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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과 - 성령과 육신

2010.05.06 14:19

이상봉 조회 수:4512

 

 

 

제18과 성령과 육신 (8:10-13)


거룩한 삶의 길


4.성령(생명)으로 말미암는 자유와 승리의 삶 (8장)


1.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아들의 생명을 누리게 됨 (8:1-13)


1.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성령이 거하는 사람)의 존재 상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8:10)


 

2.'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라는 말에서 '몸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 몸이 장차 죽게 될 것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몸이 지니고 있는 어떤 죽을 성질을 말한 것인가? 그리고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몸이 죽었다는 것은 우리 몸의 성질에 대해 말한 것이다. 즉 몸이 영생의 성질(부활 생명)을 지니지 못하고 죽을 성질(썩어지고 쇠하여지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타락한 인류(아담)를 죽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 죽을 자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억지로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길을 떠나 죽을 길로 갔기 때문에 자연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타락(하나님을 떠난) 후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졌다. 그렇다고 사람이 즉시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 없이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생명을 유지하는 기간이 얼마간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죽었다. 아담이 죽고 모든 인류가 죽는 것은 사람 안에 영생의 성질 곧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이 죄와 사망의 성질은 사람을 결국 죽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을 매우 약한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 질병과 각종 연약함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사망은 몸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전적으로 먹통이라는 데 있다. 몸은 하나님의 요구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다. 머리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더라도 몸은 따라가지 않는다. 몸은 몸 자체의 성질대로만 간다. 그것은 오직 편하고 쾌락을 즐기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몸이 죄로 인해 죽은 가장 뚜렷한 결과이다.


 

이 '죄로 인해 몸이 죽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몸은 죄로 인해 죽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그의 육신적 생명을 사용하여 곧 몸의 자연적 능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그는 계속 실패하고 말 것이다.


 

3.'영은 의로 인해 산 것이니라'라는 말에서 영은 성령님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우리의 영을 가리키는가? 또 영이 살았다(생명이다)는 것은 우리의 어떤 상태를 설명한 말인가?


 

'영은 의로 인해 살았다'는 말은 우리 영이 그리스도의 의(구원)로 인해 살았다는 말도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신다는 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보건대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영은 성령님을 가리킨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죽은 우리 몸에 역사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일으키신다. 몸이 죽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을 위할 자로 만드시는가? 하나님은 죽은 몸을 살리거나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죽은 것은 죽은 대로 내버려두고 그것 대신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가 우리 생명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가 되도록 만드신다.


 

4.바울이 성령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으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로 표현한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바울이 그런 표현을 썼는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바울이 하나님을 굳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활 생명의 능력]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생명이 지닌 [살리는 능력]에 대해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생명(부활 생명)은 예수님을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이 생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①살아 있을 때는, 우리 죽을(약한) 몸에 생명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고 ②죽은 후에는, 마지막 날 부활할 수 있도록 만든다.


 

5.위와 같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이 겪게 될 경험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생명이 되면 죽을 몸이 살리심을 입는다. 즉 몸이 하나님에 대해 살아난다는 것이다.


 

6.성령께서 죽을 몸을 살리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성령께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시는 것은 완전한 몸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강림하실 때 즉 최후의 부활 때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 죽을(약하고 무능한) 몸이 살아난다는 것은 단지 우리 몸이 하나님의 목적에 쓰일 수 있도록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은 여전히 죄의 성질을 지니고 있고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며 정욕적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용도에 쓰여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이것은 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길 힘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신 자체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고백했는데 성령께서 그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7.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은 언제 누구에게 무슨 빚을 졌다는 것인가? 또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8:12)


 

8.육신에 빚진 자로서 우리가 육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하며, 불가능하다면 왜 바울은 육신(의 요구) 대로 살지 말라고 했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2,13)


 

누구든지 육신대로 즉 육신의 능력대로, 육신의 생명대로만 산다면 육신의 요구를 거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욕으로 불타올라서 간음을 하지 않고는 죽겠는 사람이 범죄하지 않고 자기를 보존하는 것, 또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싶어 죽겠는 사람이 그 돈을 거기에 쓰지 않고 남에게 준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잠시는 피하더라도 결국은 하고야 만다. 육신은 육신의 생리적, 본성적 요구를 거부할 길이 없다. 그것이 정당한 요구가 아니라 부당한 요구라도 육신 스스로는 그러한 육신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육신에 빚진 자, 즉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육신의 생명대로, 육신의 능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는 사람은 능히 육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육신의 생명으로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실 전적으로 육신에 빚진 자는 아니다. 육신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정당한 육신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서는 누구나 육신에 빚진 자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는 자는 육신의 부당한 요구 즉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끝없이 정욕과 탐욕을 좇아 몸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는 육신의 과도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어 우리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며 힘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9.신자가 영을 좇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 또 육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영의 인도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10.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을 때 반드시 죽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신자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의 인도를 받으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가? 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는데 이 '살리라'(산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1.왜 육신대로 사는 자는 살 수 없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만 살 수 있는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6:13)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후9:8-11)




[성령과 육신]


 

로마서 8:10-13은 우리 육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고 성령께서 어떻게 육신을 돕고 계시는지에 대해서와 우리가 육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우리의 육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것이니라"(8:10) 원래 우리는 육신(몸)과 영이 다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를(성령님을) 그의 생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몸은 여전히 죽은 상태이지만) 영은 다시 살아났다. 여기서 말하는 '영이 살았다' 또는 '영이 생명이다'라는 말은 '영'을 우리의 영으로 보느냐 아니면 성령님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지로 해석할 있다. ①영을 우리의 영으로 본다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 말미암아 살았다는 뜻이 되고, ②영을 성령님으로 본다면 말의 의미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죽은 몸의 생명을 대신하여) 우리 생명이 되셨다는 뜻이 된다. 어떻게 해석하든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 성령님이 우리 육신에게 작용하여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육신에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인해 우리의 영이 살았다는 것도 사실이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의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사실은 그들이 모두 육신은 죽은 상태에 있지만 영은 살아 있으며 그것이 몸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내적 상태와 외적 상태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적 존재는 생명으로 넘쳐흐르지만 외적 존재는 아직도 사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한편으로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이 충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의 껍데기를 쓰고 살면서 연약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은 전혀 다르다. 영의 생명은 참된 생명이지만 육의 생명은 생명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실상 생명이 아니라 사망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육신의 몸이 여전히 '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이 제아무리 신령한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그의 육신은 여전히 '죄의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바라는 바는 이 몸을 벗고 장차 영광스럽고 부패하지 않는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다.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5)


 

"예수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로마서 8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영을 살리시는지에 대해, 혹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죽은) 몸의 생명을 대신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비해 11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0절은 육신은 아직 죽은 상태에 있으면서 영이 살아나는 것에 대해 혹은 영이 몸의 생명을 대신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에 대해 말했지만, 11절은 영이 살아난 후(또는 성령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신 후) 육신도 살게 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영이 살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생명을 얻어 산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죽었다는 것은 현재 우리 몸이 물리적으로 죽어서 썩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성질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진바 죄의 몸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얼마 안 가서 죽을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금도 육신은 무덤을 향해 가고 있으며 계속 약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얼마 가지 않아 정말로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영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다. 또한 몸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는 지극히 무력해서 하나님께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기에는 육신이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육신은 죽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육신의 생명(힘)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활동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은 사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사망만 낳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간증하는데도 몸(육신적 생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육신이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즉 육신의 생명은 곧 사망이기 때문에 육신이 영의 생명을 따라 일을 하려면 육신의 죽은 생명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생명을 가진 성령의 뜻을 행할 수도 없고 행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육신은 성령에게 거침이 되고 성령을 거스려 싸울 따름이다. 그러면 우리의 육신이 성령의 요구에 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그것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고 풀어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같은 역사를 성도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즉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입은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장차 성령님에 의해 살리심을 입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성도의 죽을 몸이 살리심을 입는데 있어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이라고 해서 조건을 내걸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있다. 왜냐하면 8: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육신도 이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죽을 몸도 생명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장차 성도가 맞이하게 될 육신의 부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주제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로 말미암아 장차 있게 될 몸의 부활을 비유로 들어 [지금 우리의 육신이 받는 생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부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죽을 몸(mortal body)이라는 단어 대신 죽은 몸(dead body)이라는 단어를 썼어야 할 것이다. 즉 아직은 죽지 않았지만 장차 죽을 운명에 있는 육신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을 살리시고 영의 생명이 된 것이 분명한 실제(현실)이듯이 또한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는 것도 엄연한 실제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실제로 경험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죽을 몸에 생명을 준다는 것은 거듭하는 것과는 다르다. 거듭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영의 소생을 의미하지만 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게 될 육신적 특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죄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된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스러운 형체로 변화된다는 것도 아니며, 죽을 몸이 永生不死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들은 땅 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 '질그릇'의 구속은 장차 주님이 다시 임하셔서 우리를 영접하실 때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죽을 몸에 생명을 준다는 말의 참 뜻은 (1)우리 육신이 질병에 걸렸을 때 건강을 회복해 주고, (2)우리가 질병에 신음하지 않으면 현재와 같이 건강한 상태로 우리 육신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님은 우리의 지상 '장막'을 강건하게 보호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데 육신의 질병이나 연약함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이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조건으로 정하신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죽을 몸에 성령께서 생명을 공급하심으로 강건함을 입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성령께서 육신의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제공하시는 생명의 공급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받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몸을 하나님을 위해 산 제물로 드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급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공급하심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육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8:1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육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불타는 육신의 정욕의 종이 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육신(몸)이 신앙 생활에 큰 짐이 된다. 사소한 육신적 장애만 있어도 그들의 신앙 생활은 변동을 겪는다. 가벼운 질병이나 약간의 육신적 고통만 닥쳐도 그들은 당황하게 되고 자기 연민(自己 憐憫)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태로는 영적인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이는 앞에서 설명한 것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0절에서는 "죄로 인하여 몸이 죽은 것"을 가르쳐 주며 11절에서는 "성령이 죽을 몸에 생명을 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육신의 상태를 근거로 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요점은 이것이다. 첫째, 죄로 인해 우리의 육신이 죽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려 범죄하는 죄의 몸을 입고 살 수밖에 없다. 둘째, 성령이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 필요가 없다. 이처럼 성령의 공급하심을 힘입어 우리 속사람은 아무런 (육신의) 장애를 받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대로 쓸 수 있다. 전에 우리는 다 육신에게 빚진 자들로서, 육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육신의 정욕을 제어할 힘이 없었고 또 육신의 힘을 쓰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께서 친히 육신을 제어하시며 또 육신에 힘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육신에게 빚진 자처럼 육신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 이제는 육신의 정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도 없고 육신의 허약이나 질병이 우리를 더 이상 좌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도 땅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합당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의 정욕에 어느 정도 좌우되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빚을 졌다면 그것은 도리어 성령님께 진 것이다. 죽을 몸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께 빚을 졌지 육신에 빚을 진 것은 없다. 만일 누가 우리가 땅에 거할 동안 이 장막(육신)을 적절히 유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는 것 자체를 육신에게 빚지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육신에게 빚진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육신에게 복종하여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만큼 특별한 빚을 지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는 지금 육신 자체의 생명력(힘)으로써가 아니라 성령님의 생명 공급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시며 도리어 그렇게 하도록 도우신다. 적절한 의식주의 공급과 적당한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활이 이런 것들을 돌보는 일로 일관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하지만 이같은 몸을 돌보는 일이 지나치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것이 마치 생의 목적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인 생의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합당한 요구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생각하거나 사랑해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마음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분명히 합당한 육신의 요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또는 그 밖의 필요를 위해서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그 요구들을 유보하거나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빠진 것은 영의 요구와 육신의 요구 중 육신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실패한 한 예이다. 비록 합당한 요구라 할지라도 그것이 영의 요구(하나님의 요구)와 상충될 때는 즉시 그것을 거절하고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 매우 목이 말랐지만 복음 증거를 위해 갈증을 참으심으로써 몸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성공하셨다. 우리는 이제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므로 더 이상 육신에게 져서 정욕대로 살며 죄를 짓거나, 육신의 허약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지체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만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거절하고 육신대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도 죽는다. 그러나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받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사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제한된 육신의 생명을 더욱 단축시키며 그렇지 않아도 약한 육신의 생명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 죄는 몸에 영향을 남기고 그 영향의 결과는 물리적인 죽음의 재촉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실제로 몸에 해로운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장수하며 건강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이 주신 생명을 따라 삶으로써 육신 안에 있는 사망의 역사를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망은 육신의 생명을 계속 단축시키고 약화시킬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는 말씀은 우리가 받은 성령님이 우리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 분 즉 생명의 원동력이 되실 뿐 아니라 그 육신의 일(몸의 행실)을 소멸해 가시는(죽이는 것을 돕는) 분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 안에서 육신의 능력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누르기를 원하신다. 만일 육신의 힘이 계속 발휘된다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아무 역사도 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 몸에 생명을 공급하심과 아울러 우리가 육신의 일을 죽이는 것을 도우시는 것이다.


 

어떤 신자들은 전혀 성령의 일을 도모하지도 않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전에 세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육신의 일만 도모하며 육신의 힘으로 자기의 원하는 일들을 이루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그 몸에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다. 어떤 신자들은 성령께서 자기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일을 도모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 육신의 힘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건강하고 장애 없이 자기 원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사람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생명을 공급하시지 않는다. 성령께서 자기 힘으로 자기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에게 건강과 힘을 주시겠는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 성령께서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기도록 도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고 다시는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수고와 노력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情과 욕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박았다.(갈5:24)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알고 있는 많은 신자들이 실제 삶에서 이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차지하고 있는 성령님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자가와 함께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것이다. 성령님 없이는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님만이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은 그리스도의 업적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게 하시며 또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경험하게 하신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듣고도 성령으로 인한 진정한 깨달음을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진리는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고 말게 될 것이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6:6)는 진리를 아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의 소욕의 종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아(육신의 뜻과 힘)를 버리고 온전히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때만 우리는 우리 육신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6:12-20의 말씀은 로마서 8장의 말씀과 함께 성도가 그 몸(육신)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니라" (고전6:12)


 

이 말씀은 육신에 대해 말한 것이다. 본래 하나님이 내신 모든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욕구 또는 性적 욕구 등은 자연적이고 합당한 욕구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또 합당한 육체의 욕구라고 해서 사람이 이런 것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사람(동물적 성질을 지닌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는 육신적인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지 자유로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아들이라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연히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주님을 위해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유인이므로 무엇이든 영이 원치 않는 일을 (비록 그것이 육신의 합당한 요구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食物은 배를 위하고 배는 食物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6:13)


 

13절의 전반부 내용은 12절의 전반부와 일치하는 면이 있다.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지만 그것들은 다 영원한 것들이 아니고 장차 폐해질 것들이다. 또 13절 후반부에도 12절 후반부와 일치하는 면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적 충동을 완전히 딛고 일어서서 자기 몸을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바칠 수 있다.


 

"몸은 주를 위한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바울은 식물(음식)과 몸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서 "몸은 주를 위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주 예수님은 광야에서 식물 문제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때 주님은 몸이 식물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으며, 그러므로 식물이 자신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음식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바울은 음란에 대해 말했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주를 위하며" 음란은 몸을 더럽히는 죄다. 음란은 "몸이 주를 위한다"는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이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은 결혼 밖의 부정한 性 관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혼한 부부간의 지나치게 방종적인 性 관계도 포함한다.


 

바울이 위의 말씀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육신적 요소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주를 위한 것이므로 주님 혼자만이 그것을 주장하실 수 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이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그것은 주님께 기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의의 병기로만 쓰여야 한다. 영혼의 보전은 육신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육신에 속한 모든 감각이나 행동, 음식과 언어에서 주님을 위한 성별을 이루지 못하고서는 가 완전히 주님을 섬길 수 없으며 완전한 거룩에 이를 수 없다.


 

"몸은 주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주님을 위해 올바르게 간수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몸이 주님께 속해 있다고 해서 주님이 강제로 우리 몸을 빼앗아 쓰실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를 통해서 (영혼 뿐 아니라 몸에서도) 온전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스스로 몸을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이나 신체의 허약, 또는 고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자기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칠 것을 권유하신다. 이런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채찍이며 징계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 그들이 주님께 완전히 헌신하면 그들의 질병이나 고난은 중지되고 허약함도 보완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징계를 통해서 육신은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징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람의 영과 혼은 위하시지만 몸을 위하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육신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니며 아무런 영적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분명히 "주는 몸을 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육신 문제를 주님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는 하지만 육신의 연약함이나 질병으로부터는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 질병만 주님으로부터 치유 받으려고 하지, 육신의 질병에 대한 치유는 주님께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몸의 문제는 오직 인간적 방법을 따라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땅에 계실 때 많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는 몸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주님의 목적이 오직 사람의 육신적 질병을 고치는데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의 치료를 받았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육신적 치유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육신도 주님의 구원 역사의 대상에 포함된다. 다만 그것이 구원의 궁극적이고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었을 따름이다. 주님께서 육신적 치유 역사를 베푸신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可視的 구원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건지시는데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영혼에 이어서 몸도 구속 받게 될 것이므로 주님은 몸도 위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씀은 그 앞의 "몸은 주를 위한다"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다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를 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또한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널리 계시지만 세상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신(몸)을 드리는 사람에게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합당한 인격 속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비가 산이나 골짜기에 똑같이 내리지만 패인 곳에만 물이 고이는 것과 같고, 햇빛이 모든 곳에 다 비취지만 그것을 받아서 광합성 작용을 하는 구조를 가진 植物만이 그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강건을 누리기를 원하시지만 오직 그를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들만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이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생명(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원한다면 자신의 몸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써야 한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은 우리의 헌신을 기초로 주님께서 우리 육신에 그의 생명과 능력을 부어 주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당신께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을 돌보심으로써 그들이 마음껏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호하시는 것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은 다음 몇 가지 뜻을 지닌다.


 

⑴ 주님께서 우리를 육신의 죄에서 해방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죄란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잘못되고 지나친 행동들을 가리킨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쉽게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쉽다. 사람은 몸이 약하여 밖으로부터 오는 여러 정신적 육체적 짐들을 감당하기 힘들어지게 되면 신경 작용이 매우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성적 욕구가 특별히 강한 사람들도 이런 육신의 결함(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기 쉽다. 세상의 많은 육신적 죄들이 알고 보면 이같은 육신의 생리적 결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씀은 이런 육체적 결점들이 있는 사람에게 주님이 역사하셔서 그들을 그러한 육신적 죄로부터 지켜 주신다는 뜻이다. 아무리 연약한 몸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범사에 주님께 순종할 때, 그리고 '주는 몸을 위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연약한 몸을 이끌고 기꺼이 주님을 섬겨 나갈 때, 그 사람은 그의 여러 육신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말미암을 수 있는) 육신의 죄들을 딛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⑵ 주님께서 우리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질병에서도 해방시킬 수 있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씀은 곧 "주는 질병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질병이란 결국 육신 속에 역사하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는 죄에서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질병에서도 보호하신다.


 

⑶ 주님께서 우리 육신에 부활 생명을 공급하셔서 활력 있고 풍성한 몸의 건강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그의 몸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아 왕성하고 강건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좇아(주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육신으로(옛 사람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부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몸의 필요를 다 아신다. 그러므로 몸이 건강을 누릴 수 있도록 몸에 필요한 모든 힘과 생명을 공급하신다. 여기에는 위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생명의 역사 외에도 적절한 衣食住의 공급 및 운동과 휴식의 기회 제공, 건강을 위한 지혜의 공급 등이 다 포함된다.


 

⑷ 주님께서 몸의 영광을 위한다는 뜻이다. 이는 몸의 장래와 관계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몸은 죄로 인해 죽은 몸이기 때문에 아무리 주님이 역사하시더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온전히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몸을 쓸 수 있기 위해 위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임시로 강건함을 누릴 따름이다. 그러나 장차 때가 이르면 이 죄의 몸, 사망의 몸이 썩지 않을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낮은 육신의 몸을 벗고, 영광스런 하늘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다음 절에 나오는 바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6:14)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장차 있을 육신의 救贖(구속)'에 대해 언급한 말씀이다.


 

"주는 몸을 위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분명하게 경험하려면 반드시 "몸은 주를 위한다"는 진리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바치며 범사에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몸에 부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육신의 욕망과 쾌락을 좇아 사는 사람은 결코 몸을 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6:15)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했다. 우리의 靈(영)만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이제 그리스도와 따로 존재하는 일반적인 피조물로서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단지 관념적인 이론이 아니라 명백한 실제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성령)과, 우리의 혼은 그리스도의 혼(知,情,意)과,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제외한 연합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주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은 장차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가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때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현재의 이 연합도 완전한 것이다. 성령의 보증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연합은 장차 있을 연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크게 위안을 준다. 우리에게 어떤 육신적인 약점, 결함, 질병이나 허약함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주님의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신체적인 필요에 따른 힘과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이 심각한 육신적 연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육신의 연약함에 눌려서 계속 누추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을 주님께 바쳐서 그 몸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공급을 받아야 한다.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 주님께 바치지만 보잘것없는 상태에서라도 주님께 쓰이다 보면 주님께서 몸을 위해 일하심으로 인해 강건하고 유용한 몸의 상태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받아들이고 육신적 필요를 따라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와 몸의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몸으로 범죄(음행)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각종의 징계들(질병과 사고, 사망)을 받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고전6:16) 창기와의 연합에 대해 말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가르쳤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몸을 창기와 합하면 먼저 이룬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의미를 잃고 만다. 바울이 음행을 철저히 금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림에 있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와 한 지체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영적인 일을 몸으로 느끼거나, 몸이 직접 영의 인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몸으로 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한다든지, 성령이 직접 몸을 지배하여 운용한다든지, 성령이 친히 육체에 충만히 거하여 성령의 뜻을 나타낸다든지, 성령이 친히 몸의 혀를 지배하여 말을 하게 한다든지 하면, 사람의 영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며 그 기능이 중지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몸은 결코 영을 앞지를 수 없다. 영이 몸을 지배해야지 몸이 영을 지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장막(몸)은 연약하여 그런 큰 일을 담당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될 때 더욱 위험한 것은 사탄(악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악령들의 목표는 육신이다. 사탄은 육체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진리를 체득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온갖 신비한 경험을 가지게 하여 그것을 신적 체험으로 여기게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악령들에게 미혹되기 매우 쉽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정상적인 기능을 모르고 그것을 넘는 과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곧 악령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성령이 몸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몸의 단계에서도 성령과의 교통을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지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제하는 채널은 오직 사람의 영이다. 성령은 우리 영에 거하시며 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이때 우리의 영이 혼을 거쳐 몸을 지배하여 명령함으로써 몸이 하나님을 위하게 되는 것이다. 몸은 결코 성령의 주요 처소가 아니며 영이 일차적인 성령의 전이다. 다만 영이 살아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온전히 받고, 또한 몸과 혼이 영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영뿐 아니라 몸을 포함한 전 인격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을 의식해 보려고 노력하면 악령은 기회를 포착하여 그가 원하는 신비의 경험을 준다. 그러므로 육신의 체험을 구하는 모든 노력은 악령의 침입을 초래하기 쉽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몸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다는 말의 참 뜻은 몸이 자기 자신이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로 쓰여진다는 것이며, 또 몸이 허약할 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서 강건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를 혼동하여 육신의 활동이 영의 일을 망치게 하거나 훼방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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