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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것(은사)을 사모함 / 고전13:8-14:1
 

51.은사를 사모함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단체이다. 교회는 거기에 속해 있는 신자들을 통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인격과 말과 행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다른 방법으로는 알 길이 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들-그리스도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예수님이 그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것 역시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요 세상을 영원히 다스릴 왕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몸으로 선포하는 단체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생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권세와 능력을 보이고 그것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은 그들의 어깨 위에 얹힌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알게 되며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요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들도 역시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체험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지만 교회 생활을 통해서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인은 믿는 순간 순간적으로 탄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순간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교회 안에서 사는 동안 서서히 형성되는 것이다.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순간 기독교인이나 신자가 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고 누리며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명의 죄인에 불과하다.

다만 어떤 계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런 생활에 혐오를 느끼고 변화를 받고 싶어서 교회에 들어온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차츰 교회 생활을 통해 변하는 동안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변할 수 있는 것은 교회 생활을 통해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체를 듣고 보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려주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생활은 교회 안에 예수를 완전히 믿고 완전히 나타내는 거룩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서 거룩하게 교제하고 거룩한 일을 해 나가는 생활이 아니라 다만 교회의 머리로서, 각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배워 가는 생활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주는 사람인 동시에 다 불완전하고 다 공급받아야 할 사람들로 있는 것이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주는 사람 혹은 나타내는 사람의 집합체가 아니라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집합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교회에는 언제나 예수를 믿는 사람과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며, 예수를 아는 사람과 별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공존한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하여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새로운 죄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해 교회라고 하지만 그 실체는 단순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며 항상 변하는 유동적인 것이다. 신자 개인도 변하고 교회의 범위와 내용도 늘 변한다. 어디서 어디까지를 교회라고 해야 할지 시대마다 상황마다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변치 않고 견고한 ‘하나님의 집(성전)’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할 때 어디 누구에게 가서 그 실상을 찾아야 하는가? 교회가 하나님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때 누구에게서 그런 역할을 기대하며 찾아볼 수 있는가? 목사에게서인가? 우리는 교회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교회는 어느 일 개인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 영광을 증거하는 단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말할 때 그런 것이고 절대적으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비해 교회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으니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알고 믿고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회라는 집단 전체가 총체적으로 분명한 하나님의 증인이요 그리스도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불릴만한 사람 곧 그리스도를 자기 인격과 생활 속에서 분명하게 비추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 곧 교회 안에서 참으로 그리스도인답다고 하는 앞서가는 신자들을 보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종종 인간적인 냄새를 맡게 되며 실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매우 뛰어난 지도자들 안에서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초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충분치 않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앞에 서서 달리는 신자들 즉 교회의 대표자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 사람에게 가보라고 말할 만한 사람들조차도 오랫동안 함께 있어 보면 ‘저것이 하나님이고 저것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영광과 사역도 나타내지만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세상 죄인의 모습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달고 있고 교회라는 간판은 붙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거의 무관한 사람이나 그런 집단도 많다. 그러나 진실하고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육신적인 연약함을 보이며 그로 인해 그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무색하게 되는 육신적인 죄나 허물을 나타내 보인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아마 다음 두 가지 태도 중 하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이것이 하나님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한계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한 그리스도인이 어느 날 어떤 사람과 대수롭지 않은 일로 화를 내며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자. 그것을 본 사람은 ‘아! 하나님도 때로 별 일도 아닌데 화를 내는 분이구나. 나는 신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기독교는 시시하다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혹은 ‘그리스도도 참 인간적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저 사람은 무엇인가 부족해.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아니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굉장하신 분이실 텐데 저 사람이 하는 일을 보니 저 사람은 가짜이거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태도가 다 바른 생각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 심지어 세상에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바울 같은 사람)에서 나타나는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나타내신 것과 같이 완벽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그의 인격과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조물은 그가 지니고 있는 육신적 한계로 인해 원천적으로 창조주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아니요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다툰 것을 안다.(행15:36-40) 그 둘 다 잘못했든지 아니면 둘 중의 한 사람은 분명히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까지도 다 진실하고 충성한 하나님의 종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은 곧 실수와 허물이 있어도 은사는 은사이고 사역은 사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역과 인격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격이 전혀 뒷받침되지 못하는 훌륭한 사역이란 있을 수 없으며 생명(인격)의 어떠함과 무관한 사역은 드물다. 좋은 사역에는 대개 좋은 인격과 거룩한 생명이 그 뒤에 있다. 허물과 모순이 있는 사람 안에서도 성령님은 일하시며, 그런 역사를 통해서 그 사람은 본래의 허물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가며, 따라서 허물이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사역도 가짜나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인 것이다.

사역(일)은 정확하게 말하면 ‘인격(사람) 더하기 은사’이다. 전혀 아닌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감동되고 변화 받고 닮아지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구약 시대에는 발람이나 사울처럼 일시적으로 성령에 감동되어 비인격적 기계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다가 버림을 받은 경우가 드물게 있었지만 오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 아는 만큼 말하고 본 만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사역이 사람만 못한 경우도 있고 사역이 사람보다 큰 경우도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가? 그 변수는 바로 은사(恩賜)이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 안에서 친히 일하시는 것의 결과이다. 성령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문자 그대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즉 사람은 수단이고 도구일 뿐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일하시는 것이다. 어느 정도 사람의 인격을 바탕으로 일하며 그의 종의 몸과 마음을 빌어 일하시지만 일하시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다.

바울은 고전 12:8에서 은사를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나타나서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사람을 빌어서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그것은 그의 말과 전도가 자기 자신(인간)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곧『은사』를 통해서 성령님이 친히 일하시는 것에 의존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한 질문 곧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가 무엇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몸이요 증인이지만 그 실체를 더 파고 들어가 보면 그냥 교회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곧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만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이고, 그것을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자연인으로서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성령님과 그의 일하심 즉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주셔서 역사하고 있는 은사(恩賜)’가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실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로로 해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하는 절대적인 도구이며 절대적인 통로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통로는 통로고 도구는 도구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흘려보내지만 그 주체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즉 육신 안에 있는 자연인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사람’이며, 이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 자체로서 항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인 것이다. 사람은 ‘성령의 나타남 곧 은사의 표현 도구’로서만 하나님의 대표자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성령께 항상 복종함으로 그와 항상 연합하여 하나로 있는 것이다. 즉 항상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신령한 사람 따로 있고 육신적인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성령의 나타남)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사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고 은사가 없거나 설사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의지와 능력)대로 사는 사람은 육신적인 사람인 것이다. 은사(성령의 나타남)와 믿음(순종),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그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이 두 가지가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은사가 없거나 자기를 부인하고 마음을 열어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흥왕하지 못하고 생생하게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은사와 사람 곧 은사와 헌신, 은사와 믿음, 은사와 순종이 다 필요하다.  

첫째는 은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의 열심과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하신다. 그가 일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가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 은사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은 되지 않으며 일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역사를 펼치실 것을 기대하고 사모해야 한다.

바울은 은사를 결코 시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은사를 구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하셨고 또 그것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정말로 살아 있고 영광스러운 생명체로 만들기 위해서 교회의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것으로 서로를 섬겨 모두가 온전케 되도록 역사하신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미 많은 은사가 주어졌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 헌신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은사는 ‘섬기는 일’ 즉 ‘직분’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 이전에 먼저 사랑 즉 사랑의 은사, 사랑의 마음을 구하라고 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것이므로 은사를 사모하고 사용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사와 아울러 순종과 헌신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은사만 있어 가지고는 소용이 없다. 그것을 믿는(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자 하실 때 그런 성령님의 역사에 순종하고 자기를 드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를 드려 사람들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이요 헌신이요 순종이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사랑의 마음이요 섬기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것이 있어야 은사가 살아나고 소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人) 없는 은사’ 또는 ‘사랑(愛) 없는 은사’를 본다. 그런 곳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자랑과 교만과 다툼만 있을 뿐 몸이 온전케 되고 생명을 얻는 유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차라리 사람 없는 은사보다는 ‘은사 없는 사람’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은사 없는 사람은 결국 사람 없는 은사와 마찬가지로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왜 성령의 나타남을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가? 그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나타내고 풍성히 나타내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며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은사가 없으면 사람은 점점 시들어 결국 처음 자리로 도로 돌아간다. 사람이 되먹지 않은 채 은사만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본 사람들이 차라리 은사 없는 사람이 낫다고 말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이나 재능이나 일은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좋은 인격 곧 ‘친절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드러나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거기서 어느 정도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쳐다보며 거기서 무엇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그렇게 흠모할 만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는지, 어디서 어떻게 그렇게 편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 사람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그를 그렇게 빚은 것이며 은사가 그를 섬겨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성경은 참으로 귀한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바울이나 사도들이라는 아름답고 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 사람들은 은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좋은 것, 모든 신령한 것은 다 하나님의 은사의 산물인 것이다.

은사 즉 성령의 나타남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다. 은사는 한 번 받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계속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계속 추구해야 한다. 이것을 받으면 저것을 더 추구해야 한다. 이미 은사로 인해 그리스도를 닮은 어떤 모양이 형성된 사람일지라도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풍성을 드러내시기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는 곧 (영적으로) 가난하고 육신적인 사람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로 인해 변화되고 거룩한 모양을 가지게 된 후에 안타깝게도 자신들에게 구축된 그럴듯한 외모와 능력에 스스로 만족하여 계속 성령의 나타남을 의지하지 않거나 사모하지 않음으로써 가난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역시 그 사람보다 그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나타남(은사)을 더 주목하고 더 의지하지 않고 사람만 쳐다보며 좋다 하고 만족하고 있거나 틀렸다 나쁘다 하고 실망하고 있었던 것을 본다.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며 또한 그가 계속 하나님 안에 붙들려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 뿐이다.  

사람들이 사람만 보고 은사는 보지 못하거나 은사만 보고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너무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너무 무시하고 공중의 유령 상대하듯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반대로 사람이 마치 하나님 자신이나 되는 양 사람만 바라보고 사람의 육신과 외형과 낱낱의 행동만 쳐다보고 좋니 나쁘니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이며 하나님을 올바르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은사로’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은사 없는 사람, 성령의 나타남이 없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마른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은사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무제한의 역사를 제한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잘해야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아니면 인간적인 약점과 한계만 드러내어 하나님을 심히 제한하는 ‘시시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은사 없이 사람만 남는 경우 그 사람은 결코 만인에게 신령한 유익을 주는 ‘신령한 사람’으로 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교회 생활을 통해 형제들과 교제하고 형제들의 도움을 받기를 힘써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형제들 안에서 성령님이 은사를 베푸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더 크게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님과 그 은사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만 바라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사람만 바라보다가 좋아해도 문제고 실망해도 문제다. 사람은 좋은 사람이건 안 좋은 사람이건 사람일 뿐 하나님은 아니다. 사람의 가치는 오직 그에게 주어지는 은사에 달려 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통로가 되면 귀한 사람이고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할 때나 다른 형제들을 생각할 때나 은사와 사람이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사 없이 가치 있는 사람은 없다. 교회에서 은혜와 은사를 사모하지 않고 사람만 쳐다보면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자기는 끝까지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전9:23) 그는 복음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이었고 기독교 역사상 그 이상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잘 증거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충만했고 복음과 일체가 된 사람이 왜 복음의 외인(外人)인 것처럼 그런 말을 했는가? 그것은 은사와 사람은 엄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은사는 성령님이 직접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은사를 받고 그것을 자기 인격과 삶 속에서 표현할 뿐 성령님이나 그 일 자체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성령님과 그 일의 표현 도구이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증거한다고 할 때 사람 따로 있고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따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며, 사람이 성령의 말씀을 단순히 스피커처럼 자기 인격과 무관하게 기계처럼 읊조리는 것은 아니다. 은사와 사람은 일체로 움직인다. 사람은 은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는 은사고 사람은 사람이다. 이것이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분은 되며 그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만일 바울이 자기가 아는 그리스도의 계시와 지식, 그가 누리고 있는 성령님의 감화와 능력을 자기 자신과 완전히 일체화하여 그의 인격이나 삶이 완전히 그리스도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난과 환난 속에서 단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으며 자기가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 드러난다고 말했겠는가?(고후1,12장) 그리고 왜 고전 13장에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했겠는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4장 첫 부분에서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했다. 사랑을 따라 구하고 헌신된 마음, 섬기는 마음으로 구해야 하되 “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서는 안된다. 은사를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 은사를 사모하지 않고 사랑을 논하거나 은사 없이 사람을 논하는 것은 헛일이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와 사람의 헌신간에 우열을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라면 사람보다는 성령님이 먼저고 사람의 활동보다는 성령의 나타남(은사)이 먼저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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