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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서 지체로서 봉사함 (1) / 고전12:4-27


46.그리스도의 몸 (1)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교회가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지금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우리의 영원한 신분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에베소서를 쓴 같은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고린도서도 썼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금 땅에서 그 거룩한 실체를 실제로 드러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당신의 교회가 땅에서 즉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세상이 사라진 후에 존재하게 될 미래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만 예비된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예비된 것이며 세속적인 환경 안에서 하늘의 거룩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천사가 모인 곳이 아니라 인간이 모인 곳이며 하늘의 신령한 몸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흙으로 지음 받은 몸을 가지고 사는 곳이다. 이런 환경에서 교회는 거룩과 연합을 나타내어야 한다.

사탄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니 곧 ‘천사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 수 있으며 연합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안된다. 사람은 불순종과 정욕과 죄와 갈등과 분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사탄의 거짓말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땅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따라 하나로 연합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지금 세상에 있으며 또한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부득이 어느 정도 세속적이지 않으면 안되며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일도 어느 정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교회는 분명히 세상에 있으며 세속적인 환경 속에서 활동하지만 하늘의 원리 곧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의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교회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교회인가? 신령한 원리로 움직이는 교회 따로 있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움직여도 되는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형상 교회로 드러나 있는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 세상에 있는 여러 지역 교회들이 비록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그 교회들이 껍데기만 교회이고 실제로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 어디서도 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교회든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실제를 가지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 동안 매우 신령하고 참된 교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타락하거나 껍데기만 남은 교회처럼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교회든지 외형상 교회(이단이나 전혀 교회가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로 드러나 있는 교회들은 단지 외형으로만 교회가 아니라 실제로 교회라고 보아야 하며 그런 모든 교회들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실제에 대해 주목하고 그 생명의 원리에 따라 행해야 한다. 외형상으로 교회로 드러나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주님께 책임이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어깨에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인 각 사람은 이 하나의 몸에 속해 있는 지체들이므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12절 이후의 말씀에서 바울은 몸의 생명을 지배하는 몇 가지 법칙 또는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법칙은 15, 16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라는 원리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일할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으며 교회에서 형제들을 위해 드려질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내가 이런 저런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해서 내가 하나님께 무용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발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발이 아니라 손이 되어야 하겠다. 발보다는 손이 훨씬 유용하고 귀한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손이 되어야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자 발은 ‘아 나는 손이 될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나는 걷지 말자. 발 노릇도 그만 두자’ 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생각이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존재가 되지 못할 때 자신의 현재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자기를 남과 스스로 비교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무엇이든지 비교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습관은 아직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보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손과 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런 비교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알 것이다. 몸의 모든 지체는 다 제 각각 그 역할이 다르며 따라서 다 함께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축소시키고 있다. 자기들이 원하는 어떤 특별한 지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거나 직무를 유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대중을 상대로 표나는 직분을 맡아 있는데 자기는 그런 은사를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취하는 태도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일을 하여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작다고 생각하여 자기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 “나는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받지 못하고 한 달란트를 받았으니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남의 눈에 뜨이는 일을 할 수 없으니 내가 무슨 가치가 있는 사람이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말도 잘하고 간증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모임을 인도하는 것도 잘하는데 나는 왜 뚜렷한 일은 하지 못하는가? 나는 죽은 듯이 있어야 하겠구나.”

주님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가 되고 두 달란트가 네 달란트가 되었으며 한 달란트는 두 달란트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체도 실제로는 몸에 꼭 필요하며 그것이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기 은사를 활용할 때 그것은 몸의 생명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몸의 생명은 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는 것 때문에 풍성해지지 못하고 시들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늘에 속한 몸을 생생하게 본다면 그 안에서 가장 작은 일을 맡았다 할지라도 크게 기뻐할 것이다. 우리에게 한 달란트밖에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며 교회에서 일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보다 육신적인 욕망과 야심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과 우리 영광, 우리 미래와 우리 소망이 이 세상 안에 혹은 이 육신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나라 곧 그리스도의 몸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몸에서 큰 지체로 사용하실 때만 감사하며 기뻐할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지체로 사용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가 택하시는 방법을 가장 만족하게 여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영역에서 기꺼이 일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일한다면 우리가 처음 가진 것이 설령 한 달란트가 반 달란트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것은 곧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나 열 달란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살전5:14에서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이 약한 자란 문자대로는 ‘마음이 작은 자’이다. 여기에는 믿음이 작은 사람뿐 아니라 작은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포함된다. 우리는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격려해야 한다. 그가 가진 은사는 작지만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크고 귀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크게 쓰이고 작게 쓰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연적 재능과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지금은 작지만 성령님이 한 번 그 사람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지체들이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생명의 법칙, 몸의 원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나는 여기에 필요 없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를 이런 저런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저런 변명으로 현재 맡겨진 책임을 계속 회피한다면 우리는 결국 몸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미래는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의 생명에 조금이라도 유익을 끼치는데 있다. 우리 생명은 몸을 아껴 가만히 있는데서가 아니라 우리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할 때 풍성해지고 살찌게 된다. 주님은 배가 고파서 제자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사오도록 보내셨고 목이 말라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우물가에서 만난 그 여인에게 생명을 공급하심으로 인해 물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해소되었으며 또한 제자들이 떡을 가져왔을 때 그는 이미 배불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생명은 떡으로 사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생명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려짐으로써 사는 생명이다.

몸의 교제는 항상 양 방향이다. 사랑은 언제나 서로 사랑이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든지 받기만 하는 것은 교제가 아니다. 생명의 원리는 언제나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설교 시간은 내가 말씀을 전하고 여러분은 가만히 듣고만 있는 자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도 교제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씀을 증거할 때 여러분은 비록 입을 열어서 같이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방관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 때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유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저와 마주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존재와 여러분의 소유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여러분은 저와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저에게 여러분의 소유를 가지고 저를 풍성케 하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을 무시하여 잠재우거나 소멸해서는 안된다.

나는 지난 주에 듣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했는데 이것은 기분 문제나 감정 문제가 아니라 생명 문제 곧 몸의 생명으로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저의 말씀을 들을 때나 형제들의 간증을 들을 때 수동적이고 방관적인 태도로만 있고 마음을 열어서 여러분 내면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생명과 형제를 향한 섬김의 생명을 발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들은 몸의 생명으로 서로 교제하는 시간이 되지 못하며 결국 교회적인 모임이 아니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목 마른 자에게 물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런 일을 하도록 보내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 무엇으로 하는가? 우리에게는 종종 형제들을 도울 돈이 없으며 시간이 없으며 말로 도울 능력도 없다. 그러나 꼭 그런 것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며 조용히 기도해 줌으로 도울 수도 있다. 또 우리가 형제가 말할 때 앉아서 귀담아 듣기만 해도 돕는 것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말씀하셨다.(마25:14-30) 장사하는 것 곧 우리가 가진 은사와 직분을 따라 형제들을 섬겨 몸의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맡은 가장 큰 일이며 직분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모양은 달라도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이므로 남과 비교하여 주눅들거나 남을 시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남과 우리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쓰시는데 왜 나는 그 일에 안 쓰시는가?’ 하고 하나님께나 형제에게 불평을 해서도 안된다.

몸의 모든 지체는 주어진 직분을 갖고 있으며 지체마다 주님에 의해 정해진 처소에서 각각 자기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일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영광은 똑 같다. 그 모든 영광은 그리스도의 몸의 영광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광이 주님의 것일진대 일하는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이 주신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아야 하며 이런 봉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그리스도의 몸이 얼마나 중요하며 영광스러운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의 일이 각기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요 영광스러운 일임을 안다면 우리는 꽁지를 빼고 그 일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한 주어진 일을 버리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마음대로 나서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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