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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을 사모함 / 고전14:1-19

2010.05.01 12:02

이상봉 조회 수:8696

예언을 사모함 / 고전14:1-19


52.하나님의 말씀 대언하기를 사모함

은사에 대한 말을 하는 중에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는 말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언이란 ‘영감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다.

각도를 달리 해서 말하자면 예언이란 ‘예언자가 하는 활동’이다. 우리가 흔히 선지자라고 부르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활동이 바로 예언 활동이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알려면 예언자들의 주된 활동을 살펴보면 된다. 우리는 선지자(先知者)라고 하면 그런 이름에 걸맞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내다보는 활동’을 주로 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 일은 그 선지자들이 참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나 혹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계시하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특별히 이루어졌을 뿐 일반적인 사역은 아니었다. 선지자들 대부분의 활동과 강조점은 그들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었다. 이것은 신약 시대 선지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구약 예언자들의 말씀 선포 및 말씀 증거 활동과 오늘날의 설교자들의 말씀 증거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고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계시와 영감의 정도의 차이이다. 예언자들의 선포와 증거는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 정도가 높고 오늘날 설교자들의 활동은 그 정도가 낮고 간접적이어서 이를테면 초대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사’의 활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예언직은 일시적인 직분일 수도 있고(행19:6) 고정된 직분일 수도 있었다.(14:28,29절) 어쨌든 성령님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을 일으키사 영감된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특히 성경이 확립되지 않은 시대에 있어서 이런 은사는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증거하고 깨우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바울은 특히 방언과 비교하여 예언을 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은사로 강조하며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방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자기가 말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황홀경에서 무엇인가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된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순절에 여러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으므로 베드로의 메시지를 여러 나라 말로 통역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방언을 통해서 베드로의 복음 증거를 모두가 알아듣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 14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 집회에서 이루어진 외국어류의 방언이 아니라 통역의 은사가 없이는 어떤 언어로도 이해가 안되는 신비한 종류의 말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오직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는(14:28) 특별한 말이다.

바울은 왜 방언보다 예언을 더 사모하고 그것을 하기를 힘쓰라고 말하는가? 2-12절에서 그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언은 자기와 하나님 외에는 알아듣는 자가 없으므로 다른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는데 비해 예언은 형제들이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회의 유익이다. 덕을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 이것이 기준인 것이다. 은사와 직분은 모름지기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엡4:11,12)

그러므로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방언은 예언만 못한 것이다. 은혜란 차원에서는 아무 차별이 없다. 그것을 받아서 누리는 사람 자신에게 있어서야 방언이나 예언이나 무슨 차이가 없다. 오히려 방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봉사의 일을 한다는 차원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이 나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은 해석자가 있어서 예언과 같은 차원에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면 공중 석상에서 하지 않아야 한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하는” 것이다.(14:22) 그러므로 은사의 활용은 가려서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활동은 다 믿는 형제들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면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바울은 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는 말을 이렇게 강조하는가? 교회 안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이 필요하다는 이 모든 이치와 원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방언이 예언보다 훨씬 많이 이루어지고 또 사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린도교회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교회에서 은사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방언이 예언보다 더 많이 추구되고 사모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언보다 방언이 더 신비하고 따라서 자기를 신령한 자로 나타내기 더 쉽기 때문이다. 방언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잘 통하고 있고 신령하고 수준 높은 신자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표시로 쓰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 안에서 인기 있는 은사는 방언과 아울러서 이런 조건을 만족시켜주는『병 고치는 은사』를 비롯하여 각종『능력 행하는 은사』들이 있다. 사람들은 몸으로 수고하고 희생하여 형제들을 섬기는 봉사나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봉사보다 이런 표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사실 거의 섬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교회 공중 앞에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 따라서 그다지 은사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유독 사람들은 이런 일을 조용히 자기 집에서 누리기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그것도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신자들 앞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사실 자아의 발로요 영을 좇은 행동이 아니라 육이 살아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기를 사모해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생명이다. 첫째는 내가 살고 다음은 형제들이 다 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일은 내가 살고 내가 영광을 얻으려면 내 스스로 나를 섬기고 나를 위하고 나를 자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겨야만 된다는 원리와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나타냄으로써 나를 스스로 높이려고 하지 말고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온 교회, 온 몸 안에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몸이 살아야 지체가 사는 것이다. 입은 음식물을 받아들여서 자기 안에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씹기만 하고 목구멍으로 넘겨버린다. 그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고 또한 자기가 사는 길이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예언이란 단지 남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거기에 반드시 이런 정신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무슨 정신? 그것이 추호라도 자기 지식 자랑이나 자기가 하나님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신령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뽐내려고 하는 마음이나 자기 도취나 자기 감정, 자기 열심에 빠져서 이것이 남에게 실제적으로 유익이 되는지 안되는지, 이것이 실제로 생명의 역사를 가져오고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고 선포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정신이다.

은사는 본질적으로 남을 섬기는 일이다. 예언이 방언보다 나은 이유는 그것이 보다 남을 섬기는 이 은사의 본질에 가까운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을 할 때도 전적으로 섬기는 마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 십자가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은사를 받아서 활용함으로써 몸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놀거나 방관자로 있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 형제를 진실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 곧 형제들을 어떻게든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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