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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부활 생명의 체험 / 고전15:3-8


56.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

바울은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자신을 베드로와 열 두 제자와 주님을 따르던 500여명의 무리들 및 바울 자신에게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을 예외로 한다면 나머지 경우는 다 주님이 평소에 자기를 깊이 따르던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부활 후 즉시 승천하시지 않고 세상에 40일을 더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왜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다 보이시지 않고 오직 자기를 믿는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나타내셨을까? 그것은 ‘생명과 계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먼저 믿고 그 다음에 보는 것이다.

이것은 체험으로 인한 분명한 지식과 확신 없이 하나님을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체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문제는 그 체험만이냐 아니면 그 체험과 함께 다른 것도 또 필요하냐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체험은 체험인데 어떤 체험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와 관계를 가지는 것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체험만으로는 안된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계시로(빛으로) 말미암는 내적 체험(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바깥의 모든 체험들은 이런 체험을 위한 것이다. 여러 은혜의 체험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내적 확신(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우리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체험을 가져야 한다. 외적 감각적 체험은 반드시 이런 내적 체험(계시)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의 표적을 체험했다. 자기 눈 앞에서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표적들로 인해 주님을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반대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여러 증거들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혹을 가지고 오락가락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거든 밝히 말하시오”(요10:24)

이상하지 않은가? 주님은 분명히 공개적으로 사역했는데 왜 알지 못하는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였는가? 그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10:25-27)

문제는 계시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주님의 죽으심은 공개적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은 오직 그를 믿는 자들 곧 약속을 받은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열려 있었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었다. 부활의 소식,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닫혀 있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 즉 표적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제자 중 도마만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할 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요20:25)  8일 후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비로소 주님을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때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은 먼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은 꼭 눈으로 보고 체험해야만 참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즉 육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없이 단지 계시에 의해서만으로도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계시가 주어졌다면 꼭 눈으로 보지 않고 형제들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그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을 조성하신다. 그리고 그 후에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것과 반대로 조성되어 있는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믿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도마는 이미 주님을 아는 자였다. 그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표적을 수없이 행하시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이다. 그 안에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 안에 있는 생명과 계시와 믿음을 따라 말하지 않고 육신의 감정을 따라 되는 대로 말해버린 것이다. 주님이 그에게 표적을 보는 것에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을 굳게 믿으라고 요구하신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부활하신 주님이 아무리 나타나서 손가락을 넣어보게 하고 만져보게 해도 도마와 같은 믿음 곧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안 나온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가나안 변경까지 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조건 가나안으로 쳐들어가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대책없는 모험이요 무리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거나 긍휼히 여기시지 않고 근거없는 불신앙이요 거역이요 행악이라고 규정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보는 것이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믿음이 보는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믿을 만큼 충분히 보았다. 애굽에서 나올 때 그리고 홍해를 건널 때 그리고 광야에서 만나와 물을 기적적으로 공급받았을 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충분히 체험했던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하나님은 (보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실제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체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경이 닥쳐올 때마다 불평과 원망과 좌절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보지 못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한 것이다. 계시가 없으면 보아도 믿음이 생기지 않으며, 믿음이 없으면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결국 주님을 믿은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공개되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육신은 입담거리만 제공할 뿐 아무 소용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칙은 언제나 변함없으니 곧 아들(그리스도)의 소원대로 택함을 받고 계시를 받은 자들만 하나님을 알고(믿고) 사랑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 역시 하나님을 알고(믿고)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성경에서 우리는 심지어 말씀조차 참으로 그 말씀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일 자 곧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만 열려지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사실도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표적뿐 아니라 말씀도 어떤 이들에게는 주님을 믿을 근거가 아니라 주님을 반대할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색욕거리가 될 수도 있다.(유다서 4절)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체험하는데도 믿지 못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 자신만의 문제라면 체험하는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환경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조종하는 자가 있다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 종 된 자리에서 그리고 마귀의 종 된 자리에서 해방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주님은 우리가 마귀에게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던 상태에서 놓임 받도록 만드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마음이 억지로 상실되지는 않는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롬6:14)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와 주권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승리의 역사를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상실한 대로 흘러가는 대로 마귀가 조종하는 대로 내 버려 두지 않는다. 전 같으면 정욕의 유혹을 보면 반드시 그대로 해야 하고 또 은혜의 말씀과 표적과 능력을 보아도 마음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있어야 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죄는 거부하고 은혜는 받고 하나님의 뜻은 순종하여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마음이다. 더 나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문제와 하나님의 약속을 마침내 눈으로 보게 되느냐 못 보고 마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상 우리 마음에 달렸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물론 그냥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의 마음이다.

만일 믿음이 마음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보는 것으로 된다면 보는 사람은 다 믿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 곁에서 그의 표적과 능력과 진실한 가르침과 삶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은 믿음이 보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시의 문제이며 또한 사탄으로 인해 마음을 상실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상당히 좌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는 보고 믿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본다. 주님의 부활은 오직 믿는 자들만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있게 될 사람의 영광스러운 부활 역시 그것을 믿고 그 믿음대로 행하는 사람들만 보게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 하고 없는 것처럼 육신의 정욕과 마귀의 사주를 따라 행하며 방종하는 자들, 이 세상밖에 없는 것처럼 오직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무관심한 자들은 이 영광의 부활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마귀의 손에 달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우리 손에 맡기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처음의 자리로 사람을 돌리신 것이다. 사람은 선악과도 따먹을 수 있고 생명과도 따먹을 수 있도록 지음받았음을 상기하자.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그릇 행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우신다. 우리 안에는 이미 주님의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이 생명대로 행하면 된다.

우리 모두는 항상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당당히 주님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죄에게 눌릴 것도 없고 마귀에게 꿀릴 것도 없다. 우리가 이만큼 믿는 것도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을 다 눈으로 보게 될 것이며 거기에 다 참여할 수 있다. 이 마음이 흔들리거나 헷갈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하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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