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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참 사랑 / 고전13:4-7
 

49.사랑의 특징

바울은 모든 은사를 뛰어넘으며 그 모든 은사들의 바탕과 근본이 되는 ‘사랑’의 필요성과 소중함에 대해 언급한 후 13:4에서부터는 사랑 자체에 대해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사랑의 성질과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에 있는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진정한 사랑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들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은사’로 주신 사랑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이 사랑이 오직 하나님(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타락한 죄인들 안에는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7-12)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알려면 사랑에 대한 그 어떤 철학자의 이론을 들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물론 사람들 안에도 사랑이 있다. 거기에는 다양하고 심오한 사랑의 이론과 체험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인간과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그것만이 참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랑 곧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랑은 그 사랑의 희미하고 왜곡된 투영일 뿐이다.


이제 바울이 말하는 참 사랑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1.사랑은 오래 참는다.

사랑은 사람에 대해 쉽게 성내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래 참는다. 이것은 죄 자체를 참거나 잘못되고 모순된 상황 자체를 참거나 그런 상황을 유발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런 행위를 유발한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죄 또는 죄의 행위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이런 구분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람이 타락하여 모순되고 왜곡되고 악하게 된 것은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듣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 존재 자체의 근본적 변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생각의 문제이다. 사람은 그 잘못된 생각만 바꾸면 즉각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진리를 통하여 잘못된 인간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것 즉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열어 사실, 진리를 보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면 지식 곧 계시만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여전하다. 다만 그 생각이 잘못되어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 생각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니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를 포기할 때까지 즉 세상의 종말이 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친히 임하게 되는 그 날까지 우리 마음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잘못을 범하는 형제를 언제까지 참을 것인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참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실상 끝까지 참고 용납하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사랑의 정신이다.

2.사랑은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다.

온유하다는 것은 나를 괴롭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사람에 대하여 선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며 여유 있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유로 인해 좋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은 인류에 대한 반응에서 볼 수 있다. 그분은 인류의 죄악과 반역에 대해서 즉각적인 심판으로 갚지 않고 오래 참으시며 더 나아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선대하셨다.

3.사랑은 투기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무례히 행치 않는다.  

이 투기는 가끔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바로 앞 12:31에서 이 말은 ‘사모하다’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질투의 강한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는 완전한 만족이 있기 때문에 이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다. 도리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또 낫게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바울이 보기에 ‘자랑하며 교만하다’는 책망을 받은(4장)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사랑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무례하게 행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릇된 방식으로 다루는(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랑과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불손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설사 두 사람 가운데서 보다 정당한 사람이 자기의 옳음에 근거하여 상대에 대해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생명대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4.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이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기심 곧 자기를 (과도하게 헛되이) 사랑하여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인간의 죄악된 마음 때문이다. 이것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왜곡된 생각이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서로의 이익을 챙겨준다면 스스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도 다 생존할 수 있으며 다 잘 될 것이다.

5.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불의란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거스려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시적으로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망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의 몸에 암이나 해로운 혹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때 몸을 위하려면 그것은 결국 제거될 수밖에 없다. 불의는 일시적으로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쾌락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을 그대로 두면 그는 결국 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랑은 일시적으로 괴롭더라도 그 사람을 불의에서 떠나 진리로 돌이키게 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만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있어서도 사랑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개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위한다.

사랑은 전체 인류가 살 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모기도 그 자체로서는 귀하고 쥐도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사람에게 해를 입히기 때문에 부득이 더 중한 것 곧 사람을 위하려면 파리 모기나 쥐는 없애야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들을 종의 자리에서 건져내사 복된 땅에서 은혜와 복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사탄의 사주를 허용하고 이방인들의 본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게 되고, 이기심과 탐욕으로 서로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지 않고 미워하고 다투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고 그들의 복된 삶은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법을 제정하셨다. 그 법은 엄중하였다.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은 사형,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 곧 하나님을 믿고 그 마음에 안식하지 않는 불신앙적인 사람들도 사형, 부모를 멸시하거나 음행과 각종 불륜 패륜을 저지름으로써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이것은 전체 사람들의 생존과 복리를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다. 여기에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이 법을 만드시고 집행하신 것이다. 만일 암을 허용하거나 썩어가는 지체를 허용한다면 몸은 죽고 말 것이며 만일 살인자와 질서 파괴자를 허용한다면 사회는 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생각하면서도 개인을 생각하는 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태도였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1-7)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18:15-17)

여기서 주님은 하나의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도 전체 생명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결코 무시하지 않고 귀히 여기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걸핏하면 법 타령을 하거나 무슨 좋은 일,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신이 나서 죄인을 처단하고 형제를 쫓아내자고 설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참으로 볼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참으로 맛본 사람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갈6:1-3)

죄를 미워하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모순으로 점철된 이 타락의 상황에 대해서는 분노하며, 또한 그런 죄를 몰고 온 원흉인 사탄에 대해서는 철저히 미워하고 저주하되 그에게 속아서 범죄한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미워하지 않거나 멸시하지 않고 도리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서 다른 여느 죄인들과 똑 같다.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죄인은 죄인이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죄인이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셨다면 다른 사람들도 용납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께 용납될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용납되지 못할 자도 아무도 없다. 사람의 눈에는 각 사람이 다 다르며 죄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똑 같은 죄인일 뿐이며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이 보인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로 사람을 구원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을 접촉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보신다.

6.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사랑은 바로 이런 시각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된다는 시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지 어떤 실패와 부족과 못남에 대해서든지 용납할 수 있으며 또한 용납만 할 뿐 아니라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뿐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터무니없이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가능성이 없는데도 막연히 기대하거나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될 것을 알고 기다리며 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무궁한 능력, 무궁한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그 생명이 심겨진 사람에 대해서 믿고 바라며 견디는 것이다. 조급히 사람에 대해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며 동시에 사랑이 없는 것이다.

미미하나마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이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그의 생명이 곧 살찌고 풍성하게 될 것을 믿으며 그 결과로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교회 안에 있으나 아직 생명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생명 자체가 그 사람 안에서 역동할 것을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곁의 생명 있는 형제들이 그를 참으로 사랑할 것과 또한 그 사랑이 그를 삼켜서 마침내 그를 그리스도의 복된 자리로 끌어오게 될 것을 믿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해서 생명이 있고 열심이 있는 형제에게 성장과 변화와 영광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에 대해서도 현재의 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오래 참으며 믿고 바라며 견딜 수 있다.

믿음은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이 변하여 영광의 몸이 되고 우리 지식이 완전케 되는 그 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친히 대면하여 보게 되는 그 날에 믿음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우리는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믿을 필요가 없게 되기 때문이고 또한 보든 안보든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망’도 그 날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망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시고 그와 우리가 하나로 완전하게 연합하여 살게 될 때 우리에게 다른 무엇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따라서 소망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은 주님이 오셔도, 천국이 이 땅에 완전히 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이 사랑은 현재나 미래에나 변함없이 역사한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이 사랑이 역사하는 곳이 곧 천국이다. 천국은 미래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했다. 주님이 오심으로써 그가 자기 몸을 주시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시면서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참 사랑이 체험되고 이 사랑이 (말로나 개념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증거되고 퍼져나갈 될 때 천국은 확장되고 견고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인간의 육신적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으로 묶어 하나로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못 미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며 하나님 안에서 나온 사랑, 하나님이 교회에 은사로 주신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사모해야 한다.

이 사랑은 아들의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흉내내려고 한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 속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에 대한 마음이나 열망은 어느 정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존 본능’이나 그로 인한 경쟁심, 이기심, 그리고 욕심과 자존심을 이기고 실제로 실행될 가망은 적다. 사랑은 곧 자기 부인에 다름 아니며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사랑 역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의 사랑을 더 체험하기를 소망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의 실행은 지금 말하는 이런 사랑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도 안되고 사랑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도 안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할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해 오래 참을 수 있고 온유할 수 있고 성내지 않으며 친절하며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랑을 육정에 따라 왜곡되이 베풀지 않고 공의와 진리와 조화를 이루면서 온전하게 구사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견디는 이 사랑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행하는 것으로만, 범사에 성령께 철저히 복종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사랑에 넘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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