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산 언약 (1) (출19장) / 녹취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찌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 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니라” (출19장)
출애굽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1장부터 40장까지가 있는데요. 그중에서 1장부터 지난주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18장까지가 앞부분이고, 그 다음 19장부터 40장까지가 뒷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뭘 기준으로 이걸 나누느냐 하면, 앞에 1장부터 18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건져내져 오는 그야말로 출애굽의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고, 그 다음 지금 읽은 19장부터 시작해서 40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이라고 하는 산에서 야영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는 이 과정을 주욱 기록한 그런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하나님의 율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내용가운데 가장 길고 자세하게 설명된 부분이 제사제도와 성전,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소를 어떻게 지을것인가 하는 내용을 주욱 길게 묘사하고 있고,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가지고 교제를 하는 사이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함으로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오는 그 과정에 모세가 안보이니까 기다리지 못해가지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섬기자'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한 내용이 역사로서는 유일하게 이 후반부에 들어있습니다.
후반부는 지금 읽은 19장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내용은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해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않구나!’ 하는 것을 제일 먼저 보게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덜렁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것이 아니고, 많은 절차와 과정들이 있고 그 가운데서도 경고까지 포함해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함부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사실상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근본이 되는 더 큰 한 내용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4~6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언약을 맺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을 맺는 말씀은 여러분들이 이것은 항상 암기하고 또 이것을 깊이 묵상을 해야될 그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자세히 보십시다.
4절을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4) 이것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19:5)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한 일을 보았다면 그걸 알수 있지 않느냐 이말이지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요 강한 임금을 어떻게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주무르는가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믿고 내 말만 들으라' 이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세상의 어떤것도 겁내지 말고 어떤것에도 마음을 두고 그것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라는 거지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들었던 이야기지만, 오늘도 우리가 지금 현재시점에서도 깊이 명심해야 될 일이지요.
우리마음에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한가지 바로 ‘하나님만 믿어가지고 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려고 하는 욕망, 생명을 향한 사람의 욕망과 열정, 이것이 놀랍게도 불신앙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앉아가지고서도 하나님을 못 믿는 사람이 사실 많습니다. 그건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에게만 마음이 쏠려가지고, 어떤 여인에게 마음이 빼앗긴 청년처럼 하나님께만 뿅가서 정말 하나님만 생각하면 삶이 단순하고 그 가는 길이 쉬울텐데, 그기에 휩쓸려서 그것만 따라가다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다 처리되는 그런 인생을 사는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그 하나님에게 그렇게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오늘 우리를 속여놓은 그 근본적인 거짓말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세계가 하나님께 속한것이 아니고 마귀가 우리앞에 쥐고 흔드는 그 어떤 돈과 직장과 육신의 건강과 무슨 좋은 음식 나쁜음식 또는 늙은 부모에 있어서 자식이 모든 것을 쥐고있는 것처럼 그렇게 주권자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죠. 바로 보이는 바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탄의 그런 도구로서 우리를 쥐고 흔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봤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무엇을?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4) 우리는 매일매일의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런 체험을 하고 그런 생활을 지금 해오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분들은 그렇게 생각되는 분도 있겠고, 어떤분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분도 있을텐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보시면 감사하게도 광야에서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안 좋은 환경 덕택에 그런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 경험하고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매일 떡이 내려오고 바위에서도 물이 나오는, 그런 기적속에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들속에서 은혜로 역사하시는 것들을 알만하지요. 과연 독수리 날개로 업어가지고 하나님이 이까지 갖다놓았다는 말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뒤에 하나님을 못믿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을 못 믿는다는 그것은 뭘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적어서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중심에 어떤 영적인 세력의 싸움에서 이 모든 것이 결판이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속 사람을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저 사람 어디로 날아가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걸린 사람을 생각하면, 바로 옆에 있는데 휴대폰을 채워놓고 목걸이에 위치추적기를 채워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내 마음 안에 어떤 병이 들어가지고, 말하자면 신뢰관계가 깨어지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추적을 해도 불안해서 못견뎌요. 그 다음에 어떤사람은, 어디 중동이다 어디 미국이다 어디 가서 기러기 아빠나 돈을 벌거나 하는 것처럼 떨어져 있고 주말부부가 되어도 항상 신뢰가 유지될수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자식도 못믿으면 한없이 믿을수 없어요. 내 보는 눈앞에서 계속 내가 하자는데로 이렇게 해도, ‘혹시 저게 딴 생각을 품는게 아닌가? 내 뜻대로 잘되지 않는게 아닌가?’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오늘 우리안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모든 생활이 다 기적과 같이 그렇게 펼쳐지도록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희들이 만약에 맑은정신 새로운 영 건전한 마음으로 눈을 떠서 본다면, 충분히 내가 살아있고 너희와 함께 하고있고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너희들이 알것이다’ 하나님이 그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기초해서 온 세상은 내가 잡고 있고, 너희들의 삶은 내가 충분히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주길 바란다’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은 안했지만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우리의 정신이 새롭게 되고, 우리의 생각이 온전하고 규모있게 되도록 해야된다는 것을 여기다 사실은 전제로 깔고 있는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하시고, 그 앞에 그런 말을 할만한 근거를 여러 가지로 기적을 일으키고 해서 보여줘도 사실은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생활하는 것은 이겁니다. 교회생활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역사를 막 연출하는게 아니고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는겁니다. 여러분의 생활속에서, 여러분의 몸속에서, 여러분의 모든 상황속에서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듯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떻게 해줄수도 없고, 우리가 서로 그것을 대리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사실은 정신차리게 하는거에요. 피차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악심에 빠지지않도록, 서로 잡아주고 피차 권면하고 흔들어 일깨우는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오셨는가? 사탄이 날마다 세상에서 우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우리를 시험 하고 협박하고 할때,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이러한 사실들로 정신을 새롭게 해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안에 우리가 항상 머물수있게 하는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지금까지도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약속을 맺는겁니다. 계약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이가져오너라 도장도 가져오고... 그래가지고 약속을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네 아버지다’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고 건져낸 창조자이고 구원자이고 아버지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내것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수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의 삶은 말할 필요 없다 말하면 입아픈 것이다 들의 풀도 다 사는데, 네가 왜 못사느냐?’ 그러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19:5) 다시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여 믿사옵니다’ 이런 말 하라는게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내 언약을 지키면” (19:5) 이때 언약이라는 것은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하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율법입니다.
이 뒤에 보면 언약서를 주욱 작성하는데, 언약서라는 것은 민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소가 주인을 잃고 들판으로 돌아다닌다면 ‘얼씨구나 오늘 이 소고기가 내 밥상에 공짜로 오르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끌고가지말고, ‘그것은 니 이웃이나 니 사촌이나 옆의 마을에 있는 사람의 소가 아니냐? 너의 소가 잃어버려졌으면 니가 그렇게 할수 있느냐? 그리고 그것은 내 소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으니, 그러니까 내 소니까 내 사랑하는 자식에게 내가 준거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주었으니 그 소는 니 형제것이기도 하고 네 아버지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는 나를 생각하고 나를 인식해서 그것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품어야 되겠느냐?’ 그걸 하나님이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사람 찾아서 갖다 줘야되지요. 그것이 뭐냐하면 언약서입니다. 언약서라는 것은 겉으로 보면 법이고 그게 어떤 윤리고 율법인데요. 실제내용은 뭐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뻔히 쳐다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거기 있지요? 아버지 거기 계시지요? 내가 아버지를 잊을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뻔히 눈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서 지금 형제를 괴롭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 불의한 일들을 어떻게 할수 있겠습니까? 생각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앞에서 말만하지 말고, 이제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적어도 한번은 문서로 그리고 어떤 하나의 의식을 차리면서, 우리가 동거하는게 아니고 결혼식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뭔가 하나의 틀을 가지고 관계를 맺어보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내산 언약이라는 것이 맺어집니다.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게 ‘시내산 계약’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건 다른말로 ‘모세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모세 언약이라는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면서 그때 비로소 율법과 여러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지침이 될만한 제도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여서 도장찍고 그 다음에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체결합니다. 이 계약관계라는 것은 그냥 평소에 계약을 안맺고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 것과는 다르지요. 이것은 법적인 구속력이 있지요. 우리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우리집 비었는데 며칠 들어와 살아라’ 그렇게 해서 사람이 들어와 사는것하고, 전세 계약같은 걸 맺고 다달이 얼마 지불하고 주인은 집이 새거나 하면 빵꾸를 때워준다든지 그런식으로 한다고 약속하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이러한 계약이 이제 맺어지는데, 이 계약에 충실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19:5,6) 이 뒤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게 될 지위를 잘 보십시오. ‘너희가 만약에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킨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된다’고 그랬습니다. ‘내 소유’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자식이나 하나님의 식구가 된다는 얘기지요. 하나님이 챙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우리는 예를 들어서 여기 앞에 아이들이 열명쯤 우글우글하면서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울기도 하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내 아이가 거기 들어가 있으면 내 아이 소리밖에 안들립니다. 애가 울어도 딴 사람들은 누가 울었는지 잘 모르는데 자기 엄마는 금방 그걸 딱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관심과 나의 모든 신경이 그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9:5)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바가 되고, 아신바가 되고, 하나님의 목적에 쓰이는 자가 된다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두말하면 입아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한다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결정된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잘될 수밖에 없도록 결정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0) 그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시고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그냥 이루어진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댓가, 아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사람을 새롭게 하고 깨끗케 한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속이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에베소서에서 공부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누가 엿바꿔먹을려고, 몰래 찝어 갈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날마다 우리를 공격하지만, 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를 밀까부르듯하려고 내게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믿음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기도하였노니” 날마다 밀 까부르듯이, 촌에서 곡식 터는 키에다 곡식 얹어서 탁탁탁 털듯이, 이렇게 날마다 우리를 흔들어대지만 주 예수님이 우리를 딱 붙잡고 앉아서 ‘절대로 이것은 떨어져서는 안된다 내가 이 곡식 농사짓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게 땅에 떨어질수 있느냐’ 딱 받치고 꼼짝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를 말로든 생각으로든 이렇게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인식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첫째 우리가 안식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심할수 있습니다. 이걸 딱 보면 잘못될 수가 없어요. 은행에서 돈이 딴데로 수송되어 가는데, ‘저 돈이 어디 길바닥에 떨어져서 맨홀로 들어간다든지 어디 불이 난다든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누가 염려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 만들어진 한국은행에서 돈을 수송을 한다고 그럴때 ‘저 돈이 관리가 부실해서 위험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그런걸 염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건 너무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관리와 보호속에서 해당되는 목적에 쓰이게 되는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을 이제 소개를 받습니다. 결국은 ‘나는 너의 아버지고 나는 실수가 없고 실패가 없고 너희들에 대해서 변함이 없는 확고한 하나님인고로 너희들은 나를 믿어도 된다’ 이것을 이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도장을 찍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모세가 와서 전달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에 대해서 듣고서는 8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19:8)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을 듣고 난 다음에 ‘아멘!’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를 능히 구원하신 구원자시고, 앞으로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런 복을 받고싶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대답이지요. 이렇게 말해야되지요. 이런 말을 듣고나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요.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여기 8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19:8) ‘백성의 말’이라는 것을 상당히 여기서 지금, 이게 당연한 대답인데도, 강조해서 다루고 있는것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9절에도 보시면,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19:8,9)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백성들이 나를 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반문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지금 ‘우리가 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일제히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느냐 하면 ‘그들이 나를 정말로 믿는다고 생각하느냐?’ 그 얘기를 하신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냥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은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마음에 자다가 꿈에서 생각하게 할수도 있고, 옛날에 계시를 받는 방법이라는 것이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하필이면 ‘온 백성을 산앞에 다 모아놓고, 위에서 무슨 구름과 불이 확 내려오는 것처럼 하고 천둥 나팔소리가 나고 하는 이런형식을 취하느냐’ 이걸 하나님이 설명을 하시는거에요. ‘내가 이제 그런식으로 백성들 가운데 등장을 할터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안하면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여기 1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19:9-11)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당연한 말씀에 옳은 말씀에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되지요 앞으로 잘할게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은 여기에 반응하신 내용이 뭐냐하면, 첫째는 옷을 빨고 둘째는 산에 올라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옷을 빨아라는 것’과 그 다음에 ‘내게 직접 나오지 마’ 이것입니다. 산에다 지경을 정하여서, 이렇게 나무 말뚝같은것 박아가지고 ‘접근하지 마시오’ 하는 이런 말뚝을 박아가지고 ‘저기 뚝 떨어져라’ 이것입니다. 만날려고 하면서 견우와 직녀처럼 간격을 두고서 ‘이리 오지 마’ 이런 얘깁니다. 그 다음에 뒤에 보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는것을 딴사람은 다 모르는데, 하나님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혼자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상대하느냐? 죄인을 상대하는 겁니다. 못믿을 죄인을 상대하는 겁니다.
전에 텔레비전에서 거짓말을 아주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을 취재해서 다룬 그런 다큐멘타리를 한번 내보낸 적이 있는데, 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거기 등장할때는 지금 현재 거짓말 막하는 사람같으면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할것 아닙니까? 그런데 과거에 거짓말을 많이 해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이렇게 했는 사람이 지금은 적어도 그런 생활을 청산할려고 결심을 했다든지, 아니면 현재 많이 청산되었다든지 하는 그런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이제 이 거짓말 하는 것을 취재를 하는거에요. 그런데 한참 취재를 하는데, 이 거짓말 하는 사람의 과정이라는 것이 참 불행하잖아요. 앞에 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인생을 살아온 결과로 된것이니까, 주로 엄격한 부모와 용납이 안되는 환경속에서 사람이란게 거짓말을 자꾸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것들을 취재하고 이래서 관계를 좀 좋게 만들려고 하는 이런 노력들을 해나가는 그런것을 주욱 비춰줬는데, 끝에가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게 뭐냐하면 그 거짓말 잘하는 어떤 한 사람의 지금까지의 반성의 과정이라든지 노력의 과정이라든지 그 다음에 설명을 주욱 해왔던 이 내용이 몽땅 거짓말인거에요. 그래서 뒤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거 참 일관성이 있네’‘한번 거짓말 쟁이는 영원한 거짓말쟁이’ 그러니 결국은 텔레비전의 프로듀서 PD조차도 갖고 놀은거에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이게 텔레비전에 나오는것인데 그렇게 할수 없잖아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런데 그게 알고보니까, 자기도 자기가 그런 거짓말하는 줄 모르고 있는거에요. 이게 정신병인겁니다. 거짓말을 계속하는 이게 병인거에요. 이건 누가 알수있나요? 아무도 몰라요. PD가 몰랐을뿐 아니라 워낙 거짓말을 정교하게 해서 사실처럼 했단 말이에요. PD가 몰랐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것은 지금 뭐라는 겁니까? 거짓말 한 자기도 그걸 거짓말인줄 모르고 한거에요. 사실인줄로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는거에요. 거짓말을 지어내어서 하는데, 자기스스로 감동되고 믿어가지고 나중에 그 거짓말이 정말로 거짓말이라는 걸로 탄로나니까, 어안이 벙벙해가지고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하면서 자기가 놀래 자빠지는거에요. 그래서 딴사람이 보면 무슨 쇼하는가 싶은데 쇼하는게 아니고, 이게 결국 하나님밖에는 인간의 실상을 모른다는 겁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대답을 한것은요, 진지하게 대답을 한겁니다. 이건 거짓말 한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그냥 장난으로 이야기하거나, ‘지금 그렇게 말해놓고는 다음에 가서 우리마음대로 하지’ 이렇게 한게 아닙니다. 진실로 대답을 한거에요. 아까 제가 베드로에 대해서 주 예수님이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는 상황인데, 내가 너를 붙들고 있다’ 라고 말한 걸 우리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너는 나를 위해서 목숨도 바치겠다고 했지만 실은 오늘밤에 네가 나를 부인할것이다’ 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니가 영 떨어질수는 없다’ 그 얘기를 한거에요. ‘그래서 너는 돌이킨후에 니 형제들을 굳게 하라’ 그 말을 한겁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 그러니까 베드로가 사탄이 막 흔들어대는 이런 실정인데도 주님이 잡고 있다는 것은, 조금 있다가 배신할거라는 그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 한겁니다. 베드로는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생각하지요. ‘주여 절대로 그럴일이 없습니다. 다 주를 버리더라도 내가 죽는데까지라도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펄펄 뛰면서 ‘주님이 어떻게 이렇게 서운한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일까요? 한편으로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현재 마음은 말고의 귀를 벤 그것을 보십시오. 말고의 귀를 베었다는것은 전에도 제가 설명드렸습니다만, 칼을 휘둘러서 사람의 귀만 어떻게 벱니까? 귀를 잡고서 자르지 않는 다음에는 칼을 휘둘렀는데 어떻게 귀를 벱니까? 적어도 어깨가 날아가버리지. 만약에 귀를 베어 보십시오. 어떻게 되는가 칼을 가지고 귀를 확 쳐 보십시오. 귀에서 딱 멈추나요? 이건 뭘 말하냐면 그 사람 죽일려고 목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하니까 귀만 날아가버린겁니다. 이것은 로마군대에 대해서 베드로가 과감하게 대항한 것입니다. 이건 결국 로마의 군대와 백성의 제사장과 관리들이 파송한, 이러한 권세있는 세력에 대해서, 그야말로 쥐뿔도 아닌 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열두제자 일당이 감히 맞선 것입니다. 이건 뭘 믿고 한겁니까? 예수님이 죽은자도 살려내는 것을 이사람들이 똑똑히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베드로의 마음은 ‘온세상이 진짜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이건 우리가 마음대로 할수있다 아무것도 겁 안난다’ 그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너는 아니다 너는 나를 배신할것이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가지고 행동으로 보여줬지요. 이건 입만 가지고 하는게 아니에요. ‘나는 주님을 위해서 겁나는게 없습니다’ 이걸 행동으로 보여줬는데, 그 자리에서 ‘너는 나를 배신할것이다 그것이 너의 본질이다’ 이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서 시내산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일차로 주목을 해야되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는 것인데, 인간은 못 믿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약속을 백성들에게 주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계약을 맺는 이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먼저 주지시키는 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나올수 없고 나도 너희에게 그냥 바로 가서 악수하고 교제를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는데서부터 우리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우리는 예수를 오랫동안 믿어왔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하고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진실하고, 행동이 잘 뒤따르지 못해서 좀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마음은 하나님께 열려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할수 있다, 믿을수 있다’라는 이런 마음을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도, 지금 그러한 우리에게 이 순간에 찾아오셔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너는 내 앞에서 잠잠하라’ ‘너는 내앞에 엎드리고 저기 물러가 있어라’ 그리고 ‘옷을 빨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것들 말하자면 세상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거기서 재미를 얻고 거기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인간의 현재상태를 하나님이 이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자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정조를 지키는 이런 상태가 아닌것을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144000명의 산위에 있는 이긴 사람들, 승리자들은 여자로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특징이 있지요.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더라’라는 이 특징과 그 다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라는 특징 그 다음에 ‘여자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가운데서 진실로 여자로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께 정조를 지키는 사람의 숫자는 아주 적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아! 우리가 죄인이구나’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예, 하나님의 말씀에 일제히 그대로 행하리이다’라고 응답만 할 것이 아니고, ‘주여 당신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는 이 만큼이나 당신과 우리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그 사랑안에 거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그 세계안의 그런 복된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취하고 열망하고 붙잡고 할수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우리안에서 당신의 그 약속을 이루시고, 당신의 신실함과 열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말씀하신 목적대로 데리고 가십시오’ 이렇게 나왔어야 사실은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반드시 나왔어야 될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다 그대로 행하리이다’ 이 말만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다음에 나오는 반응이 뭐냐하면, ‘너희는 옷을 빨고 나에게 직접 나오지 마라, 그 다음에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마라’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나에게만 일편단심, 내게서 오는 즐거움, 내게서 오는 위로로 너희가 위로를 삼고 내가 너희를 이쁘다 해주는 그걸로 너희들이 사랑이 충만해서, 그 마음에서 ‘아! 행복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여자에게 마음이 가 있을뿐이다, (여기서 여자라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 대한 여자라는 그 말 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가운데서 우리가 서로 마음에 좋아하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그것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여자인것처럼, 여자에게 남자이기도 하고, 부모에게 자식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사모하는 어떤 명예와 벼슬과 세상의 재물 이것들을 다 말하는거에요. 그런것들의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그리워합니까?)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모르고 있고 내가 어떤 영광이고 어떤 사랑스러운 대상인지를 너희가 못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도 나를 믿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거다” 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더 좋은 거라고 생각이 안되는데, 내가 돈은 좋은 줄 알겠고, 이쁜이는 내가 좋은줄 알겠는데,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가까이만 있으면 더 딴게 생각나는게 없고 너무너무 행복하게 된다고 생각이 안되는데 내가 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고 거기서 반응을 드러낼때, 우리는 그냥 보통의 관계처럼 이렇게 할수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말은 ‘내(하나님)가 믿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기서 아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어요. 이것을 사실은 모세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40년간의 실패의 세월을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다니면서 모세가 보고난 다음에 모세도 역시 그 말을 합니다. 신명기 30장에 보면, 신명기 27,28,2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이런 복을 받고 그러지 아니하면 이러이러한 저주를 받을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다음에 뭐라고 했느냐하면, ‘이 모든 복과 저주가운데서 너희들에게는 저주만 임할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것이다’ 이 말을 했습니다. 모세에게서 이스라엘은 자기자신과 같고 자기자식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분신입니다. 자기 얼굴에 침뱉기 하는것도 아니고, 그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이 ‘하나님이 너희들을 고생시켜서 너희들이 세상에서 정말 머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말석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있게될 때에 하나님의 이 말씀들이 다시 생각나게 될것이고, 그럴때에 너희들이 주여 우리는 죄가운데서 지음받았고 죄로 온통 점철 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나는 나를 도무지 이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를 신뢰할수 없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쳐다보고 은혜를 구할 때, 자기에게 답이 없으니까 자기는 대책이 안서니까, ‘주여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렇게 할때 하나님이 그 위에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이 그 위에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셔서 너희들 속에서 처음 약속했던 그것을 이루어 갈것이다’ 그 말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의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계약을 맺는 좋은 자리를 지금 구경하는건데요.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부터 나는 너희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싶지만 들을수가 없다 (그래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말자 그럴수는 없는거고, 이런줄 알면서 불렀으니까) 그러니 너희들은 이제 절차를 거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 절차라는 것은 결국은 제사제도입니다. 결국은 어린양의 희생, 지금 말로 하면 뭡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나오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십자가에 갖다놓고, 너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철저하게 내려놓고 성령에 순종하는 그것으로 나와의 관계를 가지자’ 이것입니다.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고, 옷을 빤다’ 이것은 결국 뭡니까? 죄를 처리하고 십자가로 자기를 부인하고, 나의 사랑 나의 목표와 나의 야망과 나의 열정, 나의 좋아하는 것들을 다 버리고, 그리고나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을 하는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때에 그리스도도 모르고 성령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할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었으니까 실감하지 못했을거에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런 이야기로 밤낮 모였을때 마다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어떻게 좀 낫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이 좀 있지요? 그러면 그대로 하는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때는 제가 솔직히 생각 할때 ‘이건 소귀에 경읽기’입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 좋은 하나님이 그들과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왜 이와같이 어렵고 어려운 이런 관계를 그렇게 가질려고 하시는건지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며, 하나님이 간단히 말씀하시면 우리가 ‘예’ 하면 될건데 뭘 이렇게 자꾸 어려운 관계들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려고 하면 양을 죽이고 그 다음에 제사장은 그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하나님이 피워놓은 등불, 하나님이 피워놓은 향을 바라보는 일만 하면서 잠잠히 있어야 되는, ‘왜 이런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갖도록 하셨는가?’ 이걸 아마 전혀 몰랐을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람들보다도 적어도 3500년 더 살았습니다. 3500년 동안에 배웠어야 될게 뭐냐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짜 죄인이구나, 인간이 진짜 아무것도 할수 없구나!’ 그것을 체험적으로 배우는거지요. 여러분과 저속에 그런 체험들이 있고, 성령이 우리안에서 그래서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틀안에서 우리 인생을 이렇게 시작해 나가도록 우리안에서 제대로 가르쳐왔다면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형제들 사랑하고 존중하고 복종하고 하는것을 에베소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하는데요. 그런것들은 우리가 그런 자기에 대한 신뢰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던지 내가 그대로 겸허히 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있을때에 아주 쉬운일들입니다. 부모에게 복종하는것도 쉬운일이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이것은 아주 쉬운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주는데 가서 줄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에요. 우리안에서 다 이러한 성령의 강한 일깨우심이 있어가지고, 이 언약,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을 영원히 섬길수있는 그런 사람으로 실제 우리삶이 앞으로 진행될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