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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가르침 / 고전14:20-26

2010.05.01 12:03

이상봉 조회 수:8333

지혜로 가르침 / 고전14:20-26
 

고린도전서 14:20-26, 골3:16

53.지혜로 말하는 법을 배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형제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하기’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20절에서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지혜로운 말을 함으로써 형제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은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했지만 여기서는 결국 지혜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예언과 지혜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언은 결국 가르침이고 가르침은 결국 말이다.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은 진리의 지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진리의 지식은 육신적인 지식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지혜를 필요로 한다. 결국 예언은 지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3:1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고 말하고 있다. 또 에베소서 5:19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은 내용 문제이다. 그러나 그런 신령한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저절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이 신령한 지식은 신령한 지혜를 통해 형제들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덕을 세우고 생명을 주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전달되는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신령한 지식은 가르침과 권면과 노래와 대화로 표현되고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은사를 사모할 때 예언하기를 사모할 뿐 아니라 그 신령한 지식으로 형제들을 섬기며 봉사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 곧 사랑의 은사도 구해야 하며 거기에 더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형제들에게 제대로 잘 전달할 수 있는 기술 곧 지혜의 은사도 구해야 한다. 지혜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통로라는 사실에 주의하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과 말을 하는 자는 더러 있어도 지혜로 진리의 지식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증거하는 자가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사람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낼 하나님의 아들이요 마귀의 거짓말과 궤계를 물리치고 진리와 생명을 나타내고 증거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 받은 생명대로만 행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죽은 말은 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될 것이며 그 말이 매우 정확하고 명확하여 권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실상은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튼 소리나 무익한 말을 하거나 혈기와 우매함으로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식조차도 제대로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교통하는 것이다. 세상 사교 모임의 교제와 교회 생활의 차이는 사람 안에서 단지 사람만 만나고 사람만 체험하느냐 아니면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느냐 하는 차이이다. 우리가 교회 형제들과 일상적으로 만나 함께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동안 서로에게서 특별히 신적(神的)인 신비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저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육신적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고 구속 받고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요10:34,35)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 즉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외형의 문제가 아니고 본질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람을 터무니없이 높이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그의 영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닌 육신대로의 사람(죄인)을 어떤 철학과 사상에 따라 터무니없이 높이고 우상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 즉 성령에 사로잡혀 있으며 하나님의 성전이 된 상태의 거듭난 사람을 단순한 죄인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무슨 신령한 것이 나오겠느냐 하며 무시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사람은 그 자체로는 타락하고 무능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회복되면 영광스러운 것이다. 교회는 이제 타락한 옛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거듭난 새 사람이요 성령 안에 있는 새 피조물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사람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기 위해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전하는 도구임을 항상 기억하고 사람에게 순종하고 마음을 열고 영접하는 것을 익혀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임 권위를 무시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친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의 말씀으로 말하지 않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말만 한다. 그리고 말을 할 때 지혜 없고 우매하게 말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세우지 않는다. 도무지 자기를 알지 못하고 남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말할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대로 말하고 육신대로 행동할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이....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자요 그 영광을 노래할 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형제들을 살리고 풍성케 할 자이다. 모든 것을 진실하고 지혜롭게 행하여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결코 죽은 세상에 속한 죽은 자가 아니므로 죽은 이야기, 허무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세상의 절망과 좌절과 분노와 불평, 불만, 원망을 늘어놓음으로써 세상의 죽음과 멸망에 참여할 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외형적 육신적 모습에만 주목한 나머지 자기들이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자라고 생각하고 마땅히 해야 할 봉사를 기피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 얻은 지위를 항상 기억하고 거기에 맞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해야 할까’ 하며 방황하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만 사람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을 향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으로 인해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우리가 가진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길로 이끌 자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된다.

사람들을 만나서 말을 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생명을 풍성케 하기를 원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여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란 결국 삶을 온전케 하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지식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서 참된 삶이 무엇인지, 영원하고 참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배웠다.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1:7)고 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면 우리는 이미 사람을 살릴 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인생의 길과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길과 뜻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많이 나타낼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여기서 우리는 지혜도 지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식이 충만하면 자연히 지혜가 생긴다. 지식은 진리를 아는 것이며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지혜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아는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아들이다. 길이 무엇인지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흔히 지혜는 곧 총명을 의미하며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의 반대말은 우둔이며 미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롭다 우둔하다는 것은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한 후 그 판단, 행동의 궁극적 결과가 어떠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면 지혜롭다고 말하고 최종적으로 나쁜 결과를 내면 미련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지혜는 참 지혜라고 할 수 있는가? 인생의 궁극적인 성공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데서만 온다. 다른 길은 다 잠시는 잘 되는 길 같고 성공하는 길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실패와 멸망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는 알고 보면 지혜가 아니라 미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지혜를 지혜가 아니라 악한 꾀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4:20에서 지혜와 미련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지혜』와『악』을 대비하고 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여기서 바울은 미련과 우둔은 아예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 있어서 다 지혜롭게 행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지혜를 말하되 그것이 참 지혜냐 아니면 거짓 지혜냐 하는 것만 말하는 것이다. 우리도 사람의 어떤 판단과 행동을 ‘지혜’와 ‘미련’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 지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지혜냐 미련이냐가 아니라 세상적 지혜나 신령한 지혜냐 이다.

우리의 관심이 되는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관계된 지혜와 총명이다. 그것이 아니고 악을 행하고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육신의 정욕과 야망을 충족시키는데 쓰이는 지혜와 총명은 참 지혜가 아니라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 악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지혜라는 것은 다 미련이며 우둔이다. 그것은 다 악을 산출하고 죄를 산출하여 마침내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다 멸망으로 몰아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하는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미련하기 그지없는 현실은 안타깝다. 우리는 우리가 사소한 이익과 자기 영광에는 눈이 밝고 판단이 빠르며 정확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유익을 얻고 남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일에 있어서는 너무나 느리고 미련한 것을 개탄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 예언의 말씀을 하고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말을 하기를 구하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주목해야 한다. 그를 더욱 사랑하고 그를 더욱 배워야 한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진실한 말, 지혜로운 말, 진리의 지식과 그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하는 지혜를 배우며 사람에게 생명과 의욕과 생기를 불어넣는 말을 하는 법을 배우자. 우리는 한 마디를 하더라도 무익한 말과 불필요한 말, 생명을 축내고 잃게 만드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면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체험하는 자리에 있으면 우리는 자연히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된다.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14:12)

여러분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 안에서 신령한 것을 얻도록 마음을 낮추고 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도록 신령한 지혜와 지식으로 풍성케 되기를 구해야 한다.(14:12) 특히 우리는 참되고 생명 있는 말을 하기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고 지혜롭게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하며 또한 쉽게 말하는 것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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