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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와 사람 / 고전12:4-7

2010.05.01 11:55

이상봉 조회 수:9496

은사와 사람 / 고전12:4-7

 
47.그리스도의 몸과 은사

우리는 지난 몇 주간 동안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몸의 원리와 몸 안에 있는 각 지체들의 교제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왔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홀로 부르시지 않고 하나의 몸 안으로 함께 부르셨으며 이 몸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셨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크고 거룩한 몸은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거처 곧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 적어도 지난 수 천년동안 계속 건축되어 왔다.

아브라함이 여기 들어 있고 모세와 엘리야,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여기 들어 있고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부르심을 받아 이 안에 들어 있게 되었으며 우리 앞에 살았던 모든 믿음의 조상들과 오늘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여기에 들어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살아 있는 처소 곧 그리스도의 몸인 영광스런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한 몸 안으로 이끄셨고 각 사람을 몸의 지체들로 세우신 것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유익과 생명 공급을 위한 것이지만 단지 이것을 위해서만 우리가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때문에 우리는 모이고 교제하며 섬기는 것이다.

교회 건축은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요 사람을 짓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단순한 사람의 연합체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영구히 안식하실 수 있는 거룩한 성전 곧 성령의 전(몸)을 짓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교회는 모든 지체들이 머리를 붙잡고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고 세움으로써 모든 지체들이 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있는 각 사람들은 무엇으로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온전케 하는 도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이고 다른 하나는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의 『인격과 생명』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우리 육신의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신 영적 은사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를 사용함으로써만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우리 인격으로 더욱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인격, 나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일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 몸을 세우는 수단인 것이다.


먼저 은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은사를 어떻게 말해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인지 어려운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근접할 것이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강하게 드러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한 측면(생명)〕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은사란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참 은혜와 선물, 참 복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실 사람에게 오직 그리스도를 주셨을 따름이다. 모든 것은 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은사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베푸신 특별한 그리스도의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생명)는 어느 한 사람(지체)에게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한하셨기 때문인가?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사람이 연약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일부분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사람이 우둔하고 무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다 받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받아서 자기 인격과 삶으로 나타내신 이는 우리가 아는 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내시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한 데 모아 교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로 몸을 섬기게 하셨다.  

은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영적 신비적 은사이고 하나는 그보다는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은사이다. 그러나 모든 은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은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이다. 이런 곳에서 언급한 것은 교회의 모든 은사 전부가 아니고 다만 몇 가지 대표적인 것들 또는 드러나는 은사들일 뿐이다.


예언하는 은사

예언은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계시 즉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의미한다. 그것은 주님(의 뜻)에 의해 말하는 것이며 주님을 위해 말하는 것이며 주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서 즉 선지서들도 미래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적고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녀들에게 책망과 경고, 권면 및 교훈의 말씀을 한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판단과 뜻(비밀)을 드러낸 것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예언도 미래에 대해 豫見하는 것보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비밀)을 밝히 드러내는 것을 주로 하는 은사이다.  
  
이 은사를 쓰는 사람은 특별히 분수를 지키는 것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받은 은혜를 넘어가서 더 말하면 그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은사 사용의 첫째 원칙은 받은대로 쓰는 것 곧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섬기는 은사

이것은 집사의 봉사를 의미한다. 이 은사는 교회의 여러 사무적인 일들을 담당하는데 필요한 은사이므로 각각의 일을 담당하는데 필요한 일반적인 은사(재능)를 이미 받은 사람들에게 부여되든지 아니면 해당되는 지혜(재능)를 주셔서 감당케 하시든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과 아울러 지혜(재능)가 있어야 되는 은사이다.(행6:3)    


가르치는 은사

가르침과 예언은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주님의 직접적인 영감 아래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역인데 비해 가르침은 그러한 예언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감추셨던 비밀을 드러내신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단번에 밝히 알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잘 가르쳐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도록 돕는 은사가 필요한 것이다.


권위(勸慰)하는 은사

이것은 형제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은사이다. 권면은 예언이나 가르침과는 다르다. 예언과 가르침은 다 말하는 은사이지만 권면은 예언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그러한 말씀에 따라 행하도록 권하는 은사이다. 이 세 종류의 은사는 다 몸을 온전케 하기 위해 주어진 은사들이며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온전히 자라도록 말씀으로 생명을 공급해 주는 은사들이다.


구제(救濟)하는 은사

구제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재능과 자비의 마음, 그리고 분배하는 지혜 세 가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구제의 은사는 손으로 수고하여 자기의 쓸 것 뿐 아니라 형제들의 쓸 것까지 감당할 수 있는 물질적 여유를 마련하는 은사와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랑의 마음과 다툼이 생기지 않게끔 지혜롭게 물질을 분배할 수 있는 은사를 포함한다.

구제는 초대 교회에 집사가 세워지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했다. 그러므로 구제는 교회의 모든 일 중 가장 보편적이고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일은 특히 성실함으로 해야 한다. 게으른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형편을 구석구석 살피지 못하므로 챙겨야 할 일들을 챙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스리는 은사
 
다스린다는 것은 교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바로 행하도록 돌보는 목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약한 자들을 돌보고 인도하는 사람은 보통의 형제보다 몇 배로 부지런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일은 자기 일대로 돌보면서도 남의 일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일에 매여 있거나 자기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스리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다스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큰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부지런함이다. (롬12:8)


긍휼을 베푸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남의 어려움을 잘 헤아리고 그것을 동정하여 힘껏 도움을 베푸는 은사이다. 여기에도 사랑의 마음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 모든 은사는 타고난 자질과 성격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타고난 자질이 채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성령 안에서 변화를 받고 통제를 받은 후에 사용되는 것이다.  

긍휼을 베푸는 일은 정말로 그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깊이 체험함으로써 그 마음이 긍휼로 충만케 된 때에만 제대로 할 수 있다. 사람을 돌보며 섬기는 일 특히 죄인들과 약한 자들을 섬기는 일을 해 보면 거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없다면 곧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우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수행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특별한 은사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8-1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28-30)  

많은 사람들이 은사라고 하면 오직 방언하고 통역하거나 병 고치는 등의 표적을 행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그것을 첫째로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로마서 12장에서는 그런 은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오직 예언과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품 등과 같이 몸(교회)의 생활에 꼭 필요한 은사들에 대해서만 말했다. 방언이나 통역, 병 고치는 능력 등의 은사도 귀한 것이고 중요하지만 이는 특별한 용도에 쓰이기 위해 주신 그야말로 특별 은사이다. 이 은사들도 몸의 봉사를 위해서 쓰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개인적인 필요 또는 세상을 위한 필요 즉 전도와 같은 일을 위해 주어진 표적의 성격을 띤 은사들이다.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몇몇 신비적 표적적 은사가 아니라 몸의 지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기능)들이다. 이런 은사들은 세상을 위한 은사가 아니라 교회(몸)를 위한 은사이다. 각 사람이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서 모두가 몸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교회가 교회답게 되도록 하는데 소용되는 것이 바로 이 은사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은사들은 갑자기 신비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조성된다. 받은 은혜에 따라 즉 각 사람이 누리는 생명의 분량에 따라 은사도 정해지는 것이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생명(믿음)의 분량이 충만하면 여러 면에서 많이 섬기고 깊이 섬길 수 있고, 그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섬기는 것이다.

은사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생명)을 성령으로부터 받아서 몸에 전하는 수단과 도구이다. 이것은 일의 도구인 셈이다. 이에 비해 직분 또는 직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몸에 주는 위치 또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일의 도구가 아니라 일 자체이다.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은사를 가질 수 있지만 직분은 다를 수 있으며 여러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도 교회 안에서는 한 가지만 사용하며 한 가지 일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모든 지체는 다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일을 하기 때문에 다 각기 직임을 가지고 있다. 영적 은사는 직분 곧 『그리스도를 주는 일』을 하라고 주어진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영적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실제로 일을 하느냐 하는 것 곧 은사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귀한 은사 아무리 많은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덕을 세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보다 중요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말한다. 은사는 위로부터 온 능력이지만 사랑은 십자가를 거친 인격의 열매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은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방법이지만 일시적인 것이며 그것은 오직 사랑 안에서 역사될 때만 가치 있게 쓰인다.  

여기서 우리는 은사뿐 아니라 은사자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은사는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영구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은사가 아니라 은사자이다. 영적 은사는 종종 어느 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사라지곤 한다. 하나님이 잠시 어떤 사람을 들어쓰시다가 더 이상 그를 쓰지 않게 될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은사는 결코 은사를 받은 사람 곧 은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은사가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권세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사람이 단지 하나님의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참으로 깊이 아는 사람 곧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생명으로 삼아 영원히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어떤 사람 안에 거하시다가 떠나시곤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께 쓰이지 않고 버림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사를 거두어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를 거둔다고 해도 사람 자신이 허무하게 쓰러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은사가 아니고 생명이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은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쓰인다. 구약 시대에 삼손은 힘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걸어갔으며 생활이 엉망이었다. 결국 그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고 하나님께 더 이상 쓰이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단순히 은사를 따라 어떤 사람의 영적 깊이를 측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계속 깊이 사용되려면 은사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은사의 구사도 가치있는 것이지만 성령의 목적은 그 이상이다.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인격을 조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은 형성하지 못하고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설교나 전도나 봉사만 능숙히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결국 그런 설교나 봉사가 곧 그 사람의 합당한 인격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 은사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하며 은사보다 사람이 중요하며 은사보다 사랑이 더 귀하며 모든 은사 중에서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크고 중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이며 은사는 단지 몸에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생명)를 공급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능력을 주신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바울은 은사와 직임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기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은사나 직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사람 자신』 곧 은사자의 인격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의 인격이다.

삼손은 분명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발람과 사울도 얼마동안 그랬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낸 일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인간됨이 틀렸기 때문이다. 주님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실 때 예컨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할 때의 표현을 보면 ‘이사야의 예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고 ‘선지자 이사야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시하는 것이 단지 선지자의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을 대변하는 ‘선지자’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씀을 거절한 것은 단지 ‘예언’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거절한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람을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나 사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중점적으로 받아야 할 훈련은 무엇인가? 주님께 헌신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 지식이나 설교 요령이나 전도 방법, 봉사 방법, 목회 방법 등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더 많은 교리를 배우거나 이런 저런 기독교적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 곧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알고 하나님과 사람을 깊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더 크고 많은 은사나 큰 직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배움으로써 그의 인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우리의 봉사로 말미암아 혜택을 받으며 우리가 가진 은사의 혜택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적절치 못한 인격 때문에 장애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명수가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을 때 이것은 참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마실 수도 없고 안 마실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으로 빠뜨리는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은 처음에는 이런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자들, 그다지 가치가 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단지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일은 외적인 은사로 시작해서 외적인 체험이 증가일로를 보이다가 점점 그것이 적어지면서 내적인 생명의 체험으로 진전되어 간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일의 깊이와 내면성이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크게 부각되어 나타날 때 다른 일들은 어쩌면 그의 은사까지도 더욱 작게 나타난다. 두 사람이 동일한 말을 하고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상대방이 받는 영향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시며 교회에 선지자를 주신다. 예언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취급하신 사람이며 또한 그는 성령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을 체험한 사람이다. 종종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몇 일을 보내느냐고 묻는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적어도 10년 또는 20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날에 그의 메신저로 사용하시려고 어떤 사람을 그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택하신다. 그들은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훈련을 받게 된다.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영적인 일은 두뇌의 지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선행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간됨을 먼저 보신다. 우리는 영적인 가치가 아닌 지적인 것으로 교회를 속일 수 없다. 교회는 그리고 생명은 그것을 벌써 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말과 일치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내가 당신을 참으로 알지도 못하고, 십자가의 의미도, 또 하나님이 부어주셔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내 안에 결핍된 것들을 채우사 온전케 하여 주십시오. 나를 깨뜨리시고 시험하시고 연단하셔서 나로 참으로 주님을 알게 하시고 그 아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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