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과의 싸움 (출17장) / 녹취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17장)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만나를 얻고 또 밤에는 매추라기가 내려와서 양식을 다 먹을수 있게끔 이렇게 하는 은혜의 체험을 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음번에 모자라는 것이 물이죠. 그래서 물이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앞에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죄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특별히 못된 짓을 하고 못된 생각을 하고있는게 아니고,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나타나는 양상을 보면 이게 분명히 나쁜거지요. 아주 죄고 악하고 아주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볼때 보기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어가보면 다른게 아니고 두려워서 그런겁니다. 두렵고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요. 우리가 가정에서도 보면, 좋은사람이라 하더라도 건강이 약해지거나 경제적으로나 혹은 여러 가지 사람사이에서 심한 압박을 받든지 해서 그렇게 사람이 눌리게 되면, 그 좋은 사람이라는게 좋게 유지가 안되지요. 마구 자주 화를 내고 마구 짜증을 내고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앞에서 참 죄가 많다는 것은 그런겁니다. 그래서 속에 여유가 있어야 됩니다.
어쨌든 예절이라는 것도 우리가 흔히 하는말로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 는 말이 있는데, 배가 불러야 그 다음에 이런거 저런거를 둘러볼수 있는, 그래야 그때 보인다는 말이죠. 배가 불러야 되는데, 문제는 배가 부르고싶지만 안되는걸 어떻게 하느냐? 우리에게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겁니다. 우리 부모에게서 나올때 맨몸 하나만 달랑 가지고 나왔지만, 하나님이 주셔서 우리로 살게하신 것을 알지요. 그러면 여유가 없을때에도 그 생명의 여유를 자기속에서 산출할려고 억지로 애를 쓸것이 아니고, 우리를 부유하고 넉넉한 세계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되요, 별수가 없어요. 우리가 여유롭고 사람들 가운데서 보기좋은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니고, 못되지 않고, 사람이 볼때 품위가 있고, 여유롭고, 그래서 가까이 하고 싶고 그런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를 믿어야 되요. 별수가 없어요.
이 믿음이 없는 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양상이, 이것뿐 아니고, 물 뿐 아니고, 40년동안 혹은 그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여러 가지 트라블(trouble)을 겪게되고, 만들어내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사람들에게 언제나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그들 곁에 계시고, 그래서 눈을 들어서 그저 위를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충분히 이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라는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계속 그겁니다. 사람은 계속 불안하고 답답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가운데서 제일 쉬운방법,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제일 쉽고 제일 간편한 방법으로 그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수있도록 항상 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모세보고 그 지팡이를 들고 내가 인도하는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느냐하면, 호렙산에 큰 바위 위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 바위에서 하나님이 앞에 서 있을테니까 모세더러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바위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모든 지도자들이 보는앞에서 맨땅도 아니고 습지도 아니고 바위, 넓직한 이런 바위를 지팡이로 두드리죠. 그럴때 물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겠습니까? 바위에서 어떻게 물이 나겠습니까? 나무꼭대기에 올라가서 고기를 낚고 하는 것과 똑같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 답답하니까 이런수를 쓰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 하는것을 하나님이 감안하고 이런 쇼킹하고 자극적인 방법을 쓰는 겁니다. 이걸 보고 ‘걱정하지 마라’ 하는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큰 희생입니다. 이 지금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것은 큰 희생이에요. 무슨 희생이냐 하면요. 우리가 일상 삶속에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것들이 지금 뭐가 있는가 이렇게 살필때, 우리의 생각이 병들어있고, 그런 생각이 병들도록 하나님께서 자꾸 기적을 일으켜가지고, 자꾸 쇼킹하고 놀라운 일만 벌려가지고 자기 살아계심을 나타내시고 자기 사랑을 나타내시는 그런식으로 일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뭐있나 찾으면 찾을수가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엄마가 아이에게 뭘주고 있는가? ‘엄마는 나에게 뭘 해주나?’ 이렇게 질문하는 아이들이 많지요. 사실은 ‘뭘 해주나?’ 하는 입부터 엄마가 준것이지요. 그 숨쉬고 존재자체부터 시작해서 그날 아침에 밥 먹었지요, 옷입고 있지요, 따뜻한 방에 살고있지요, 학교갔다 왔지요, 목에는 mp3 걸고 있고 손에는 시계차고 다 가지고 있고 다 받은 것인데, 그건 안보이고 ‘오늘의 별미가 뭐냐’ 이겁니다. ‘오늘밤에 불고기를 해주느냐? 오늘 새로운 물건을 내한테 하나 사주느냐?’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없으면 사랑도 없고 은혜도 없고 해준것도 없는 겁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그만큼 큰 상처를 입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사람에게 주신 것은 해와 달과 별과 천지만물입니다. 이 천지만물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살도록 주신 선물이에요. 이걸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온 겁니다. 우리의 부모가 그 중에 한 부분이고, 그 부모에게서 우리가 지음받았을 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오늘까지 우리가 생명유지하고 생활하는 겁니다. 이것 전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조질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런데 무슨 곡식, 밭에서 자라고 논에서 자라고 하는 그런것 먹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 이것만 은혜인가?’ 이런식으로 문제가 될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위에서 물을 내는 것은 큰 희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인간의 죄로 인해서 온 현상입니다. 이럴때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것은 우리가 참 하나님앞에서 마음이 너무 연약하고, 우리의 눈이 너무 어두우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눈을 여시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 있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어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적이 벌어질때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할게 아니고, 사실은 이 기도를 우리가 해야되요.
이 기적은 사실은 희생인데, 하나님의 희생의 결정판은 뭐냐하면요, 하나님 자신을 사람을 위해서 희생시키는 겁니다. 이 반석은 고전 10장 4절에 보면 ‘이 반석이 뭐고 물이 무엇인가’를 바울이 해석을 해놨습니다. 이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의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이미 이것을 나타내신 겁니다. 우리가 그 위에 우리인생의 집을 짓지요. 바위위에다 집을 짓는 겁니다. 이 반석, 우리 인생의 기초는 두들겨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깨졌겠죠? 바위가 안깨졌으면 물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아무리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도, 맨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실수는 없어요. 그때 지진이 일어났든지, 무슨 엄청난 폭발이 밑에서 일어났든지, 해가지고 쩍 갈라지면서 그 밑에서 물샘이 터져 나왔겠지요.
어쨌든 하나님이 바위를 모세지팡이로 쳤을때, 이것은 십자가의 역사가 벌어진겁니다. 그 바위는 바울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랬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여기서, 사람을 위하여서 쳐서 부서진 것입니다. 거기서 생명수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요. 생명은 어디서 나오는가? 생명수는 어디서 흘러나오는가? 언제나 어떤 한 상대방에 대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완전히 낮추어가지고 상대방에게 자기가 생수가 되고 생명의 떡이 되도록 까지, 자기를 갈아부수고 자기를 지극히 부드럽게 하고, 그렇게한 한 인격, 그렇게한 한 사람에게서 생명이 흘러나온다는 거지요. 그래서 주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이것이 너희들을 위해서 주는 나의 양식, 떡이고 음료다’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결국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생명주는 영을 받았습니다. 맨날 주님으로부터 받아먹는거만 영원히 하는것은 아니고, 어른이 아이에게 젖을 주고 밥을 주면 그 아이도 머지않아서 어른을 따라서 성장해서 어른이 되게 되는 것인데, 우리의 놀라운 승리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멸망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희생, 예수의 죽음, 여기서는 바위의 부서짐, 이것은 많은 생명들을 그 가운데서 살려내고 획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역사의 바탕은 전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고 난 다음에 막바로 르비딤이라는 곳에서 아말렉이라는 대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말렉과 더불어서 첫 전쟁을 벌이는거에요. 지금까지 나오면서 날이 뜨겁다든지 먹을게 없다든지 전갈이나 뱀이나 이런 광야의 위험이라든지 이런 것은 만났어도, 사람이 직접 그들을 가로막아서서 해치려고 하는것은 없었는데 이제 이 아말렉을 처음 만난겁니다. 이 아말렉은 굉장히 호전적입니다. 아주 호전적입니다. 이 사람들을 왜 만나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거기 있었으니까 만났겠지라고 생각될수 있지만 꼭 그런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볼때 그 이스라엘백성이 가는 그 길에 반드시 그 사람들이 걸릴만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럴만한 길 같으면 하나님이 인도를 안하지요. 그런데 소문을 듣고 아마 ‘우리땅이 빼앗기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징계는 항상 필요하다 그랬죠? 광야생활은 징계의 연속이라 그랬잖습니까? 광야생활은 기적의 연속이고 징계의 연속입니다. 기적만 연속으로 벌어지면 좋을텐데 싶지만, 기적이 연속으로 벌어질려면 기적이 아니면 안되는 상황이 있어야 되겠죠? ‘날마다 구원을 받는다’ 날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째야 되겠습니까? 날마다 위험에 빠져야되겠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같은 바보같고 너무너무 답답한 그런 인성 그런마음은 마땅히 연단을 받아야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다른방법으로 그들을 징계를 하셨을지라도 지금은 이제는 사람을 통해서 징계를 하시게 됩니다. 이때 아마 많이 죽었을거에요.
모세가 팔을 들어가지고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겼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중력의 법칙이 잡아당기는데 이 팔이 계속 들고 있을수 있나요? 그래서 ‘아이고 팔 아파라’ 하고 내리면 졌다는겁니다. 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건지셨다고 하지만, 중간에 수많은 사람이 죽은겁니다. “이스라엘이 지더라” 아말렉이 칼날로 이스라엘 사람들 죽인겁니다. 그 와중에 제 생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것 같아요. 결국은 이건 연대책임입니다. 그때 꼭 불평한 사람만 죽었겠습니까? 불평한 사람 안한사람 칼날이 가리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서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그 마음을 다스릴줄 알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육신의 안락함과 육신의 편안함, 그 육신의 형편이 좋아졌을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이 괴롭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환경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한걸음 한걸음의 과정과정들이 힘들다고 계속 불평하고 저항을 하면, 마치 수갑을 찬 사람이 계속 이걸 괴롭다고 잡아당기면서 저항하는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죠. 착고에 채인 발이 몸부림을 치면 어떻게 되는것인가? 그건 발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착고에 발이 상하니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착고란 말은 딱 채워가지고 고정시키는 족쇄나 수갑같은 것을 말하는데, 고대사회에서 나무나 쇠로 가지고 딱 묶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이스라엘이 저항하는 겁니다. ‘너무 싫어 아! 괴롭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느냐’ 막 원망하고 저주하고 울고 그러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손이나 발만 상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만난것은 ‘사람이 쉽게 사는 법이 뭐냐? 안전하게 사는 법이 뭐냐?’ 이걸 하나님께서 자극적이고 확실한 방법으로 일깨워주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사람이 너무 육체적으로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으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고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예를 들어서 아내나 남편이 병이 들어서 다 죽어가면,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심한 장애를 입어가지고 지금 다 죽게되었다 그러면 공부를 못해도 괜찮고, 팔다리가 하나 떨어져 나가도 괜찮고,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지금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부인과 자녀 남편 할것없이 멀쩡하게 다 잘 살아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좋아죽지 않는다 말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욕망, 새로운 만족을 육체안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육체안에서 소망을 구하는 사람은 그래서 육체적으로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불행해집니다. 더 좋은것을 가져야 되니까요. 오늘 아침에 불고기 먹고 오늘 낮에는 또 산해진미를 먹고 그렇게 한 사람이 저녁에 무슨 식사를 기대하겠습니까? 보리밥을 기대하나요? 뭘 기대합니까? ‘밥 먹는것도 귀찮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중이라면 그냥 어디 고구마나 감자 하나 있어도 눈이 번쩍 뜨일텐데. 그러니 주관적인 행복도로 볼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사실 주관적인 것이거든요. 안에 내면의 정신적인 그것이 행복을 결정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국민들의 삶의 행복지수가 제일 높다고 하잖아요? 제일 없으니까, 제일 없고 그 가난한 나라에서 일년의 대부분을 홍수가 나가지고 나라의 절반이 맨날 물에 잠긴답니다. 그러니 삶이 삶이라 할것이 뭐가 있나요? 물만 한잔 마셔도 ‘아이구 행복해라’ 이렇게 되는겁니다. 인간이 이러니 별수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사람에게 행복을 줄려고 하면 별수없이 두들겨패야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이전에 불평하던 것이 입이 쑥 들어가도록 아말렉을 보내서 작살내는 겁니다. 이건 사람을 괴롭히는게 아니에요. 사람을 괴롭히는게 아니고 인생에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놓쳐가고 있는자들에게 그것을 되찾고 회복할수 있도록 하나님이 최적의 처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아말렉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이 이제 뜨거운 맛을 보는것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아마 수백명, 수천명이 죽었을거에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은 그래도 영적싸움이죠. 무슨 영적 싸움입니까? 하나님의 택한백성,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위해서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는 이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러 가는데, 마귀가 어쨋든간에 중간에 와서 가로막는거지요. 아말렉은 마귀의 선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수지요. 이스라엘이 비록 약하고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구원의 백성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은 역시 영에 속해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 아말렉은 하나님 자녀들의 길을 가로막는 자라는 점에서 육에 속한 세력입니다. 영의 세력과 육의 세력, 성령의 역사와 육신의 소욕 이것은 항상 투쟁하고 끊임없이 계속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겁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7)
우리가 뭘 원합니까?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우리의 원하는게 뭡니까? 우리는 잘먹고 잘살고 누워있고 싶다 이겁니까? 우리의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의를 추구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찬송받는 하나님안에서 내 인생도 빛이 나기를 원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원할 때 원수는 안팎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체만 하더라도 지금 이 전쟁이 두가지 전쟁이 아닙니까? 하나는 자신들과의 전쟁입니다. 자신들의 불안함 두려움 답답함 먹먹함,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건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디냐? 밥은 어디 있느냐? 자기내부에 있는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바깥에서 그것을 가로막는 외적인 대적과의 전쟁 이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끊임없이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지속할것이라고 봐야됩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된다고 하는것인데, 이것은 뭡니까?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기도하고 어떤 어려운 환경속에서 날이 서 가지고 영적으로도 깨어가지고 ‘하나님 지금 내가 위기에 섰습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됩니까? 도와주십시오’ 하는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지요. 그런데 그거 해결되어도 절대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것 해결되더라도 그것은 한 과정을 지나간 것 뿐이고, 다음에 산넘어 또 산입니다. 왜 그런가? 죽는날 까지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쫒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안에 있는 독버섯, 암이 확 자라는 것입니다. 교만과 무사안일과 ‘내일은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근거없는 기대, 거짓평안, ‘괜찮을거야 괜찮을거야’, 사실은 양심안에서 성령이 ‘너는 큰일났다’ 하는데도 우리가 이 싸움이 없다면 그냥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됩니다. 우리 자신과 싸워야 되고, 우리 외적으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속이는 모든 형식의 대적들과 싸워야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광야에서 아말렉과 부딪치는 것은 피할수 없는 일이에요. 이것은 자기 죄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그것 아닙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원망하고 불평하니까 하나님이 나중에 보면 불뱀을 보내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해서 징계가 온 것이라고 봐야됩니다. 하지만 그렇든 저렇든 하나님의 자녀는 어쨌든 이런 싸움을 싸워야 됩니다.
이집트의 바로왕, 여기의 아말렉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두 개의 세력을 대표합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택한백성을 세상에 묶어놓음으로서 못나가게 하는겁니다. ‘세상에 있어라’ ‘하든거 계속해라’ ‘그것 한다고 해서 하나님 못 섬기냐? 여기서 해라’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이집트가 했다면, 아말렉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약속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동행하는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안에서 이루시는 이 구원은 안팎에 훼방을 받을 수밖에 없는것입니다. 이게 되기만 하면, 세상임금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것은 다른게 아닙니다. 그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 삶에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있고, 그 말이라는 것은 사람의 속에있는 생각과 속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말이죠.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하는 이것을 잘 살펴야 됩니다. 우리 생활속에서 우리가 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우리 아들, 우리 딸, 내 하는일, 장사, 우리가 우리속에서 늘 하고 있는 그 모든 말들이 우리 육신의 즐거움, 우리 육신의 괴로움 그것을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 위치가 확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랬는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 이것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수 없다”라고 하는 말에서도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 찬송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한마디의 이 말이 나오는 이 삶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사탄이 그걸 그렇게 못하도록 항상 우리를 불평에다 묶어놓고 항상 원망에다 묶어놓고 두려워하며 좌절하며 낙심하는 그러한 말들로 우리의 말들을 채우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의 나라는 우리의 찬송 한마디에 무너집니다. 우리가 오늘 어떤 상황속에서든지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우리에게 내일이 있고 내일뿐 아니라 오늘도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받았던 시험이 그건데, 이게 받쳐주면 내일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내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릴때 받쳐주면 내일이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현재 서 있는 이 자리에서는 말을 안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늘 그것을 생각 안하는 거에요. 현재는 지금 내가 떨어져 죽었느냐? 아니라는 말입니다. 현재 내가 성전꼭대기에 안전하게 오늘까지 서 있는것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시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보장이 필요한것이 아니고, 현재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나로 숨쉬고 나로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다' 하는 것을 예수님이 앞에서 표현 했거든요. 그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받쳐주는 일, 다시 말하면 내일 하나님이 나에게 양식을 주시거나, 내일 내 인생을 보장해 주시거나 하는 것이 없어도 현재 나는 충분히 하나님을 믿을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적인 자리에서 우리가 감사할수 있는 것이 찬송입니다.
찬송은 소망으로 인해서도 감사하고 찬송할수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찬송의 재료지요. 우리가 앞으로 주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될것이고, 영혼의 구원을 입을 것이고, 몸이 구속을 받을것은 미래의 소망입니다. 지금은 없는 것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우리는 감사할것이고, 현재 앞에 있는 이 사람들, 우리의 가족들이나 이사람들이 예수의 생명이 계속 그 속에 축적되고 키워지고 확대되고 하는 가운데서 얼마나 보기좋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것인가, 이것은 우리소망입니다. 그런 소망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볼때 충분히 하나님께 감사할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보기 싫고 지금은 그 사람 때문에 입에서 욕이 나올것 같아도 감사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현재로서 우리가 충분히 감사할수 있다는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안에 생명의 씨를 집어 넣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 지금 감사할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그걸 적용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훼방을 받는 이것은 우리가운데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찬송이 되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그꼴을 사탄이 못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말렉은 결국 이런점에서 우리안에서 두려움과 불평 불만 그런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리로 하여금 마음대로 육신적인 성급함과 육신적인 생각대로 행동해 버리도록 만드는 사탄의 모든 훼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아말렉은 굉장히 무서운 후유증을 훗날에 남기는데, 하나님이 이 아말렉의 후손, 말하자면 아각왕, 아말렉왕인 아각이라는 사람을 사울로 하여금 완전히 전멸시키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는 그걸 살려둡니다. 주위에 있는 나라니까 ‘내가 한번 은혜를 베풀어주면 다음에 우리말을 잘듣고 조공을 바치고 그런 신세가 될것이니까 지금 그사람들을 굳이 다 죽일 필요가 뭐있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이 아말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앞으로 나아갈려고 하는데, 믿음으로 살고 환경을 초월하여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렇게 사는 삶을 발목잡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자, 육에 속한자 세상 죄인들의 모형으로 아주 적합하지요. 그들은 팥죽 한그릇으로 인생을 결정해 버립니다. 팥죽이 있으면, 오늘 내가 먹을것이 있으면 좋고 감사하고, 그게 없으면 모든게 없어진것 처럼 그렇게 황당한 선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팥죽한그릇이 없다고 동생에게 있는 팥죽 그것을 내가 먹고 ‘장자라는게 무슨 소용있나?’ 하고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영혼을 파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자에게 주신 축복이 얼마나 크고 영원한 것인가 아무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와 친하게 되거나, 우리와 결혼을 하거나, 우리근처에서 무사히 살아있는 것도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사람들을 완전히 없애야 되요. 이러한 정신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세상사람들과 싸우고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우리의 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세계에 뭔가 장애물이 될수있는 이런 거짓된 생각구조 이런것들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영원히 아말렉을 하나님의 원수로 규정하시고, 완전히 전멸시킨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지금 현재 아말렉과 싸워 이긴것만이 다가 아니고, 여기 14, 15, 16절에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그래서 앞으로 아말렉을 완전히 천하에서 기억이 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도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도말은 누가 합니까? 완전히 멸절시키고 작살내는 것은 누가합니까? 이스라엘이 해야지요. 그래서 첫 왕인 사울에게 그것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하는거에요. 이게 벌써 이 사람들이 가나안땅 들어가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마구잡이로 결혼하고, 그들의 우상숭배문화 그들의 타락한 탐욕의 문화 이런것들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마구 수용하고 서로 교통한 그런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안에서 하나님이 이 아말렉을 이렇게 만났을때 어떻게 역사를 하셔가지고 이것을 철저히 도말하고 앞으로 대대로 여기 지금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7:16)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 이런것을 우리의 영적 삶속에서 잘 받아들일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 앞으로의 남은 숙제입니다. 이 싸움은 사실은 다음 주에 생각을 해보겠지만, 힘든싸움은 아니에요. 팔만 들고 있으면 됩니다. 이 팔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팔만 들고 있으면 됩니다. 주님이 이루신 승리라는 겁니다. 주님이 다 승리해 놓은 것을 믿고 마음가짐에서 ‘나는 절대로 세상과 타협할수 없어 나는 절대로 불의하고 거짓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는, 하나님의 정신이 땅에 떨어지고 멸시받는 이것을 용납할수 없다’ 이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내가 밥한그릇 그저 따뜻하게 먹고 조금더 편하고 쉽게 살기위해서 내가 육신적인 욕망을 따라서 쉽게 불평하고 쉽게 원망하고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것을 나는 수용할 수 없다’ 이 싸움을 우리가 싸우고자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아까 말한 것처럼 팔들고 다 이기게 해주는 사람밑에서 그냥 그저 얻어먹기로 싸우고 그저 얻어먹기로 이기는 겁니다. 단지 마음만 있으면 되요. 단지 사탄과 싸워서 ‘나는 그놈에게 조그만한 나의 삶의 단 1%라도 내가 손해보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데, 내게 주신 의와 진리와 착함과 거룩함의 삶 사랑으로 연합하는 삶 이게 어떤것인데, 내가 육신의 적은 욕망 시시한 욕망 먹어도 만족함이 없고 드러누워도 따뜻함이 없는 그러한 죄의 몸 썩어질 사망의 몸에 내가 왜 내 인생의 영원한 것들을 양보를 하고 희생을 할것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강하게 영적인 삶을 도모한다면 이 우리를 훼방하는 어떤 세력도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