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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 고전13:4-7


50.그리스도와 사랑

사랑은 오직 사랑의 생명에서만 나온다. 우리는 마귀에게는 결코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그런가? 마귀의 생명이 ‘사랑하는 생명’이 아니라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살인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생명을 받은 자들은 아무리 남을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할 수 없다. 아예 마귀에게 깊이 사로잡혀 있는 불신자들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거듭난 생명으로 살지 않고 육신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물론 처음에 잠깐 동안은 사랑할 수 있겠지만 끝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며 깊고 완전하게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통하여 우리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주님은 억지로 사람을 사랑하신 분이 아니라 그 생명이 사랑의 생명이므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사랑하셨다. 이러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 생명의 능력으로 이러한 자연스럽고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지난 주에 우리는 참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속으로 이런 사랑을 하기 원한다.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사랑 안에 거하며 자기도 남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지난 주에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이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생각했다. 하나님께 속한 참 사랑은 육신적인 본능으로 애쓰고 힘써서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사랑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있다. 우리는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인격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사람을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실 것을 믿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알아가는 동안 그의 생명이 우리 생명이 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그와 같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따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랑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사랑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만 따라 갔는데 어느 날 보니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그의 인격이 사랑으로 충만한 인격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삶과 사역도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주님을 주목해 보기로 하자.

주님의 인격은 그의 말씀과 사역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님의 삶을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삶이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일이 주님의 사역의 주류는 아니었다. 주님의 주된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청종하는’ 일이었다. 그의 일생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사 그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일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바울이 증거하는 바 주님의 마음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었다. 사랑은 반드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길이고 이래야만 모든 일이 제대로 된다.

다음으로 주님은 영생을 사랑하셨다. 영생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삶을 사랑하셨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생명 또는 삶을 사랑한다는 것을 오직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세상 삶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생명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생명 사랑은 하나님의 약속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 등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굳게 붙잡았다. 그들은 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을 사랑하고 붙잡은 것이다. 이것이 곧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사랑하고 붙잡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육신적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이나 이웃 사람들보다 먼저 이 생명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을 사랑해야 한다. 영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주신 이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게 된다. 이 생명은 지금도 누리는 것이며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는 날 완전하게 누리게 될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다.

주님이 비록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된 삶을 물리치시고 불의와 악을 미워하신 것은 그것이 생명에 반(反)하기 때문이다. 반생명적인 것들을 용납하면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만 한다.

주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셨고 또 처음에는 그것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그것을 언제까지나 들어주시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떡을 원하고 병 고치는 것과 잘 살게 되는 것을 원했다. 그들은 오직 땅에 속한 축복, 세상에 속한 것만 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영생에 배치되는 반생명적인 소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들어주실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이 처음에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신 것 즉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사 그들을 만족케 하신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계시며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참되고 영원한 삶을 그들에게 주시기 위해 자기가 바로 참 떡이요 참 양식이므로 자기를 따르라는 사실을 외치실 수밖에 없었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먼저 영생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안에 이 영원한 생명이 충만할 때 우리는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이 고귀한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주님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을 사랑했으며 또한 그가 정한 진리, 그가 정한 인생의 길을 사랑하시며 그의 법을 즐거워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따라 또한 그가 정하신 인생의 길(진리)을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법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아름답고 가벼운 생명의 자연스러운 굴레일 뿐이다. 시편 119편 기자는 이런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119:13-16) 라고 말했으며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7,103) 라고 증거했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8:33-36)  우리는 참 생명과 진리를 사랑함이 없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람의 삶과 영혼을 위할 수 없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주님은 사람을 사랑하셨다. 이것은 너무도 현저한 일이어서 주님 하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신 것을 떠올릴 정도이다. 왜 주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을까? 사람은 죄인이요 마귀 편에 붙어서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주님이 왜 사람을 사랑하셨는지에 대해 묻기 전에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을 먼저 물어볼 수 있다. 그들도 다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믿고 있다. 왜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같은 피조물인데도 동물은 필요에 따라 죽일 수도 있는데 왜 인명만은 귀히 여겨야 하는가?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사람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말하지 못한다. 단지 그냥 인간은 존엄하고 생명은 그저 귀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서 (지혜,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힘이 가장 세고 지배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론 사실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며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음으로 존엄하다. 그러나 왜 사람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그 크기도 작고 숫자도 힘도 작은 존재인데도 그처럼 지혜가 있어서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또한 힘이 있고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며 힘이 없고 다스림을 받는 것들은 그렇게 귀히 여기거나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만일 힘의 원리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말한다면 사람 안에서도 힘이 없는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멸시를 받아도 그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이유,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즉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구원하시고자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를 또한 사랑하고 귀히 여기신 것이다.

사람은 어찌 하다보니 만물의 지배자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며 하나님을 나타낼 아들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영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가 된 것이나 그 생명이 무엇보다 존귀하고 소중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지금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정신이 없고 마귀에게 깊이 속아서 거짓되고 허망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가? 주님은 그것을 모르고 사람을 사랑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사람의 타락과 죄인됨을 아시고도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주님은 사람을 현재의 외모대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시각대로 바라보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아직도 사람을 사랑하시니 나도 사랑한다’는 식으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이 범죄하여 죄인이 된 것을 싫어하시며 마귀와 하나가 되어 거짓과 악을 행하시는 것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마귀와 그 종된 사람들을 함께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돌이키시고 구원하시려고 애를 쓰신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세상의 심판과 종말을 연기해 오셨으며 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대로 하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사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의 부활 후에 성령님을 보내시사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드셨다. 주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을 사랑하시고 위하신 것이다.

둘째, 비록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또한 상당한 정도로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여전히 하나님과 관련하여 가치 있게 보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개나 소처럼 되어버렸다면 주님은 사람에게 아무 기대도 애정도 나타내지 않고 바로 세상을 바로 심판하시고 쓸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속에는 아직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가르침과 감화가 있을 때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으며 거룩하신 분의 아들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만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 안에는 비록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지각과 이성과 양심, 하나님을 지향하는 (종교적) 본성 등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 안에 새겨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 사람을 속이고 지배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선을 행하는 것이나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귀는 때로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나 잔혹한 살인마 같은 악인들을 일으켜 온 세상을 온통 죄악으로 도배하고 멸망으로 몰아넣으려고 시도했지만 그런 시도는 언제나 끝까지 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잠시는 마귀에게 속아 광분하며 함께 놀아나다가도 그 정도가 심해질 때는 다시 이성을 회복하여 그런 죄와 혼란을 물리치고 정상적인 상황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오늘 여기까지도 오지 못하고 마귀와 그가 일으킨 악인들의 손에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이 오늘 정도라도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와 거기에 참여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 역사에 간섭하시사 세상을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 곧 선과 의와 진리에 대한 의식이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오늘 인류에게 없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뿐이다. 나머지는 거의 다 있다. 그래서 사람들(공자, 플라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을 알고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하나님의 말씀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주님은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사람을 여전히 하나님의 종류로 보고 사랑하며 존귀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사람을 하나님의 종류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비록 여러 가지 문제가 많고 그래서 접할 때마다 사랑의 마음은커녕 미움과 짜증을 유발한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생각하며 사람에게 소망을 가지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마음 자세이다.

물론 우리는 사람 안에 이런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사람의 상태를 전혀 낙관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가지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갈파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 소망이 없으며 마지막에 확실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안에 어느 정도 양심이 있고 악을 싫어하고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종교적인 본성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인류의 상태에 대해 안심한다는 것은 큰 오산이며 금물이다.

마귀는 인류의 구원과 파멸을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인간의 이성이나 양식(良識)이나 종교 본능과 같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소위 ‘하나님의 형상’은 결코 생명을 좌우하는 그 핵심 요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이 아무리 있어도 계시(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을 아는 정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요소들이 아무리 사람 안에 충만해도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아무리 천성적으로 착하고 종교적인 성향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장려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인간의 다른 모든 의식(意識)과 특성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마귀는 사람을 달리 시험하지 않고 오직 그 생각, 그 의식을 사로잡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지(믿지) 못하고 마귀의 거짓말과 망상에 빠지도록 시험한 것이다. 하와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귀의 이런 시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어 왔다. 마귀는 사람 속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의지하고자 하는 생각을 없애고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다른 모든 성질이 그대로 보존되더라도 얼마든지 사람을 사로잡아 자기 종으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모두 스스로가 아니고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마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지금 자기 생각에는 다 정신을 차리고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마귀의 거짓말과 망상에 사로잡혀 헛되이 살고 있다. 인류의 대표적인 망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속이고 싸우고 없애고 밟고 서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류는 마치 마귀가 관전하는 검투장에서 싸우는 검투사들과 같다. 왕과 관중이 관람하는 운동장에서 검투사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가 상대를 이기더라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에 이어서 나타나는 다른 검투사와 또 싸워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싸움은 모든 사람이 다 죽어야 끝나는 것이다. 승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관중만 즐거워할 뿐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치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불특정 다수와 끝없이 경쟁하고 싸워야 하는 전쟁처럼 살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안된다’고 생각하며 저 사람을 죽이면 내가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싸우는 사람 안에는 아무도 승자가 없다. 오직 마귀만 그것을 즐기며 비웃을 따름이다.

나는 어떤 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노예 검투사들이 살 길은 서로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쳐서 동시에 왕과 귀족들을 향해 달려가 죽여버리는 것이라고.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참 지혜가 있다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우지 말고 모두 마귀에게로 달려가서 그를 대적하고 그를 저주하며 쫓아내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류에게는 이런 지혜가 없고 이것을 보는 눈이 없다. 그러므로 미련한 가운데서 마귀의 뜻대로 놀아나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귀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그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 있는 인류라는 존재에 대해 여전히 관심과 애정이 끌린다. 무릇 자는 사람은 깨우면 되고 모르는 사람은 가르쳐 일깨우면 되는 것이므로 아무에게 대해서도 포기하지 말고 다가가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무슨 일이나 목적 때문에 꼭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생명이 사람을 사랑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것이다.

주님이 만일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구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서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설사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얼른 들으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백성이 필요한데 그 백성들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원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 쉽다. 사람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서니까 주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랑의 나라’요 마귀의 나라가 ‘미움의 나라’라는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이요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마귀가 살인하는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이다. 마귀는 거짓말과 살인의 아비요 그것을 제것으로 하는 자이므로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 그는 그가 선 자리를 마귀가 다스리는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피차 물고 먹으면 망할까 조심하라”(갈5:15)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는 다 사람의 마음에서 결정된다. 마음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꼭 지옥이 죽어야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지옥은 궁극적 지옥일 뿐 유일한 지옥은 아니다. 지옥은 지금 이 땅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지옥은 바로 지옥의 행위가 있는 곳이다. 즉 미워하고 물어뜯고 해치고 죽이는 행위가 있는 곳은 어디나 마귀가 왕노릇하는 지옥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랑이 흐르는 곳,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으로 서로가 하나로 엮어지는 자리는 하나님이 왕노릇하시는 자리이며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그 생명이 그런 생명이기 때문임과 동시에 그렇게 해야만 마귀가 쫓겨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행동을 생명과 연관지어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라는 ‘일의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과 복리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구원이 먼저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것이 먼저이고 그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가 온 땅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먼저이다. 이것을 안 다음에 우리는 그의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어떻게 해야 그의 나라가 세워지며 굳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의 나라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명의 성질로 결정지어진다. 이 땅에 사랑의 생명이 지배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이고 미워하는 생명이 지배하면 마귀의 나라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미워하고 싸우면 거기에는 제아무리 놀라운 선행이 이루어지고 굉장한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마귀가 여전히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미워하는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것이 타당하냐 타당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서로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미워하고 싸우면 하나님의 나라는 서지 못한다.

지금 교회들 가운데는 싸우고 있는 곳이 많다. 그들은 다 정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혹은 교회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그 곳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한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로 말미암은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자리에는 다툼이나 시비나 원망이 없고 오직 사랑이 나타날 뿐이다. 자아로 일하고 허영으로 일하고 혈기와 육정으로 일하기 때문에 미움과 다툼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대하기 전에 먼저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들이라는 눈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단지 사람이다. 그의 바깥 모양이나 행위로 인해 그를 차별하거나 미워하거나 적대해서는 안된다. 사람의 악한 생각과 행동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생명 안에서 저절로 분별된다. 우리는 그런 악한 생각과 거짓된 생각, 행위는 거부하되 사람 자신은 사랑해야 한다. 물론 사람의 생각 또는 행위와 그 사람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생각에 구애받지 말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그렇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그런 생명이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위 ‘내 생각’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내 생각이 아니라 다 남에게 배워가지고 얻게 된 남의 생각들이다. 날 때부터 무슨 생각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모든 사상과 생각은 다 세상에 떠도는 이런 저런 생각을 듣고 배워서 내 것으로 가지게 된 것이므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이런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와 나를 궁극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차별해서는 안된다.

생각이란 바뀔 수도 있는 것이고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생각들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교묘한 거짓말에 속아서 그의 생각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외형과 행위는 물론 그의 속 생각조차도 따지지 말고 일단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들여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모든 사람들을 다 우리와 다른 존재로 차별하며 거절하게 되어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사랑 안에서 불의를 거부하고 사랑 안에서 위로하고 사랑 안에서 책망하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사랑이 없고 미워하고 다투는 마음, 원망하고 멸시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그럴듯한 일일지라도 그 모든 일들은 이미 마귀가 점령하여 지옥 깃발을 꼽아 놓은 곳에서 그 나라를 견고케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인류의 복리와 선과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에 있는 사랑의 생명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기여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 좋은 일만 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언제든지 사랑보다 다른 것이 앞서면 마귀가 이긴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이론이 사랑을 덮고 일어서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미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보다 선악의 지식이 앞선 것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 지혜와 주장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는 거짓이 없고 사랑 안에는 불의가 없다.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세우고 선과 의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랑의 생명을 따라 행해야 한다.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면 선과 의와 진리가 반드시 서게 된다. 사랑 안에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생명을 따르지 않고 선을 도모하고 의를 세우려고 할 때 우리는 마귀의 간계에 넘어간 것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과 사람과 일을 다 잃는 것이다.

주님이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제쳐놓고 먼저 세상의 구원이나 진리나 정의의 회복 또는 율법의 완성이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같은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골몰하셨다면 주님은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겼다. 그의 승리의 비결은 매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받든 것이며 매사에 일보다 사람 사랑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매사에는 순서가 있다.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므로 그 회복과 구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를 청종하는데서 이루어진다. 주님의 생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의지하는 생명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려는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는 또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위와 죄를 먼저 보시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본래적 영광과 존귀를 먼저 보셨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지닌 안팎의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한 사람에게라도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려고 애쓰셨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사람의 오해와 실망을 불러왔다. 사람들은 주님의 비효율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주님이 정말 메시아인지 도대체 일을 할 마음이 있는 분인지 의심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주님이 오직 사랑의 생명으로 행하신 것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사역이었음이 명백해졌다.

주님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마치 사람보다, 생명보다 더 높고 소중한 일인양 사람(생명) 위에 올려놓은 모든 것들을 다 끌어내리셨다. 그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 선과 정의의 구현, 위대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건설, 심지어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과 모든 율법까지도 그것들이 하나님과 그 형상인 사람보다 더 소중히 여겨질 때 그것들을 단호히 물리치셨다. 주님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추구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 사랑의 생명 안에서 행해지지 않은 모든 일들은 그 동기와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결국 자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의 태도에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일인지 내가 스스로 그럴듯한 생각에 따라 일을 하고 있는지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의지하는 태도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언제나 무조건적이며 친절하고 온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항상 바라보며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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