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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싸움 (출17:8-16) / 녹취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17:8-16)

아말렉과의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지난시간에 보았습니다. 이 아말렉과의 싸움은 성격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할때, 사탄이 원수가 우리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그러한 성격의 싸움이라 그랬죠? 사탄은 자기의 영역을 잃게 될까 항상 두려워하고 또 조심하고 우리에 대해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날을 세워서 싸움을 계속 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마음이 좋아가지고 혼자 생각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가 또 지금 현재 마음에 진리를 향해서 앞으로 가고 있고, '앞으로 잘 하겠다' 이 생각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것일뿐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늘 찾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냥 바보처럼 가만있는 사람들도 삼킬 판인데, '자기나라를 좀먹고 자기를 죽일려고 하고 자기를 완전히 지상에서 도말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세력을 어찌 환영하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겠는가?' 이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숙명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절대 피할수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죄와 더불어 또 모든 악의 세력과 더불어서 싸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싸우는게 아니에요. 내가 싸우는게 아니고 마귀가 먼저 싸움을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 예수를 믿으면 이러한 예수를 믿는것에 대한 반응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올것을 기대하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데 '사람들이 이전과 나를 똑같이 대해준다'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여전히 나를 좋다하고, 나를 칭찬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까이 두고싶어한다'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때에 그분이 하늘에서 본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게 하신 일을 안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주님이 인정으로 어떤 죄인들이나 세상의 거짓된 어떤 길에 대해서 그냥 덮어놓고 입을 다물고 싶어도 그것은 안되는거에요. 부득이 죄인들을 책망하고 세상의 거짓된 길을 까발리고, 예를 들자면 성전에서 소나 양을 파는사람들이나 돈을 바꾸고 장사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을 볼때, 주님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뒤집어 엎어 버렸다는거지요. 이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부득불 그 속에 있는 의와 진리가 그렇지 않은 어떤 것들을 볼때 그와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그런거지요.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의의 길을 좇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사 나 자신이 똑같은 죄를 범하더라도 어떤 다른사람들에게서 죄가 나오는것을 볼때 우리는 매우 거북합니다. 어떤 불의와 협잡과 유치하고 아주 간사한 이런것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런것을 볼때 인간적으로 말할것 같으면 그냥 그런사람들에게 욕을 마구 해주고 싶고 싸우고 싶고, 교회형제들 안에서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그를 당연히 멸시하게 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는 건 뒤의 문제고 우선 속이 불편하게 되는거지요. 이것은 우리가 어쩔수 없는 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저항을 불러오게 됩니다. 세상에서 저항을 불러오고 교회안에서 형제들간의 관계에서라도 마찬가지고요, 그 다음에 자기자신안에서 어느때는 성령의 욕망을 가져서 선한 뜻을 품고 그런 것들로 가슴이 벅차지만, 어느때는 육신의 욕망에 이끌려가지고 그냥 의를 저버리고 그냥 정욕대로 하려고 하고 이기적이고 악한 생각과 경쟁하는 마음을 품어서 속이 부글부글거리게 되고 그렇게 되지요? 그럴때 우리는 그런 자신속에서도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한편으로는 평화를 가져오고 세상에서 고요하고 단정한 생활 이것을 사는 사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수 없는 전사입니다. 어쩔수 없는 싸움꾼이라고요.

이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버가모 교회라고하는 교회가 나옵니다. 이 버가모교회는 세상한복판에서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모든 죄와 이 신자들이 거의 어깨를 맞닿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속에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교회복판에 죄가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계2:13) 라고 그랬습니다. 사탄의 위라는 것은 보좌를 말합니다. 사탄의 보좌가 있는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까지도 완전히 타락해가지고 교회안에서 겨우 가물에 콩나듯이, 예수를 제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고는 몇명밖에 찾아볼수 없는 그런 가운데 교회가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충성된 사람을 찾았는데, 그 충성된 사람의 이름이 뭐냐하면 ‘안디바’라는 것입니다. ‘안디바’라는 것은 헬라어의 뜻이 ‘모든 것을 반대하고 싸운다’는 뜻입니다. 안티(Anti-)라는 말이 있지요. 안티라는 것은 반대하는 세력이나 사람들을 이야기 하지요. 인터넷에 안티사이트가 있는데, 그 안티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안티파스, 사람 이름이 안티파스라는 것입니다. 안티파스, ‘모든 것을 반대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괴롭고 좋지않은 위치입니까? 그러나 할수없다 이것입니다. 세상환경이 우호적이고, 세상환경이 하나님 말씀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상황이면, 이 사람은 아무것도 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 한복판까지 다 썩고 바로 옆에 있는 모든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거짓된 생각에 다 물들어 있다면 나는 이 세상 모든사람과 다 싸울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이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우리가 낭만적인 사람은 되겠지만,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사탄에게 잡아먹히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부드럽지만, 그리고 혈과육에 대해서 싸우는것이 아니기때문에 겉으로 볼때 우리가 왈가닥하고 시끄럽고 소리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 이런 영적세력과의 이 싸움에서 우린 적어도 단호하고도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나가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우리가 주목해서 볼일은 ‘이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오늘 크게 볼때 두 가지의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가 산위에 올라가고, 여호수아는 (이때부터 모세의 실질적인 후계자나 마찬가지로 모세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이 여호수아인데) 전쟁터에 가서 직접 칼을 들고 싸웁니다. 그래서 모세가 산위에서 싸움하는 현장을 내려다 보면서 손을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힘을 얻어서 싸움에서 이기고, 만약에 이 팔이 내려오게 되면 그 싸움은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그런싸움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앞에 출애굽기 14장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홍해를 건너게 될 때 하나님이 그 뒤의 이스라엘을 추격하여 온 애굽군대와 싸우시는데,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4) 뭐라고 그랬습니까?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싸움은 손도 댈 필요가 없어요. 손 안대고 코푼다는 식으로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이런 싸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싸움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그 능력을 힘입어서 나가서 직접 싸워야 되는 그런 싸움입니다.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출17:9) 전쟁이라는 것은 죽을수도 있잖아요? 전쟁에서 어떻게 단 한명도 가시에 찔리는 일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이제 믿음이 있고 용기가 있고 혹시 하나님을 위하여서 싸움을 하다가 생기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뽑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들중에 죽거나 다친사람도 있을거에요.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을 봐야되는 것이니까, 전체적으로 볼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싸움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싸움은 사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다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한편으로는 인간의 속성을 볼때 이런 싸움이 더 실감나는 흥미진진한 싸움이 될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것은 이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두가지가 있는데요. 우리의 싸움이 두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전적으로 기도만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역사하시도록 사람은 완전히 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찬송으로 대응하는 싸움입니다. 또 하나의 싸움은 직접 나가서 우리가 싸움현장 복판에, 일선에 서가지고 어떻게 보면 마음에 두려움과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마음을 다잡고 의지를 발휘해서 직접 싸우는 이런 종류의 싸움입니다. 이 두 종류의 싸움은 우리삶에서 딱 어느 한가지만 나오는게 아니고, 항상 때를 따라서 같이 나옵니다. 어느것이 더 좋으냐? 그런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고, 둘다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는 것을 지켜보는것은 어떤 장단점이 있느냐하면 (사람이 만약에 믿음이 없으면 둘 다 이문제가 다 어렵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둘 다 아주 재미가 있어요.) 장점으로 말할것 같으면 어떤 장점이 있느냐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거니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다만 지켜보고 찬송만 하면 되는것이니까. 그런데 단점은 뭐냐하면,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만약에 우리가 확고한 믿음위에 서 있지 못하면 그 싸움은 일이 도대체 이렇게 풀려나갈 것인가를 실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손밖에서 벌어지는것이니까. 그래서 이것은 어떻게 보면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눈감고 그림을 그리는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그려지고 있는지 사실은 이게 굉장히 불안하고 불확실한 것처럼 느껴질수가 있는 부분이죠. 눈감고 우리가 절벽을 가는것과 똑같아요. 눈 딱 가리고 절벽을 가는것과 같습니다. 굉장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요. 나는 지금 일이 필요한데, 지금 전쟁이 났는데 적군이 바로 앞에 와 있는데, 나는 전혀 아무 소리를 지르는 것조차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는겁니다. 큰 믿음이 필요하죠. 이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실제로는 그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하는데 있어서 더 화끈하고 좋지요.

그 다음에 오늘 여기서처럼 “사람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 직접 싸우는 것입니다. 직접 싸우는데 뭐하느냐면 뒤에 기도의 배경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두 팀으로 결국은 이 싸우는 부대를 둘로 나눌 수 밖에 없어요. 하나는 직접 일선에 가서 야전에 가서 싸우는 사람이고, 또 한팀은 뒤에서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이 지원은 다른게 아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직접 싸우는 것도 사실은 알고보면 내가 직접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어떤 다른사람들을 보내가지고 나의 삶에 어떤 당면한 문제들 속에 손을 쓰고 있습니다. 내 아는 어떤 사람이나 혹은 나하고 관계없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 보내가지고 거기서 문제를 풀게 하시든지 해가지고 누군가 하고 있는거지요. 내가 안나간다고 해서 저절로 하늘에서 손이 내려와서 문제를 푸는것은 아닙니다. 사람속에서 다 벌어지지요. 결국은 그렇게 보면, 현장에서 일하는 팀 하나하고 뒤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붙들면서 하나님과 싸움하는 팀, 이 한팀이 늘 같이 있어야 됩니다. 이 두 팀이 늘 있어야되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싸움의 방식이 이런차이를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모든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누군가가 앞에 다 싸워놓은 것이 있어서 내가 갖다 쓰기만 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은 우리속에서 우리와 함께 직접적인 싸움을 싸워나가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접적인 싸움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앞에 이루어 놓은 그 싸움의 배경, 앞에 이루어놓은 승리의 배경이 있고 싸우는 것이지요. 그 다음 지금도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할것같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그랬습니다. 성령님은 그런 백그라운드를 뒤에 두고서 우리를 데리고 직접 싸움터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싸움이든지 간에 결국은 하나님이 이 싸움의 주체라 하는 사실, 지금 이 싸움 다하고 난다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단을 쌓고는 이름을 짓게 했는데, 이것은 바로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었죠. ‘여호와 닛시’라는 것은 뭡니까?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다’ 하나님이 나의 깃발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다 하고, 마귀와 싸워서 그 거짓말과 모든 것들을 다 분별해내고, 그런것들을 우리가 다 물리치고 이런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고 그럴 힘이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우리 제일앞에서 대장으로 나가서 선봉에서 그 모든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끝났습니다. 지금도 계속되는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싸움은 끝났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평강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성령의 싸움이 지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기초하는 이 성령의 싸움, 이 싸움은 우리가 몸 아끼지 말고 겁내지 말고 나가 싸워야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 사실은 두렵지요. 우리의 졸렬한 인품, 인내도 없고 까딱하면 감정에 휘둘려가지고 좋은말 할려고 갔다가도 싸움판이 벌어질수있는 그런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참 두려워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나보다 더 이 일에 적합한 어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내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항상 있습니다. 흔히 교회 일반적인 신자들 같은 경우에는 무슨 전도를 하러가든지 무슨 상담을 하러 가든지 그런일이 있으면 전도사님을 데려가든지 목사님을 데려가든지 이렇게 하고 싶지요? 이것은 뭡니까? 싸움을 정면으로 부딪혀가지고 할만한 그런 용기가 없는거지요. 그렇게 하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지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피할 수가 없어요.

처음에 홍해를 건너올때는 하나님이 그냥 자신이 직접 다 처리를 했습니다. 바닷물에 다 수장시켰지요. 그러나 지금 아말렉을 만났을 때는 “너희중에 사람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싸우는것은 아니고,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할 때 ‘내가 그 속에서 역시 역사하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는 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는데, 그 내용은 너무 많아서 우리가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우리는 우리자신하고도 싸우는 판에 지금 누구하고 안싸우는 사람이 있는지 거꾸로 세는 편이 빠릅니다. 모든 사람과 싸우게 되는데, 그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첫째 기억하십시오. 사람하고 싸우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남편하고 싸우거나, 아내하고 싸우거나, 자식하고 싸우거나, 혹은 이웃하고 싸우거나, 손님하고 다투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때 그러한 싸움이 그 사람들과 다투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싸움의 첫째 원칙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랬습니다. 사람하고 싸우면 이미 이것은 패배한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 어떤 사람이 나를 해롭게 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속이 시끄럽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할때 그를 그렇게 만든 그 배후의 세력하고 싸워야 됩니다. 그것이 마귀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마귀와의 싸움은 우리가 싸우는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확실한 승리를 우리가 믿음으로 갖다 쓰고, 그것을 거기서 선포하고 우리가 그 믿음을 발휘해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고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길수 있습니다. 진리로 영적인 이 싸움을 싸우는 겁니다.

특히 이 찬송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이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것을 우리는 늘 염두에 두고 그것을 모든 우리의 싸움의 현장에서 실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이라고 하는 유다의 경건한 왕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 사람 나중에 보면 아합과 연합을 해서 하나님께 아주 많은 꾸중을 들은적도 있는사람인데,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던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누구하고 의지하고 연합하는 그런 어떤 성향이 있었는데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사람이 그러한 약함과 두려움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부분이 뭐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좋게 생각하고 늘 가까이 하려고 했지만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이런 마음이 일단 이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스라엘에서 손꼽히는 몇몇 경건한 왕중에 들어가는건데, 이 여호사밧때에 모압사람들과 암몬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몇몇 세력들을 더 연합을 해가지고 유다를 치러왔습니다. 그럴때 그가 굉장히 두려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가서 기도를 하고, 유다백성들에게 전부 금식을 하라고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를 합니다.

여기 성경 몇구절을 읽어보면요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대하20:6) 무슨 말입니까?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늘 해치려고 하는것은 이것은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를 괴롭히는 건데 왜 이런 상황에 하나님이 손풀고 가만히 있습니까? 이 얘깁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대하20:6) 저것들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묻는것입니다.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대하 20: 6)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대하 20:12,13) 이건 뭡니까? 이것은 전쟁이 났는데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운겁니다. 아이들하고 여자들을 다 꺼집어 낸겁니다. 군사들이 무장을 하고 나온게 아니고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을 다 꺼집어 내놓고는 ‘하나님 우리가 이렇습니다’ 이 얘기를 하는겁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다윗의 표현대로 하면, ‘내가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것 하나님께 드릴제사 이것은 상한심령 뿐이다’ 라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수없다는 얘깁니다.

그럴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야하시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다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대하 20: 15,16) 지금 이 여자들하고 애들밖에는 실제로 전쟁할만한 제대로 된 사람들도 없어요.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때 그랬던것 같아요. 그런데 어쨌든 전쟁터에 나가라는 겁니다.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 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대하20: 16) 그러니까 적이 오는 현장으로 복판으로 나가라는 겁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대하 20:17) 항오를 이루고 선다는 것은 옛날 군대가 전쟁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들이 미국 독립전쟁이라든지 옛날 나폴레옹군대하고 영국군대 싸움같은 것을 하는 영화나 사진같은 것을 보면 줄을 주욱 지어 서 있지요. 일제히 앞에 있는 사람들이 총을 쏘거나 활을 쏘면 한쪽에 있는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주르륵 죽든지 자빠지고 그 다음에 이쪽에서 또 하고 하는식으로 무슨 게임하듯이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저쪽에 줄을 주욱 서 있고 ‘와~’하고 함성을 지르면, 이쪽도 애들하고 여자하고 그것밖에 수준이 안되는 사람들도 줄을 주욱 서가지고 마주 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한번 보세요. 피하는게 아닙니다. 손풀고 노는 것은 아닙니다. 정면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싸움은 오늘 여기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이 싸움, 여호수아는 직접 칼들고 나가서 싸우고 모세는 뒤에서 기도하고 있는(모세뿐 아니지요 아론과 훌이 팔을 받치고 있는) 이런 협동작전, 이것을 한 장소에서 섞어놓은것 같은 이런 상황을 보입니다. 어떻게 하는가? 전쟁터에 이 사람들이 다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터 복판에서 이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여호사밧이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엎드려서 경배한 다음에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20:19) 그리고 여호사밧이 그 찬양하는 부대를 앞에 세워놓고서는 뭐라 말하는가 하면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찌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대하20:20) 이제 더 확실한 조치를 취하는데 그 조치라는게 이겁니다.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대하20:21) 그러니까 전쟁은 안하고 사람들을 전쟁터 한복판에 딱 갖다 놓고는 뭘 하느냐면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그의 사랑과 그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항상 우리의 죄가운데서도 지켜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사실은 이때에도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죄악가운데 빠져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사람들이 마온사람들과 함께 쳐들어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입니다. 안그러면 사실은 그들이 얼씬거리지도 못해요. 아까 여호사밧이 기도할 때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의 신이 아닙니까? 이방나라들을 다 잡고 있는게 아닙니까?’ 아니긴 왜 아니에요 잡고 있지요. 잡고 있는데 그들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 가서 몽둥이질로 몇 대 때리고 오느라’ 하고 온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말을 하는가? ‘내가 잘했습니다’ 이게 아니고요. ‘하나님은 언제나 잘 용서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사랑이 많고 언제나 자비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자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로 나가는 겁니다. 은혜를 붙잡는 태도를 가지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실 이스라엘가운데 뭐가 없다 할지라도 그 입을 통하여서 시인하고, 그 입을 통하여서 그것을 표현하고 선포할때 뭔가가 그 말한대로 생겨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크나큰 특권입니다. 그렇게 찬송할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결국은 이 군대를 다 격퇴시킬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나님은 참 잘하십니다’ 이말을 한건데,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20:22) 하나님은 일하시고 사람은 찬송하는 이것이 우리삶의 원리입니다. 어느자리에서든지 그리스도는 싸우시고 우리는 그를 믿고 찬송하는 겁니다.

시편136편을 보면, 찬송을 하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안에서 현재 그것이 부족한데도, ‘하나님이 이전에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라는 것을 찬송하는 내용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하나를 읽어보면, 시편 136편 24절부터 보면,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24,25) 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외부의 적들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할때에 한 찬송입니다. 그럴때 그는 뭐라고 찬송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건지신 것을 감사합니다’ 왜? 이전에 건지신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감사하며 찬송할때에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 실제가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누가 배고픈 사람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주리는 사람이 있을때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풍부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찬송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내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색한 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항상 풍족히 주시고 부족함없이 우리인생을 이끌어가신다는 그 마음을 내가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 찬송이 마귀로 말미암는 모든 훼방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수도 있고 병들게 할수도 있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마침내 하나님을 원망하고 삶에 대해서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스스로 죽어가는 그런자리에서 우리를 건질겁니다.

오늘 여기 이 싸움을 다시 한번 우리가 생각합시다. 모든 싸움은 결국은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이루신 이 승리들을 우리가 지금 입으로 다시 읖조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늘 말을 해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말을 하시고, 형제들이 함께 모였을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과거의 것이라도 계속 말해야 됩니다. 이것은 뭘 말하느냐고 하면 과거에 은혜를 베푸신 그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분이시거든요. 오늘도 그런성품을 가졌고 그는 영원히 우리 아버지란 말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잘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이 뭐냐하면 우리가 그런 아버지가 금고를 열고 우리에게 얼마를 퍼줄까하고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돌아서서 딴데가서 없는실력에 푼돈이라도 벌려고 도둑질을 하고 사람들을 해치고 하는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충분히 돈벌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유하신 아버지가 금과 은을 쌓아놓고 송아지를 잡아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때, ‘우리는 그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내가 아버지께로 갈 때 절대 아버지가 나를 싫다고 하지 아니하실 것이고, 내가 그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더 축내고 아버지의 것들을 더 먹을때 우리 아버지는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라는 것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찬송은 그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승리다’, ‘여호와는 우리의 깃발이다’,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고 하나님이 나의 안전이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보장이다’ 이것을 끊임없이 우리가 말을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 지금 두가지를 계속 반복해서 얘기 하는데, 여러분들 이것을 헷갈리지 마시고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싸워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저절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나는 가만있는데 어떤 상황들이 저절로 호전되거나 저절로 좋게 전개되거나, 이렇게 되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닙니다. 젖먹이때는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젖먹이때는 하나님이 ‘너희는 서서 가만히 있어라’ 하고 홍해를 이렇게 다 갈라주시고 그 다음에 ‘건너가라’ 하지만, 나중에 요단강때는 사람이 들어가야 물이 갈라집니다. 하나님을 체험할수 있는 나이가 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맛볼 뿐아니라 그런것들을 입으로 찬양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속에 드러나게 되어야 할 그때에는 우리는 입을 벌려 찬양을 해야되요. 찬양을 해야되고 우리의 마음을 넓혀가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속에서 이전보다 더 확대되도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역을 우리 입술로, 입술의 찬송으로 넓혀나가야 합니다. 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원을 주셨다면 오늘은 만원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5만원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찬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5만원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네 입을 넓게 벌려라’는 말씀이고, ‘네 장막터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어떤 탐욕을 가지고 헛된 것들을 자꾸 꺼집어 내고 그런것들을 발설하는 것을 통해서는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비하신 그 모든 의와 하나님의 예비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예비하신 큰 구원,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능력을 우리입으로 확대해 나가고 점점 그런것들을 더 꺼집어 내어가지고 하나님이 감추어 놓았던 것까지라도 모조리 다 우리가 입으로 자꾸 떠드는 바람에 밖으로 이렇게 다 나오지 않을수 없도록 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상가운데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찬양을 아껴서는 안되요.

그리고 이것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 사망과 쓰러지는것 무너지는것 이런걸 말하면 안되요. 그런걸 말하는 순간 마귀는 자기의 영역을 확대해 갑니다. 자기의 나라를 세워갑니다. ‘우리남편은 쪼다야’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머지않아 ‘쪼다’가 될것입니다. 자식을 보고서 ‘빌어먹을 놈아’ 할때, 그는 빌어먹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무슨 마법적인 그런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마귀가 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축복한다고 해서 다 축복이 되겠는가?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게 아니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축복을 할때 사람을 잘되게 하고자 딱 기다리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축복을 하면 축복이 되는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저주를 할때, 내가 저주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언제든지 죽일려고 도사리고 있는 마귀가 항상 사람곁에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로 사람을 죽일수도 있고 살릴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라는 것은 그냥 말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 정사와 권세 바로 악한 천사들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이 옆에 손을 받쳐가면서라도 반드시 유지해야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살아계시며 전능하시며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손을 들어서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 손을 든다고 해서 전쟁을 이기는데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찬송을 표시하는 손입니다. 그래서 ‘여기 딱 앉으세요’ 하고는 돌을 딱 갖다 받치고는 그 다음에 두 사람이 손을 딱 받치고는 절대로 안내려오게 하는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개인삶과 가정에도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뒤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것과 없는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서 서로 기도하십시오. 우리안에서 앞에 달려가는 형제들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얻어 먹어야 되고, 그 사람들을 통하여서 우리가 힘도 얻어야 되고, 그래서 남편이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이렇게 할때 더 잘 달리도록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것처럼 더 격려하고 더 돈 잘벌어오세요 더 건강하세요 하는것처럼, 그 사람들이 영적인 능력이 강화되도록 앞에 달려가는 사람을 위해서 서로 기도해 줘야되고, 그 다음에 뒤에 처져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앞에있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기도해야됩니다. 그때 그 기도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부자이시고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데 저사람은 왜 저렇게 쩔쩔매는가? 저 사람들은 왜 쫄쫄 굶고 있는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 마귀가 우리 약한 자들 안에서 여전히 이렇게 가난하고 곤고한 이런상태로 그냥 붙들어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금 즉시 나서서 팔 걷어붙이고 역사를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우리가 하는겁니다. 그렇게 할때에 가난하고 연약하고 아직 생명이 미미한 사람들이 먹고 팍팍 크는 것입니다. 본인들도 삶의 의지가 있어야되요. 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것은 절대로 피할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노래부르는 성가대가, 노래하는 찬송부대가 군대 앞에 딱 서서 적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싸움이든지 피할수 없다는 것이니까 우리자신들이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기도하게 해야됩니다. 본인이 기도하시고, 젖먹이같은 그런 신자라 할지라도 본인도 의지를 내가지고 예수를 찾고 그렇게 하도록 우리가 한편으로는 조치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기도로 쎄게 밀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중에 찬송을 부를때보면 입만 벙긋벙긋하고 찬송을 안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전혀 찬송을 안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사람들은 그 영적인 생명이 성장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서 흘러나올때 자기것인 것처럼, 오늘 내가 죄 짓고 왔거나 집에서 두들겨부수고 싸우고 온 부끄러운 이전 시간을 보냈더라도 지금 이시간에 하나님 말씀이 흘러나올때는 마치 내가 그 겸손과 온유와 사랑과 이런것들을 내것으로 소유하고 있는사람처럼 막 말을 하는겁니다. 그렇게 말을 하시고 그 다음에 모든 하나님의 이루신 승리에 대해서 우리는 침이 마르도록 계속해서 칭송하고 계속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 이러한 적극적인 생명을 향한 의지를 찬송으로 표현한다면 머지않아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말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그대로 될것입니다. 얻는자는 언제든지 두드리는 사람들, 찾는 사람들이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든 승리를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표현하십시오. 이 찬송은 뒤에서 배후에서 하고, 본인도 마음안에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놓치지 않고 표현되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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