순간부터 한 마리의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떡 한 조각 그것에 일희일비하는 그런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을 이미 깊이 체험한바 있는데, 지금 닥쳐오지도 않은 문제 까지 미리 계산해가지고 염려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렇게 하는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뭐가 필요한 가를 봐야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할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지 뭐가 필요하냐?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부터 일용할 양식을 얻고 모든 생활의 필요한 것을 몽땅 공급받더라도,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꼭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꼭 그들이 가져야만 될것이 뭡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사는 법” 이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요. 하늘의 해가 내일 뜰건지 안뜰건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내일 하늘에 해가 뜹니까 안뜹니까? 또 비가 앞으로 옵니까 안옵니까? 앞으로도 비가 오겠지요. 그러면 양식은 먹고 살게 됩니까 안됩니까? 그건 정해진것 아닙니까? 그건 법칙인데 어찌해서 그것을 걱정하고 염려하느냐 이겁니다. 먹고 사는것은 하나님이 자기자식을 낳아가지고 그건 정해진 것입니다. 우리집에 지금 자녀들이 여기 앉아있는데, 이 자녀들이 앞으로 밥 먹을건지 못 먹을건지 물어볼 게 뭐가 있습니까? 태어났다면 당연한거지. 안되면은 그 부모가 아이를, 엄마가 아이를 임신하면 엄마가 입덧을 하든지 무슨수를 쓰든지 해가지고 밥을 못먹더라도 아이는 다 되게 되어있다고 그러죠. 나중에 결국은 입덧이 심하면 엄마의 몸에 있는 영양분이 싹 빠져나가서 엄마의 장기가 손상이 된다고 그러지요. 하나님이 참 얼마나 일을 신기하게 하셨는지, 그 아이는 반드시 나야하니까 '못먹는거는 니사정이고 아이는 무조건 되야 된다' 이겁니다. 이게 법칙인데, 먹고사는 것을 가지고 뭐 때문에 염려하느냐 이것입니다.

무얼로 사는가 하는것을 모르는 이게 정말 가난입니다. 이게 정말로 기근이고, 이게 정말 가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그 마음을 모르고,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굶어죽일것 같으면 뭐할려고 꺼집어 내요? 그것도 꺼집어내는 것을 저절로 꺼집어내는 것도 아니고 온갖 기적을 행하고 온갖 수고를 하고 노력을 해가지고 여기다 갖다 놓았는데, 왜 여기서 굶어죽는다는 말입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루하루 인생길을 살아가는 이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고,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땅에 만약에 불의와 죄악과 거짓과 미움 이런 것들이 그득한채로 이대로 영원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 안믿는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정말 못볼 일을 보았다든지, 지난번에 보니까 젊은 사람이 늙은 택시기사를 뺨을 때린 거에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어떻게 저럴수 있느냐? 말이지요. 택시기사가 많이 약을 올리거나 잘못을 했겠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것은 안될일이다' 라고 하는 어떤 것, 그것이 진리 아닙니까? 의와 진리 이런것들이 파괴되고 이럴때 사람들은 견디지 못할정도로 '이것은 이래서는 안된다' 다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런 놈 천벌을 좀 안내리나' 무슨 아주 잘못된 일이 있을때 사람들이 '하나님은 뭐하는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무슨뜻입니까? 사람안에 예수를 믿든지 안믿든지 간에 하나님이 심어놓은 의의 본성이 있고, 진리의 본성이 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그대로 되어야 됩니다. 반드시 의가 회복되고 진리가 회복되어야 됩니다. 인간 세포안에 그것이 심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없이 이렇게 불의와 사탄의 세계가 영원히 지속될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섭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그 사람들만 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짓지 아니한 모든 왜곡되고 모든 부패하고 모든 불의한 것들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이건 영원한 뜻이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이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도록, 이 영광스러운 회복의 기수가 되도록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면은,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우리가 사람에게 시달림 받는것이 문제겠습니까? 아담의 저주가 우리에게 내려져 있는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질병도 있고 약하고 병들기도 하고 정신도 쇠약하고 이렇습니다. 이거 쉽게 치울수 없습니다. 죽는날까지 우리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함을 안고 살아가야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서 의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산에 우리가 정말 말뚝이 되고 기둥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반드시 육신적인 삶을 돌아보신다는 겁니다. 이걸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늘 그래서 두가지를 여기서 확실하게 배우고 이 부분을 여기서 끝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것 같아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 있기는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거고, 원컨대는 오늘 형제들이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끝내면 좋겠어요. 더 이상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맛을 보지말고, 안식과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찬송케 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입만 벌리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우리가 말하는 그것만 하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눈을 떠서 보면은 이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우리가 이런 불평과 원망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요. 오늘 해가 뜨는 것이 너무 분명한 사실입니다. 구름이 가리고 있어도 영원히 구름이 가리고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구름이 있지만, 때로는 컴컴하지만, 때로는 모자를 안쓰면 안될정도로 하나님의 땡볕이 내리쬐어서 하루아침에라도, 이 우리아파트 같은데 보면은 그 풀이 무성한 거를 싹 깎아버려서 다 죽여놨어요. 그러나 하루 해가 쨍쨍 내리쬐고 하루 비가 확 와 버리면 다음날보면 확 커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하시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어려운 일은, 진짜 어려운 일은 성령이 정말 수고하시고 2~30년 일하시는 것은 제가 볼때 한가지 밖에 없어요. 먹고 살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그게 어려운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손에서 이토록 견고하게 붙들려 있고, 견고하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하는게 그렇게 어려운것 같아요. 그것을 보질 못해가지고, 눈이 어둡고 사탄에게 깊이 사로잡혀 있어가지고 하나님의 이루신 큰 구원을 못보는 이게 정말로 어려운 문제지,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전부 그겁니다. 눈을 띄워가지고 하나님을 보게 하고 그 구원을 보게하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오늘 우리가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가지고 자랑하고 서로 격려하고 이렇게 한다면 이건 성령의 역사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하게 일을 많이 하고 그래서 돈을 더 잘벌고, 일을 열심히 해서 다른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사역을 할거고, 조금 약하고 부족한 사람은 부족한데로 죽을 먹으면서 살든지 그런차이는 있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너무 인생에서 크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 가지고 가나안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서 수고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인생이 영위될수 있는 그런 참자유와 완전한 행복의 세계를 허락하셨다는 이것을 우리가 계속 쳐다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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