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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서 지체로서 봉사함 (3) / 고전12:4-27

 
46.그리스도의 몸 (3)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에 있어서 각 사람이 유의해야 할 첫째 원리는 작은 지체,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체라도 다 각각 자기 은혜와 은사의 분량을 따라 자기 자리에서 몸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 달란트에 불평하거나 그것을 땅에 묻거나 다른 지체들만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몸의 지체들이 다 함께 일해야지 한 지체가 혼자 나서서 모든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유능하고 유력한 한 지체가 다른 지체들을 무시하고 모든 일을 독차지하게 될 때 몸은 건강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은 세 번째 원리와 네 번째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 번째 원리는 12:21,22에 나온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몸 안에 있는 어떤 지체들이 다른 지체들 곧 약하거나 시시해서 있으나마나한 것처럼 보이는 지체들을 제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감히 누가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피 흘려서 사신 지체들을 몸에서 제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종종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몸 안에 있는 어떤 몇몇 지체들이 자신들이 머리나 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체라도 지체는 지체이지 결코 머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가 머리의 능력을 가지고 행할 수 있다거나 지체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느 지체가 약하고 미숙하다는 것이 그를 없애버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물론 죄와 관련되어 징계를 내리는 것은 별 문제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감히 ‘너는 필요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별로 귀하게 보이지 않는 지체들로부터 종종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거의 인정하지 않는 작은 형제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무슨 힘이 되겠으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면 우리의 품위가 떨어지고 우리의 영적인 지위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지체 중에서 가장 약한 것까지도 얼마든지 쓰실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쓰신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영적 지도자가 자기에게 닥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께 기도하였지만 전망은 어두웠다. 주님은 금방 문제 해결을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분명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알았지만 적어도 현재 그것은 그가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다급해졌다.

당시 그는 어느 외딴 시골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수준이 높은 신자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에게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이 안된 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설교는 힘을 잃었고 열매도 없었다. 이때 그는 교제할 수 있는 형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곳에 있는 유일한 형제는 예수를 믿는 소수의 촌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생각에 주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한다 해도 그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아마 제대로 기도도 해주지 못할 것이고 체험을 말해주거나 조언을 해주지도 못할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는 몸이 하나요 각 지체 안에는 머리로 말미암는 몸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결국 그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그는 할 수 없이 그 촌사람 형제들이라도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면 그들이라도 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몇몇 형제가 그의 요청에 따라 돕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형제들에게 솔직하게 자기 어려움을 말했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한 줄기의 빛이 그에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빛은 너무도 분명했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날 이후 그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넘치게 되었다. 그 날 주님은 그에게 매우 약하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주님께는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리고 몸의 한 지체인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체험을 허락하셔서 우리로 서로 사랑하며 돕고 의지하게 만드신다. 종종 우리가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이것은 우리를 교만과 헛된 만족에서 건져내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이끌기 위함이며 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스스로 ‘나는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내게는 이런 저런 형제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네 번째 원리는 12:24,25에 나온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분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나누어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우리는 이미 한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항상 실제로 서로 같이 있어야 하며 사랑하며 교통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도 다툼과 분열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는 것이다. 육신의 몸의 경우를 보라. 몸 안에 분쟁이 있으면 그것은 곧 건강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한 발이 다른 쪽 발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다투게 되면 그것은 곧 서 있거나 걷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은 앉은뱅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늘의 교회는 물론 나누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이다. 그것은 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땅의 교회에는 사탄의 방해가 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연합이 침해를 받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종종 침해를 받아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방해를 물리치고 실제로 연합을 유지할 수 있는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엡4:4)

이 두 말씀은 몸과 성령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숨겨져 있지만 몸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보이는 다른 짝이다. 성령님이 하나이시므로 몸도 하나이다. 성령은 한 인격체이시므로 둘이나 셋으로 나눌 수 없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는 사람의 집단이나 연합체가 아니라 성령의 전이요 성령의 몸이기 때문이다.

한 몸은 한 성령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몸을 고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한 몸을 유지하는데 열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언제나 연합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몸의 연합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범사에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우리 서로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하신다. 이것은 생명 안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지식이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모든 생명체 곧 모든 동물에게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것은 영적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우리 손으로 만지거나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느껴진다.

이런 의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있음을 알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 곧 괴로움을 느끼며 평안과 기쁨을 잃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향해 우리 영이 반응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 몸을 바칠 때는 비록 우리 육신은 피곤하고 괴롭지만 우리 영은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죄에 대한 윤리와 상식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고 괴로움을 느끼시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의식 곧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있다. 이로 인해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깨닫거나 회개하지 않고 도로 변명하고 대항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는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또 우리 형제들에 대해 그들이 우리의 형제임을 증거하신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 일깨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 안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면 일깨워도 소용 없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그 사실을 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몸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다른 지체들과 함께 소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몸에 속한 다른 지체들을 알아보며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형제를 형제로 알아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누가 ‘이 사람이 형제요’ 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그를 알아보며 또 누가 ‘이 사람은 형제니 사랑하시오’ 라고 말해 주지 않아도 그를 본성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형제 사랑의 의식(意識)』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있을 때 그 마음이 저절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혹 어떤 때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의 의무요’ 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안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음으로써 어머니가 어머니의 사랑을 회복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그에게 이미 어머니의 본성적인 사랑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몸의 지체들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그와 반대로 분열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진정으로 몸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 있어서 분열은 어떤 이유로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분열 자체는 물론이고 분열을 초래하는 모든 것이 미워지며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간에 차별과 나누어짐을 허용한다는 것은 몸을 떠나 이방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교파를 자랑하는 것이나 분열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모든 주장들이 다 생명 안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교리나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생명 안에 있는 어쩔 수 없는 본성적 의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몸의 지체들을 사랑하며 연합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거스르는 모든 이론과 주장은 다 생명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생명이 가장 확실한 인도자라는 사실을 갈수록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며 가장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형제와 싸우며 교파적 분파적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며 그것을 변명하며 옹호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십자가를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알지 못하고 그 혈기와 정욕대로 사는 것을 허용하며 자기 삶에서 거듭난 생명으로 말미암는 거룩함이 나타나야 함을 부정한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다 생명 안에 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론과 주장은 그것이 정교하고 그럴듯하기만 하면 그것이 영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몸의 생명은 그것을 결국 알아본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교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것은 곧 머리를 붙잡고 교제하는 것이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머리를 붙들지 않으면 몸이 생명을 얻지 못하며 연합도 성장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료 지체들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머리를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교제의 길이요 원칙이다. 우리 생각에는 형제 자신을 잡아야 연합이 되고 몸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이시며 그 분만 분열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는 이런 성질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붙잡고 사람을 의지하면 결국 도로 나누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잡으면 그 생명이 우리를 결국 사랑과 연합으로 이끈다.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사랑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과 연합의 성질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어떤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교제를 나누고 반대로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교제가 우리 사람이 중심이 되고 있는 교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이것이 우리의 교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교제의 바탕과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형제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데 그가 그 일에 감사치 않는 태도를 보이면 마음이 매우 불편하고 불평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감사를 받기 위해 일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어떤 형제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 뿐이다. 나는 그 사람 자신을 보고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며 그의 배후에서 그를 옹호하시며 그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를 섬기도록 인도하시는 분에 의해 그를 필연적으로 사랑하고 섬긴 것뿐이다. 우리의 일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모두가 머리와의 관계에서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어떤 사람과 하나 되려면 그 사람 자신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몸의 교제를 나눔에 있어서 이런 태도를 취하면 몸 전체의 하나됨을 유지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어떤 한 두 형제와만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에게만 마음을 온통 준다면 이것은 결국 몸을 나누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좇는’ 교제가 아니라 ‘육체를 좇는’ 교제이기 때문에 교제의 바탕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어떤 두 형제가 특별히 서로 가까워질 때 우리는 이 사랑이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를 붙잡는 가운데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사랑인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영역 안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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