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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의 의미 (1) (출16:13-30) / 녹취

2010.05.03 15:32

이상봉 조회 수:4980

만나의 의미 (1) (출16:13-30) / 녹취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제 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출16:13-30)

우리가 지난주부터 시작해서 만나에 관해서 계속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으로 주신 특별한 양식입니다. 이런 만나에는 만나의 존재 자체도 특별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되고 쓰이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특별한 특징들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특징들을 몇가지 정리를 하면 한 서너가지를 말씀드릴수 있는데, 첫째는 이것이 아침 일찍이 공급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이슬내릴때 이게 왔고, 이게 지나고 나면 뜨겁게 햇빛이 내리쬐일쯤, 요즘 말하면 8~9시되면 이것이 다 녹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만나는 하루밖에 보존할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싶지 않더라도 별수없이 일용할 양식밖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하루밖에 안가니까. 다음날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상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더라'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만나의 세 번째 특징은 일주일 중에 매일 내려오는것이 아니고 6일동안은 내려오고 7일째는 안내려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일째 양식으로 먹을수 있도록, 6일째에는 이틀치 양식이 거두어지게 되었고, '6일째 거두어질수 있다'라는 것은 보존할수 있다는 거지요. 원래 하루밖에 보존할수 없다고 했는데, 두 번째 특징이, 세 번째 이 특별한 기적속에 상충되는것 같은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틀째 놓아놔도 괜찮다는 겁니다. 딱 어느날에만? 안식일에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이 만나는 오직 광야에 있을동안에, 다시 말해서 그들이 달리 농사를 짓고 달리 뭔가 양식을 구할수 없는 그때에만 공급이 되었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첫수확물이 나오게 되었을 때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몇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오늘 만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먼저 첫 번째 특징은 아침 일찍이 거두러 나가야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인데, 왜냐하면 늦게 나가면 없어지니까요. 이건 뭘 말합니까? 만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내려주시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그 만나라고 하는, 그런 가시같이 생겼고 똥글똥글한 식물, 그것만이 만나가 아니고,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주시는 모든 여러 가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 또 생명의 말씀을 포함해서 영적인 공급까지도 다 동일한 원칙을 여기서 우리가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칙이 뭡니까? 아침 일찍이 추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새벽기도라는 것이 있지요. 새벽기도라는 것은 일단 문자그대로 아침 일찍이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런 일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시간적인 것만을 거기에 적용할 필요는 없구요. 중요한 사실은 순위입니다. 하루에 모든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공급을 제일먼저 챙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활동을 하는것은 만나를 거두고 난 다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거의 밤중에 일어나야 되다시피 하니까요. 이슬은 언제 내려옵니까? 이슬은 8시나 9시에 내려오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새벽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밤에 추운 공기가, 더운공기 이런것 속에 있는 습기나 수증기 같은것을 모아가지고 땅에 내리는 것인데, 이것은 일찍이 나오는 거죠. 중요한 사실은 해가 나면 이게 쓰러져 없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실제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우리 일상생활도 부지런히, 아침 일찍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 옳고 바람직한 태도이구요. 꼭 그것이 시간적인 면에서 일과를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려고 할때 우리가 게을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9시에 나갔다고 하면 만나는 하나도 없는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열심을 내어서 받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심을 내어가지고, 하나님이 그의 수고와 성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을 우리가 열렬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그것을 믿고 붙잡고 의지하는 이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무릇 살고자 하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는 관심없어요 모르겠어요' 이런사람은 안되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려고 할때, 거의 막바지 궁지에 몰려있을때라도 각성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아하스왕은 북쪽의 아람나라와 북이스라엘이 자기나라 유다를 삼키려고 날을 갈고 있을때, 너무 두려워서 거의 오금이 저려오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참 불쌍히 여겨서, 그동안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했으면 그런일도 없을텐데, 다 범죄하고 흐리멍텅하게 살다가 그 위험한 지경까지 갔단말이에요. 그럴때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좀 쳐다봐라 하나님이 너를 도울 태세가 되어있으니까, 너를 도울 준비를 하고있으니까, 하나님에게 손을 좀 내뻗어보라'고 할때 ‘아이고 머 하나님 귀찮게 그걸 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랬단 말입니다. 굉장히 겸손한것 같죠?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을 시험해보고, 하나님을 테스트하고, 하나님에게 은혜의 맛을 좀 보라'고 그렇게 관심을 돌리고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이야기했을때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사모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9시, 10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양식이라 하는 것이 뭐 대수롭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여러분들이 오늘 주일에 쉬고 싶은데, 몸이 피곤하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교회에 나온것은 그런의미에서 아침 일찍 만나를 거두러 나온것의 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우리 삶의 전 분야에 적용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양식을 먹어야 살것 아닙니까? 모든 일의 제일 앞에 가장 이른시간에, 사람에게 의논하거나 다른 방법을 써보기 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오는것에 기대를 거는마음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드시 사람과의 교제이전에 주님과의 교제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것은 하루밖에 보존할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그런가 하고 상황을 살펴보니까 정말 그렇죠. 19절, 20절의 말씀이 그것 아닙니까.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출16:19,20) 이 하루밖에 보존할 수밖에 없는것은 왜 하루밖에 보존할 수밖에 없다고 그랬습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생각한 내용이 그것 아닙니까? 하루밖에 보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선한거 먹고 살아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데 매일 새것 받아먹지, 뭐하러 냉장고에 넣어놓고 땅에 저장해 놓았다가 한달씩 일년씩 된것을 먹을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는데, 우리가 빗물같은거 옛날에 정수기 그런거 없는시대에 물없는 섬지방이나 이런데 사람들은 받아놓았다가 먹어야 될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게 한달이나 두달이나 이렇게 만약에 비가 안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물이 다 썩어요. 노리끼리하게 변하여 거의 썩다시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걸 뭐때문에 먹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사정에 응답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하실수 있는데, 왜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자꾸 필요로 하느냐 이겁니다.

사탄은 시험을 두가지를 한다면 이 두가지 시험을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시험을 했던 것처럼 ‘사람이 먹고 살아야 되지 않느냐?’ 이 시험을 반드시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험에 걸렸습니다. 시험에 걸린게 ‘시험에 붙었다 합격했다’ 이말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말이 아니고 시험에 빠져가지고 바보 짓을 한겁니다. 광야에서 양식이 딱 떨어지니까, 갖고 나온것이 다 떨어지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하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한겁니다. 보기좋게 시험에 덜커덕 걸렸습니다.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이 그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다음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살리시는데 우리가 죽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참고 하나님의 공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급이 왔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지나가다가 땅에 떨어졌고, 아침에는 만나가 떨어져서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시험이 또 기다리고 있는가? 바로 미래에 대한 안전보장입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라면 저축, 축적, 담보, 보증 이런말로 표현 될수있는 그 어떤 것이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받은 시험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그 시험은 왜 왔을까요? 앞으로 그런일이 있을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결국 예수님이 위험, 핍박을 겪을거라는 말입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받쳐주는가 안받쳐주는가를 확인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꼭대기에서 떨어질때 천사를 보내가지고 딱 받아주면 ‘아! 나는 자신있게 앞으로 나가서 일하겠다. 내가 인생을 겁낼 필요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봉사하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거지요. 그러나 그것은 시험이라는 겁니다. 오늘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고 내 목숨을 보전하실수 있다면, 내일도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내일도 내가 세상에 있어야 될 필요가 있다면, 내일도 내가 숨쉬고 살아 있어야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발을 써서 일해야 될 필요가 있다면, 나는 내일 손발을 쓸 수가 있을 것이며, 내일 내 머리가 먹통이 되어가지고 바보가 되거나 그런일이 없을 것이며, 내 입에 밥이 들어갈 것이라는 겁니다. 만일 내가 내일 쉬어야 된다면, 내가 하던 일을 다 그치고 주님께로 가서 안식해야 될 처지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굶게 하든지 옥상에서 떨어져가지고 받쳐주지도 않고 죽게 하든지 그렇게 할수 있죠. 그것은 인생을 마감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괜찮아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사정보다도 하나님 자기 사정이 급해서라도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의 삶을 책임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틀치 사흘치 양식은 우리가 걱정을 안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 마음은 오늘 내가 딱 먹을 떡 세조각, '아침먹고 점심먹고 저녁먹고 그 다음에는 없네' 이러면 불안하지요. 하나님은 내일도 해가 뜨게한다는 겁니다. 오늘 해가 내리쬐다가 ‘아무래도 식물의 생장에 아무래도 부족해, 오늘 밤없다’ 그래서 계속 쬐고, 그 다음날까지 이틀했는데도, 이틀만에 농산물이 다 자라나요? 안되니까 ‘안되겠다 계속하자’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해가 져 버립니다. 져 버리면 깜깜하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식물도 잠들고 동물도 잠들어야 합니다. 성장과 모든 호흡을 멈추고 죽은듯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날되면 다음 날 해가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양식을 내일까지 남지 못하도록 썩게 해버린다는 겁니다. 이거는 얼마나 좋은건지 몰라요. 저는 그래서 냉장고가 없는 세계에 살면 좋겠어요. 냉장고가 있으면 뭐냐하면, 결국에는 맨날 오래묵은 음식만 먹는겁니다. 옛날 사람들 같으면 그날그날 파를 심어놓았다가 그날그날 뽑아먹고, 상치 오늘 먹을 만큼 뽑아먹고 이렇게 할수 있었다면, 지금은 결국은 오래오래 묵어가지고 시들어 빠진 것을 어거지로 그냥 차가운데 집어넣어 놓았다가 꺼집어 먹는것입니다. 이건 뭡니까? 저축입니다. 저축이라는 것은 낡은 것을 활용하는 기술일 뿐입니다. 신선한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매일매일 햇빛과 비를 내려서 우리로 새로운, 꾸정물 다 썩은물 그런물 말고, 새 물을 마시게 하시고, 새로운 오늘의 햇빛을 내일도 또 쪼이게 하십니다. 축전지 같은데 저장해 놓았다가 어제 햇빛가지고 오늘 전기 때는게 아니고 오늘 햇빛을 오늘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래서 항상 제일 좋은 삶을 살것입니다. 늘 아슬아슬하고 무슨 줄타기 하는 인생을 사는 것처럼 밖에서볼때 그렇게 보이겠지만, 실은 당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고 사는 사람은 그 순간순간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마음이 여유롭고, 하나님의 그 살아계시는 역사를 제일 먼저 땡겨서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새것을 취하고 어제보다 더 좋은것을, 하나님은 늘 앞으로 가시는 분이니 뒤로 가지 않습니다. 앞으로 가는 분에게서 최첨단의 인생을 받아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만나는 일주일 중에 마지막 날인 7일에는 공급되지 않고, 6일에 이틀분이 공급되었다고 그랬죠? 이건 앞에서 말한 이것하고 상충이 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그랬죠? 왜 이것은 이틀치를 가지게 하는가? 새것이 좋다면서 7일은 왜 안주는가? 7일에 안주는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것이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한 거라 그랬죠? 7일에는 뭡니까? 7일에는 양식이 안 온다는 말입니다. 양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양식이 없는데 내입에는 양식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7년째도 마찬가지입니다. 7년째는 농사 자체를 아예 짓지를 않습니다. 1년 단위로 농사를 짓는 것이니까요. 농사 자체를 아예 짓지않는데, 신기하게도 그 전해에 6년째때의 그 땅에서 똑같이 씨뿌리고 똑같이 잡초뽑고 똑같이 거름주고 비왔는데 2년치 농산물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죠. 만나가 내려온다는 그 자체도 말로 다 할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니까 그 정도는 보통이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은혜로 사는 법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십니다. 사람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전에 제가 농담삼아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적도 있지만, 중국에 가니까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중에서 참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TV에서 보여주는데, 다른게 아니고 나무 대 젓가락 하나하고 길쭉한 쇠작대기 같은거 하나하고, 이거 두 개가 생활의 도구에요. 이것가지고 어떻게 벌어먹는가? 공원에 차 마시는 사람들이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주욱 있는데, 거기 가서 사람들 귀를 파 주는거에요. 귀를 파주고 대나무작대기를 귀속에 넣어가지고 쇠작대기를 가지고 톡톡 두드리면 그 사람이 뿅 간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게 간질간질 하고 귀가 너무 재미가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귀 후벼주고 그다음에 귀 쇠작대기로 두드려가지고 기분좋게 살살 긁어주는 그거 해가지고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조그만한 작대기 두 개 이것 들고다니면서 귀두드리고 귀 긁어주는 그걸 하면서 산다는 거에요. 인생은 몸팔아서 사는 사람도 있고, 오만방법으로 다 삽니다. 그것도 다 자기대로는 생업이고 인생이죠. 그런데 제일 좋은것을 우리는 취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인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사는 것은 지금 아기들에게서 볼수 있죠. 이 아기들은 오줌 똥 싸는것부터 시작해서 먹고 싸는것 씻는것 입는것, 날씨가 추워지나 더워지나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추워지면 옷 두꺼운 것 입히고, 저절로 자동으로 모든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열매를 많이 맺으리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과실을 맺을것이다” 인생은 풍성하고, 기름진 인생이 되어야 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수고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수고하신 것을 갖다 먹는것입니다. 안식일에 6일째까지만 양식이 나오고 7일째는 나오지 않았는데, 그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사는 것은 '그들의 전 인생이 그렇게 하나님이 먹여살려서 사는 것이다' 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속에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그런날로 하루를 사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인생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하시는것 같지만, 실제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요구는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굉장히 부유하고 하나님이 굉장히 전능하고 능력있는 분인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 '잘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 행복하고 즐겁고 그 삶이 아주 부유하게 이렇게 펼쳐지라는 것입니다. '잘먹고 잘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국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게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생명의 질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굉장히 밀도가 높고 그 삶이 정말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권세있는 그런 삶이 되라는 것인데, 그건 어떻게 될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서 이루어놓으신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갖다 쓰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에요.

그렇게 할수 있는 방법중에 여기 안식일이 옛날 구약시대에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인데, 안식일에 하나님의 주신 것들을 갖다 쓰는 방법이 뭡니까? 가만 있는 겁니다. 일 안하고 가만 있으면 되요. 우리는 지금 생활속에서 이런 일 전혀 안하고 쉬는 날도 있긴 있지요. 오늘 같은 날, 우리가 세상의 제도도 정착되어 있습니다만 일 안하고 쉽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날도 공장에서 나오라하는 어려운 중소기업에 다니는 분 같으면 일해야 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먹여살리고 하나님이 돌보시는 자를 세상이 절대로 해치지 못한다' 하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을 내어놓을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누리게 하신 것 이상으로 우리 삶속에서 실제로 쉼을 얻을수 있습니다. 마음과 육체의 쉼을 얻을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계속 괴롭게 하고, 내 몸을 계속해서 피곤하도록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가면 내가 쉴수가 없잖아요. 실제로 일이 너무 많으면 꿈이 많다고 잠언에서 그랬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일이 많은 사람은 꿈속에서 조차도 쉬지 못합니다. 꿈속에서도 시달리고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이렇게 되어져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할수 있도록 반드시 환경을 허락하셨다는 거에요. 6일째 되는날에는 이틀치 양식을 주고 그게 썩지도 않았어요. 그리고는 그렇게 해서라도 7일째는 팍 쉴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째로 받아먹은 이 사람들은, 이보다 더 큰 안식을 누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바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견고하게 붙어있지 못하므로 우리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쉼이 없는 것이지, 만일 내가 지금이라도 '정말 오늘 밤에라도 내 영혼을 불러갈수 있다' 고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 해드리고, '내가 지금 사는것은 내가 사는게 아니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담고 사는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께 과감하게 자기 인생을 맡겨보십시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되야되고 이 만큼은 살아야되고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되고 이런걱정을 다 버리고요. 그런것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런것은 우리보다 더 똑똑하시고 그런것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의 군사'라고 하는 하나님과 관련된 내 인생, 너희 몸은 너희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지음받은 존재라고 하는 그 관점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앞에 드려진 인생이 되는겁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급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우리 인생은 실질적인 안식을 누릴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아니고, 자기 영광을 위하지 않는 사람을 애써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돌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우리 자신을 드린다면, 이것은 인생자체가 공이 하나님께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우리가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건강한지 밥은 굶고 있는지 먹고 있는지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집에 종업원으로 고용이 되었다 그러면 문제가 달라지지요. 그 사람이 안나오면 오늘 우리 공장이 안돌아가니까요.

우리가 안식을 하는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안에 있을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우리자신이 작은 벽돌하나로라도 쓰여질 때입니다. 안식의 전제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안에 드려져있는 인생,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는 인생은 반드시 안식할수 있습니다. 그 안식이라는 것은 생각만의 안식이 절대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있어야 될것을 아신다”고 그랬습니다. 소떼나 양떼를 돌보는 목자, 목동에게 하나님이 입에 풀칠을 안시키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떼나 양떼조차도 절대로 굶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서 어떤 일을 한다면요. 일하는 주체인 우리가 굶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구요. 그때 제가 굶는다고 말하는 것은 꼭 밥먹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어쨌든 쉴 수 있고, 우리인생이 그런문제에서 생명으로 인해서 걱정과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제가 이제 먹고산다는 말로 표현한 것인데, 하나님의 일하는 그 사람이 그렇지 않을뿐 아니라, 우리의 일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사람을 전도해서 사람을 살려내고자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망해서 죽어버리면 내가 전도할 수가 없으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제7일에는 절대로 굶지않도록 하나님께서 6일째되는 날에 양식을 두배로 주시고 썩지않게 하시는 이 원리의 적용을 해볼 수 있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이 목적을 위하여서, 안식하고 찬양해야 된다는 우리의 존재목적을 위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삶에 모든 것들을 전부 간섭하시고 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어떤 사람을 섬기고 내가 어떤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을 심지어 심판을 하거나 할때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나를 돌보실 뿐 아니라, 나의 일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에게도 개입해서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로 끌려갈 때 앗수르에 복음을 전하는 것 보세요. 한시간만에 왕부터 백성들까지 전부 다 구원받는 것 보세요. 그런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식을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이 잡혀가서 바벨론에 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살 때, 왕이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능력을 체험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 집을 거름터로 만들것이다’ 하고 하나님의 엄청난 종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세요. 안식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편치않으면 안되요. 우리인생이 피곤하고 서글프고 우리인생이 초라하고 세상의 조롱받는 그런 여유없는 인생이 되어선 안됩니다.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삶에 간섭하셔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안에서 ‘하나님이 어찌 이리 좋은가! 하나님믿고 사는 삶은 어찌 이리 안전하고 확실한가!’ 이 찬송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직접 기른양식을 먹게될 때까지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직접 양식을 길렀을 때에 더 이상 만나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16:35) 만나라는 것은 오늘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먹고살게 될 월급이라든지, 농산물이라든지 그런것일 수도 있고요. 사람의 격려와 위로 이런 것일수도 있고요. 여러 가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주시는 진짜배기 양식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이스라엘에게 주고자 하신 양식은 가나안땅에서 나오는 그 여러 가지 진기한, 맛이있고 종류가 다양하고 거기 포도와 무화과와 감람유와 밀 이런것을 주려고 한것입니다. 만나는 뭔가? 그것 먹기까지, 그것 먹으러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살려놓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모든 풍성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복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늘에 우리가 갔을 때에 햇빛도 필요없고, 등불도 필요없고, 강물도 필요없고, 거기에는 무화과나 포도도 다 필요없어요. 왜? 예수 자신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포도가 되고 어느때는 무화과가 되고, 등불이 되고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될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한다는 표현처럼 우리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가시는 과정속에 있는겁니다. 이 과정속에서는 너무 완전한 것을 찾으면 안돼요. 여기서 세상좋은거 다 먹고, 세상좋은거 다 구경하고 세상의 모든 위로를 다 받고, 남편과 아내가 사는데 너무너무 뜨겁고 너무너무 재미가 있어가지고 '깨가 좔좔좔 쏟아지는 것을 죽을때까지 하겠다' 이거는 무리입니다. 그런걸 기대하시면 안됩니다.

만나는 사실 맛이 없는 것이에요. 그것을 한번두번 먹을때는 맛이 있지만,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그것만 먹으면 맛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요. ‘아! 이거 죽으나 사나 만나밖에 없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만나의 용도와 만나의 효용을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교회생활을 하고, 형제들과 함께 있고, 부부생활을 하고, 우리의 부모님 있고 자식도 있는 이것은요 하나님이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분적으로 체험하고, 우리로 영생을 추구해 나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보조적인 환경입니다. 이게 절대 전부가 아니에요. 여기서 천당을 다 살려고 하고, 여기서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먹어볼려고 하면 안돼요. 만나는 얼마 안가면 끊어집니다. 여러분 나중에 가면 우리 다 부부간에 사는거고, 엄마 아빠고, 마음에 들고 안들고 할것없이 다 날아갈 겁니다. 어느 때가 되면 그것은 다 지나가고 우리가 지금 아내를 보고서도 ‘형제여 자매여, 그동안 나하고 잘 지내줘서 감사합니다 그 덕택에 내가 지금 이 요단강 건너 이까지 잘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중에 서로 새로운 관계, 영원한 한 몸인 그 관계로 우리가 들어갑니다. 그러니 좋은 부모 못 만났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좋은 부모,아내,남편을 만났다고 해서 너무 좋아하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완전한 양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그리스도께 충분히 나아갈수 있게끔 힘을 불어넣고 우리로 살게하는 양식이니까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의지하는 거지요. 그러나 한계를 알아야 됩니다. ‘만나는 어디까지나 만나다’ 이거지요.

그걸로 광야에서 텐트치고, 만나부스러기 먹고,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앞으로 빨리빨리 갑시다’ 이렇게 하고 있는 판국에 거기서 뭐 벽에다 벽지붙이고 장식하고 그런걸 어떻게 합니까? 오늘 이 반찬은 맛이 있구나 없구나 그런말을 할수가 없지요. 우리 인생길을 크게 놓고, 항상 이 그림을 선명하게 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목표는 여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거지요. 우리는 흔히 말하는 ‘천당가서 잘 먹고, 잘 살겠다’ 그것도 아닙니다. 천당가서 잘먹고 잘산다는 것은 너무 작은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잘먹고 잘산다는 거는 역시 육신안에 있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육신에 있지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몸이 아픈데, ‘이 아픈 몸을 벗어버리고, 좀 편안한 몸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살고 싶다’ 이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지금 아내나 남편이나 가족이 마음에 안드는데 ‘저것 좀 떼버리고 더 좋은것을 좀 붙여놓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주 작은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고 해서 그런 문제들이 아주 해결되어서 아주 신이 나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것은 그때가면 보이지도 않을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그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오늘 우리가 우리것으로 가지게 될것입니다. 내일 우리가 그렇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소망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될 자이므로, 오늘도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5-7) 자꾸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안에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품, 사랑과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 가득하게 되어서, 우리의 존재자체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온 우주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반사하는, 그런것을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무엇이 될지 잘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수, 그것을 먹고 마시겠지요. 그럴때 우리가 먹는것은 지금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만, 아마 지금의 상황으로 굳이 가장 좋게 비유하자면, ‘형제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 찬송, 형제들이 그 아름다운 진리의 말을 하고 사랑이 넘치는 말을 하는걸 듣는것이 아마 우리의 양식이 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 말 한마디를 들을때, 우리는 그야말로 ‘뿅’ 갈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5만원짜리 뷔페 이런데 가서, 가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이구! 이거 먹고싶은것 많은데 배는 조그만하고 오늘 이거 갈등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면, 여기 예를 들어서 10~20명의 형제가 있다면, 10~20명 입에서 한마디씩 나오는 찬송, 그것은 단 한마디만 해도 우리가 그것으로 충분히 배부를 수 있고, 다른 생각이 날 일이 없도록 만족스럽게 될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이 지상에 있는 모든 형제들, 베드로부터 아브라함 노아 에녹 할것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모든사람들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것들을 우리에게 서로 계속 공급을 한다면 ‘이것이 어떨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앞으로 뷔페에서 50~100가지의 음식을 놓고서 고민하는 그런문제가 아니라, 수천, 수만, 수억의 하나님의 생명으로 무장되고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전에 우리가 남편과 살 때, 혹은 어떤 부모와 사랑을 주고받을때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완전한 것들을 우리가 그안에서 받고, 어떤 음식을 먹을때 우리의 만족과는 비교할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배부르게 될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힘을얻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주님의 세계를 온전하게 누리기까지 달려갈수 있기 위해서 보리빵이라도 먹는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리빵 보리떡에 불과한, 개떡에 불과한, 아내와 남편, 그리고 그런 정도에 불과한 월급, 그런 정도에 불과한 우리의 여러 가지 보조적인 장치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을 지라도, 우리가 그걸 가지고 힘을 얻어서 감사하고 앞으로 달려가면 되는것입니다. 지금 여기 앉아가지고 이것타령 저것타령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우리가 정신을 팔아가지고 주님께로 달려가지 못하고, 발목이 여기에 붙잡혀서 인생을 원망하고 삶을 저주하고 신랑을 비난하고 아내를 욕을 해대고 부모에 대해서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는 동안에 그 사람의 영혼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부인처럼. 만나를 만나의 가치대로 제대로 알고 추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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