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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와 찬양 (2) (출15:1-18) / 녹취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15:1-18)

오늘도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사람은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찬양을 하는, 이것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겠습니다. 찬송이라는 것은 지난주에도 잠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하신일들을 눈을떠서 쳐다보는데서 나오는 겁니다. 찬송은 신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우리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해놓으시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도록 만들어 놓고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려고 애를 쓸 필요가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기는 있습니다. 있지만 그일은 적어도 찬송을 억지로 하는것은 아닙니다.

찬송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뭔가 좋은 말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고마운 분이다 하나님이 잘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하는게 찬송인데, 그걸 하기 위해서 실제로 나에게 아무런 좋은 일이 없는데도 좋은 것처럼 마음을 억지로 생각을 하고, 상황을 좋게 보려고 애를 쓰는 이런일은 우리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송을 받으실 때에, 여기 지금 찬송의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15장의 이 찬송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에 대해서 말한것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들이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우리 눈이 열려가지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6일째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다' 하는 이런 것 정도만 우리가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사실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고,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젆혀 없게 될것입니다. 6일간 창조는 큰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서 여러분이 아시는 데로 천지가 다 창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심지어는 식물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어떤 식물들은 사람이 와서 씨 뿌리고 가꾸고 하도록 미리 남겨놓을 정도로, 전적으로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환경들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후에 동물과 식물이 새로 만들어 진 것도 있어요. 앞으로도 사람이후에 이 우주간의 질서들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사람을 중심으로 이 천지만물이 다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 살기 좋도록 모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물이 하늘에 가 있으면 어떻고, 땅에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또 그것이 육지와 물이 분리 꼭 되어 있어야 되는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들여서 어떤것들은 구분하시고, 그래서 사람이 놀기 좋도록, 편히 쉴수있도록 모든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은 뭐할려고 이렇게 붙여 놨겠습니까? 하나님 만드신 이 모든 것들 쳐다보도록 이렇게 만든것 아닙니까? 눈을 들어 산을 보든지 들을 보든지 지으신 사람이나 모든 생물을 쳐다볼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살 뿐 아니라 행복하고 우리인생이 충분히 만족할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눈이 열려서 그것을 본다면 찬송할수 있습니다.

해가 뜨는것도 참 찬송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걸 처음 알려주신 사건이,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건져내실 때 여러 가지 재앙을 베풀었는데 9번째 재앙, 바로 흑암의 재앙입니다. '해라는 것은 당연히 있는게 아니구나!' 하는것을 그때 알게 되었을것입니다. 우리가 올해같은 경우에 비가 많이 오고 흐린날이 많아져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아! 일조량이 부족해서 걱정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손을 한번 드리우신다면, 이 작은 생명의 원천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 태양빛이 가리워지는 이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수가 있습니다. 이 일조량이 부족하면 우선 사람들이 우울증 같은 것에 걸린다고 그러죠. 비타민D 인가 어떤 것이 부족하게 되어가지고 사람이 그만 아무 힘도 없고 성격도 보면 뭔가 음울한 그런것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뭐 아무것도 아닌 불빛 하나인데 말이지요.

인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안에서 오늘처럼 이 정도로 목숨을 부지하고 여기서 살수 있는 것만 해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불평할 세월이 있으면 잠시 시간을 내 가지고 눈을 크게 뜨고, 육신의 눈을 크게 뜨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마음의 눈을 열어가지고 사물을 좀 보는게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은혜가 어떠하고, 우리에게 주신 복이 어떤가 카운트를 좀 해 볼 필요가 있어요.

찬송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찬송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실패와 한숨소리가 개입될 여지가 사실은 없습니다. 찬송은 '현재 어떤 상황이 전부다 완전히 좋아졌는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작하시고 그 일을 제대로 해 나가시는가' 하는 것을 보고 하는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안에서 오늘날 찬송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은 좀 환경을 무시하고, 실제 그사람이 놓여있는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좀 뭔가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것처럼 들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찬송은 그와같은 자리에서 언제나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삽을 처음뜨고 건축을 이렇게 하는 자리, 기공식입니까, 그런 자리에 가 보면은 오색연기를 피우면서 굉장히 화려하게 작업을 시작합니다. 사실은 황무지에서 말이죠. 그렇지만 옆에 보면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미래의 영광이 그림으로 딱 그려져 있지요. 앞으로 '설계해놓은 건물이 어떻게 지어질것인가' 하는 것을 옆에 붙여놓고는, 그 다음에 맨삽 하나 딱 떠는데 모두 박수를 막 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시작한 일은 그리스도 오시기 몇천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지로 부터 200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 일이 얼마만큼 진척이 되었고 얼마만큼 확실하게 진행이 될것인가' 하는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알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우리는 큰 찬송을 해야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찬송과 간증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말하는 예배시간에 노래를 부르고 찬송하는 것도 있고요. 그 다음에 간증집회다 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것들에 대해서 찬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찬송들이 힘있고 순수한 찬송이 아니라 상당히 억지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이것은 하나님의 그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성품과 그 분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하나씩 이루어져 가는 것들을 보고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 속에 있는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찬송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찬송을 하거나 간증을 하려고 할때, 물론 자기 이야기를 해야 되지요. 내가 하나님안에서 은혜받은 이야기를 하지, 남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그 내 이야기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시고 그분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셨는가?' 그리고 내안에 아예 현재 제대로 되어진 것을 선명하게 내어놓을수 없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꿈을 주셨는가, 어떤 이상을 보이시고 어떤 마음을 주셨는가' 하는 것을 말해도 이것은 아주 훌륭한 찬송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말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자기의 형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의 형편에서 어떤 좋은 것을 찾아내서 이야기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아주 형편없는 그릇인데, 거기에 수백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담긴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찬송을 뭘 해야 되겠습니까? 요강에다가 황금을 가득 담아놓았다면, 요강을 들여다보면서 요강안에서 좋은부분을 찬송해야 되겠습니까? 황금을 찬송해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죠. 그런데 우리는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안에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두셨는가? 그게 그 말씀이고, 그게 그 약속인데,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거하며 다시는 눈물이 없고 다시는 죄가 없고 사망이 없는 그러한 세계를 우리 가운데 여신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고 앉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을 먹고 있나, 내가 지금 고기를 먹고있나' 그걸 쳐다보고 있는거죠.

사람속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자기에게 어떤 것을 행하셨는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말하지 않고, 그것도 안되면 그냥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게됐다면 그것도 사실은 큰 것을 내가 얻은겁니다. 남의 것이 아니고 내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해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주님의 그 영광스러우심에 대해서 말을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자꾸 자기의 주관적인 형편과 느낌을 기초를 해서 찬송을 하려고 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을 억지로 기쁘게 할려고 발버둥치는 결과가 되게 됩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형편과 느낌이라는 것은 환경도 날마다 바뀌고요, 그 환경을 인식하고 환경에 대해서 반응하는 우리 마음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이 찬송이 일정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찬송을 보시면, 이 15장에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부른 찬송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렀다하면 이건 남자들인데, 이스라엘에 있는 지도자들이겠죠. 이 사람들이 서로 기뻐하면서 주고받은 말이 이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20절에 아론의 누나 미리암이 손에 북을 잡고 찬송을 하는데, 여자들이 쭈욱 따라나오면서 춤을 추면서 함께 찬송에 화답하는 게 나옵니다. 거기도 보면 내용은 간단하지만 결국은 똑같은 찬송을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15:21) 아주 간단하지요. 뭘 찬송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높고 영화롭다'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내가 본 바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참 대단한 분이다' 그 다음에 하신 일을 찬양합니다. '그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졌다 우리를 죽이려던 대적, 애굽 군대를 하나님이 다 처치해 주셨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한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바로 뒤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를 했는데 '그들이 사흘동안 길을 가서 물을 얻지를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만났는데, 이건 물이 너무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세에 대해서 원망을 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17장에 가보면 곧바로 그들은 물 문제로 인해서 이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강하게 모세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원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17:1,2) 하니까 백성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17:3)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 지금 하나님이 은혜를 분명히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억지로 뭔가 좋은거를 하나님께 말할려고 용쓸 필요도 없었지요. 너무도 선명한 일이 앞에 벌어졌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자기들 안에서 '육신적인 형편이 어떠한가'를 계속 주목하는 사람으로 있는한 이찬송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찬송은 가랑잎처럼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서 우리의 심령이 우리의 속사람이 그야말로 마음눈을 열어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부르심의 소망, 영광의 기업의 풍성, 이것을 분명히 볼수 있도록 해달라고 꼭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낼때 열가지 재앙을 베푸는 이런것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홍해를 건너게 한것도 포함됩니다. 또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마시게 한 것도 포함되고, 또 쓰고 못먹을 물에다가 하나님이 뭔가를 던지니까 그 물이 달게 되어가지고 마실수 있게 된 이런것들도 물론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의 형편에 언제든지 간섭하고 거기에 당신의 사랑과 당신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마음을 담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우리의 속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이 은혜들에 대해서 반응할수 있도록 눈이 열려있지 못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모일때 찬송같은 것을 물론 잘 안합니다. 노래를 안부른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참 감사하고, 모여서 참 감격하고 서로 기뻐서 '이번주에 얼마나 당신 행복했습니까?' '얼마나 복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말들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감사와 찬송을 하기는 해요. 하지만 그 속에 더 많은 것이 한숨섞인 신세타령 같은거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인 찬송을 한 후에 그보다 더 많은 인간적인 고충들을 이야기 하는줄 몰라요. 그리고 아예 그걸 동시에 하기도 하지요. 찬송을 하기는 하는데 앞뒤에 내용은 '하나님 찬송합니다' '은혜가 감사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면 '주님의 은혜로 다 잘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 내용은 뭐냐하면은 자기가 괴롭고 불안하고 두려운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찬송, 이런 간증이라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을 초라하고 아주 왜소하고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되게 됩니다. 이게 왜 그렇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거듭 주지시키고 싶습니다만, 찬송이 이렇게 힘이 없고 하나님을 오히려 비참하게 만드는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역안에서 찬송의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 안에서 찬송의 근거를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그분의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하시거나,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아,내가 너를 불러 낸 것은 너로 하여금 세상에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너는 오늘 복받은 사람이다.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고, 세상가운데서 나의 이름을 둘 영광스러운 처소로 삼겠다' 이 말을 합니다. 이 사람 가만 있다가 들은 얘기 아닙니까? 자기가 한게 뭐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을때에 사실은 그 사람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엄청난 축복과 영광이 그사람에게 퍼부어진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결국은 살아있을 동안에, 한편으로 보면 육신적으로 그 사람이 아주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영광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외로웠고 긴 세월동안 자식도 얻지 못했고, 또 그 땅이 자기 것이 실제로 되지도 않았어요. 죽을때 자기 아내의 무덤을 사람들에게서 억지로 돈을 주고 사야만 되었을 정도로, 실제로 이 땅은 그 사람 것이 되지도 않았고 자기에게서 큰 민족이 일어난 것도 하나도 없고, 단지 이삭 하나 아들이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것이 전개가 되었냐하면 정말로 찬송할만한 한 내용이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사람이 너무너무 여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데 자기 집에 종이 300명입니다. 그 사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때에, 갈대아 우르라는 것이 옛 고대 바벨론입니다. 굉장히 세상의 중심이죠. 화려한 바벨탑을 쌓고 하던 그곳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냈다는 것은 세상에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불러낼때는 세상것을 다 버리고 나오게 한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세상에서 그만한 엄청난 재물과 그만한 엄청난 부리는 부하들을 데리고 나올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가족들 데리고 자기 맨몸으로 나온겁니다. 그런데 자기집에 300명의 기르는 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군대의 힘이, 원래 군대가 아닌데, 얼마 만큼 강했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한 다섯나라 연합국 군대와 싸워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한 개인과 그 사람의 세계가 벌써 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식구라고는 자기하고 이삭 둘밖에 없던 시절에 벌써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거는 이삭도 없을 때였어요. 여러분이 아시는데로 300명의 군사를 보내서 롯을 데리고 온것은 아직 자기에게서 이삭이 나오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때에 군대를 끌고가서 자기 조카 롯을 데려오기 위해서 그런겁니다만, 하여튼 잡혀갔던 소돔의 모든 백성들과 재물을 도로 가지고 왔는데, 소돔왕이 고맙다고 '이 재물은 당신이 다 가져가세요 사람만 돌려줘도 우리는 감지덕지입니다' 그렇게 했을때 그가 말하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내가 분명히 네게 이야기 하는데, 너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조금도 듣고싶지 않다 이것 도로 다 가져가라' 아브라함은 지금 땅도 없고 사람도 없고 재물도 없고 권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이 어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굴러온 돌처럼 겨우 들어온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소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온갖 금은보화를 모조리 다 자기가 접수할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것이 적에 의해 다 탈취되었는데, 그것을 도로 찾아왔으니까. 그런데 왕이 고맙다고 돈은 또 벌면 되니까 '당신 다 가지세요' 지금 돈으로 말하면 한 1000억이나 되는 돈을, 통장째로 주면서 '이거 당신 하시오' 하는건데 '나는 니한테서 부자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 도로 줘 버렸어요.

그래서 집에 왔는데, 시험이 왔던것 같아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뭔데 소돔왕이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러면서 악수를 청하고, 소돔은 가나안 일대에서 가장 번영하고 부유한 도시인데, 거기에 사람들이 모두 나를 영웅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이리 들어와서 우리하고 잘 지내봅시다 하는데 내가 뿌리친 것입니다. 나는 지금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여기에 무슨 조직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했는가? 하는데 하나님이 딱 계시중에 나타났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말아라 내가 너의 상급이다"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자기 살아있는 동안에는 실제로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엄청난 민족이나 이런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가축도 많고 돈도 많고 종들도 많고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길 "이땅은 전부 당신거니까 마음대로 갖다가 쓰세요" 라고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법적인 소유권만 내게 없을뿐이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존경했는것 같아요. 존경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의 묘소를 사려고 할때 "돈 받고 팔다니요 이거는 선생님 마음대로 얼마든지 쓰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온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하면 말씀이 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온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꿈이 그 사람에게 요셉에게처럼 비춰진 거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때 그것을 찬송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으매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더라"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 13장, 15장 이 모든 과정속에서 하나하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전부 실제로 손에 받은 것이 없는 때에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안에 떨어졌고, 하나님의 계획이 그 사람에게 비춰졌을때 그가 그것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최소한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라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슨 찬송이냐? '설마 그런일이 어떻게 있을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적어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니까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되도 잘 하시겠지요' 최소한 그렇게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찬송이고 믿음인데요. 아브라함의 그 믿음과 찬송은 그 사람 안에 실제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지기까지는 2000년, 혹은 앞으로 수천년, 만년이 지나야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늘 여러분과 저도 지금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 있으니까 모를 일이지만, 아브라함 당대에 이미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했다고 표현하고 있지요. 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것을 기다리다가 만나고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그 근본적인 약속이 아직 물리적으로 성취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믿음안에서 찬송함으로써 자기 당대에 그 비슷하게 챙겼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이 그겁니다. 그는 나라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에게서 야곱이 나오고 야곱에게서 12아들이 나오고 그것이 불과 몇세대 지나지 않는 동안에 애굽에 내려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백만의 민족으로 실제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까지는 아브라함의 가까운 시일내에 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이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자기 집에 종이 300명 있다는 것은 뭐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확실하게 펼쳐지는구나' 하는 것을 적어도 '시작 지점'에서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들이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첫째는 영혼의 구원을 얻고, 그 다음에 육신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나중에 몸의 구속을 받겠지요. 하나님과 더불어서 우리가 앞으로 얼마만큼 영광스러운 생활을 할지는 우리가 이 머리로는 잘 측량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약속이 우리 생활속에서 자그마한 부분부터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에게 확신을 줄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속에서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열고서 하나님이 어떤일을 해 나가시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지켜보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당대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고스란히 챙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인격이 변화된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 살아있는 동안에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그 영광스럽고 그렇게 인자하고 그렇게 깊이있는 성품을 우리가 다 받아서 우리가 그렇게 변할까' 사실은 의심스러워요. 우리가 이 죄있는 세상속에서 계속 시달리고, 시험을 당하고 우리 육신이 영혼과 싸우고 이렇게 하는 구조속에서 온전하게 그렇게 될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가지고 한부분 한부분씩이라도 변화를 시켜나갈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걸 붙들고 찬송을 하는겁니다.

금방 어떤 십원짜리 욕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뭔 얘기를 하다가 그만 평소의 습관이 나와가지고 쌍욕을 확 해 버렸다고 합시다. 형제간에, 부부간에, 혹은 엄마에게 확 대들었다고 합시다. 부끄럽지요. 그럴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것이고,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영광과 축복에 대해서 말하기는 어려울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늘 우리 마음에, 그때에 벌써 세상과는 다른 어떠한 것들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게 뭡니까? 벌써 말할수 없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했을때 우리는 숯불을 얼굴에 뒤집어쓰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아! 내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하는가' 당장에 속에서부터 칼날이 날아 들어오게 되지요. 그럴때 우리는 그 말을 한 직후에도 자기를 의지하거나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가지고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금방 더러운 말을 하고 욕을 해 놓고는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진실한 입술을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양순하고, 우리를 온유하고, 우리로 화내지 아니하고, 우리로 더러운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인생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지으셨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그것은 확실합니다' 라고 내가 말을 할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마 육신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 일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겁니다. 자기의 느낌이나 자기의 현재의 좋은 모양을 챙기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내속에서 이루시는 역사 즉 성령이 금방 내가 더러운 말을 했는데 금방 따라와가지고 '어떻게 네가 그런말을 할수 있느냐' 라고 찌르시는 이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바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그 찬양이 그냥 '회개하게 하시고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해서는 안되고요. 뭐라고 말하느냐면 '더러운 말을 할수 없는 인간으로 나를 지으신 것을 찬양합니다' 이말을 바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육신의 형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찬양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니가 지금 어떤 모양이냐?' 이걸 말하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어떻게 영광스럽게 하셨는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몇억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나에게 주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그 돈을 줬다 하더라도, 내가 굶고 있을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것을 가지고 빵을 사먹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면 '나는 괴롭다' 말할수 있느냐 이겁니다. '나는 배고프고 곤고한 자다' 말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내가 믿음이 없거나 내가 어떤 다른 사정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것을 누리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신것은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살지못하면 우리인생은 사실은 비참해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입니다. 그런짓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실이에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해야 되는데,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으로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못사는 것은 우리책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그 문제는 뭡니까? 하면 되는거에요. 내가 지금 돈을 받았는데 여전히 배고프다 그럼 가서 사먹으면 되지 그런데 왜 쫄쫄 굶고 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느냐 그말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는 것을 뭐할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건 내가 한게 아닙니다. 내가 자살한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살렸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입니다.

내가 현재 바보같이 헛된 영광을 구하여서, 언니하고 동생이 서로 앉아가지고 큰 파이를 먹겠다고 밥 한숟가락 더 먹겠다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지금 싸우고 있다고 합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더라도 그사람은 그걸로 싸울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지금 잠간 바보짓을 여전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바보짓을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일을 그만두기도 해야 되겠지만, 먼저 그 바보짓을 한 직후에라도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런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싸우지 않는 사람이 된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이 큰 일을 이루신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도 돈만 챙기다 왔고, 오늘도 세상에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작은 영광과 칭찬을 내가 사모하고 그런것에 붙들려 있다가 온 사람이지만, 그것은 내 길이 아니고 그것은 내가 하지 말아야 되는건데 내마음에 동의하지 않는건데 내가 쪼다라서 끌려다니다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신 역사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런데 흔들리지 않는 인생으로 세우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찬송을 할수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야합니다. 매일 그것을 하는사람은 실제로 진리가 그 사람을 자유케 할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송한 내용은 훌륭한 찬송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근본적인 은혜, 정말로 찬송을 해야 될 그 내용을, 다시금 새롭게 하고 붙들고 하는 것이 빠져있는 찬송입니다. 아브라함은 죄 지으러 갔을때에도, 딱히 죄지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 그것을 피하여서 하나님이 살아라 하는 곳을 벗어나서 딴데로 갔습니다. 딴데로 간것이 애굽으로 간거고, 나중에 이삭도 마찬가지죠. 이삭은 블레셋으로 갔지요. 이것은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죄 지으러 갔고 실패하러 갔는데도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약속이라는 것은 그대로 작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도 복받고 거기서도 잘되어 가지고 도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할 때 '내 형편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거에요. 내가 지금 똥통에 빠져있어도 그래서 아무 영광이 없는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영광과 축복과 빛을 비추시고,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깨끗함으로 옷입히신 이 사건,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아는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이삭을 죽이라고 하는 황당한 시험이 왔을때에도 그 사람은 속으로 걱정을 안하는 것입니다. 왜 걱정을 안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이 약속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죽으면 다시 살려내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쓰겠지, 죽을려고 할때 다른 수단을 써가지고 죽음을 면하게 하든지, 아니면 죽어도 다시 사는 법이 있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사람안에서 인생이 항상 찬송이 되지요. 항상 안식이 되지요. 바울은 모든 환경속에서 자기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환난과 풍파가 없는것이 아니고, '형제들이 그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아니하노라"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많은 환난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고 살 소망까지 다 끊어질 정도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노라"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그것이 하나도 문제가 안되고,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늘 이런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안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선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약속“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8)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것이라”(레26:11,12)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하고 또한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37:26,27) 이 약속들은 각각 다른 곳에서 한 약속입니다. 어떤 것은 레위기에서 나온것이고, 어떤 것은 에스겔서에서 나온것이고, 또 어떠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달라도 그분의 처음 세우신 계획을 사람들 안에서 차곡차곡 실천해 나가고 실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최대의 약속, 그리고 근본적인 약속은 뭐냐하면 우리를 하나님안으로 끌어 들여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 다했지 않습니까? 가난한게 문젭니까? 외로운게 문젭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지 못하고 우리에 대해서 입에 올리지 않는것이 문젭니까?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3-5) 이것은 끝에 되어진 일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것을 말한것은 역사가 이대로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아직 이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했지만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서 이 약속을 벌써 받았고, 그 다음에 이것을 이루어가시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솜씨를 지금 체험하고 있는중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을 해봐야 절대 전부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건짐받고, 만나를 먹고, 물없는 데서 물마시고 한다고 해서 그들의 구원이 그 사람들 안에서 온전히 실행된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뭡니까? 그 사람들 하나님과 같은 종자로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너무너무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배고픈 자리에서 하나님이 밥 먹여주는 정도 가지고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까? 턱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병든 여러분들이 좀 고침을 받고, 조금 외롭고 심심한 사람들이 사람 하나 소개받고, 좀 배고픈 사람들이 밥술 좀 뜰만하게 되었습니까? 그것도 대단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함께 거하셔서 여러분과 하나님이 한사람이 되고, 한집이 되고, 한 나라가 되어가지고 그 안에서 같이 다스리고 같이 즐거워하고, 사망의 그림자도 없는 그런 세계안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영광과는 비할수 없는 거지요. 현재 우리안에서 하나님이 조금씩이라도 하신것들, 한게 없다면 앞으로 기다리세요, 아직도 이루어진 것이 제대로 없다면 그걸 기다리시고, 다만 하나님의 그 약속만을 생각하고 되씹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이 세계를 약속하신 것들, 이것을 우리가 계속 말을 합시다. 그게 믿음이고, 그게 찬양이고, 그게 감사입니다. 이말을 계속하십시다 "하나님은 참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자기 하신 약속을 착착 잘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내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이 사탄에 의해서 방해가 되거나 또는 자기가 저항을 하거나 해서 지지부진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싸워야지요. 싸우고 하나님께 졸라야지요. "성령이여, 내안에서 당신의 일을 속히 이루십시오" 그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고 '나는 니가 함부로 건드릴 몸이 아니다 나는 귀하신 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될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부가 될 사람이고 그의 집이 되고 그의 그릇이 될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과 불가분리의 사람이니 네가 어떤것을 가지고 와도 소용없으니까 사망이든 칼이든 기근이든 무엇이든지 나에게 와서 말하지 마라'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와 세상을 대하여서, 육신의 정욕에 대하여서 우리는 이것을 다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대하여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도 또한 세상의 그런것들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날마다 말을 하는것입니다. 이 찬양을 하시고 이 간증을 하실때에 여러분이 여러분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금방 이 “쌍놈아” 하고 욕을 했다해도 관계없어요. 그거는 사람이 바보라서 하는 짓이고, 금방 가난해가지고 어디가서 '한푼줍쇼'하고 사람에게 구걸하고 왔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것은 육신에 속한 일이고 그것은 우리가 멍청하고, 우리가 가난하고 우리가 죄의 몸이고 사망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때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1) 다윗이 온 세상의 대적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을때, 그 시를 지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형편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죄의 종으로 허무한 모습으로 있을때조차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찬양들이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붙들고 있는 손을 결국은 놓게 만들 것이고, 그가 우리 가운데서 뭔가 획책하는 것들을 미리 다 예방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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