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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와 찬양 (1) (출14:31-15:18)  / 녹취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14:31-15: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들을 건너게 하신 이것을 눈앞에서 목격을 하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겠죠. 그래서 이 큰일 엄청난 일이죠 전무후무한 이런 역사를 보았으므로 그들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고 하나님께 찬송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를 믿고 또 모세도 믿은 것을 단지 주목하고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고 넘어갈수가 없고, 이러한 이스라엘의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좀 하는 말로 '좀 씹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것은, 이 사람들이 이후에 이러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고서도 작은 문제, 큰 문제 할것없이 모든 삶에서 만나는 문제를 대할 때마다 두려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을 했다 하는 사실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좋은 찬송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이것은 바로 우리안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할 때도 우리의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도 다음에 있을 문제를 염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려하고 공연히 걱정을 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지혜로운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 이상 하나님이 사람에게 화끈하게 자기의 존재와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만 한 일도 없다고 할수있죠.

우리가 요 앞에 바다가 보이는데, 바로 저앞에 영도가 보이는데, 여기서 하다못해 영도까지라도 반으로 갈라진다고 합시다. 자, 이것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안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겠지요. 그런데 성경이 말해주는 것은 뭐냐하면 한달 혹은 일년만 지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졌다가 모든 사람이 그 가운데로 왔다리갔다리 하는것을  체험을 했다하더라도, 한달이나 혹은 일년 후에는 하나님을 진짜로 견고하게 붙들고 있고, 믿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믿는다는 문제가 어려운 문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다는 것은 진정한 믿음으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껍데기, 표면적인 믿음, 그래서 잠시 후면 빛바랜 그림처럼 슬슬 희미해지다가 나중에 가면 통 보이지 않게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내가 얻어서 믿게 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다가 무슨 작업을 하심으로서, 그래서 껍데기의 내 생각과 형편 느낌과 관계없이 속에서 무언가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돌이키는 그런 작용이 일어나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참으로 알때만 참으로 하나님을 믿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간에 믿을때도 그렇죠. 사람간에 뭘 말할 때도, 굉장히 많은 강조를 해서 말한다고 우리가 그말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절대로 도박을 하지 않겠다" 하면서 손가락을 댕강 잘라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보다도 화끈하고 이것보다도 더 확실한 그런 표가 없다고 할수 있는 행동을 한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볼때 조금은 믿음이 가지요. 그런데 돌아서면 아이고 저사람이 손가락이 없으면 다른 손가락으로 도박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든다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본것은 분명히 굉장한 일인데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을 댕강 자르든지 사지를 몽땅 잘랐다 해도 그 불안과 두려움이 가시지 않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사람의 인격을 내가 믿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사람의 마음과 그 사람의 속을 내가 한번이라도 신뢰할만한 정도로 내가 체험을 했다면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참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그 손가락을 안잘라도 말로 길게 안해도 믿을수 있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생명안에서 깊숙이 체험해서 정말 하나님은 믿을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뭘 안봐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게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그것이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겠니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약속 때문에 애굽을 나왔고 지금도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겁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애굽땅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 동안에 애굽땅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거에요. 그리고 지금 홍해도 물론 건너가는 일도 없겠지요. 그러니 이 하나님의 근본적인 약속을 만약에 믿는 사람이라면 홍해가 갈라지거나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지든 안벌어지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약에 홍해 속에 들어갔는데 물이 그만 확 덮여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꼬로록 해서 빠져죽어버렸다. 애굽군대가 빠져죽은게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빠져죽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활시키겠죠. 부활.

아브라함은 이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조상이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실제로 바쳤습니다. 바친다는 것은 머 목사로 바친다 이런게 아니고 죽이는 겁니다. 죽이는 제물로 잡을려고 했습니다. 그럴때 아브라함은 정신이 돌아서 그렇게 한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양을 준비했다가, 염소나 양같은것을 준비했다가, 자기 아들을 대신 할 것이라고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되었지만요.

그렇게 믿을수 있었다면 더 정확하게 믿을수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그건 모르겠고, 한술 더 뜨서 죽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 아들은 본래 태어날 수 없는 사람인데 태어났거던요. 그러니까 90살에 그 어머니 태가 다 말라붙고, 90살 먹은 할머니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시집을 89살에 가도 괜찮겠어요. 자 이 정도의 상황을 체험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어도 무슨 수가 있겠지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뚜렷한 약속을 받지도 않았어요. 내가 내 아들을 그렇게 하면 내가 딱 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위기를 모면하게 해줄게 약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표적이 있든지 없든지 그런사람들은 상관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란 것은 결국 뭐냐하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우리 마음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얻은 엄청난 이 축복을 볼수있게 되는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볼수 있게 되려면, 눈이 열려야 됩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께 이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내 눈이 열려서, 이 눈은 어디 눈입니까. 이 눈은 바깥의 눈이 아닙니다. 마음눈입니다. 이건 소경도 볼수 있고, 아무라도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도, 그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볼수 있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사모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근본적으로 믿고 있다면,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겠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그들을 아는 체하고 나타난 때로부터 한번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위경속에 처했을때,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알아서 해라 연단을 좀 받아라' 그렇게 한적도 없어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감싸듯이 그야말로 눈동자처럼 이렇게 지켜 보호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만 만나면 항상 안절부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는가?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그의 약속과 그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 하나님의 약속을 안다는 것은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 그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인데, 이걸 모르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22장 29절에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부활은 없다는 것을 꾸며낸 이야기를 가지고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과 결혼하면 죽어버리고, 죽어버리고해서 그래서 옛날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과 결혼하고 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자식을 못낳고 죽은 형을 위해서 동생과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려고 했는데 또 죽어버리고 또 죽어버렸다. 나중에 7명의 형제가 전부다 그 한여자를 다 아내로 삼고 하다가 다 죽어버렸다. 그러면 천국에 가서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그 부인은 누구의 부인이 되겠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랬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약에 성경을 알았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다면, 아브라함처럼 말이지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낼 것을 아브라함은 사실은 들은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알았냐고요? 하나님이 이 이삭을 통하여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식들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삭을 통하여서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큰 민족이 될려고 하면 이 사람이 죽으면 안되잖아요. 약속이 없어도 하나님이 먼저 번에 하신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때,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을 굉장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 사두개인들, 사두개인이라는 것은 제사장 계급들입니다. 굉장히 자기들 딴에는 경건하고 하나님께 정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죽게도 하시고 다시 살게도 하시는, 그리고 없는 데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습니다'라는 목소리를 높일수록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는 '참 못 믿겠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귀한 일이죠. 어차피 불신앙이라는 것은 다 있는거고, 마음이 불안한 거는 다 뻔한건데 하나님께 가서 '주여 내가 믿음이 없고 답답한데 좀 도와주세요 내마음이 불안한데 좀 봐주세요' 그것도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더 좋기로는 여러날 동안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살면서 그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그 사람 안에 알게 했는데 이것이 전혀 접수가 안되어 가지고 눈앞에 당장 어떤 문제해결이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조금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캄캄해지는 이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머무르지 않는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왔지만, 오늘은 도우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사실, 어제 밥 먹었다고 해서 오늘 배가 부릅니까. 어제 도움은 오늘 똑같은 도움이 와야 되는거지. 어제 도왔다고 해서 오늘 내가 도움이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도 마음이 없는게 아니고, 하나님도 늙어가지고 어제는 도울수 있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까 이렇게 꼬인 것은 하나님이라도 풀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좀 우려를 해 드리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도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 이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열 번 자기를 구원하셨다 하더라도 열한번째 위기를 만나면 여전히 불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져야 비로소 감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는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반대되는 대조되는 개념 이것은 보는것입니다.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서 입에다 달콤한 사탕을 넣어주고 볼에다 뽀뽀를 해주고 손등을 이렇게 부들부들한 손으로 다정하게 비벼주면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인줄 우리가 다 알수 있죠. 개가 살살 비벼주면 꼬리를 살살 흔드는 것처럼 '아이고 좋구나' 느낄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누가 한재에 백만원씩이나 하는 쓴 보약을 다려가지고 뜨겁고 냄새나는 그 보약을 내 입에 털어넣어 준다면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느낄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떤 사람이 나를 한과목에 백만원씩이나 하는 그런 공부, 또는 그런 헬스클럽에 회원권을 끊어가지고 나를 그런데로 넣어가지고 약한체력을 강하게 만들고, 약한 마음을 단련시키도록 힘들여서 교육을 시킨다면 나는 그에게서 사랑을 느낄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안에 우리를 다루시는 그분을 깊이 아는 눈이 없다면 우리는 가랑잎처럼 계속 파도타기를 해야 될것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바다가 아무리 잔잔하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바람도 없어가지고 접시에 물 떠 놓은것처럼 그렇게 수평을 유지할수는 없습니다. 그런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알고 힘들여서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도록 확실하게 하나님을 배운 사람, 그렇게 확실히 하나님이 눈을 열어준 사람은 돌덩이와 같이 물밑에 가라앉아 있는것입니다. 위에 태풍이 일어나도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보는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것은 영원함이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일이 눈앞에서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믿음으로 우리마음에 감사가 되고 안심이 되고 찬송이 되고, 그런 가운데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기까지 기다려 나가는 것이 신자의 재미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어떤 일로 기뻐해야 되고 어떤 일로 슬퍼해야 될지를 안다는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사탕을 입에 넣어주는 것처럼 자기 육신의 생명, 육체의 생명을 현재 어떻게 기분좋게 하고 어떻게 만족스럽게 하느냐 하는 것에 전적으로 눈을 꼽아가지고 있죠. 육체의 생명을 하나님이 돌아보시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주시는 그것만 기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감사하지요. '하나님 믿습니다' 이렇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나마 그들의 육체를 고난과 시련속에 던지게 될 때에는 매우 싫어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뭐가 참된 복이고 뭐가 참된 은혜인가를 압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알기 때문에. 만일 우리에게 지각이 있다면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떡을 한조각 주고서는 우리의 현재 잘못된 행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것을 불안하게 생각 할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을때 '과자 사먹어라 가서 텔레비전이나 봐라' 이렇게 한다면 '아 이것은 큰일이구나 이제는 나에게 대해서 포기한것은 아닌가' 우리는 불안감을 갖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어떤 문제가 있을때 우리의 부모가 지키고 있다가 매를 든다면 우리는 그것을 맞으면서도 여전히 나에게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는 이런것을 느끼기 어려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기업이나 어떤 축구단이나, 야구단 이런데서 감독이 내게 대해서 세게 나오고 가장 어려운 포지션에 자꾸 세우고 그래서 가장 힘들게 하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되고, 가장 어려운 자리에다가 둬가지고 계속 굴린다면 그 마음속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알아차릴 것입니다. '아 나를 저 뒤에 가서 물 주전자나 들고 편안하게 그냥 쉬게 하지 않고, 가장 센 곳에 보내가지고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쉴새없이 방망이를 휘두르게 하고, 쉴새없이 운동장을 뛰게 한다면 아! 이것은 나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있구나' 바로 느낄수 있을것입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책상에 앉아가지고 커피나 심부름시키고 문서나 작성시키고 그러한 사람이 크게 기대를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장에 가장 치열한 영업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보내가지고 복잡한 일들을 다 경험하게 하고, 두루두루 힘든 일을 거치게 할때 '나를 키울려고 하는가 보다' 그렇게 알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가운데서 어떤 일을 벌려갈 때 그 일이 내 육체에 있어서 얼마나 재미있고 편안하고 쉽게 느껴지느냐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서 내 인생이, 내 속 사람이 얼마만큼 깊어지고 얼마나 강하게 단련되는가 그것을 보는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전보다도 오늘 이 고난과 이 체험을 통하여서 조금더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리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고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큰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어쨋든 간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노래했다” 했고, 나중에 보면 미리암도 찬송을 하고 했는데. 어쨋든 간에 이스라엘이 이때나마 찬송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찬송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이사야서 43장 말씀을 보면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하는 말씀을 볼수 있는데 이걸 생각하면 우리가 '찬송이 우리의 직업이고 우리가 항상 해야될 일이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항상 찬송을 받아야 됩니다. 그분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고, 우리가 찬송 할 때에 우리가 살고 하나님의 일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아주 다목적입니다.

이 찬송은 찬송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일석삼조』라는 것입니다. 돌 하나 던져서 세 마리 토끼, 세 마리 새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찬송을 할때, 먼저 우리 중심으로 생각해 보지요. 우리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가 찬송을 할때 우리는 우리안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들이 날아가고, 우리의 약함이 변하여 우리가 찬송하는 내용안에 있는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가난하고 곤고하고 사탄이 손가락 끝으로 밀기만 해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나의 신랑이 되시고, 나의 주가 되시고, 나의 구원의 투구와 방패와 칼이 되셔서, 그 어떤 세상의 대적이라도 내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한번 나서기만 하면은 다 박살낼 수밖에 없는 그런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합니다. 찬송은 그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대한 믿음이죠, 그런 반응이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말 한마디면 됩니다. '나는 죄지을 사람이 아니고 나는 울고 서있을 사람이 아니고, 나는 천하만물을 다스릴 사람입니다. 나는 여기서 코풀고 휴지를 버리고 침이나 뱉는 사람이 아니고, 이 모든 땅 덩어리, 이 모든 집을 전부다 관리하는 주인입니다. 내가 내집에 내 방바닥에 침을 뱉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송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찬송의 내용이 아니구요. 홍해를 건너게 하신것은 무엇 때문에 건너게 해주셨습니까? 세상속에서 저주받은 그 삶을 살고, 세상에 갇혀가지고 지옥의 백성, 사망의 백성, 죄의종으로 살게 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광스럽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건져낸다는 사실을 여기서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홍해라는 물이 갈라진 것이 찬송의 내용이 아닙니다. 물이 갈라질 필요가 있습니까? 바다라는 것은 항상 그대로 물이 출렁출렁하는 것이 좋지요. 산이 없어지고 물이갈라지고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는 것은 찬송 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늙어도 주름도 안지고, 죽지도 않고, 병도 안들고 그것도 찬송의 내용이 아니에요. 사람이라는 거는 공부를 잘 할수도 있고 못 할수도 있고요, 건강할수도 있고 좀 약할 수도 있고 밥을 많이 먹을 수도 있고 적게 먹을 수도 있는 겁니다. 많이 먹으면 찬송이고, 적게 먹으면 안찬송이고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을때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하는것은 그런 일들이 하나하나 전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느냐 하면 '너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사람이고 너는 내 것이고 너는 하늘에 지금 앉아있다 너는 세상의 주권자고 너는 왕이다' 이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찬송을 하는겁니다.

그러니까 찬송이라는 것은 좋을때만 하는게 아닙니다. 육체의 기준으로 볼때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했듯이, 달콤한 사탕을 이 썩을까봐 부모가 못 먹게 할때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맛없고 먹기에 거북한 보약을 나에게 줄때 내가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볼려고 할때 텔레비전을 탁 꺼버리고, 그 대신 나를 공부하든지 체력을 단련하는 자리로 몰아낼때 나는 찬송을 하는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모든 육체의 즐거움이 다 빼앗기는 것과 같은 자리에서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한데 처하든지 가난한데 처하든지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바울이 말했을때, 그는 가난한 데 처하면 하늘에서 당장에 떡 보따리가 딱 내려와서 배 안 고프도록 떡을 딱 채워주는 그런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상황에서 문제가 없다'고 말한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로 주릴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릴때 주리는 것으로 인해서 배우는 것이 많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주리는 자들의 심정을 알게되고 죄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불순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일어나고 먹고살기 힘들어진 것은 죄의 결과거든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앞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망하고 결국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길을 내사 우리가 그 시험을 결국 이기고 최종적으로 승리하도록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시험이 올 때에 두려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찬송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찬송이라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제목이 무궁무진해요. 그 찬송할 대상과 내용이라는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일, 특히 육체가 즐거워하고 육체가 안심할만한 그런일로 인해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충실히 경험할수 있는 모든 과정, 다시말해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당신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우리안에 그대로 뒤집어 씌워가지고  우리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의롭고, 하나님과 같이 진실한 인생이 되도록 우리를 한걸음 한걸음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 그 모든 과정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안심하고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내가 참 좋은 길로 가고 있구나' 그렇게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백성이 그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알므로서 그 인생이 찬양이 되는 인생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그들이 모든 일에서 좋은 일만이 아니고요, 홍해가 갈라지고 떡이 내려오고 이것 말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복을 챙겨서 '아! 감사하다 기쁘다' 그렇게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 이 찬송은 세가지 역사가 있다고 했지요. 사람은 사람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갖다 쓰니까 이 찬송이라는 게 갖다 주는 능력이 아주 큽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능력을 체험하고 찬송하지요. 그런데 나중에 가면은 순서가 거꾸로 될 때가 아주 많습니다. 지금 아직까지 요 현안문제에서는 내 마음에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뭐 우리가 암만 육신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지금 내가 만약에 애가 중병에 들어서 앓아서 다 죽어간다 그러면 머 불안하지요 그 문제는 꼭 풀어야 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럴때 그 문제로 인해서 안식이 안되고 있는데, 찬송을 하는 겁니다. "생명을 지으신 이를 찬송합니다. 그리고 지으실 뿐만 아니라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만들 능력이 있을뿐 만아니라 가꾸어 나가고 자기 뜻대로 결국 제대로 키워가지고 제대로 써먹기까지 생명을 간수할 줄 아는 하나님을 내가 참으로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난 그런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 너무 미덥습니다" 찬송을 시작하는 겁니다. 찬송을 할때에 우리안에 있는 그 문제들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주님앞에 드려서 내가 주님을 따라가기 바쁘게 될 때 내가 내 자식의 문제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내 미래의 문제도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내가 주님을 따라갈 때 난 내게 있는 모든 문제들이 전부 주님에게 눈이 먼 이 상태에서 문제가 안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문제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환난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대개 경우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것이거든요. 그럴때 우리가 그 목적에 딱 맞추어 가지고, 하나님 마음에 맞추어 가지고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눈을 꽂아 가지고, 그분을 더 전심으로 추구하고 따라가면 이 문제들은 자동적으로 다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송이라는 것은 일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이렇게 되었을때 우리가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일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사람을 만들었고, 밥도 주고, 떡도 주고, 건강도 주고, 공부도 시키고 하는겁니다. 그런데 내가 찬송을 안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필요없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내가 찬송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찬송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계속 살려놔야 됩니다. 찬송하는 사람은 계속 찬송할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안에 붙들어 넣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내 문제들을 하나님이, 나도 제대로 모르고 있던 문제까지라도 찾아내 가지고 하나님이 풀어나가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찬송은 사탄에 대해서 직격탄을 날립니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로 찬송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을지라도 현재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어떤 것을 기어이 찾아내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불안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직업이고 그것이 그의 직무입니다. 사탄은 그런점에서 굉장히 성실한 존재입니다. 지금 이땅에 있는 예수믿는 신자의 90%이상의 사람들을 그렇게 속여가지고 자기 의도대로 부리고 있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무슨 중병에 걸려가지고 오늘내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힘도 있어요 지금 시간도 있어요 지금 작으나마라도 형제들과 나눌수 있는 돈이 있습니다. 선을 행할수 있는 돈과 시간과 인생이 있습니다. 있는데 이걸 쓰기도 바쁜데 그러면 지금 쓰면 되지요. 오늘 내가 살고 내일 주님께 간다하더라도 그것은 머 괜찮은 것이니까. 죄만 짓고 50년이나 사는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영광스럽게 살다가 가는게 낫잖아요. 자,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얼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할려면 오래살아야 된다 이걸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살고 있지않느냐 이겁니다. 지금 사는것을 가만히 보니 몸이 너무 약해가지고 오래 살것같지 않다 이것입니다. 이래가지고 앞으로 70살이나 80살이나 90살까지 못살겠다 이것입니다. 산다하더라도 비실비실해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못할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힘이있고 할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건 생각안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러니 지금 현재 아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없도록 지금 나에게 건강을 완벽하게 해주시요, 그 다음에 통장에 100만원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되고 한 10억이나 그정도는 넣어놓으시요, 그 다음에 현재 건강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 미래에 가면 내가 늙을것이니까 자식을 꼭 가져야 됩니다. 그것도 아들, 그것도 돈 잘벌어가지고 나를 부양할수 있는 그런 아들을 내가 키워야 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낳는것 부터가 고민이고 그 다음에 낳아가지고서는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 매일 현미경을 들고 그것만 파고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반드시 잘 커 가지고 공부도 잘하고 잘되어야 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일이 다 잘될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람이 하나도 안부는 그런상황을 원하는 것인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일을 전부다 지금 땡겨가지고 손안에다 다 갖다쥐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탄이 성공하지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불안한 겁니다 그 다음부터 불평하는 겁니다. 왜 이게 안되는가? 왜 나는 이게 없는가? 왜 나는 이런것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목적인 찬송은 간데없고 영원한 불평과 영원한 염려와 영원한 근심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럴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입을 열어서 매사에 감사하고 찬송을 한다면 사탄은 그의 모든 일과 그의 존재가 다 무의미하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 죄악에 대해서 참 신물이 나지요 어떤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어떤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추악하고 더러운 일들을 뻔뻔스럽게 저지르고 할때, 우리가 그런것을 접할 때 상처를 받고 괴롭고 싫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 왜 그렇게 한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자신도 물론 거기 한 일원이지만은.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더럽게 살고 왜 그렇게 유치하게 살고 졸렬하게 사는가?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지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오늘까지 이렇게 만들어 놓고 키워놓고 붙들고 있는데도, 그것은 하나도 안보이고 내일 내가 잘살아야 된다, 내일 내가 살려면은 돈을 벌어야 된다, 내일 내가 성공할려면은 좋은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미래의 삶을 위하여서 자기인생을 스스로 부지하기 위해서 그 더러운 짓을 하고 그 거짓말을 하고 그 치사한 짓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지금 우리부터 믿음으로 살아야 되요. 내 안에서 만약에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단련하는 하나님앞에서,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이런 삶이 훈련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어느 한쪽 구석에 가서 뭔가에 집착하고 앉았고,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어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행동을 “할수없다 나도 살아야지” 하는 그런 행동을, 하는 자로 서있게 될겁니다.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은 그 내용을 가만히 보면요 자기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찬송을 여러분이 집에 가서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속에서는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찬송은 하나님을 보는데서 나오는 거지, 자신을 들여다 보는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랐고, 적들을 물리쳤고, 모든 것을 하셨다는거지, 우리가 어떠냐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환경이 어떠냐 하는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적들에 대해서 이야기 한것이 나옵니다. 뭐라고 이야기 했냐하면은, 적들은 '오늘 우리를 멋들어지게 칼로 가지고 박살을 내고 우리를 죽이고 탈취물을 빼앗아 가지고 나누어 가질것이다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 칼을 빼리니 내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거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애굽 군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로 허허 웃으면서 '오늘 이거 왠 떡이냐' 하면서 우리를 쳐들어 왔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한방에 물속에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니 찬송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관계없고요, 내 형편이 어떻고 내가 뭐 내 생각이 어떻고 내 마음이 어떠냐하고도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의 형편은 찬송을 부르게 되는 원동력이 될수 없고요. 오히려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는것은 아니냐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도 아니고 찬송을 부르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아무 관계없어요. 찬송은 사람의 형편과 상관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를 바라보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찬송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여러가지 신기한 일들을 우리속에서 보이게 안보이게 착착 진행해 나가시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것입니다.

이 출애굽기 15장의 찬송을 보면 구속에서 시작하여 영광으로 딱 끝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딱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홍해를 가르는 것보다 더한 일들이 우리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거야 지금이라도 물막이 공사 같은거 하면 할수 있지요. 그러나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켜서 사람이 그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고, 세상의 죄와 허무한 일들을 슬슬 거절하고,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삶을 하나씩 하나씩 취하여 가는 이런 일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일보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과 저속에서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잘하시고 확실하게 해나가시는 능력을 이제 우리가 붙들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렇게 하면서 우리안에서 어떤 종류의 불안감과 문제꺼리가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말하지 말고요, 하나님이 어떤뜻을 세워서 우리속에서 일을 해 나가시는 것에 대해서 쳐다보고 말을 합시다. 형제들에 대해서도 서로 그 이야기를 계속 합시다. 앞으로 계속해서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뿐 아니라, 지금 사랑을 받았다, 지금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합시다. 그 사람이 가난하고 병들고 세상에서 조롱받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것에 대해서, 우리가 말을하고 찬송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갈 것이고 마귀는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서 손떼고 물러 갈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거기서 기쁨을 얻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이 찬송은 이렇게 3가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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